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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09. 23. 월요일

편집부 홀짝







 










꿈을 꾸었다. <반 고흐 (上)>을 올려놓고 난 며칠 후였던 것 같다. 꿈 속의 난 거실에서 티비를 보고 있었는데, 아내는 거실 한 쪽에 있는 컴퓨터 책상에 앉아 말 없이 마우스만 움직이고 있었다.(필자는 미혼이다) 티비 소리와 마우스 클릭 소리만 집 안을 채우고 있는 정적의 시간. 꿈 속의 나와 아내는 그저 법적으로만 부부였을 뿐, 사실상 남 보다 못한 관계였던 것이다. 난 어떻게 해서든 이 관계를 풀고 싶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무엇이,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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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참을 수 없는 침묵의 시간. 답답함을 이기지 못한 나는 결국 집에서 도망치기로 했다.


“밖에 나가서 캔 맥주 좀 사가지고 올게.”


“......”


아내는 내 말에 미동조차 없다. 듣지 못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저 눈 앞의 모니터만 응시하고 있다. 딱히 대답을 기대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리고 그때였다. 문을 나서면서 잠깐 쳐다 본 아내의 얼굴. 여전히 시선을 모니터에 고정한 채로 아내의 한 쪽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간 것을 보았다. 그 차디찬 냉소. 백 마디 욕설 보다 더 가슴을 찢어 놓는 경멸에 찬 그 표정. 충격에 빠진 나는 집 밖으로 나와 정처 없이 거리를 헤매다가...


꿈에서 깨어나 눈을 떴을 때, 필자는 한 동안 멍하니 누워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꿈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생생한 그 감정의 디테일이 당황스러웠다. 꿈 속의 아내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결혼도 하지 않은 필자의 꿈 속에서 아내로 등장했던 그녀의 얼굴.


과거 헤어졌던 연인의 얼굴이었다.



상처


살아가면서 상처를 받는다는 것은, 그렇게 특별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남이 나를 할퀴어서 생긴 상처이든, 아니면 내가 남을 할퀴다가 입게 된 상처이든 말이다. 살면서 단 한 번의 상처도 받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아닌가.


그러나 '상처 받는다는 것'을 일상적인 일 가운데 하나인 것으로 그저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다. 상처 받는 것에 이골이 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렇다. 무덤덤해지려 애쓰는 것과 진짜 무덤덤한 것은 다르니까. 깊게 베인 상처는 그 자체로도 고통스럽지만 상처가 아물고 난 이후에도 어떤 방식으로든 흔적을 남긴다. 흉터가 될 수도 있고, 후유증이 될 수도 있다.


육체적 상처를 입는 순간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은 제 각각이다. 비명을 지르는 사람도 있고, 입을 꾹 다문 채 끙끙거리며 소리를 내지 않으려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가 하면 욕을 하는 사람도 있다.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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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적 상처를 입었을 때에 나타나는 사람들의 반응 또한 이렇게나 다양할 것이다. 특히나 빈센트 반 고흐는 정신적 상처, 버림 받는다는 것에 극단적으로 민감했던 사람이다. <찌질한 위인전> 반 고흐의 두 번째 이야기를 시작한다.



선천적 면역 결핍과 후천적 면역 결핍을 모두 가진 자의 고통


선천적으로, 혹은 후천적으로 면역이 결핍된 사람의 특징은 외부에서 침투하는 신체적 위협(병원균 등)에 매우 취약하다는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잠깐 앓고 넘어갈 환절기 감기 따위도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치명적이어서, 그것이 폐렴으로 악화되거나 각종 합병증을 유발시켜 생명을 위협하기도 한다.


빈센트 반 고흐의 정신 세계는 마치 육체적으로 선천적 면역 결핍과 후천적 면역 결핍의 요인을 모두 가진 사람과 같은 것이었다. 작은 상처와 스트레스 요인에도 쉽게 무너질 만큼 그는 정신적으로 허약했고, 그로 인해 끝내 죽음을 맞이했다.


