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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09. 27.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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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나 까자 - 아부나이 대마초]

[알고나 까자 - 네오나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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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왼쪽)과 

나찌 학살에서 살아남은 할아버지(가운데), 

요아힘 가우크 독일 대통령(오른쪽)이 

나란히 손 잡고 나찌의 집단 수용소 현장을 방문한 사진.



저번에 썼던 네오나찌 이야기에 이어서 요번에는 나찌가 했던 짓과 그 안에 있었던 인간 본연의 문제를 더 짚어 볼까 한다. 


나찌가 나쁘다, 아니다 식의 이야기는 접어 놓도록 하자. 


나찌 학살이나 홀로코스트 얘기를 가끔 듣지만 우리는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이 아니다. 따라서 글로 잘 표현한다고 해도 그들의 고통을 이해하는 정도는 발톱의 때만큼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자. 

 

이번엔 좀 슬픈 얘기다. 이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독일로 돌아가 보도록 하자. 


당시 독일에는 엄청난 수의 수용소가 건설되어 있었다. 약 천 개가 넘는 집단 수용소와 보조 수용소가 있었으며, 그 중 일곱 개는 학살을 위해 존재하였다. 이 학살 수용소(독: Vernichtungslager) 중에 특히 유명한 것이 우리가 잘 아는 '아우슈빗츠'다. 이곳에서만 약 110만 명이 학살을 당했으며, 그 외의 다른 곳까지 합쳐서 학살 수용소에서만 약 250만 명 이상이 학살 되었다.


나찌가 유대인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학살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추정치는 제각각이다. 천만 명이라는 설부터 사백만 명이라는 설까지, 어쨌든 대략 그 사이쯤 되는 것이라 알려져 있다. 400만과 1000만의 간극이라... 넘 심하지 않나? 


그리고 일반 수용소가 있는데 규모에 따라서 노동을 시키는 곳도 있었고, 그냥 가둬 놓고 괴롭히는 곳도 있었다. 그 곳에는 유대인들을 위시하여 폴란드인과 일부 러시아인이 갇혀 있었다. 또한 공산주의자, 집시, 장애인, 성적 소수자 등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도 감금되어 있었다. 이 곳의 수감자들은 죽음 대신 우리나라 삼청교육대처럼 노동을 강요당하거나 괴롭힘을 당했다. 죽음 보다 더 잦 같은 삶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죽음이 굉장히 고통스럽겠지만 수감자들의 입장에서는 다시 나갈 희망 없이 사는 것보다 한 방에 죽을 수 있다면 그 편이 나았을 지도 모를 정도로 고통스러운 삶이었던 건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그 끝은 결국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이었으니 과정이 더 고통스러웠다고 말하는 것이 꼭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수용소 이야기가 나오면 항상 언급되는 단어가 '홀로코스트'다. 이 대량 학살의 과정과 결과에 있어 어떤 끔찍한 일이 있었는지는 어느 정도 알려졌으니 대강 넘어가도록 하자. 하지만 어쩌다가 유대인이 독일인들로부터 그러한 처우를 받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자.

 

히틀러의 엄마의 정부가 유대인이었다거나 조부가 유대인이었다는 등 많은 루머들이 있지만, 사견으로는 한 사람의 증오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 민족 전체에 깔렸던 알 수 없는 분노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히틀러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로 급격히 나빠진 '독일 경제의 부흥'을 무기로 집권 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의 독일인들은 내부적으로 굉장히 불안한 시기였고, 어딘가에 자신들의 스트레스, 억울함, 분노 등을 배출해 내고자하는 욕구가 굉장히 강했다. 그러한 독일인들에게 민족적·종교적 색채가 유달리 강한 유대인이 좋게 보였을 리 없다. 게다가 그들이 경제적으로 성공한다면 자신들의 경제적 침체와 대비하여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되고, 이는 그들로 하여금 유대인에 대한 증오심을 갖게 하거나 분노를 일으킬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시작된 유대인 색출 작업. 유대인들을 독일 땅에서 쫓아내고, 격리시킨다.('게토'라는 격리 정책이 있었다.) 그러다 전쟁이 절정에 달할수록 그냥 몰살하는 정책으로 바뀌었다. 


