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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진입니다 추천4 비추천0






#문단_내_성폭력 해시태그와 박범신 작가의 성희롱 사건으로 발끈하는 마음에 패러디문학을 시도해 본 은규가 벌써 절반에 접어들었습니다. 이후 박범신 작가의 인터뷰에서는 진정한 반성의 빛이 느껴지지 않아서 아쉬웠습니다. 잘못을 인정하고 고치는 호기로운 모습도 ‘어르신’들만이 할 수 있는 멋진 일인데 말이죠.


#문단_내_성폭력 해시태그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고 지도선생인 시인으로부터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모임 ‘탈선’도 계속해서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언론이 흥미를 잃고 잠시 잠잠해지자 가해지목인들은 법적 방도를 포함한 위협을 시도했고, 그 와중에 오랫동안 희생받아온 윤미경(가명)님이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그를 구해낸 것은 가족이나 친구가 아니라 또다른 문단 내 성폭력 희생자였습니다. 마치 오원춘 사건처럼 할 수 없다고, 성의 없게 대하는 경찰들을 재촉해 창문을 깨고 들어가 빈사 상태에 놓인 피해자를 간신히 발견했습니다. 윤미경 님은 며칠간 죽음과 싸우다 간신히 깨어났지만 그와 다른 피해자들의 싸움은 길 것입니다. 자신의 피해 사실을 거울삼아 이렇게 다른 희생자들을 돕고 있던 한 분은 가해지목인 중 하나로부터 고소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성폭력이라는 것은 피해자의 돈과 시간을 무한정 요구하는 종류의 죄입니다. 왜 그것을 요구당하는 것이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인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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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처럼 이십대 초반에 군생활을 한 제 친구 하나는 말했습니다. 자신은 꽤 괜찮은 고참이었다고요. 화장실 같은 곳에 후임들이 몰래 숨어서 과자를 먹는 게 안쓰러워서 내 관물대에 얼마든지 있으니까 내무반에서 내어 놓고 당당하게 먹으라고 했답니다. 후임들은 당연히 사양했고, 제 친구는 극구 그리 하라고, 내 맘이 안 편하다고 권했습니다. 그런 어느 날, 한 성실한 후임이 정말 내무반에서 되냐고 물어 왔다고 합니다. 그 순간 제 친구는 “아 물론이지”하고 대답하면서 속으로 “어쭈 이자식...”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자신이 우리 모두 군인이니 동등하게 내무반에서 간식 정도 먹자고 생각하고 그러자고 권한 것도 진심이었는데 정말로 쫄병이 당당하게 간식을 까먹는 순간 이 녀석이 ‘기어오른다’는 생각이 철렁, 하고 들었다는거였습니다. 최근의 전세계적 페미니즘의 움직임(캐나다 총리 다 아시죠?)을 보며 그는 그 내무반에서의 광경을 생각했다고 합니다. 자신을 포함해서 페미니즘에 찬동하고 페미니스트에 호의적인 남성들이 사실은 내무반에서의 자기 모습과 비슷한 게 아닐까. 겉으로는 평등하자, 라고 하면서 정말 자기 자리까지 치고 올라오면 ‘어, 기어오르네’ 하는 생각이 드는 게 아닌지 많이 반성했다고 했습니다. 이 짧은 경험은 숙고해볼 가치가 있는 듯합니다. 그러면 은규 5편도 읽어주세요. 러브씬은 몇 화에 나올까요? :)