빈센트의 집안에는 유독 정신 질환이 많았다. 빈센트의 두 삼촌이 정신 질환 진단을 받은 바 있으며 어머니는 만성 우울증을 앓았다. 그런가 하면 빈센트의 여동생인 빌은 정신적 문제로 말년을 요양원에서 보냈으며 또 다른 동생 코르는 빈센트가 죽은 지 10년 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빈센트의 경제적, 정신적, 예술적 지원자였던 테오 또한 빈센트 사후 6개월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 죽게 되는데, 직접적 사인은 간 기능 부전에 의한 사망이었지만 정작 죽기 전 그가 병원에 보내진 가장 큰 이유는 아내 요한나와 아들 빈센트에 대한 지속적인 학대였다.


이를 통해 유추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집안에 정신병적 유전력이 존재하고 있었을 가능성이다. 만성 우울증을 앓고 있던 빈센트의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그의 형제들이 정신적 문제를 보였다는 점을 감안할 때, 빈센트 또한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기에는 한가지 의문점이 있다. 빈센트를 포함한 그의 형제들 가운데 빈센트의 정신적 문제가 가장 극단적으로, 삶의 전반에 걸쳐 나타났기 때문이다. 또한 유전적 요인이 있다고 해서 모두가 같은 질환으로 고통 받는 것은 아니기에 이것만으로는 그가 보인 이상 행동을 모두 설명하기 어렵다.



대체된 아이


형제들 가운데 장남이었던 빈센트 반 고흐에게는 사실 형이 있었다. 아니, 사산됐기 때문에 형이 있을 뻔 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지도 모르겠다. 원래 빈센트라는 이름은 그의 부모가 죽은 첫 아이에게 지어주려 한 이름이었다. 고흐 부부의 첫 아이인 빈센트가 사산되자, 그의 어머니인 안나는 큰 슬픔에 빠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안나는 다시 아이를 갖게 되는데, 그가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빈센트 반 고흐이다.


빈센트가 안나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안나는 빈센트를 죽은 장남의 대리자로 생각했던 것 같다. 죽은 첫 아이의 이름인 빈센트를 그대로 물려주기로 일찌감치 마음을 먹었으니 말이다. 놀랍게도, 빈센트 반 고흐는 사산된 첫 아이가 1852년 3월 30일에 죽고 나서 정확히 1년이 지난 1853년 3월 30일에 태어난다. 태어나면서부터 다른 이의 인생을 대리해야 하는 운명을 짊어진 것이다.


빈센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어둡고 추운 불모의 시기’라 표현했다고 한다. 그는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이는 지극히 당연한 결과라 할 수도 있겠다. 대체된 아이의 운명을 짊어진 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어떻게 온전한 사랑을 아이에게 쏟을 수 있겠는가. 빈센트 반 고흐의 ‘대체된 아이 콤플렉스’를 주장했던 앤 스타일스 와일리의 표현을 빌자면 ‘죽은 아이가 살아 있었더라면 안겨 주었을 기쁨에 대한 어머니의 즐거운 공상에 똥 묻은 기저귀가 있을 리 없’는 것이다. 빈센트는 가장 충분하게 모성을 받았어야 할 시점부터 이미 그의 어머니로부터 거절당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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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 시절의 빈센트 반 고흐


심지어 죽은 빈센트의 무덤은 가족의 목사관 정원에 붙어있었는데(그의 아버지는 목사였다), 빈센트는 겨우 걸음마를 뗄 무렵부터(혹은 그 이전부터 어머니의 품에 안겨) 매주 자신과 같은 이름을 가진 형의 무덤에 헌화하는 어머니를 지켜봐야만 했다.


태어나서부터 이러한 광경을 목격하고, 친모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했던 빈센트 반 고흐. 그의 ‘대체된 아이 콤플렉스’를 지적했던 여러 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은 하나다. 빈센트가 이미 어린 시절부터 누군가에게 거절 당하고 버림 받는 것에 극심한 공포감을 느껴왔을 것이라는 점과 그러한 거절 속에서 나타나는 내적 반응은 통제하기 어려울 정도의 분노라는 것이다.


빈센트는 이미 그 스스로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그들 사이에 섞일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가족들과 함께 있을 때조차 자신은 낯선 이방인일 뿐이라고 느꼈을 정도로.


