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당연히 ‘사실무근’이라고 말을 하겠죠. 오래됐으니까 기억이 안 난다라고 얘기를 할 거예요. 근데 제 머리가 기억을 하고 있으니까요. 그건 엄연한 사실인 거고.”


 

며칠 전, 이완영 의원이 고용노동부에 재직하던 시절 출입처 기자에게 성폭력을 저질렀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이 의원 측은 즉각 의혹을 부인했다. “사실무근”이라고.

 

딴지는 20년 전 이완영 의원에게 성폭력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전직 기자 A씨를 만나 인터뷰했다.

 

A씨는 당시 노사관계개혁위원회 출범을 준비 중이던 이완영 의원을 취재했었다. 위원회의 출범 과정과 방향, 내용, 취재했던 노동부 고위 공무원 등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A씨는 20년 전 사건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고 했다. 지금도 그때 생각이 불쑥불쑥 찾아와 괴롭다고. 오랜 시간 트라우마에 시달렸다고.



line.jpg


 


61.jpg



코: 96년 당시에 노동부에 출입하는 언론사 기자이었던 거죠?

 

A: 네. XX 노동전문 일간지요.

 

코: 기자는 몇 년도부터 하셨던 건가요?

 

A: 94년 2월 대학교 졸업하고 아마 여름부터 했던 거 같아요.

 

코: 96년도 5월에 사건이 있었는데, 당시 이완영 의원을 취재하고 있었던 거죠?

 

A: 당시 중국이 부상하면서 우리나라도 세계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노사관계를 바꿔야 한다 해서 대통령 직속으로 노사관계개혁위원회가 만들어졌어요. 1996년 5월 9일에. 그걸 취재하고 있었어요.

 

코: 이완영 의원은 언제부터 알고 있었나요?

 

A: 신입 기자 시절, 94년 말부터 노동부 출입하면서 온 과를 헤집고 다녔으니까 바로 알았을 거예요.

 

인: 노사관계개혁위원회(이하 노개위) 취재는 얼마나 오래 하셨어요?

 

A: 취재 기간이 그렇게 길지 않았어요. 노개위가 아직 출범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체계는 어떻게 되고, 어떤 문제의식을 가지고 활동을 할 건지 취재를 했던 거고요. 그 당시 노개위 사무실로 남대문 쪽에 있는 국제빌딩을 얻었었는데 아직 입주도 하지 않았었죠. 5월 9일 날 발족을 했는데 제 기억에는 4월 말이나 5월 초에 취재를 시작했던 거 같아요.

 

코: 당시에 이완영 의원은 노동부 어느 국에 소속돼 있던 건가요?

 

A: 근로기준과였던 거 같은데. 그 사람 약력을 찾아보면 알 수 있을 거 같은데. 95년 96년에 근로기준과에 있지 않았나요?

 

인: 약력에 정확한 연도 표기가 안 돼 있더라고요. 운영과장을 했다고 하는데...

 

A: 운영과장은 노개위 운영과장을 말합니다.



2212.JPG

1996년 2월 2일 동아일보 인사면.

이완영 의원은 당시 근로기준과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코: 그 전에는 어느 정도 안면은 있으셨던 건가요? 출입은 자주 하셨으니까.

 

A: 안면은 있죠. 처음 본 건 아니고요. 친하지는 않아도 사무관 이상급은 무슨 과에 누가 있고, 이런 것들은 대충 파악했었죠.

 


1996년 5월, 과천

 

코: 이제 그날 술자리 얘기를 조금 해봐야 할 거 같습니다. 그 자리는 노개위 마무리를 축하하는 자리였나요?

 

A: 아니요. 술자리는 4월 말, 5월 초 정도에 끝난 노개위 취재가 마무리될 무렵에 이완영이 술 한잔하자고 해서 인근 단란주점에서 가졌던 거에요.

 

: 그 전에는 그런 술자리를 가졌던 적이 없고 처음인가요?

 

A: 처음이었는가는 확실치 않아요. 기자들이야 취재처에 있는 사람들과 밥 먹고 술 마시고 하니까. 이완영도 취재원이었으니 밥 먹고 술 한잔 마시고 그랬을 가능성은 있겠죠.

 

코: 당시에 갔었던 단란주점에 대해서 기억나시나요? 상호나 이동 거리 같은 거요.

