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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09. 25. 수요일

이작가








 

 

6. 추심원과 채무자의 동거

 

 

철수는 성실했다. 채권추심원의 하루는 언제나 바빴다. 정신없이 채무자에게 전화를 걸어 빚을 독촉했다. 하루에도 수백 통의 등기를 조회했고 우편물을 발송하는 데 실수하지 않으려고 간을 졸였다. 때로는 채무자를 추적하는 선배들을 따라 나갔다. 채권추심법 제9조에 따르면 오후 9시 이후부터 다음 날 오전 8시까지의 야간에는 채무자를 방문하거나 반복적으로 전화를 하는 등 빚을 독촉하는 행위가 불법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그 덕분에 추심원이 밤 9시를 넘겨서 야근하는 일은 없었다. 대개는 보통 사무원이 업무를 마치는 시간인 예닐곱 시 경에 퇴근하곤 했는데 그때쯤이 되면 너무 피곤해서 녹초가 되어버리곤 했다.

 

 

본래 철수는 말주변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채무자와 전화 연결이 되어도 어떻게 말을 꺼내야 좋을지 몰라 머뭇거리기 일쑤였다. 어느 정도 일에 익숙해지고 난 뒤에는 나름의 고객응대 매뉴얼을 따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그러다 대화가 길어져 채무자의 사정 이야기를 듣고 나면 가엽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서 어찌 대응해야 좋을지를 몰랐다. 대부분의 채무자는 신용등급이 떨어져 대출을 받을 수도 없었고 신용불량으로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지도 못해 빚에서 헤어날 길이 없는 상황이었다. 안정적인 수입이 있다고 해도 고리의 대부금을 갚기란 힘겨운 일이었다. 그렇게 궁지에 몰린 사람에게 윽박지르는 말을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채무자에게 위악적인 태도를 취해야 하는 것만큼이나 선배들에게 위선적인 태도를 보여야 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철수는 상사들이 일부러 부하직원들을 찍어 누르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기도 했다. 위에서 받는 압박감이 크면 클수록 채무자에게 더 강한 압력을 쏟아내게 되고 그 결과는 이전보다 늘어난 실적으로 돌아오기 마련이었다. 위계질서가 분명한 회사 내에서 군대식의 말투를 쓰는 일 자체가 철수에게는 너무나 괴로웠다. 그럼에도 철수는 성실했다.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이라도 열심히 했다. 자기가 잘 할 수 있는 일인지 아닌지 계산해 볼 겨를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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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권추심 업무를 배워가면서 철수는 수아의 채무를 해결해 나갈 방법을 찾았다. 몰래 와이어넷에 접속해 수아의 부채내역을 조회했다. 캐시앤머니에서 대출받은 원금 500만원 중 상환액은 고작 60만원 정도, 이자는 원금의 두 배 이상으로 불어나고 말았다. 하지만 악성채권이니 만큼 채권추심원과 교섭을 해본다면 원금 일부를 감면받고 상환할 수 있을 것이었다.

 

 

얼마 정도까지 가능할까? 철수는 추심원의 입장에서 나름의 시나리오를 짜보았다.

 

 

지난달 박치훈 과장의 일별 실적일람표를 보면 1일부터 24일까지 목표달성액은 고작 52%였다. 그러나 25일 이후 5일 동안 50% 이상을 추심해서 그 달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매월 25일 이후에는 급여를 받은 뒤 빚을 갚으려는 채무자가 많기 때문에 추심액이 다른 날에 비해 훨씬 늘어났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고 나면 기세가 한풀 꺾이기 마련이었다. 추심원으로서 가장 애가 타는 날이 바로 28일이나 29일이었다. 한 달이 끝나기 전에 목표액을 맞춰야 한다는 압박감이 가장 심한 때이기도 했다. 이 시기가 지나 말일이 되어버리면 어떤 추심원은 그 달의 달성을 포기해버리고 어떤 추심원은 이미 목표를 달성해 더 이상 열심히 해야 할 이유가 없게 된다.