*                *                *



은규 5 - 공인중개사 A의 이야기


한은규는 제 주머니에서 언뜻 보아도 낡은 폰을 꺼내 이요란 시인이 남긴 핸드폰을 내 손에서 집어가 액정 크기를 비교해 보고 있었다. 화면에 잠금설정이 되어 있고 그 번호는 나밖에 알지 못하므로 한은규는 그저 핸드폰의 외피만을 바라보았다. “우와, 삼성이 좋긴 좋아요, 아이폰 좋다는 애들도 있는데 저는 배터리 충전 안 되는 게 싫어서. 그리고 애플빠들 어쩐지 재수없어요. 할무니 앞에서 그런 말 하다가 혼나긴 했는데...” 그는 마치 소녀처럼 배시시 웃으며 핸드폰을 돌려주었다. 흠집 하나 없이 정갈한 핸드폰이었다. 펜이든, 컴퓨터든, 부엌 살림이든 옷가지든 단정하고 알차게 쓰는 시인의 성품이 그대로 묻어났다. “저는요, 폰도 갤럭시 쓰면 뭔가 성공한 사업가 된 기분이 들 것 같거든요. 저도 형님처럼 건물 경영하고 그러면 꼭 갤럭시 금장으로 된 거 폼나게 쓸 거예요. 형님은 어떤 거 쓰세요?” 평범한 나의 엘지 폰을 본 한은규는 실망한 듯하더니 호주머니에서 무언가를 신나게 꺼냈다. “이거 아세요, 이거? 최근 잇템! 재벌립밤! 같은 반 여자애가 향이 없어서 싫다고 줬는데 전 무향이 더 좋더라구요. 더 고급지잖아요. 할무니는 잇템, 이런 말 써도 꾸짖으셨죠.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는 제 나라 말이 있는데 괜한 외국말로 어느 나라 말도 아닌 나랏말을 만든다고 말예요.”


마치 입맞춤처럼, 어느 재벌이 청문회에서 마른 입술을 적시기 위해 발랐다는 립밤을 여린 입술 가득 촉촉하게 바른 한은규는 입을 다물었고, 그 눈빛은 어딘가 처연해 보였다. 아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과 이요란 시인이 관계가 없게끔 해달라고 마른 성을 내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희대의 시인의 노년의 사랑, 어쩌고 마치 호스트처럼 신문과 텔레비전에 오르내리는 것은 겨우 스무 살 나이의 소년, 혹 청년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진저리를 내는 것도 당연하다. 이요란 시인은 자신의 사후 1년이 지나면 이 노트를 공개해 달라고 말했었다. 그러면 저 한은규는 얼마나 놀랄까. 지금 선생의 집이 있는 쪽 담벼락을 어째 아련하게 바라보고 있는 저 유리구슬 같은, 천치 같기도 하고 영악한 것도 같은 저 눈빛은 무엇을 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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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얼마 전 이 핸드폰을 나에게 건네 주면서 이요란 시인은 평소답지 않게 깔깔깔, 하고 웃었다. “왜 생전에 조금이라도 행세했네. 하는 문인들이 죽으면 꼭 그이가 살던 집을 무슨무슨 기념관으로 꾸미고 그 사람 이름으로 상도 주지 않소? 아마 이걸 보면 아무도 그런 짓 할 생각은 꿈에도 못 할거요. 내가 바라는 게 바로 그거예요. 내 집입네 생활의 냄새입네 작업실입네 여기서 시가 태어났네 어쩌네 하는 구경을 절대로 시켜 주고 싶지 않아. 내 이름을 딴 상 따위도 마찬가지요. 내 시는 오로지 나만의 것이야. 모든 시인의 시는 저만큼의 것이지. 그런데 다른 시인의 이름을 딴 레테르를 그 시인의 자신만의 고유한 시에 붙이는 것은 아주 오만하고 실례되는 행동이 아닐까? 아마 이 노트가 다 해결해 줄 거예요. 아이, 참 우습구려. 호호호...”