 

A: 저는 과천 노동부 청사에 주로 지하철을 타고 왔다 갔다 했기 때문에 청사 외에는 잘 몰라요. 이완영 차를 타고 이동했고, 이게 우리 아파트라고 하면서 아파트 옆에 자기 차를 주차하고 걸어 같으니까 인근 단란주점이겠죠.

 

인: 이완영 의원이 고른 주점인가요?

 

A: 저는 그 인근 상호, 식당 거의 모르니까. 그렇겠죠.

 

코: 당시에 자리에서 이완영 의원이 폭탄주를 타서 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같이 있었던 이완영 의원이나 사무관도 같이 마셨던 건가요?

 

A: 양주로 폭탄주 여러 잔을, 컵으로 된 걸 권했었던 기억이 나요. 그 당시에 제가 어렸기 때문에 그렇게 술 많이 마시고 이런 건 익숙하지 않았던 거 같아요. 그러니까 처음에는 머리가 말짱했는데, 몇 잔을 마셨더니 갑자기 어느 순간 기억을 잃었어요. 아예 기억이 끊겨 있어요. 일정 부분이.

 

인: 기억을 잃기까지 정확하게 같이 있던 사람들이 몇 잔을 마셨다는 건 기억은 못 해도, 그 사람들도 비슷하게 다 마시고 있었던 건가요?

 

A: 제가 몇십 잔 마신 건 아니고요. 5잔 안팎을 마셨을 거예요.

 

인: 그 사람들도 다 비슷한 템포로 다들 먹고 있었던 건가요?

 

A: 네. 이후에 눈을 떠보니까 차 속이었어요. 단란주점에서 차까지 어떻게 옮겨졌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래서 다음 날 B사무관한테 가서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봤더니 그 사람이 아예 답변을 안 해서 회피를 해서 그냥 제가 알았다 하고 왔거든요.

 

인: 기억이 안 난다든지 그런 말 없이 아예?

 

A: 아예 대답을 안 했어요.

 

코: 술자리에서는 징후라던가, 무례하게 했다던 게 그런 게 전혀 없었나요?

 

A: 아뇨 없었어요.

 

코: 평소에도 그렇지는 않았던 건가요?

 

A: 그건 잘 모르겠어요. 평상시에 성추행범이라고 써놓고 다니는 거 아니니까요.

 

인: 같이 일하는 여자 직원들을 대하는 태도라든지 그런 거에 이상이 전혀 없었던 거죠?

 

A: 제가 취재했던 기간이 그렇게 길지 않아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7, 8개월? 1년도 안 됐으니까요. 노동부에 일주일에 2~3번 출입하는데 각 과별로 부서별로 사람들 특성까지 알만한 상황은 아니었어요.

 

인: 나중에 정신이 들었을 때 차 안이었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 후에 어떻게 하셨어요?

 

A: 손등에 너무 낯선 느낌 때문에 화들짝 놀라서 깼더니, 제 티셔츠를 위로 들어 올리려고 하고 있었어요. 제가 정신없으니까 의자에 기대고 있었겠죠. 깨면서 앞으로 일어나서 토하려고 했었어요. 그랬더니 창문을 내려줬고. 저는 찬바람 마시고 가겠다고 했죠. 그리고 내가 집에 가겠다고 했고, 같이 택시를 타고 집 앞에서 내렸어요. 사실 택시 탄 과정은 잘 기억이 안 나요.

 

근데 기억나는 건, 이완영이 자기 집으로 가기 위해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당황을 했나 봐요. 이 사람도 (걸어서 가다가) 횡단보도 거의 끝에쯤 가가지고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더니 순간적으로 뒤돌아봐서 저를 딱 보더라고요. 그게 기억이 나요. 그다음 날 제가 전화를 했죠. 어제 상황은 어떻게 된 거냐고 얘기했던 거고. 그랬더니 그 사람이 답변을 못 하고 우물쭈물하면서 무슨 말 하는 거냐, 모르겠다 했어요. 그렇게 끝이 났어요.


 

n2.JPG

출처 - <노컷뉴스>




알려지지 않았다


코: 다음 날 사건을 회사에 보고하신 거죠?

 

A: 그다음 날 제가 출근을 안 했고, 편집부장이 저희 집 앞으로 왔어요. 상황을 이야기했고, 그만두고 싶다고 했어요. 선배가 그렇게 하면 당신이 지는 거니까 일단 와서 기사를 쓰고 사무실은 계속 다니는 걸로 하자 해서 오후에 출근해서 기사 썼고요.