 

 

그러니까 수아가 28일 쯤 추심원에게 전화를 걸어서 빚을 한 번에 갚겠다고 교섭을 한다면 원금 할인이 가능할 것이다. 이야기를 잘 해본다면 300만원 선까지도 타협이 가능할 것이다. 그렇게 채무상환 시나리오를 만들어 보니 철수의 통장에 있는 돈만으로도 해결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다른 회사에도 채무가 있을 테지만 이런 식으로 하나씩 해결한다면 조금씩 희망이 보이지 않을까?

 

 

철수는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 말 한 마디도 하기 싫을 정도로 지쳐버렸다. 그래도 기운을 내서 틈나는 대로 수아에게 조언했다.

 

 

“너 지금 부채가 여기 저기 있지 않아? 그걸 조금씩 분납해도 연체이자 갚아 나가기도 어려워. 그럴 때는 상환금액이 적은 곳부터 하나 하나 상환하는 게 나아. 추심업체 쪽에서도 빚을 한 번에 갚을 때는 이자도 빼주고 원금도 깎아주고 하니까. 그러니까 앞으로는 한 방에 해결하는 거다?”

 


“알았어.”

 

 

철수는 수아가 정말로 알아들은 것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철수로서는 수아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신중하게 꺼낸 말이었다. 수아는 이런 이야기만 나오면 말수가 줄어들었다. 그래도 철수는 꾸준히 채무에 대해 이야기했다.

 

 

“일단 추심원 전화를 받아봐. 교섭을 해서 사정을 설명하고 통장압류된 거 풀어달라고 하고 앞으로 어떻게 상환할지 얘기를 좀 해봐.”

 


“나중에...”

 

 

하지만 수아가 어느 추심원과 교섭을 했다는 소식을 철수는 듣지 못했다. 끝없이 계속되는 독촉전화에 시달려온 수아는 전화 받기를 두려워했다. 평소에 수아의 전화벨은 언제나 무음 설정이었고 전화기를 아예 꺼놓는 경우도 잦았다. 수아의 악몽은 늘 전화벨 소리로 시작했다. 추심원이 윽박지르는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했다. 두려운 기억과 직면하기는 어려운 법이었다.

 

 

“너 개인회생이나 파산 이런 거 되는지 알아본 적 있어?”

 


“아니.”

 

 

“지금 수입이 있으니까 파산신청은 안 될 거고 개인채무자 회생제도를 알아보자. 신청할 때 인지대랑 송달료랑 법무사 수임료가 들어가는데 복잡할 거 없어. 법무사 가면 다 알아서 해줘. 비용은 내가 보태줄게.”



“됐어. 내 일이잖아.”

 

 

철수가 빚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면 수아는 사라져버리고 싶었다. 가장 치욕스러운 과거가 모두 드러나고 말았다. 차라리 다른 남자를 만나 바람을 피웠다거나 철수를 속이고 나쁜 짓을 했다거나 하는 종류의 과거라면 나았을 것 같았다. 아버지 때문에 생긴 빚은 천형이고 족쇄였다. 아무 것도 잘못하지 않았는데도 죄책감에 사로잡힌 수아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철수에게 이런 걱정거리를 떠넘기는 것만으로 부담스러웠다. 거기에 더해 이 착한 남자가 사채꾼이 되어 버리다니 이런 일에 끌어 들이고 만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수아는 갈팡질팡했다. 철수는 수아를 붙잡아 둘 방법을 알지 못했다. 전보다 돈을 많이 벌고 빚을 갚을 방법도 찾아내고 있는데 수아가 이전보다 불행해진 것 같았다. 철수는 이해하지 못했다. 수아가 꿈꾸는 미래는 이곳에 존재하지 않았다. 빚더미에 오른 채 스무살이 시작된 이후 수아에게 미래는 존재했던 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수아는 아주 멀리를 꿈꾸었다.

 

 

“우리 카페에서 알바하던 남자애가 있거든. 대학생인데 나랑 동갑이야. 걔가 이번 달까지만 일하고 호주에 워킹홀리데이 갈 거라고 그러더라.”

 


“그래?”

 


“호주 워킹홀리데이는 신청만 하면 다 받아준대. 영어시험 볼 필요도 없고 신체검사만 받으면 된다더라. 호주 가서 알바하면서 어학원 다녀도 된대. 호주는 알바비가 엄청 쎄서 우리 돈으로 한 시간에 막 2만원씩 받고 그런대.”