뭐가 그리 재미있다고 웃어댔을까. 그때는 덩달아 어색하게 따라 웃었지만 그 노트의 내용을 다 알고 있는 지금의 나로서는 전혀 우습지가 않았다. 이 내용을 언론에까지 공개하는 건 어렵지 않을까. 내가 고작 이요란 시인의 집을 중개해 주고 내 몇 안 되는 특기 중 하나인 커피 콩을 볶아 일주일에 두세 번씩 걸음하며 잠깐 인사하는 정도임에도 불구하고 시인의 유언집행자가 되었다는 것은 문학기자들 사이에 순식간에 퍼졌다. 부동산 전화는 불이 날 정도였고 손님에게 집을 보여주고 있는데 부동산으로 쳐들어온 기자들도 부지기수였다. 이유는 단 한, 이요란이 생전에 남긴 기록이 없느냐는 거였다. 내가 그들이었다 하더라도 미공개 일기나 유작 같은 것은 유언집행인에게 남기는 것이 당연한 수순 같았지만, 이요란은 일체 그런 것을 남기지 않았다. 요란한 인생을 살았지만, 그의 마지막은 더 이상 그럴 수 없을 만큼 고적했다. 원체 마지막 교정쇄가 나온 다음에도 열 번 스무 번 노안을 이겨내고 돋보기로 검은 점을 태우는 장난을 치는 아이처럼 원고를 보는 양반이라 아마 유고 같은 건 없을 거예요, 하고 출판사 직원이 혹시 그런 거 없냐고 물었다가 내가 대답도 하기 전에 자답했었다. 그렇다, 시인이 남긴 것은 정말로 없다. 내가 손에 들고 있는 이 기록만 빼고.


내가 상대해본 언론은 <벼룩시장> 정도가 전부인데, 유수 일간지들의 문화팀에서 불티나게 전화를 걸어 시인이 남긴 것이 없느냐고 물을 때마다 나는 둘러대기에 바빴다. 부동산이라는 직업은 아무래도 팔 때와 살 때 약간의 거짓말을 보태기 마련이므로 평소 부끄럽게 생각했던 그런 내 업무의 특성이 꽤 도움이 되어 주었다. 그러나 시인은 누구에게도 공개하지 말라는 말은 않았고 - 사실 그랬더라면 일이 훨씬 편했겠지만 - 그 내용을 한은규에게 자신의 1주기에 알리라고 작은 글씨로 덧붙였다. 한은규는 어떻게 할까. 얄팍한 듯도 하고, 천박한 듯도 하고, 껄렁한 듯도 하고 얌전한 듯도 한 아직 군 미필의 저 남자 아이는 대체 어떤 아이일까. 이요란의 기록을 읽지 않았더라면 PC방을 몰려다니거나 집에서 ‘롤’이나 ‘오버워치’에서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전과를 거두는 평범한 소년으로 보이건만 이 기록을 읽은 후의 나는 결코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핸드폰의 사진 갤러리에는 시인의 글씨가 분명한 메모가 휘갈겨 적혀 있었다. 얼마나 날려 썼는지 그 격정이 물씬 느껴졌다. 나의 환란, 나의 혼돈, 나의 지옥, 나의 향락, 나의 천사, 나의 황야, 나의 은규...


그때 한은규가 고개를 반짝 들더니 뭔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방금 황야, 라는 말을 떠올려서 그런지 그의 입에서 황사가 뿜어져 나와 조그마한 부동산을 가득 채우는 느낌이었다.


“할무니, 글 같은 거 갖고 계시죠?”


거짓말을 해야 할지, 참말을 해야 할지 몰라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저도 노트를 갖고 있어요. 할무니 건... 갤노트죠? 제 건... 그냥 노트예요. 몰스킨이라고 아시죠? 그 왜 헤밍웨이가 썼다는.”


“헤밍웨이?”


“헤밍웨이도 모르세요. 그 유명한 어부 있잖아요. 어디더라, 플로리다에서 큰 물고기를 잡아서 쿠바로 돌아가는데 상어들이 다 뜯어먹어서 결국 뼈만 가져갔다는 존경받는 어부 말이에요. 그 어부도 썼던 노트래요. 고기 잡는 사람이 노트는 왜 썼는지 모르겠어요.”


아무래도 이요란과 서지숙이 들려준 것들을 제 머릿속에서 함부로 뒤섞고 있는 것 같았지만 나는 굳이 헤밍웨이와 <노인과 바다>를 구분해 주지 않았다. 한은규도 제 나름의 추억을 간직할 자격이 있다. 그는 크로스백에서 손때가 반질반질하게 묻은 낙타색 표지의 노트를 꺼냈다.