여기까지는 대충 인터넷 디비보면 나오는 내용이다. 하지만 여기는 잉여스러운 딴지니까 다른 쪽으로 조금 더 깊쑤키 디비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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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소의 전경


수용소에 갇힌 유대인들과 외국인, 사회적 약자들은 과연 어떠한 삶을 살았을까. 영화나 소설 등으로 이미 알려진 이야기도 많지만 그래도 그들의 삶을 한번 따라가 보자. 


참고로 수용소를 다룬 영화들을 보면 등장 인물들이 실제에 비해 뚱뚱하다. 당시의 사진들을 찾아보면 그 사람들이 얼마나 말라 있었는지 알 수 있다. 물론 영화에서 그런 사람들을 섭외하긴 어려웠겠지만, 어쨌든 현실이 훨씬  지옥이었다는 점만 기억하자. 


일단 얼마나 먹고 사는 지가 궁금하다. 수용소 마다 차이는 있지만, 생존자의 증언에 따르면 정말 정말 최소한의 음식만이 주어졌다고 한다. 하루에 빵 한 쪽이 나오고, 아주 맑은 스프나 커피(당연히 우유나 설탕 빼고) 중 하나를 500밀리씩 줬다. 요즘 우리에게는 간단히 먹는 아침도 안되는 양 아닌가. 게다가 구역에 따라서 어떤 곳은 아침에 배급을 주고 어떤 곳은 저녁에 배급을 주었다. 빵과 스프를 받고 한 번에 먹으면 저녁에 받은 사람은 다음날 아침에 굶어야 한다. 다음 날의 노동을 어떻게 견뎌야 한단 말인가.

 

저 개미 똥구멍만 한 배급도 나눠서 먹어야 하니 그 배고픔은 가히 상상을 초월 했으리라 생각이 된다. 다른 생존자의 말에 따르면 그 쪽은 하루에 빵 한 쪽과 마가린 50g, 생감자 4개를 씻지도 않고 흙이 묻은 채로 받았다고 한다. 저것을 어떻게 먹을지 상상이 안가지만 그들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무튼 대략 수감자들이 하루에 받은 음식은 200칼로리 정도다. 200칼로리면 요즘은 과자 몇 쪼가리 씹는 양이다. 수감자들에게는 영양이 삶의 동력이었는데 그러한 것을 최소로 줄이니 수용소 생활 시작과 동시에 신체적 기능은 빠르게 약화된다. 


그들의 하루 일과는 여름에는 새벽 4-5시 기상이고, 겨울은 6-7시 기상이다. 눈을 뜨면 30분 안에 씻고, 입고, 먹고, 침상 정리 플러스 내무실 청소를 마쳐야 한다.(씻을 수 있고, 입을 옷이 있으며, 먹을 게 남아 있다면 가능한 얘기다)


기상벨이 울리고 침상에서 스프링 튀어오르듯 일어나지 못하는 수감자들에게는 무지막지한 구타가 기다리고 있다. 나찌친위대인 ss가 수감자를 관리했는데 ss는 일반과 무장으로 나뉘어져 있다. 일반 ss의 경우 수용소 관리나 치안 등의 업무를 했고, 무장 ss는 전쟁에 동원되었다. 


그런데 기상이 새벽 4-5시라 하더라도 사관에 따라 그 이전에 기상시켜서 죽도록 운동을 시키는 경우도 일주일에 한 두 번씩 있었다. 그것도 눈 밭이나 지저분한 곳으로 일부러 데려가서...... 기록에는 체조(gymnastics)라고 표현되어 있고 필자는 운동이라고 썼지만 삼청교육대의 얼차려 비슷한 거라고 예상이 된다. 


