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이미 취재 현장을 떠난 지 몇 년이 흘렀고 현장의 거친 숨결보다는 계산기와 컴퓨터 자판 두들기는 소리에 익숙한지 오래라, 새삼스레 ‘취재 윤리’라는 단어에 신경이 갈 이유는 없으나 정유라 체포 과정에서 제기된 명제를 요모조모 뜯어보다 보니 예전 생각이 나서 끄적이게 됩니다. 

 

“보도를 하기로 했다면 신고하지 말았어야 하고, 신고하기로 했으면 보도하지 말았어야 한다. 그게 프로페셔널리즘을 지키는 대가다.” 이것이 어느 저널리스트가 제기한 취재의 ‘원칙’입니다. “기자는 사건을 보도만 할 뿐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cavin karter.jpg

 


우선 저는 이 원칙을 ‘원칙적으로’ 지지함을 밝혀 둡니다. 일례로 이 유명한 사진, ‘독수리와 소녀’를 두고 “먼저 소녀를 구하지 않고 카메라를 들이댄” 행위를 비도덕적이라고 비난하는 것에 견결하게 반대하거든요. 일단 저널리스트라면, 기자라면, PD라면 그리고 아프리카의 비극을 취재하는 임무를 맡았다면 일단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레코드 버튼을 쥐는 게 맞습니다. 그렇게 해서 아프리카의 비극을 세계에 알리고 대책을 세우게 하는 게 본연의 임무기 때문입니다. 

 

이 사진을 찍었던 케빈 카터는 퓰리처상을 받았지만, 사람들의 비난과 양심의 가책을 못이겨 자살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케빈 카터가 뜻하지 않은 비판에 괴로워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가 '양심의 가책'으로 자살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의 유서는 이러합니다. 

 

"절망적이다. 전화가 끊어졌다... 집세도 없고... 양육비... 빚 갚을 돈...!! 돈이 없다... 나는 살육과 시체들과 분노와 고통에 쫓기고 있다. 굶주리거나 상처를 입은 아이들, 권총을 마구 쏘는 미친 사람, 경찰, 살인자, 처형자 등의 환상을 본다. 내가 운이 좋다면 켄의 곁으로 가고 싶다.” 

 

그를 정녕 괴롭혔던 인간의 탐욕이 빚어낸 전쟁이라는 참상 그 자체였습니다. 거기에 더하여 그의 절친한 친구 켄이 남아공의 한 마을에서 벌어진 폭력 현장을 취재하다가 살해당했습니다. 소식을 들은 케빈 역시 그 마을로 자발적으로 뛰어들었습니다. 피비린내 나는 마을 안, 사람이 죽어가는 폭력의 현장에서도 그는 카메라를 놓지 않았을 겁니다.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카메라는 놓지 않았을 겁니다. 그것이 그의 일이었기 때문이죠. 

 

<독수리와 소녀> 사진을 찍은 뒤 카터는 소녀를 구했습니다. 저는 그게 그의 최선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카터가 소녀를 구하지 않고 다른 걸 찍으러 갔다면 저는 그때는 “보도할 뿐 개입하지 않는다.”는 원칙 따위는 집어치우고 카터에게 욕설을 퍼부을 것 같습니다. 

 

소녀를 안아 구호소 안까지 옮기는 일은 기자의 책무는 아닙니다. 하지만 저널리스트 이전에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도 있는 겁니다. 아이가 죽기만을 기다리는 독수리 앞에서 사진을 찍고 쾌재를 부르며 다른 ‘참상’을 찾아 떠나는 ‘프로페셔널’에는 휴머니즘이 깃들 수 없고 휴머니즘 없는 프로페셔널만큼 위험한 건 없으니까요. 단지 사람마다 그를 구현하는 정도와 수준의 차이는 있겠습니다만. 