 


“그렇구나.”

 


“나도 워킹홀리데이 갈까?”

 


“영어도 못하면서.”

 


“영어를 못하니까 가야지. 영어도 배우고 돈도 벌고.”

 


“여기서 일하면서 영어 공부를 해도 되잖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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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아가 마다해도 철수는 지치지 않고 추심원으로 일하면서 알게 된 사실을 전해주었다.

 

 

“통장압류 들어갈 때 말야, 우리 회사는 5대은행에만 압류조치를 하거든. 국민, 신한, 우리, 하나, 농협, 이렇게 다섯 군데에 나누어서 압류신청을 해. 오륙 년 전에는 다 받아 줬다는데 요새는 나눠서 넣는데. 채무가 오백만원이면 백만원 씩 나눠서 압류신청을 하는 거지. 어떤 회사에서는 7대은행으로 나눠서 외환이랑 기업에도 넣는다더라. 어쨌든 큰 은행을 피해서 통장을 개설하면 다시 압류되지는 않을 거야. 내가 확인해 볼까? 하루 휴가 내고 같이 은행 가볼래?”

 


“아냐. 농협통장은 괜찮아.”

 


“농협중앙회랑 단위농협이 다르거든. 수협 같은 데다 넣어도 괜찮고. 남들 잘 안 쓰는 지방 은행이나 외국계 은행 통장도 압류에서 안전할 거야.”

 


“그만하자.”

 


“뭘 그만해. 대체 어쩔 건데? 다시 통장압류 되면 어쩌려고 그러는데?”

 


“상관없어. 어차피 돈도 없는 걸.”



"저기, 저금리대환대출이라는 제도가 있어. 햇살론이니 직장인신용대출이니 이런 이름 들어봤지?"



"그건 또 뭔데?"



"지금 굉장히 높은 금리를 쓰고 있잖아. 그런 경우에 10% 정도 되는 저금리로 대출을 받아서 고금리 대출을 해결하는 거야."



"또 빚을 지라는 말이야?"



"빚을 더 지라는 게 아니라 현명하게 상환계획을 세워보자는 말이야."



"됐거든."



“왜 그렇게 아무렇게나 말해? 적어도 빚이 얼만지 얼마나 갚아야 하는지 제대로 알아보기라도 해야지.”

 


“니가 신경 쓸 일 아니잖아.”

 


“야, 니가 니 일을 안 챙기는데 나라도 챙겨야지.”

 


“그게 왜 내 일이니? 우리 아빠 일이야.”

 

 

“어쨌든 법적으로 채무자는 너, 민수아잖아. 니가 책임져야 하는 일이라고. 그렇다고 뭐 채무부존재소송 그런 거 진행할 거야? 니가 니네 아빠 고소할 수 있어? 그리고 이게 법원에서 승소할 거 같아?”

 

 

철수는 얼굴이 붉어지도록 언성을 높였다. 수아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너 완전 빚쟁이 같아.”

 

 

“빚쟁이라니. 야, 내가 하는 일이 그건데. 너 보기엔 채권추심이 그렇게...”

 

 

“그만해. 그만하라고.”

 

 

철수는 수아가 화를 내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자신의 배려를 받아들이지 않는 수아에게 도리어 화가 났다. 철수는 열기를 식히려 집 밖으로 나갔다.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싶었다. 그러나 담배와 라이터, 지갑 핸드폰 모두 집안에 두고 빈손으로 나왔다. 철수는 무작정 길을 걸었다. 저녁시간이었지만 이르게 취한 사람들이 무리지어 비틀대며 길을 걸었다. 식당에서 몰려나온 사람들이 술집을 기웃거렸다. 수많은 사람들이 경쟁하듯 술을 마셨다. 철수는 취객 사이를 이리저리 부딪치며 걸었다.

 

 

영등포의 밤거리는 휘황찬란했다. 타임스퀘어 후문을 지나자 붉은 불빛이 보였다. 좁은 골목길로 들어가자 샤시문 너머로 여자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철수는 느린 걸음으로 천천히 골목을 지나가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철수보다 나이가 많을 것 같은 여자들이 '오빠'라고 부르며 손짓을 했다. 붉은 불빛 아래서 수많은 여자들이 가슴골과 배꼽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들은 야한 옷차림을 과시하며 유혹의 웃음을 흘렸다. 철수는 그 웃음이 역겹고 싫었다. 하지만 골목 끝에 도착하자 다시 한 번 왔던 길을 되짚어 걸었다.