기상 후 30분이 지나면 아침 점호를 실시한다. 점호 시간의 대부분은 인원을 점검하는 데에 시간을 보내는데 줄 서서 가만히 있으면 된다. 그런데 이 가만히 서 있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군대 갔다 온 남자들은 알 것이다. 수감자들은 아침 점호를 일 나갈 때까지 했다고 한다. 눈을 뜬 즉시 차렷 자세로 서서 움직이지도 못한 채 몇 시간을 서 있는 것이다. 게다가 아무리 궂은 날씨라도 예외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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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점호 후에는 일을 나간다. 전날 저녁에 일할 곳을 알려주거나 아침에 인원을 선발하기도 하는데 해 뜰 때부터 해 질 때까지, 죽어라 일하는 시스템이다. 독일은 겨울이 굉장히 길고 해도 짧다. 일반적으로 겨울에는 16시가 넘어가면 해가 떨어지고, 여름에는(썸머타임 제외하고) 21시가 넘어가면 해가 떨어진다. 수감자들은 겨울에는 17시까지 여름에는 20시까지 노동을 했다. 휴식 시간은 점심 때 30분 가량 주어지는데 음식은 먹지 못하고, 그냥 숨 돌리는 시간만 준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렇게 일을 끝내고 수용소로 돌아오면 바로 저녁 점호가 기다리고 있다. 아침에야 일도 나가야 하니까 그나마 짧았지만 이 저녁 점호는 길~게 아주 길~게 이어진다. 저녁 점호 역시 인원을 체크하는데 이 때엔 산 사람이든 죽은 사람이든 전부 나와서 대기해야 한다. 죽은 동료가 있으면 데려 나와서 땅에 눕혀놓고 천으로 덮어 놓는다.


저녁 점호는 대략적으로 머릿수를 체크하는 아침과 달리 한 명 한 명 이름을 부른다. 이름이라도 빨리 불러주면 좋겠지만,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있다고, ss는 그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중앙에서 한 명이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로 호명하기 때문에 잘 들리지도 않고, 특히 러시아·폴란드·프랑스 등 외국어 이름은 설령 읽을 줄 알아도 읽지 않는다. 이름을 읽지 않고 시간을 질~질~ 끄는 것이다. 마치 '너의 이름이 독일어가 아니기 때문에 네 이름에 책임이 있는 것이야'라고 말하듯이... 


저녁 점호의 하이라이트는 도주자가 있었을 경우다. 인원 체크시 만약 도주자가 있다면 나올 때까지 나머지 수용자들은 서서 대기한다. 1939년 2월, 영하 15도의 엄동설한에 한 수용소에서는 탈영한 인원이 나타날 때까지 무려 19시간 동안 수감자들이 바깥에 세워져 있었다. 그에 따라 25명의 인원이 동사 하였고, 다음 날 낮에는 70명의 인원이 그 자리에서 동사하였다. 독일의 추운 겨울을 생각하면 상기와 같은 일들이 우리의 자랑스러운 군대 문화인 얼차려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임은 자명해 보인다. 당시 수용자들의 옷은 얇디 얇았고 일부러 신발을 벗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니 말 그대로 밖에서 얼어죽으라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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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점호가 끝나면 이제 따뜻한 방에서 쉴 수 있기는 개뿔~ 내무실 점호가 이루어진다. 내무실 점호는 주로 얼차려로 이루어 지는데 수 백 만 가지의 꼬투리를 잡아서 행해진다. 당시 수용소 시설은 겨울이 되면 내부의 구석에 얼음이 쌓일 정도의 방한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집단 수용소라는 말이 딱 맞도록 굉장히 좁은 곳에 사람들을 밀어 넣었다. 닭장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시설인데 주로 행해졌던 얼차려는 '눈 위에 머리로 물구나무 서기'였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서 잠자기 전까지는 구타가 이어졌다.


잠을 자는 시간은 9시 이후인데 이건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사실 대중 없었다. 취침 시간에는 술을 먹고 돌아온 ss들이 자신들의 스트레스를 풀 요량으로 수감자들을 깨워서 괴롭히기도 했다. 게다가 잘 때에는 이불을 덮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이불이 있을리도 만무했겠지만 추워서 양말을 신고 자는 인원이 있으면 그 내무실은 그날 밤 잠은 다 잔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따라서 자다가 얼어 죽는 사람들과 폐렴에 걸린 환자들이 엄청나게 많이 속출 했다. 이렇게 병에 걸려서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고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한 수감자 병원도 따로 있었다. 말이 병원이지 원래 죽이려고 한 놈들이라서 환자들을 한 곳에 격리 시켜 두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곳에서 죽은 사람들을 다시 시체 안치소의 시체 더미 위에 올려놓는다. 


