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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0. 02.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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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에 언급한 바와 같이 수용소 내부의 '생활' 만으로도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을 만큼 잔인하고 악랄한 나찌 수용소의 시스템은 호시탐탐 수감자들의 목숨을 노렸다. 홀로코스트라 지칭되는 가스실 내부에서의 대량 살상 이외에도 하루에 수 십, 수 백의 수감자들이 죽어 나가는 곳이 바로 나찌의 집단 수용소였다. 당시 수감자들의 삶이 어떠했는지는 2차 대전이 끝난 후에 많이 알려졌지만, 수감자들의 생활과 삶 보다는 자극적이고 집단적인 나찌의 살상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한 댓글러가 나찌에 학살 당한 피해자 수의 추정치가 과장 되었다는 주장을 하면서 당시 수용소 내부의 처참한 생활도 과장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더라. 


물론 그랬을 수도 있다. 당시 학살 당한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 정확한 사망자는 집계조차 되지 않는다. 따라서 사망자의 수도 들쑥날쑥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할 만큼의 많은 인원이 그곳에서 죽음을 당했고, 희생 당한 그들의 의미는 댓글에 적혀있는 그것 보다 훨씬 무겁다는 데 있다. 


역사적으로 전해지는 여러가지의 사건들, 특히 가해자 집단과 피해자 집단이 극명하게 나뉘는 일들의 경우(삼청교육대, 시리아 사건 등), 그 사건을 수직적으로 바라보며 뭐가 더 잔혹했고 뭐가 더 많이 죽었으며 하는 식으로 바라볼 필요가 없다. 어찌됐든 그러한 일들이 일어났고, 그러한 어떤 사건도 결코 가볍지 않다. 집단의 죽음에 비해 개인의 죽음이 가벼운 것은 결코 아니며, 역사의 비극 속에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을 가지고 숫자로 그 의미를 확대 혹은 축소 하지는 말자.  


그래서 이번에는 이 세상 모든 개개인의 삶과 죽음의 무게가 똑같다고 보았을 때, 대량살상의 수법 만큼이나 잔인하고 비참했던 수감자들의 삶을 들여다 볼까 한다.


매일을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서 철저히 부서져 갔던 인간들이 있다. 이들의 외모는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인간의 그것이 아니다. 살가죽이 마르고 말라서 뼈에 달라붙어 있는 상태이며 마치 양피지 같이 칙칙한 색과 쭈글쭈글한 모양을 하고 있다.


발과 다리는 종기로 가득 덮여 있고 온몸의 근육은 전부 빠져나간 것처럼 보인다. 머리통은 마르다 못해 관자놀이 부위가 움푹 들어가 있고 얼굴은 길게 늘인 듯 해 보인다.


콧물이 멈추지 않아 항상 턱까지 흘러내려 있으며, 눈 두덩이는 푹 꺼져서 마치 해골을 연상시키는 얼굴을 하고 있다. 눈빛은 초점을 잃고 항상 흐릿흐릿 하며, 동공은 굉장히 천천히 움직인다. 눈빛 뿐 아니라 온몸의 각 부위가 한없이 천천히 움직이며, 그 움직임은 마치 기계의 움직임처럼 툭툭 끊기고 부자연스럽다.


몸 주위로는 형용할 수 없는 악취를 풍기며 땀, 소변, 입에서 나오는 알 수 없는 이물질들이 다리를 타고 흘러내린다. 몸에는 삵고 삵은 걸레 같은 천 쪼가리를 걸치고 있으며 그 위를 수도 없이 많은 이(머리이)들이 기어 다닌다. 약하디 약해진 피부에는 셀 수도 없이 많은 상처들이 생겨났다.


뭐든 입에 닥치는데로 넣어야만 했던 그들은 곰팡이 가득한 빵과 벌레가 기어다니는 치즈 부스러기, 땅에 굴러다니는 썩은 생선과 버려진 채소 쪼가리들까지 주워 먹었다. 그래서 이들은 항상 아무 곳에서나 설사를 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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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젤만을 아는가?


무젤만은 무슬림을 뜻하는 옛날 독일어이며 알라신을 믿는 사람들을 지칭한다. 하지만 수용소 내부에서 무젤만은 단순히 위에 서술했던 행동과 외형을 지닌 사람들을 통칭하는 단어로 아랍인들을 지칭 하는 것이 아닌, 좀 피해야 할 사람을 지칭하는 그들의 은어였다.


아우슈빗츠의 가스실에 사람이 가득 들어가는 것을 자신들끼리 '차이나 타운' 이라고 부른 것도 비슷한 이유이다. 즉, 실제로 무젤만이 무슬림이던 아니던 상관은 없다. 다만 유태인의 관점에서(유태인이 다수인 사회였으니까) 자신들과는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고, 사이도 그닥 좋지 않은 집단의 이름인 '무젤만'이라는 단어를 빌려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한 것이다.