 

저는 이게 보고가 됐을 거라고 생각을 했어요. 왜냐면 출입처 변경을 계속 요구했었고 회의에서 출입처 변경이 결정되니까 당연히 얘기했겠구나 생각을 했던 거죠. 나중에 알고 봤더니 보고가 안 됐었어요. 저는 7개월 동안, 그러니까 국감 끝날 12월 말까지 계속 다녔거든요. 노동부 가면 계속 복도에서 마주치고.

 

코: 편집부장에게 말했는데 그게 상부까지는 보고가 안 된 건가요?

 

A: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성희롱이나 성폭행 문제에 대해서 굉장히 예민하지 않았던 시대인 거고. 개인의 프라이버시로 생각해서 비공개로 하는 게 저한테 도움이 된다고 판단을 하셨던 거 같아요. 그래서 위에 보고하지 않았던 거고.편집부장도 20대였고, 저도 20대였고 다들 어렸었기도 하고.

 

코: 그 이후로 국감 끝날 때까지 있었고, 혹시 이완영 의원이랑 얘기를 나눠보신 적이 있나요?

 

A: 아니요. 그 사건 이후로 거기 가는 걸 많이 꺼려했기 때문에 그쪽 취재는 제가 잘 안 가려고 했었어요. 당시 운영국장이었던 C국장을 통해서 취재했지 이완영을 따로 취재할 일도 없었고요.

 

인: 복도에서 몇 번 마주쳤다고 했잖아요. 그때도 이완영은 평소랑 다를 바 없이 행동했었나요?

 

A: 국감 하면서 화장실 갔다 돌아오면서 마주치고 하잖아요. 그러면 저는 되돌아갈 수도 없고 그냥 이렇게 얼른 피해가죠. 복도에서.

 

인: 그쪽도 분명히 다음날 통화 했을 때 우물쭈물했었고 하면 기억이 안 난다고 해도 전혀 기억이 없다고 보기는 어렵잖아요 상대방에게. 그럼 상대방도 마주쳤을 때 뭔가 반응이 있었을 것 같은데.

 

A: 모르는 척을 했어요.

 

인: 아예 모르는 척을?

 

A: 아예 인사 안 하고, 서로 인사 안 하고 피해가죠.

 

인: 그럼 원래는, 인사를 안 하는 건?

 

A: 그런 건 아니죠. 그 사람 인지하고 있어요. 아니면 다음 날 왜 저한테 그런 태도를 보였겠어요. 우물쭈물 답변을… 난 정말 모른다 그런 것도 아니고, 그냥 뭐 음음 이러면서 계속 우물쭈물하면서 하여튼 그랬어요.

 

코: 사건 이후에 이완영을 다시 만난 게 언제인가요?

 

A: 제 출입처가 7개월 동안 변경이 안 되다가 12월 말에 한국노총으로 바뀌었어요. 그래서 출입처 변경 전에 마지막이니까 그동안 수고했다고 환송식 겸 해서 저를 불렀죠. 안 간다고 했었는데 편집국장이 당신도 와 있으니까 오라고 해서 가니까, C국장, 이완영, 저희 편집국장, 편집부 기자가 있더라고요. 그 자리에서 이완영이 대뜸 한겨레 기자 누구 소개해 줄 테니까 만나봐 이렇게 얘기했어요. 제가 화가 나서 빤히 쳐다보면서 싫다고 그랬더니, C국장이랑 편집국장이랑 웃으면서 만나봐~ 사귀어봐~ 해서, 화가나서 저는 나왔죠.

 

코: 당시에 그 사건 인지하고 있었던 건 다음 날 만난 편집부장 한 분이고, 나머지 기자들은 몰랐던 건가요?

 

A: 나중에 알았지만 몰었더라구요. 다른 선배도 출입처 변경을 왜 해야하는지 물어서 제가 화가 나기도 했구요. 선배들한테 한 번도 그 사건 몰랐느냐, 선배들이 그렇게 이야기하면 되느냐고 문제를 제기하진 않았어요. 그것 때문에 오히려 적극적으로 문제를 처리해주지 않는지 좀 더 따져 묻지 않은 스스로를 많이 자책했죠. 사실 저 자신에 대한 원망이 좀 컸었죠 그것 때문에.



소리없이 파괴적으로 찾아온다


tunnel-835461_960_720.jpg


코: 혹시 당시 이완영 의원 명함 같은 거 가지고 있으신가요?