이제 수감자들이 하는 '일'을 살펴보자. 


노동(Arbeit)은 그들 일상 중 가장 많은 시간을 차지하는 일이다. 그럼 위의 글들을 읽으면서 '그나마 노동을 하는 시간이 가장 편하겠구나'라고 막연히 생각한다면 이는 오산이다. 당시 법무부 대빵이던 오토 티라크의 메모 중, 괴벨스와 힘믈러의 대화를 기록한 곳에서 '노동을 통한 제거(Vernichtung durch Arbeit)'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여기서 '주'가 되는 것은 '노동'이 아니라 '제거'다. 즉 제거를 위한 노동을 시켰으니 그 강도를 말로 설명해 무엇 하나 싶다. 수감자들은 각종 작업에 동원 되었는데 일단 기술자들은 열외 되어 기술이 필요한 실질적 노동 현장에 투입이 되었다. 그래서 옛 어른들이 기술을 배우라고 하셨나 보다. 인터넷 논객 변xx 씨에게도 누군가 기술을 배우라는 충고를 하더라. 잘 새겨들으시길 개인적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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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 티라크의 사진 ~

인상파다. 


아침 점호가 끝나면 수감자들은 작업장까지 몇 킬로미터씩 뛰어간다. 때로는 발목까지 잠기는 진흙을, 때로는 얼음 위를 말이다. 당시 수감자들에게는 나막신이 지급되는 곳도 있었는데 나막신을 신고 뛰다 보면 발에 상처가 너무 심하게 생겨 신을 벗지 못할 정도였다. 따라서 많은 이들은 한 겨울에도 맨발로 뛰었다. 뒤에서 구타하면서 뛰어오는 관리자들의 마수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감자들은(대부분은 부상을 입은 몸으로) 정말 목숨을 걸고 일터까지 뛰어 갔다.


수용소의 작업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필요한 작업장과 불필요한 작업장. 필요한 작업장은 빨래 공장, 건축 현장, 군수 산업 등에 이용되는 노동 현장을 말한다. 그런데 웬 불필요한 작업장인가. 당시 수용소에는 필요한 노동력보다 훨씬 더 많은 수감자들이 있었다. 독일 전역에 1000개가 넘는 수용 시설이 있었으니 그 수감자 수만 해도 어마어마 했으리라 짐작이 된다. 그런데 이러한 많은 인원이 다 할 일이 있겠는가. 거기에 이들은 각종 외국인과 사회적 소수자들로 어마어마한 노동력을 창출하기도 쉽지 않은 사회적 약자들의 집합이다. 따라서 악랄한 나찌들은 불필요한 노동 현장을 만든 것이다. 


당시 수용소에 있었던 한 생존자의 증언에 따르면 그들의 작업은 수용소 주변에 이중 담장을 세우는 일이었다고 한다. 그것도 돌을 깨고 날라서. 여기서 문제는 장비가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당연히 장비가 없으니 작업은 느리고 부상자도 많이 나오며 힘은 몇 배로 더 들었다. 담장을 세울 돌을 깨는데 주어진 재료는 날이 무뎌진 손 망치가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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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감자들은 죽어라 고생을 하여 담장을 결국은 완성하였다. 그러자 관리자가 와서 완성된 담장을 보고 "완성이 되었으니 담을 허물어 다시 원위치 시켜라."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그 일은 끊임 없이 계속 반복 되었다. 처음 들어온 수감자들은 얼마 간은 솔선수범 하여 작업을 하지만 이러한 일이 몇 번 반복 되다보면 모두 의미 없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심리적으로 느끼는 노동의 강도는 배가 되고 의지는 약해진다. 살벌한 감시자들의 눈을 피해 대강 대강 일하는 것은 곧 죽음을 부르는 행위이기에 대충 할 수는 없다.