수감자들은 무젤만을 '죽어있는 산 자' 혹은 '살아있는 죽은 자'로 표현 했고 흔히 '걸어다니는 시체'라고 얘기하기도 했다. 외형적인 모습이나 행동하는 것을 보고 추측해 볼 수 있는 이미지는 고전적인 좀비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좀비라는 것이 부두교에서 나온 말이지만 보통의 우리가 알고 있는 좀비의 특징은 부두교의 좀비와 많이 다르기에, 필자는 문학적으로 좀비의 근원이(단지 외모적인 면에서만) 무젤만이 아닐까 강하게 추측해 보는 중 이다. 무젤만 역시 좀비처럼 '살아있는 시체'라고 불렸으니까 말이다.


무젤만에 대해서는 사실 많은 기록이 전해 내려오지는 않는다. 대부분의 내용은 당시 수용소의 생존자들에 의한 증언이다. 다만 어떤 의사가 꽤나 단순하게 무젤만 현상이 나타나는 것에 대한 대략적인 서술을(신체적 변화와 행동 변화에 대한) 한 것이 기록으로 남아있는 수준이다. 수용소에는 무젤만이 상당히 많이 존재했지만 집계와 기록이 제대로 되지 않아 그 정확한 수는 파악되지 않는다.


일례로 당시 수용소에 끌려온 수감자들 중 프랑스 여인들도 많이 있었다고 한다. 그들 중에는 멋진 옷에 세련된 헤어 스타일을 하고, 몸에서는 은은한 향수 냄새가 풍기는 채로 수용소에 끌려 온 아름다운 여성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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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수감 후 시작되는 변화를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고 한다. 머리를 깎고 옷은 다 수용소에서 주는 옷으로 바꿔입어야 하는데다 비위생적이기까지한 그곳의 현실에 적응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새로운 사람들이 수용소에 들어온 지 며칠이 지나면 수용소에 있던 기존의 사람들은 저 사람이 이 곳에서 살아나갈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파악이 되었다고 한다.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과 그냥 자포자기 하는 사람의 생존 확률은 상당히 큰 차이가 있었다.


모든 시작은 최소한으로 배급되는 음식에서 시작된다.(전편에 썼듯이 대략 하루 200칼로리 정도의 음식을 배급 받았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나면 신체는 급격하게 약화된다. 몸이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려고 스스로를 태우며 몸 속에 남아있는 영양분을 다 소모하는 것이다.


온몸의 근육들이 사라지고, 몸은 최소한의 기능으로만 작동하기 시작한다. 맥박이 점점 느려지고 혈압이나 체온도 낮아진다. 그에 따라 별로 춥지 않아도 항상 몸을 덜덜 떠는 상태가 되고 호흡도 상당히 느려진다. 목소리는 작게 낼 수 밖에 없고, 단순한 동작에도 상당히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만 한다. 배고픔에 의한 설사나 구토가 시작되면 이러한 몸의 변화는 더욱 급속히 진행된다.


처음에는 시도 때도 없이 화장실을 들락 날락 거리다가 결국에는 침상 위에서 대소변도 못 가리고 자포자기한 상태로 그 위에서 잘 움직이지도 않는다. 자신의 몸을 뜻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된다. 행동은 항상 목적 없이 산만할 뿐이고, 몸통을 앞 뒤로 흔들어대고만 있는다. 피부 역시 한없이 약해져 있고 감각도 무뎌져 있지만 이유도 없이 겨드랑이를 긁고 또 긁어댄다.


움직일 때 역시 다리를 들지 못해서 발을 항상 바닥에 질질 끌면서 다니고, 조금 더 시간이 흐르면 벽이나 손잡이를 짚지 않고는 더 이상 걸어 다니지도 못한다. 몸의 각 부위는 점점 따로 놀게 되고 결국은 그 어느 것도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모든 신체의 기능이 무너져 버리게 된다.