그의 정신병적 유전력이 선천적 면역 결핍이었다면, 그가 대체된 아이로 태어나 겪었을 정서적 스트레스와 압박은 후천적 면역 결핍과 같은 요인이었을 것이다. 삶 속에서 그가 당했던 거절의 사건과 그 때마다 그가 입었던 상처와 고통은, 태어나면서부터 허약했던 한 아이가 죽을 때까지 겪어야만 하는 투병의 역사에 비견될 만하다.



잇따른 사랑의 실패


빈센트의 생의 전반에서 주목할 만한 그의 첫 번째 사랑은 사촌 누이인 ‘케이’다.(이 전에 하숙집 주인의 딸을 사랑하기도 했다). 당시 케이는 남편과 사별하고 홀로 자식을 키우고 있었으며 빈센트 보다 연상이었다.(빈센트는 유독 자신 보다 연상의 여자를 사랑하는 일이 많았는데, 이 또한 모성의 결핍에 기인한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 또한 가장 절대적 사랑이라 할 수 있는 모성애를 거부 당한 빈센트가 이 때문에 이후에도 계속 실현 불가능한 사랑에 집착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케이를 향한 빈센트의 사랑은 시작부터 가능성이 희박했다. 개신교 목사 집안에서 사촌 누이를 사랑한다는 것은 근친상간과 다를 바 없는 일인 데다가, 케이는 처음부터 빈센트와 교제할 마음이 없었다. 케이를 향한 빈센트의 일방적인 구애는 집안에서 문제를 일으키게 되었고, 그는 그의 부모와 케이의 부모 모두에게 비난을 받는다.


이후 빈센트는 병들고 임신한 매춘부 시엔을 거두면서 다시 한 번 사랑에 빠진다. 시엔과 결혼할 마음까지 먹은 빈센트는 다시 한 번 부모의 격렬한 반대에 맞서게 된다.(심지어 이 때에는 동생 테오와도 반목한다) 그러나 빈센트는 오래지않아 거칠고 험한 삶을 살아왔던 시엔의 신경질적 기질과 태도에 고통을 받는데, 처음에는 이를 모두 감내했지만 그녀가 다른 남자들과 어울리며 몸을 파는 것을 목격하면서 끝내 시엔을 포기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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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를 돌보는 시엔, 반신상


이후 고향에 돌아온 빈센트는 열 두 살 연상의 마르호트와 교제하게 되지만, 둘의 결혼을 마르호트의 부모가 반대하자 급기야 마르호트는 음독 자살을 기도한다. 게다가 마르호트의 임신 소문이 퍼지면서 마르호트의 음독과 임신에 대한 모든 의심의 화살이 빈센트를 향한다. 이 과정에서 그의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죽자, 비록 오랜 세월 아버지와 반목했지만 빈센트 또한 실의에 빠진다. 그의 어머니 안나는 남편의 죽음이 빈센트 때문이라고 그를 비난하고, 빈센트는 더 큰 상처를 입는다.


사건은 그치지 않았다. 당시 빈센트는 ‘스틴’이라는 이름의 열 일곱 살 처녀를 자주 모델로 삼았는데, 어느 날 스틴이 임신을 하자 빈센트의 결백은 또다시 의심 받게 된다.(결국 범인은 빈센트를 찾아와 비난했던 카톨릭 신부들의 교구민 중 한 명인 것으로 밝혀졌다)


사랑의 실패와 가족과의 불화, 본인의 결백에도 불구하고 추문에 휩쓸리는 등의 사건들을 겪으면서 빈센트의 정서는 점차 황폐해져 갔을 것이다. 그럼에도 빈센트는 아직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다. 그의 모친이 빈센트를 정신 병원에 보내야 한다고 했지만, 빈센트는 그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사람들의 오해와 의심이 빈센트 자신과 전혀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의 행동과 그에게서 풍겨지는 분위기가 지극히 평범한 다른 사람의 그것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빈센트는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미쳐가고 있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얼마간 고통 받다가 아물었을 정서적 상처도 빈센트에게는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 번 거절 당하고 버림 받을 때마다 빈센트의 상처는 시간이 지나도 아물지 않고 피를 철철 흘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또 다른 상처를 새겨 넣는 고통의 연속. 더욱이 비극적인 사실은, 육체적 상처는 아물지 않으면 과다 출혈로 죽거나 하겠지만 정신적 상처는 그렇지 않다는 데에 있다.