그렇게 좌절과 절망의 반복 속에서 한 인간은 점점 나약해 지고, 신체적·정신적 죽음으로 한 발 한 발 다가서게 된다. 당시 수감자들이 가장 가고 싶어했던 노동 현장은 지붕이 있는 곳이나 불이 있는 곳이었다. 어떠한 악천후에도 일을 시켰을 나찌들을 생각하면 그나마 불과 지붕이 주는 안락함이 최선이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를 위한 경쟁과 로비도 치열했지만 그 곳에 들어가는 인원은 굉장히 적었다. 


그 안에서는 대신 굉장히 장시간의 노동을 강요받았다. 빨래를 하는 여자들의 경우 아침 6시부터 밤 12시까지 일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곳에서 일하려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점은 그 외의 장소에서의 노동 강도가 얼마나 빡~세었는가를 증명한다. 즉 노동의 문제가 아닌 생존의 문제라는 점을 다시 한 번 상기 시킨다. 


수감자들은 일반적으로 크고 작은 부상에 시달릴 수 밖에 없는데 당연히 가장 많이 앓고 있는 것이 폐렴과 상처가 덧나서 곪은 부상이었다. 거기에 약을 바를 시설도 인원도 없었으니 작은 상처 하나에도 결국 목숨을 잃게 되는 상태가 종종 있었다. 거기에 더해 최악의 위생 상태와 면역력으로 인한 전염병이 끊임없이 돌았는데 그에 대항하여 살아남는 것은 순전히 개개인의 능력이었다. 


수감자들의 하루를 대략적으로 살펴보았다. 디테일한 내용들이 일부 빠졌겠지만 그들의 하루는 대략 저렇게 구성되어 있었다. 위에 열거된 먹을 것, 구타, 가혹 행위 등의 신체적 강압 외에 교묘히 숨어있는 정신적 가압 행위도 있다.

 

위에 열거한 많은 일들은 대부분 철저히 계산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정해진 시간표 내에서 일상은 항상 반복된다. 하지만 그 안에는 종종 구타와 폭력, 삶과 죽음을 가르는 여러가지 악행들이 시도 때도 없이 행해지는데 이것을 소위 '시간 테러'라고 일컫는다. 미래에 대한 가능성을 수시로 부수어 버림으로써 그들의 시간 관념을 현재에 묶어 두는 것이다. 일할 때에도 점호 시간에도 수감자들은 시계를 소지할 수 없으므로 대략의 시간을 전혀 알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시간 감각은 무뎌지고 수시로 행해지는 구타와 가혹 행위등이 더해지면서 미래에 대한 예측을 포기하게 된다. 


수용소 내에서는 과거의 모든 것이 필요 없게 되고, 미래에 대한 희망과 예측이 불가능 하게 되며, 수감자들은 영원한 현재 속에 갇혀 버린다. 현재의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선택권만 있을 뿐 그 이상의 어떠한 생각도 할 수 없게 된다. 그렇게 되도록 정해진 일과가 있음에도 자주 깨트림을 당한다. 갑자기 특식을 제공 받기도 하고, 밤샘 점호가 이뤄지기도 한다. 때에 따라 술 취한 군인들의 구타를 경험하기도 한다. 이는 수감자들의 심리 상태를 허약하게 만든다. 


얼마 전 전두환이 자신의 훈장을 반납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전두환이 누구인가. 불과 30여 년 전에 우리나라에 삼청교육대를 만들고 사람들을 잡아다가 위의 시스템을 베낀 듯한 방법으로 젊은이들을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상태로 만든 그 인간 아닌가. 그런 사람이 1,600억을 내니마니 하며 아직도 티비에 나온다. 그리고 인터넷에는 일부 그를 옹호하는 사람들까지도 있다. 


물론 전두환의 그것이 나찌의 수용소와 비교할 수 있느냐는 반론이 있을 수도 있겠으나 그 안의 시스템이나 방식 자체는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름만 '교육대'일 뿐 어떠한 교화라든가 교육이라든가 하는 것들은 개나 줘버린 그런 시스템 말이다. 그리고 그에 관한 어떠한 사과나 반성의 기미도 없는 뻔뻔한 모습을 보고 있으면, 본인이 그 시스템 안으로 들어가도 저리 당당하고 뻔뻔하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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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참 나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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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보리삼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