이러한 신체적 변화들은 당연히 정신적으로도 한 인간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역할을 한다. 점점 생각과 집중을 할 수 있는 능력 자체가 떨어지고 자신이 사는 세계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그 동안의 기억이나 생각들은 모두 잃어 버리게 되며 많은 이들이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모든 의식은 단지 '먹을 것'이라는 하나의 문제에만 고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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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상태의 무젤만들은 먹을 것들을 찾는 것에만 집중하며 음식에 대한 환각이나 환청을 경험한다. 그럴수록 인지 능력은 점점 더 떨어지고 감각은 점점 더 무뎌진다. 온몸의 감각이 무뎌짐에 따라 추위와 더위도 점점 더 느끼지 못하게 되고 뜨거운 태양 밑에서 피부가 타 들어가도 움직일 줄을 모른다. 이렇게 떨어진 감각 때문에 누가 눈 앞에서 불러도 반응하지 않고 귀에 대고 고래 고래 소리쳐도 거의 듣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자신을 구타하는 간수에게도 전혀 반항하지 못하고 그냥 맞기만 할 뿐이다. 즉, 아직 살아 있지만 이 세계와 주변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에 갇혀버린 상태가 된다. 남들로부터, 그리고 자신으로부터 완전히 떠나버린 육체와 정신의 상태이다.


이 상태에 이른 무젤만들은 더 이상 무언가를 생각할 수도, 행동으로 옮길 수도 없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육체적인 죽음의 상태에 놓이게 된다. 이 단계에 들어서면 더 이상 배고픔도 고통도 느끼지 못하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상태가 된다. 마지막 시기에 그들은 더 이상 음식을 주어도 먹지 않고 입에 떠 넣어 주어도 목으로 넘기지 않는다. 그렇게 그들은 이 세상과 자신을 놔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살아남은 사람들과, 무젤만이 되어서 죽어간 사람들의 차이는 무엇일까? 모든 것을 음식의 부족으로 인한 기근으로만 해석하기에는 오류가 따른다. 사람이 굶어 죽어가는 것과 무젤만이 죽어가는 과정은 앞서 보았듯이 상당히 다르기 때문이다.


수용소에 들어온 순간부터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마치 죽음의 낙인을 이마에 박은 듯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고, 그와 반대로 자기 자신을 끝까지 놓지 않으려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항상 위생에 신경 쓰고, 옷도 정갈하게 입으려 하고, 신체적으로 스스로의 규칙을 만들어 실행에 옮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다시 말하면 스스로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 자신의 내부와 외부에서 일어날 수 있는 부주의에 대해 신경을 쓰는 사람만이 무젤만이 되지 않고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야말로 수용소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꼭 필요한 요소였다.


이러한 규칙을 지키며 살아나가고 있는 사람들과 무젤만은 모든 면에서 충돌이 일어날 수 밖에 없다. 무젤만들은 아무 곳에나 서 있고 누워 있고 널부러져 있었으며, 일을 할 때에도 도움은 커녕 방해만 되는 존재일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의 몸에서 풍기는 악취와 질병에 신경도 쓰지 않았기에 주위 사람들에게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주었다.


이러한 일들이 반복 되면서 무젤만은 불필요하고 피해만 주는 존재가 되었다. 사람들은 그들을 한 쪽에 몰아 놓고 욕하고 때리고 침 뱉고 조롱했다. 같은 취급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았던 이들은 결국 무젤만을 그들 가운데서도 가장 밑바닥 인생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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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그들은 수용소 내부의 사회에서 가장 구석에 위치하여 겨우 겨우 하루 하루 목숨만 부지하고 있었으며, 자기 스스로 자신을 포기했듯이, 남들로 하여금 자신을 포기하게 만든다. 자신의 신체가 죽어감에 따라 정신적 죽음과 사회적인 죽음을 동시에 맞이하는 것이다.


죽음을 얘기할 때, 그 죽음의 과정을 보는 것은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사고나 강압, 혹은 끔찍한 기아에 의한 죽음일 경우에 인간은 그 죽음에 맞서 끝까지 반항한다. 하지만 무젤만의 경우 이러한 반항조차 없는 그냥 체념 상태의 죽음... 죽는다는 것에 대한 순응과 그럴 수 밖에 없는 외부적인 요인이 결합되어 육체 뿐 아니라 정신도 완전히 파괴되는 과정이 잘 나타나있다.


사회적으로 보았을 때 그들의 죽음은 우리에게도 많은 생각을 하게한다. 일단 무젤만들은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수용소 내부의 사회 속에서 항상 문제를 일으키는 존재들이다. 각종 규칙에 위반된 행위를 하고, 남들과 함께 일하지 못하고, 거기에 쳐다보기조차 불쾌한 외모를 가지고 있다. 게다가 이 무젤만들은 남의 모습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의 미래의 모습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다른 수감자들의 마음을 더 불편하게 했다.