 

 

철수가 길을 돌아오자 여자들이 다시 한 번 오빠를 불러댔다. 그러나 철수가 다시 또 다시 그 골목을 배회하자 얼굴을 알아 본 여자들은 철수를 유혹하지 않았다. 철수가 보는 앞에서 샤시문을 촤르르 소리 나게 닫아 버리기도 했다. 어떤 여자는 등 뒤에서 다 들리도록 욕을 했다. 길에다 침을 뱉는 여자도 있었고 철수의 발치에 바로 떨어지도록 담배꽁초를 던지기도 했다. 그녀들이 차갑게 대하자 철수는 도리어 마음이 편해졌다.

 

 

밤늦게 집으로 돌아왔을 때 수아는 없었다. 철수는 집안을 뒤지며 수아의 흔적을 찾았다. 수아의 옷가지 몇 벌과 큰 가방이 없어졌다. 철수가 사준 옷과 가방은 모두 남겨져 있었다. 그리고 작은 식탁 위에 메모지가 놓여 있었다.

 




 

그동안 정말로 고마웠어.

 

하지만 빚진 사람이 빚쟁이와 함께 살 수는 없어.

 

더는 못하겠어.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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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수는 수아를 기다렸다. 철수가 군대에 있을 때, 방 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있을 때, 수아가 기다려 주었던 것처럼 자신도 수아를 기다려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수아는 한 번도 전화를 하지 않았다. 곧 휴대전화를 해지해 버려서 연결이 되지 않았다. 철수는 해지된 전화가 다시 연결되지 않을까 싶어 일하다 말고 가끔씩 전화를 걸어보곤 했다. 어느 날 낯선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그 여자 전화 아니라고. 아놔, 내가 전화번호를 바꾸든가 해야지.”

 

 

남자는 수아를 찾는 빚 독촉 전화에 어지간히 시달린 듯 다짜고짜 짜증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철수는 남자에게 정중하게 사과했다. 그 남자가 전화에 시달리는 데 자신의 책임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철수는 주인이 바뀐 번호를 전화번호부에서 삭제했다. 그러나 그 숫자는 오래도록 잊히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철수가 십 년이 넘도록 사용했던 전화번호도 바뀌고 말았다. 017 번호를 계속 쓰고 있었는데 KT가 2G 서비스를 종료하면서 전화번호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통신사의 방침에 따라 자기 전화번호가 강제로 바뀌어야 한다는 사실이 억울해도 달리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전화번호를 유지하기 위해 다른 통신사로 옮겨볼까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동안 피쳐폰을 쓰면서 회사에서 놀림을 당하고 있었고 카카오톡을 쓰지 않아 업무 상 전달받을 내용을 제 때 확인하지 못한 적도 많았다. 결국 철수는 스마트폰을 구입하고 전화번호를 바꾸었다. 어차피 수아는 전화 연락을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돌아온다면 집으로 찾아오겠지. 집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기다림은 어려운 일이었다. 수아와 함께 살던 원룸의 계약기간이 끝나자 집주인이 전세금을 올려달라고 요구했다. 영등포 뉴타운 개발로 전세대란이 일어나 일대의 전세금이 모두 술렁거리고 있었다. 철수에게는 그만한 돈이 없었다. 직장을 옮기고 정규직이 되면서 월급이 많이 오르긴 했으나 그 월급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은대도 전세금을 댈 수 없었을 것이다. 대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전세금을 마련하고 있는 걸까?

 

 

부양가족이 없는 20대 미혼 남성으로서는 전세자금 대출을 받을 수도 없었다. 일반 대출이라도 받으려고 알아보았지만 추심업체에 재직한다는 이력 때문인지 은행권에서는 대출을 해주지 않았다. 대부회사에서 근무한다는 이유로 카드발급이 거절당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채권추심원은 이 바닥이 돌아가는 생리와 법의 허점을 잘 알고 있으니 대출이나 현금서비스를 왕창 받아내고 악질적으로 파산해버릴까 싶어 그러는 모양이었다.