폴 고갱. 구원자이자 파괴자


빈센트 반 고흐와 폴 고갱의 만남은 미술사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는 사건이었으나 빈센트 개인에게는 절대적 사건이었다. 둘의 공동 작업을 가장 절실하게 갈망했던 것은 빈센트였다. 고갱과 함께 작업하기를 강하게 희망했던 빈센트는 이러한 의지를 수 차례 테오에게 밝혔고, 테오는 둘의 공동작업을 적극적으로 주선한다. 빈센트가 고갱과의 작업을 얼마나 강렬하게 원했는지, 그는 고갱의 도착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면서 만반의 준비를 다했다. 고갱을 기다리는 시기, 고갱과 함께 했던 시기의 빈센트는 그 어느 때 보다 열정적으로 작업에 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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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고갱


고갱은 빈세트 보다 다섯 살 연상이었으며,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데 있어 주저함이 없는 사람이었다. 또한 자신이 늘 빈센트 보다는 위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기 때문인지, 함께 작업하는 빈센트에게 늘 거침이 없었다. 그런 면에 있어서는 빈센트 또한 고갱과 크게 다를 바 없었지만 문제는 빈센트가 일반적인 사람들 보다 훨씬 정신적으로 연약하고 예민하다는 데 있었다. 빈센트가 고갱과 함께 작업했던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예술적으로도 많은 진전을 보인 것 또한 사실이었지만 그런 시간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던 것이다.


당연한 귀결이겠지만, 그런 둘의 관계를 먼저 견디지 못한 것은 고갱이었다. 날이 갈수록 빈센트의 행동을 이해하기 힘들었던 고갱은 결국 빈센트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그러한 고갱의 결심이, 빈센트의 내재된 상처를 폭발하게 만들었다. 고갱이 간과한 것이 두 가지 있었다고 한다면 첫 번째는 고갱이 생각했던 것보다 빈센트가 정신적으로 굉장히 여리고 민감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런 빈센트가 고갱을 너무 많이 의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일부 정신분석학자들은 빈센트가 죽은 자신의 형과 고갱을 동일시했다고 보기도 한다. 자신의 어린 시절을 얼룩지게 했으면서도 실은 얼굴조차 보지 못한 형의 모습을 고갱과 일치시켰다는 것이다. 필자는 빈센트가 고갱에게 동성애적 감정을 느꼈다는 또 다른 일부의 주장 보다는 이러한 견해가 더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빈센트가 실제로 그렇게 생각했든 그러지 않았든, 확실한 것은 빈센트에게 고갱이 상당히 의미 있는 사람이었다는 점일 게다. 그런 고갱이 빈센트를 떠나려했다.


빈센트는 폭발했다. 빈센트를 떠나기 전, 근처 숙박업소에서 머물고자 했던 고갱을 따라나선 빈센트는 면도칼로 고갱을 위협한다. 그리고 이내 그 면도칼을 그대로 들고 선 채로, 빈센트는 발걸음을 돌려 홀로 고갱과 자신이 함께 했던 ‘노란집’으로 발걸음을 돌이킨다. 그리고 나서 빈센트는 그 면도칼로 자신의 귀를 자른다. 이렇게 터진 빈센트의 내적 상처는 빈센트가 죽을 때까지 그를 괴롭힌다. 당시 빈센트가 보인 정신착란의 상황을 빈센트는 전혀 기억하지 못했으며, 그 이후로 빈센트는 자신에게 정신적 스트레스와 압박이 가해질 때 마다 정신착란의 증세를 보이게 된다. 물론 그때마다 빈센트는 자신이 발작을 일으켰던 상황을 기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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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와 고갱이 함께 살았던 '노란집'


고갱과의 일이 있고 나서야 빈센트는 비로소 자신의 정신에 문제가 있음을 깨닫는다. 자신의 귀를 자른 자해 소동이 있은 뒤, 빈센트는 자신과 고갱이 함께 했던 프랑스 아를에서 레이라는 이름의 의사에게서 치료를 받지만, 자신의 의지에 따라 정신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빈센트는, 스스로 정신 병원으로 걸어 들어 갔다.