그리고 한 사람의 잘못을 전체의 잘못으로 해석하는 수용소 사회의 구조 때문에 이들은 수용소의 감시자들 뿐 아니라 일반 수감자에게도 미움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존재였다. 나찌 감시자들도 무젤만을 많이 학대하고 죽이고 했지만, 다른 수감자들 역시 무젤만을 구타하고 괴롭히는 일이 많이 있었다. 그리고 구타에 대한 무젤만 특유의 무반응은 구타자를 더욱 더 도발하는 행위로 비춰졌다. 때문에 반응 없는 그들을 결국 죽을 때까지 패는 일이 종종 일어났다. 게다가 폭력이 끝난 후에도 반응이 없는 무감각한 그들의 특성 때문에 이러한 종류의 폭력은 대부분 조용히 묻혀버렸다.


이러한 특성들은 요즘 보이는 왕따 현상과 비슷하다. 왕따를 당하는 아이들의 자존감이 높고 자기 자신을 지키려는 의지가 강한 경우 그 아이는 끝까지 저항을 하지만, 스스로를 믿지 못하고 허약한 아이들일수록 스스로 외부세계와 차단된 더 큰 벽을 쌓고 그 안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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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젤만의 이야기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죽음은 순간이 아니라 과정에 있다는 점이다. 죽어가고 있는 어떤 이를 다른 이들이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을 때, 이미 그 사람은 육체적 죽음에 앞서 사회적으로 죽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죽음은 생물학적 죽음과 큰 차이가 없다.


무젤만을 바라보는 다른 수감자들 역시 그들의 존재와 행동이 불쾌할 수 밖에 없다. 무젤만은 수용소 내의 그 누구라도 될 수 있으며 그들의 모습과 내가 닮아 있다는 점이 다른 수감자들에게는 알 수 없는 또 다른 공포로 다가 왔음이 분명해 보인다.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의식도 갖추지 못한 무젤만의 삶이 내 삶이 될까 두렵고 내 미래의 모습이 될까 두려운 다른 수감자들은 그들의 존재를 부정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럴수록 다른 수감자들 사이의 연대감은 강해지고 자신들과 다른, 또 소수인, 게다가 힘도 없고 문제만 일으키는 무젤만은 수용소 내부의 사회를 흔드는 또 다른 적으로 인식 될 수밖에 없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 무젤만의 죽음은 지극히 개인적이다. 너무 개인적이어서 그 누구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약자 중의 약자이다. 하지만 이는 수용소 내부의 사회를 바라볼 때 전혀 개인의 문제가 아닌 그 내부 사회의 문제이다. 


마치 저 곳의 무젤만처럼 우리 사회에는 사회적 무젤만들이 수도 없이 양산되고 있다. 대한민국 사회가 가지고 있는 'OECD 자살률 1위'라는 타이틀이 이를 잘 반영하고 있다. 물론 자살의 이유야 워낙 다양하고 방법도 천차만별 이므로 이를 무젤만 현상과 연관시키는 것은 억지스러울 수도 있다.


당시 수감자 집단이 모두 겪고 있었던 대규모의 공포가 무젤만이 되어가는 소수의 사람들이 겪는 공포를 잊게 만들었듯이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대규모의 공포는(남북문제, 경제문제, 정치문제 등) 소수가 겪고 있는 고통을 외면하는데 있어 좋은 도구가 되고 있다.


뉴스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생활고를 겪던 아무아무개 씨가 처지를 비관하여 자살했다고 한다. 현대 사회의 돈이 무젤만의 빵과 같다고 생각 한다면 자살의 원인을 생활고 만으로 치부하는 것은 너무나 성의 없는 해석이다. 무젤만에게 빵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그들을 구제하지 못한다는 것은 이미 증명된 사실이다.


그들을 구제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사회적 활동과 연대이다. 내가 이 사회에서 완전히 밖에 있다고 생각하게 될 때 그 사람은 무젤만이 되고, 천천히 죽어가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영역을 국가가 나서서 관리할 수는 없다. 국가가 복지를 통해서 빵을 줄 수는 있겠지만 그 사람을 사회의 틀 안으로 데려오는 것은 해결하기 어려운 가장 세심한 영역이다. 그리고 이는 사회 구성원들의 적극적 협조 없이, 그리고 사회적 시스템에 대한 믿음 없이는 절대 해결 불가능한 영역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위의 상태를 지향하는 것은 아직 너무나 멀어 보인다. 국가의 최상부가 그렇지 못하고 있다. 그 밑도 그 밑도... 결국 서로 간의 불신과 대립만 팽배한 사회 아닌가. 


21세기의 미친듯한 경쟁사회에서 내가 살아남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끔은 주변 사람들과 같이 사는 정신 좀 발휘하자. 우린 적어도 수용소에 살던 그들 보다는 훨씬 안락하고 살기 쉬운 사회에서 살고 있으니 말이다.


좀 죽어나가는 사람들 없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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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데우스

트위터 : @tadeusinde


편집 : 홀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