 

 

철수가 마지막으로 돈을 빌릴 수 있는 곳은 소비자금융, 즉 대부업체였다. 일하고 있는 추심회사의 모회사 역시 대부업체였으나 그렇다고 해서 대부업체에서 고리의 대출을 받을 엄두가 쉬 나지는 않았다. 자기가 상대하는 채무자들 역시 급할 때 잠시 빌려 사용하고 금방 갚으면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대출을 받았다가 계획이 어그러지고 만 사람들이 아니었던가. 앞으로의 인생이, 이 회사와 사회가 어떻게 될 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집주인에게 사정을 해서 전세를 전월세로 돌려 몇 달을 버텼다. 그러자 생활이 너무 빠듯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부모님께 꾸준히 보내던 용돈을 줄이고 싶지는 않았다. 정기적으로 예금하던 금액을 줄일 수도 없었다. 자기의 미래도 불안했지만 나중에 수아가 왔을 때에도 모아둔 돈이 전혀 없다면 곤란해질 터였다.

 

 

결국 철수는 경기도 남부에 있는 위성도시로 이사했다. 출퇴근 시간이 더 길어지고 교통체증을 피해 일찍 움직여야 하는 불편을 감내하기로 했다. 나고 자란 서울을 떠나 이사를 가는 날, 같은 원룸에서 이사를 나가는 집이 하나 더 있었다. 오가며 얼굴은 보았으나 인사 한 번 나누었던 적이 없는 이웃이었다. 얼마 안 되는 원룸 살림이라도 두 집의 이사가 겹치니 짐이 뒤섞여 어수선했다. 철수는 그런 혼잡이 싫지 않았다. 이 복잡한 대도시에서 떠밀려 나가는 사람이 자기 하나만이 아니라는 사실이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두 사람이 함께 살았던 작은 집을 떠났다. 둘이 처음 만났던 도서관과 한강둔치도 멀어졌다. 서로의 전화번호도 알 수가 없었다. 철수와 수아가 연결되어 있던 끈들이 하나 둘 사라지고 말았다. 이제 남아 있는 연결고리는 오직 와이캐피탈 뿐이었다. 철수가 이곳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수아가 잊을 리는 없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자 철수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수아의 모습도 흐릿해졌다. 혼자만의 생활이 적적했으나 외로움에 사로잡혀 견딜 수 없었던 날들은 지나갔다. 이사를 하면서 수아가 남겨둔 옷가지와 짐을 모두 정리해 상자에 나누어 넣고는 장롱 맨 아래에 쌓아 두었는데, 계절이 바뀌어 두꺼운 이불을 집어넣고 얇은 이불을 꺼낼 때야 비로소 그 짐을 가지고 있었다는 기억이 났을 정도였다.

 

 

가끔 수아가 생각날 때가 있었다. 또래의 젊은 여자 채무자와 통화를 하고 나면 심란해졌다. 수아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영등포 집창촌에서 보았던 여자들 같은 선택을 하지는 않았을까? 가진 것이라곤 제 몸뚱이 하나 뿐인 젊은 여자가 달리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그런 일을 상상하다 보면 너무 아프고 고통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철수는 캥거루를 상상했다. 호주에 워킹홀리데이를 가고 싶어 했으니까. 햇살 좋은 나라의 어느 카페에서 일을 하고 있겠지. 호주 사람들도 우유 거품 위에 하트나 나뭇잎을 그려주면 좋아하겠지. 어설픈 영어로 더듬더듬 말하면서 친구들을 사귀게 되겠지. 그 중에는 백인도 있을 테고 흑인도 있을 테고 아마 동양인도 있겠지. 수아는 착하고 귀여우니까 제법 인기가 있을 테지. 그러니 그 애에게 잘 해주는 괜찮은 남자를 골라 만나겠지. 호주에 사니까 쉬는 날에는 캥거루를 보러 가기도 하겠지.

 

 

아기 캥거루가 엄마 캥거루의 배주머니 속에 들어가 있는 모습을 상상하면 철수는 안심이 되었다. 캥거루 같이 넉넉한 주머니를 가지고 있었다면 지금도 함께 있었을 텐데. 그러나 모두 지나가버린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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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작가


편집 : 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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