평생을 어머니와 반목했던 빈센트가 어머니를 용서했던 것도 이 시점에서였다. 서글프게도, 그것은 성공한 빈센트가 어머니를 이해했기 때문에 용서한 것이 아니었다. 과거 자신을 정신 병원에 보내려 했던 어머니와 결정적으로 틀어졌던 빈센트는, 자신에게 정말로 정신적 문제가 있다고 깨닫게 되자 어머니를 용서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그가 자의로 정신 병원에 입원한 이유는 단 한 가지뿐이었다.



오로지 그림을 그리기 위해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빈센트 인생에 단 한 번도 그에게 생계 수단이 되어주지 못했다. 그러나 빈센트에게 있어 그림은, 생존을 위한 수단이었다. 빈센트가 정신 병원에 자기 발로 찾아 들어간 이유는 오로지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그의 상태가 회복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그래왔지만 이제 정말로 그에게 남은 것은 그림 그리는 것 밖에는 없었다. 그가 살아야 할 이유 또한 그것 말고는 없었을 것이다. 빈센트는 그 때부터 그 자신과의 지난한 싸움을 이어 나간다. 그가 숨을 거둘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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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가 입원했던 정신병원



회복과 위기, 그리고 안도


정신 병원에서 빈센트는 정말로 ‘미친 사람’들을 목격한다. 그리고 그 자신은 조금씩이나마 점차 회복한다. 그 안에서도 그는 작업을 쉬지 않았다. 때때로 착란 증세를 보이기는 했지만 그는 확실히, 그리고 서서히 회복했다. 그리고 그 무렵, 그는 동생 테오가 요한나라는 여자와 결혼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위기였다.


유일한 동반자인 동생 테오의 결혼 소식이 그에게 위기인 이유는 자명하다. 테오가 독신일 때는 빈센트를 향한 테오의 지원이 오로지 그의 독단적인 선택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테오가 결혼하게 된 시점에서, 그것은 불투명한 일이 된다. 그러나 다행히도 테오는 경제적 지원을 멈추지 않는다. 테오의 아내인 요한나 또한 빈센트를 인간적, 예술적으로 존경했던 것이다. 자신에게 보낸 요한나의 애정 가득한 편지를 보면서, 빈센트는 크게 안도 했을 것이다.



또 다른 빈센트의 탄생과 잠시 동안의 행복, 그리고 절망


테오와 요한나가 빈센트를 얼마나 존경했는지, 그들은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2세의 이름을 빈센트라 짓고 형을 대부로 삼는다. 그리고 그 무렵부터, 드디어 빈센트는 화가로써 평단에서 이름을 알리게 된다. 그 무렵 정신 병원에서 스스로 나온 빈센트는 가셰라는 이름의 의사이자 그림 애호가에게 보살핌을 받으며 프랑스의 오베르에서 지내게 된다. 오베르에 머물며 작업에 여념이 없는 빈센트를 테오의 가족이 찾기도 했는데, 자신과 같은 이름을 가진 조카와 그의 가족을 만난 빈센트는 그 어느 때 보다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그것이, 빈센트의 처음이자 마지막 행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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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의 아내 요한나와 아들 '빈센트 빌렘 반 고흐'


빈센트에게 급작스런 위기가 닥친 것은 어린 빈센트가 아프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갑자기 테오의 재정 상황이 악화되었다. 아프고 어린 아들 빈센트와, 존경하는 형 빈센트 사이에서 테오는 갈등해야 하는 상황을 맞이한 것이다.


테오는 형을 버릴 수 없었다. 그러나 요한나는 달랐다. 모성이 먼저였다. 테오와 요한나는 갈등한다. 그리고 그 갈등의 현장을 빈센트가 목격한다. 한 동안 괜찮았던 빈센트의 정서에 있어 이러한 충격은 결정적인 것이었다. 죽은 형인 빈센트로 인해 태어나면서부터 불행했던 빈센트가 이제는 자신의 이름을 딴 어린 빈센트로 인하여 버림 받을 처지가 된 슬픈 아이러니. 당연히 빈센트는 그 광경을 목격하자마자 정신 착란을 보였어야 했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실로 놀라운 인내였던 것이다. 평생을 아물지 않는 상처의 연속에서 고통스러워했던 빈센트의 초인적인 인내. 빈센트는 꿋꿋하게 자신이 살고 있는 집으로 돌아가고, 다행히 테오와 요한나는 경제적 지원을 중단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빈센트 반 고흐, 그의 죽음