 

A: 명함은 받았는데, 서울에 있다가 귀농하면서 거의 다 버리고 왔던 것 같아요.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요.

 

코: 그 이후에 한국노총으로 출입처를 변경하시고 기자를 쭉 하신 건가요?

 

A: 네 99년도에 결혼하고 임신하고 이러면서 그만뒀구요. 2001년도에 다른 주간지에 입사했죠. 거기 좀 있다가 2006년도에 귀농을 했고.

 

코: 사건을 가족이나 주변 분들에게 말씀하셨나요?

 

A: 남편하고는 남편 사귀고서는 바로 이야기를 했었죠. 97년도 말쯤에 만난 거 같으니까 그쯤에.

 

코: 96년도면 상담받거나 치료받을 곳도 없었겠네요.

 

A: 그 당시에는 힘들고 우울한 건 있었지만, 그게 그런 것(사건)과 같이 연결된 거라고 생각 못 했어요. 계속 바쁘게 취재하다 보니까 뭐 개인적인 문제로 신경 쓸 여력이 없었어요.

 

이후에 귀농하고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까 과거에 집중하면서 그런 걸 느꼈던 거 같아요. 내 생활이 왜 이렇게 우울하고 기쁘지 않은지 고민하면서요. 과거에 대한 회한들? 내가 그 당시에 왜 조금 더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을까에 대한… 그런 것들이 굉장히 컸었어요.

 

나중에 찾아봤더니 성폭력 후유증이 나중에 불시에 찾아온다는 얘기도 있더라구요. 그래서 공소시효가 10년인데 그런 것도 없애야 한다 그런 얘기도 있고. 아 이게 나한테 그 성폭력 후유증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굉장히 무기력하고, 스스로 잘, 인정 자존감도 좀 많이 낮아지면서… 그거에 대한 생각이 시도 때도 없이 불쑥불쑥 찾아오고. 하루에도 몇십 번씩 내가 그 생각을 하겠다고 해서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그 순간 그냥 하고 있는 거에요, 이렇게 정신을 차려보면. 하여튼 수십번도 하루에 수십번도 갑자기 찾아와서 다른 것들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고 할 수가 없었어요. 이런 트라우마에 많이 시달렸어요.

 

코: 사건이 없었으면 기자 일을 조금 더 오래 하셨을 수도 있었겠네요.

 

A: 전 기자 생활 아주 좋아해요, 굉장히 재밌어 하구요. 사람들 만나는것도 좋아하구요.


코: 이완영 의원이 2012년도에 초선으로 당선됐는데, 출마한다는 걸 언제 아셨나요?

 

A: 2006년도에 시골 내려와서 지내다가 인터넷으로 신문 검색하다가 그 사실을 알게 됐죠. 고령 쪽에 이완영이 나온다고. 우연히 알게 된 거예요.

 

코: 그게 12년도겠네요.

 

A: 예 2012년도에. 선거에 나간다는 걸 알게 됐을 땐 선거 막바지였어요. 검색을 해보니 대구청에 있을 때 여직원 성추행 건이 제기돼서 경찰까지 넘어갔더라구요. 그 당시 통진당 후보가 이 문제를 계속적으로 제기했었어요. 그쪽에 연락해서 제 사건은 너무 오래됐으니 대구청 여직원을 찾을 수 있으면 제가 설득해서 같이 기자회견을 하겠다고 했는데, 못 찾겠다고 연락이 왔어요. 경찰에서는 무혐의로 결론 내렸고.

 

인: 당시에 낙선운동은 어떻게 하셨나요?

 

A: 공인이 되는 것과 사인으로 남는 건 완전히 다른 거잖아요. 적어도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알려야겠다라는생각을 하고 당시 노동당 당원이었던 친구에게 얘기해서 노동당 여성위원회와 전화 상담을 했었어요. 그런데 그쪽에서도 제 사건만으로 기자회견을 하기에는 위험부담이 크다고 했고 선거 막바지이기도 해서 더이상 진행을 못 했어요.

 

코: 그럼 2016년 선거 때는 어떤 방향으로 낙선운동을 하셨나요?

 

A: 다시 출마한다는 얘기를 듣고 이번에는 정말 안 되겠다 싶어서 하다못해 피케팅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여성의 전화랑 민변이랑 법률 상담도 받고, 새누리당 공천 위원들과 청와대 신문고에 이완영에 대해 제보했었죠. 이미 공소시효가 지났기 때문에 법률적으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거든요. 차라리 저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면 저에게도 타격이 있겠지만 법적공방을 하겠다고 끝까지 주장을 했었죠. 그래서 대학원을 휴학하겠다고 교수님께도 말씀 드렸구요.