 


한국일보-정범태.jpg

출처 - <한국일보>

 


1960년 음력 설날 서울역에서는 열차에 빨리 타려고 질주하던 사람들이 넘어지면서 수십 명이 압사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때 마침 귀성 풍경을 찍으려고 대기 중이던 기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엉키고 죽어가는 그 끔찍한 현장에서 그는 침착하게 사진을 찍습니다. 거의 필름 한 롤을 다 찍죠.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어느 정도 사진을 찍었는데 기자는 나 혼자 밖에 없으니 현장만 깨끗이 치우면 그만이다. 사고 수습을 위해 현장에 나온 철도국 직원들에게 사상자들을 빨리 옮기라고 고함을 쳤다. "빨리 병원으로 옮기세요. 여기는 서울역 앞 세브란스 병원으로!" "여기도 빨리! 용산 철도병원으로 가세요!" "서대문 적십자병원, 그리고 서울대병원!!" 마치 사고수습본부에서 나온 요원처럼 소리를 지르며 가끔씩 잽싸게 셔터를 눌러댔다.” 

 

보도하되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의 프로페셔널을 비판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게 기자가 지켜야 할 원칙이고 저널리스트가 열지 말아야 할 판도라의 상자를 고수한 것이며 취재 윤리를 지킨 행동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개입의 범위가 어디까지이며, 저널리즘의 냉정함과 휴머니즘의 따뜻함 사이의 기온 차, 취재자의 의무와 시민으로서의 의무 사이의 간극이 얼마나 큰지는 잘 모르겠으나 하여간 저는 그런 프로페셔널은 지지하기 어렵습니다. 

 

“잘 나갈 때 조심해라.” 는 말처럼 JTBC가 연일 대박을 터뜨리는 지금 그 취재진이 가장 주의를 기울여야 할 때는 맞을 듯합니다. 하지만 이번 정유라 경찰 신고 건에 관한 한 “보도하되 개입하지 말라”는 원칙을 어겼다고 보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정유라는 이미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법적 성인입니다. ‘엄마가 사인하라고 해서 사인하는’ 어린애일 수는 없고, 인터넷이 뻔한 세상에 한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고 자신이 어떤 혐의를 받고 있는지 손바닥 보듯 하고 있으며, 지금껏 한국 기업에서 뜯은 돈으로 호화롭게 생활해 왔던 사람입니다. 이미 적색수배령이 예고돼 있는 사람이었고요. 

 

그를 찾아낸 것은 취재진의 개가입니다. 하지만 취재를 거부하고 은신해 있을 때 기자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신병을 확보할 수 있도록 공권력의 힘을 빌리는 것밖에 없습니다. “보도하되 개입하지 말라”면서 신고를 하려면 취재하지를 말아야 한다는 ‘윤리’는 솔직히 배운 적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JTBC 기자가 함정을 파서 정유라를 끌어들였다거나 정유라를 협박했다면 명백한 취재 윤리의 문제이겠지만, 취재를 거부하는 용의자, 자금 세탁에 그 이름이 쓰였고 외환 도피의 혐의도 있으며 그 외 중대 범죄의 혐의자 내지 참고인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이를 자신의 ‘취재’를 위해 방치했다면 그것도 아주 엄중한 ‘취재 윤리’ 위반이 되지 않겠습니까. 아니할 말로 정유라가 도망가서 더 깊숙이 숨어버렸다면 그를 찾기 위해 들어가는 시간과 노력의 낭비는 누가 책임져야 하겠습니까. 

 

 

jtbc-2.PNG

출처 - <JTBC>

 


물론 정유라가 잡혀가는 극적인 모습을 잡기 위해 신고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해가 갑니다. 당연한 욕심이지요. 특종 앞의 저널리스트이란 닭고기를 앞에 둔 열흘 굶은 사자보다 더 맹렬한 법입니다. 유감스러울 수 있지만, 그 욕망이야말로 프로페셔널의 원천입니다. 그 과정에 불법이 없다면, 인도주의에 어긋남이 없다면 저는 그 프로페셔널을 지지합니다. 

 

단지 그 시행 와중에 지나침이 없기를 바랄 뿐입니다. 오히려 JTBC의 취재 윤리는 언젠가 경향신문의 특종을 도둑질한 장물을 사용했을 때, 그때 더 폭풍같이 비난받았어야지요. 이번은 아닌 듯합니다.

 


 

 


이전 산하칼럼은 이곳에서 모두 볼 수 있습니다






산하

 

편집: 딴지일보 인지니어스

Profile
딴지일보 공식 계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