이렇게나 끈질기게 자신을 놓지 않으려 했던 빈센트의 의지는, 허망하게 그 마지막을 보게 된다. 당시 빈센트는 자신을 돌보는 가셰 박사의 딸인 마르게리트를 모델로 삼아 종종 그림을 그렸는데, 그가 마르게리트에게 연정을 느꼈는 지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가셰는 이를 못마땅해 했던 것 같다. 이 때문에 가셰와 빈센트의 관계가 틀어지게 되는데, 빈센트가 가셰를 상당히 의지했던 만큼 그것이 빈센트에게 충격이 되었던 것 같다. 가셰와 한바탕 다툼을 일으켰던 빈센트는, 허망하게도 가셰와 자신의 집 사이에 있는 밀밭에서 자신의 복부에 총을 쏜다. 빈센트는 쓰러졌다.


피 흘리며 쓰러져 있는 빈센트를 누군가 발견했고, 빈센트는 옮겨졌다. 소식을 들은 테오는 황망히 빈센트에게 달려온다. 며칠 뒤, 빈센트는 자신의 동반자인 동생 테오의 품에서 숨을 거둔다. “이제는 이 모든 것을 끝내고 싶구나.”라는 말을 남긴 채. 그것은 빈센트의 죽음이자 테오의 죽음이었다. 형의 죽음이 요한나와 아들 빈센트 때문이라고 여겼기 때문인지, 이후 테오는 아내와 아들을 지속적으로 학대했고, 결국 병원에 입원한 테오는 반 년도 되지 않아 형의 뒤를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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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가 마지막으로 살았던 숙소의 전경



우리의 상처를 아물지 않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빈센트의 생애에 있어 우리에게 기억되는 세 번의 자해가 있다. 케이의 부모 앞에서 자신의 손을 불에 지진 일, 고갱을 떠나보낸 빈센트가 자신의 귀를 자른 일, 그리고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던 권총으로 스스로를 쏜 일이다. 이를 두고 빈센트의 자해에 일정한 패턴이 있다고 주장한 이들이 있다. 빈센트는 상대를 위협하는 행동을 함으로써 억제불능 상태의 분노를 표현한 후에, 그 분노를 자해로 폭발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첫 번째 자해와 나머지 두 번의 자해가 조금 다른 맥락 선상에 있다고 생각한다. 케이의 부모 앞에서 행했던 자해는 어쩌면 젊은 빈센트가 케이를 향한 사랑의 의지를 표현하기 위해 저지른, 치기 어린 행동이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자신의 귀를 자른 일과 스스로 복부에 총을 쏜 것은 자신에 대한 일종의 '징벌'적 의미가 강하다고 볼 수 있다. 빈센트가 고갱을 면도칼로 위협한 후에 그 면도칼로 자신의 귀를 자른 것처럼, 권총으로 가셰 박사를 위협한 후 돌아오는 길에 그 권총으로 자신을 쏜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진실은 빈센트와 가셰 박사 만이 알고 있을 테지만 말이다. 빈센트의 죽음은 그런 점에서 자살이라기 보다는(정녕 그가 자살을 원했다면 권총의 총구는 머리를 향했을 것이다) 과도한 징벌적 자해가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보는 편이 더 옳을 것이다.


외부적 스트레스 요인을 당했을 때, 특히나 타인에게서 버림을 받는 등의 상처를 입었을 때 빈센트가 보였던 극단적인 형태의 정신 착란과 자해는 평범한 사람들에게서 찾아 볼 수 없는 행동 양상이다. 그러나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또한 어떤 방식으로든 누군가로부터 상처를 받기도 하고, 때로는 상처 입히기도 한다. 그리고 상처입은 우리는, 때론 비난의 화살을 우리 자신에게로 돌린다. 