그런데 한 지인이 박근혜 정부에서 이완영이 노동부 장관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하셨어요. 노동부 장관이 된다면 인사청문회를 거쳐야 하는데, 인사청문회는 선거 국면보다 훨씬 집중도가 높을 것 같아서 제가 문제를 제기하기에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계획을 접고 다시 학교로 돌아가 공부를 마쳤죠. 저는 인사청문회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요즘 여러 사건이 터지면서 이슈가 됐기 때문에 차라리 지금이 더 좋은 때라고 생각했어요. 저에게는 상처의 치유 과정이기도 하고, 국회의원은 민주주의의 골간이기 때문에 이건 개인을 넘어선 문제라는 두 가지 판단이 있었기 때문에 문제를 제기하게 된 거예요.



21년, 선명한 기억

 

코: 최근에 국조특위 보시면서 많이 힘드셨을 거 같아요.

 

A: 저는 트라우마 때문에 지금도 그 사람이 TV에 나오면 얼굴 똑바로 잘 못 봐요. 이번 미국 대선에서 70대 할머니가 비행기 안에서 트럼프에게 성추행당했던, 그 36년 전 일을 이야기하잖아요. 남들은 별거 아닌 사고 정도로 생각할 수 있는 문제인데 당사자에겐 씻을 수 없는 거더라구요.


그런 일의 피해자가 되면 사건을 객관적으로 보고 싶어도 볼 수 없고, 내가 원하지 않는데도 그 사건 때문에 다른 일을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그런 상황이 와요. 개인의 생활을 완전히 피폐하게 만드는 범죄에요. 저도 예전엔 단순한 사고 정도로 생각하면 되지 않냐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제가 막상 당해보니까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던 그런 거더라구요. 그런 거였더라구요, 성폭력이라는 게.


머리가 하얀 할머니도 36년이 지난 일을 저렇게까지 기억하면서 이야기를 하는데 제가 지금 말을 못하면 제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스스로에 대한 무기력과 무능감, 자책감 때문에 평생을 어떻게 살 수 있을지 무서웠어요, 실은.


그래서 이런 과정은 저 자신을 위한 치유의 과정이에요. 이 과정을 겪지 않으면 저는 남은 삶이 좀 힘들 거 같아요. 그래서 역설적이지만 저는 기쁘게 시작했어요.


첫 아이를 임신해서 출산일이 다가올 때, 다가올 고통이 너무 무섭거든요. 그때 산모교실 선생님이 고통이 커진다는 건 그만큼 예쁜 아이를 볼 시간이 빠르게 다가오는 거라고 하셨어요. 그것과 마찬가지로 아프지만 이 과정을 끝내야 상처가 회복될 테니까 오히려 기쁘게 생각하고 있어요.

 

인: 지금은 이완영 의원이 굉장히 핫하기 때문에 A씨에게는 문제를 제기하기 좋은 기회일 텐데 앞으로 이게 잘 마무리되지 않는다면 이후에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A: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인: 만약 다음 선거에 또 나온다고 하면 다시 낙선운동을 할 생각이신 건가요?

 

A: 아마도 그럴 것 같은데요. 지금 상황에서 제가 가장 바라는 건 그 대구청 여직원처럼 다른 피해자들이 함께 밝혀주는 거예요.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이완영이 노동부 중앙청사에 있을 때도 다른 성희롱 문제가 하나 더 있었고, 그것을 계기로 대구청장으로 갔다는 소문도 들었어요.

 

코: 대구청장으로 발령받는 것이 일종의 좌천인가요?

 

A: 3급이면 어차피 지방에 한 바퀴 도는게 관려니까 좌천이라고까지 규정할 순 없지요. 하지만 그런 일이 사실이라면, 저 말고 다른 두 명의 피해자가 더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거죠.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피해자분들도 함께 그 일을 밝혀서 이완영이 부도덕한 사람이고 국민을 대표하는 입법기구가 될 수는 없다는 걸 보여줬으면 해요.