이러한 형태의 정신적 자학은, 심지어 상대방과 자신 사이에 뚜렷한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도가 형성됐을 때도 일어난다. 누가 봐도 본인 자신이 피해자의 성격을 띄고 있을 때조차 한 동안 가해자인 상대에게 분노를 느끼다가 자기도 모르는 새에 스스로를 자책하고 비난하게 되는 것이다. 이미 상처를 입은 상태에서의 그러한 자학은 상처를 덧나게 할뿐 아니라, 그 이후에도 뚜렷한 흔적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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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일상적인 관점에서 지나친 자기합리화는 오히려 당사자에게 해악이 된다. 그러나 극심한 통증에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마약 성분의 진통제가 필요하듯, 아파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자기합리화는 해악이 아니다. 이미 충분히 괴로워 하는 사람에게 "너에게 또한 잘못은 있어"라고 말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런 사람도 없을 뿐더러, 자격이 있다한들 그런 말이 당사자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뿐아니라 더 큰 상처가 됨은 물론이다.


물론 화가로서의 빈센트의 생애와 우리의 삶이 동일시 될 수는 없다. 빈센트 반 고흐에 있어 그의 처절했던 삶의 궤적이 위대한 예술적 성과 남겼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빈센트 반 고흐 자신에게나 혹은 우리에게나, 스스로의 상처를 감싸고 돌보아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때문에 빈센트 또한 온전한 정신 상태를 불잡기 위해 그렇게나 끊임없이 싸워나갔던 것일 게다.



자기 파멸에 대항하는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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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을 자신 만의 시각으로 색채화하여 그리는 빈센트 반 고흐의 화풍이 그저 그가 정신분열과 환각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는가? 적어도 그는 그림을 그리는 순간만큼은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그가 정신분열증을 겪었다고 단정짓기에도 어려운 이유 중 하나 또한 그가 착란을 겪는 와중에도 꽤 오랜시간 멀쩡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의 정신이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에, 환각으로 인하여 보이는 대상 그대로를 그렇게 그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자신 만의 느낌으로 대상을 재해석하고 그 안에 정서를 담았을 뿐이다. 미친 사람의 눈에 비치는 미쳐보이는 세상을 그린 것이 아니라 실제 자신에게 보이는 것을 자신의 느낌과 정서를 담아 표현한 것이다.(인상주의 화가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말이다) 


이를 두고 한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 “자기 파멸에 대항하는 그의 투쟁이 빈센트에게 위대한 화가로서의 활동을 촉발했다.” 이 말을 남긴 사람의 이름은 빈센트. '빈센트 빌렘 반 고흐' 박사. 테오의 아들이자 빈센트 반 고흐의 대자였던 사람이다.



It's not your fault


영화 <굿윌헌팅>으로 마무리를 하고자 한다. 영화 속에서 맷 데이먼의 광기를 잠재운 로빈 윌리엄스의 단 한 마디는 "It's not your fault."였다. '니 잘못이 아니야'라는 말 한 마디에, 유년 시절 아버지로부터 학대 당한 트라우마로 인해 자신을 사랑하는 연인조차 믿지 못하고 일부러 떠나가게 만들었던 맷 데이먼이 울음을 떠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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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받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말이 아닐까


경제적으로 무능한데다가 정신적으로도 온전하지 못했던 빈센트 반 고흐. 정신 착란과 자해를 반복했던, 죽고 나서야 인정받은 위대한 예술가. 


누군가에게 거절을 당할 때마다, 상처를 받을 때마다 착란을 일으킬 정도로 괴로워했던 빈센트 반 고흐. 평생에 걸친 자신의 광기와의 처절한 투쟁.


어쩌면, 우리 삶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겠다. 정도의 차이일 뿐. 


<찌질한 위인전>. 빈센트 반 고흐의 긴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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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들 눈에는 내가 어떻게 비칠까. 보잘 것 없는 사람, 괴벽스러운 사람, 비위에 맞지 않는 사람,

사회적 지위도 없고 앞으로도 어떤 사회적 지위를 갖지도 못할, 한 마디로 최하 중의 최하급 사람......

그래, 좋다. 설령 그 말이 옳다 해도 언젠가는 내 작품을 통해 그런 기이한 사람,

그런 보잘 것 없는 사람의 마음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보여주겠다."

- 빈센트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 中

Photograph By 좌린








편집부 홀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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