그래서 저는 그분들이 용기를 내셨으면 좋겠어요, 다른 것을 위한 용기가 아니라 스스로를 위한 용기에요. 그분들도 저 못지않은 트라우마를 겪고 있을 텐데 아까 말씀드렸듯이 치유의 과정이 없으면, 생명이 다할 때까지 그 기억을 벗어날 수가 없거든요. 옳지 않은 일에 대해 자기가 맞서고, 그 일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쳤던 기억이 치유의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지금은 좀 힘들지 모르겠지만 자기의 긴 인생을 보면 말하지 않는 것보다 말을 하는 것이 더 홀가분하고 편할 수 있다는 거죠.


인: 조심스러운 질문이지만, 그때는 왜 편집부장님 말고 다른 선배들에게 더 알리지 않으신 건가요?

 

A: 제 입장에서는 편집부장에게 이미 얘기를 했기 때문에 국장에게 따로 보고를 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못 느꼈어요. 그 이야기를 굳이 힘들게 다시 하고 싶지도 않았구요.

 

제가 가장 두려운 건 그냥 이 사건 하나로 마무리되는 거예요. 이완영 의원은 자기가 정말 안 했다면 법적으로 대응하겠다 바로 나섰을텐데 지금 아무런 대응이 없잖아요. 잠잠해지기를 기다리는 거죠. 제2의, 제3의 피해 여성이 나오지 않는다면 이 사건은 며칠 있으면 사그라들겠죠. 새누리당에서 이완영을 제명 조치한다고 하더라도 국회의원 신분은 그대로 유지가 되는 거잖아요. 그럼 무소속으로 있다가 나중에 다시 나올 수도 있는 거죠. 그 사람은 그렇게 재기하려고 하겠죠. 그렇게 되는 게 제가 가장 원하지 않는 결과일 텐데, 지금 상황에선 제가 어떻게 할 수 가 없네요.

 

코: 사건 당시 술자리를 함께했던 B사무관은 CBS노컷뉴스와의 통화에서 A씨의 이름은 익숙하지만 사건에 관해서는 오래되어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것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A: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죠. 20년 전 일인데.

 

인: 당시에는 대답을 회피했다고 하셨잖아요.

 

A: 아예 이야기를 안 했어요.

 

인: 조금이라도 기억이 있다면 그날 헤어질 때의 상황을 얘기했을 텐데, 아예 회피한다는 건 사건에 대해서는 모르더라도 둘만 남게 되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는 의미로 보이는데요.

 

A: 정확하게는 모르겠어요.

 

인: 그 당시 이완영 서기관과 B사무관의 관계는 어땠나요? 상하관계가 잘 와 닿지 않는데 어느 정도의 권력관계가 있는 관계인가요?

 

A: 서기관 밑이 사무관이죠. 4급이 서기관, 5급이 사무관.

 

코: 제보 이후에 여러 언론에서 기사가 나갔는데, 이완영 의원 측에서는 “사실무근이다” 이렇게 답했습니다.

 

A: 당연히 “사실무근” 이라고 말을 하겠죠. 오래됐으니까 기억이 안 난다라고 얘기를 할 거예요. 근데 제 머리가 기억을 하고 있으니까요. 그건 엄연한 사실인 거고.

 

인: 덧붙여서 “정치적 의도”가 있는 것 같다는 말도 했습니다.

 

A: 정치적 의도 있죠. 정치적 의도가 없는 사람이 오히려 바보 아니에요? 20년 동안 그런 경험 속에서 살았는데.




line.jpg



 

인터뷰를 통해 A씨는 20년 전 성폭력 피해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의 자질에 대한 의혹 제기이자, 한 개인의 삶에 20년간 지대한 영향을 끼친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과정이라고 밝혔다.

 


사건이 보도되기 직전 아이들에게 이 사건을 알리고 동의를 구한 A씨는 딴지와의 인터뷰뿐 아니라 다른 언론의 취재 요청에도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중이며, 곧 여성단체들과 협의해 이완영 의원의 사퇴를 촉구하는 기자회견도 고려중이다.



n1.JPG

출처 - <노컷뉴스>

 


10년이라는 공소시효와 무관하게 찾아온 트라우마를 치유하기 위해 A씨는 고통이 동반된 치유 과정을 시작하고 있다. 치유 과정의 시작점에 선 A씨는 소문으로 그친, 혹은 아직 드러나지 않았을지 모를 성폭력 피해자들이 함께 용기 내주기를 바란다는 말을 전했다.

 

딴지는 A씨과 같이 용기를 내려는 누군가의 제보를 기다린다.





딴지일보 인지니어스, cocoa


Profil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