“이건... 지숙 쌤... 그러니까 서지숙 선생님이 남긴 거예요.”


아까 립밤을 반질반질하게 듬뿍 얹어 놓았는데도 한은규의 입술은 다시 바짝 말라 있었다.


“그 노트를 보여 주시면... 이 노트를 드릴게요.”


한은규는 응접 탁자에 탁, 하고 몰스킨 노트를 표지 반대쪽으로 올려놓았다. 나의 환란, 나의 혼돈, 나의 지옥, 나의 향락, 나의 천사, 나의 황야, 나의 은규... 그 구절을 나는 기어이 보여주어야만 할까, 저 소년에게.


“먼저, 그 노트를 보여 줘요 그럼. 어차피 선생님의 기록을 내가 은규씨에게 보여주지 않을 이유도 없지만, 서지숙 선생님이 기록을 남겼다는 건 금시초문이라서.”


“저도 이걸 보여 드려야 하는지 아닌지 계속 고민했어요. 근데...”


한은규는 잇자국이 날 만큼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건, 솔직히, 제 이야기가 들어 있지만, 그냥 서지숙 누나, 아니 쌤 거예요. 제가 가지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요. 그리고... 할무니 이야기 보고 싶어요.”


“아까는 어떤 관계도 더 이상 갖고 싶지 않다고 했으면서...”


말끝을 흐리는 내 물음에 한은규는 고개를 숙였다.


“세상 일이, 그렇게 말로 다, 설명되세요?”


스무 살이나 됐을까. 저 아이의 말이 다 맞다. 다 될 것 같았단 부동산 계약이 엎어진 것도 부지기수였고 그 중 대다수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유였다.


“그럼, 동시에 보기로 하면 어떨까. 창고로 쓰는 쪽방이 있는데, 의자가 하나 있으니까 주스 가지고 가서 편하게 봐요.”


한은규는 몹시 그러기를 바랐던 듯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의 갤노트를 보는 순간 혼자이고 싶었던 것 같았다. 나는 5핀 충전기를 건넨 다음 잠금화면의 비밀번호를 풀어 주었다.


“꽤 기니까, 중간에 배터리 떨어지면, 이걸로.”


한은규는 레자 소파에 크로스백을 내려놓은 다음 떨리는 손으로 내게서 물건들을 받아간 후 창고 문을 닫았다. 그리 큰 소리가 나게 닫은 것도 아닌데 내게는 마치 지진이 일어나 땅이 우그러지는 듯 거대하게 울렸다. 저 아이가 노트를 보고 나면 어떤 반응을 할까. 한때 문학청년이었던, 하지만 지금 부동산 총각 사장일 뿐인 나로서는 짐작도 할 수 없다. 전 복덕방 주인일 뿐입니다, 이 말은 이요란의 마지막 기록이 있는지 집요하게 물어오는 방송사나 주요 일간지 관계자들에게 선생의 갤노트를 숨기는데 특효였다. 내가 한때 문청이었건 말건 복덕방이나 하는 사람이 무엇을 알겠냐고 의뭉을 떨면 그들은 곧 김이 새는 듯 전화를 끊었다. 내가 문청이었던 거야 그들이 모를 테고, 이요란이 누구를 열애했는지도 그들이 모를 테다. 나는 그들이 보기에 오로지 보증금 천이면 월세 얼마, 이천이면 얼마 이런 거나 아는 사람일 테니 이런 때에 편했다. 그리고 저 노트를 봐야 하는 사람이 드디어 저 골방에서 보고 있다. 이요란처럼 단정하진 않지만 중저가라도 산뜻하게 쓰인다며 늘 가지고 다니던 라미(Lamy)라는 브랜드의 만년필로 써내려간 서지숙의 글씨는 깔끔하면서도 경쾌했다. 본래 택한 전공대로 간호사가 되어 차트를 썼다면 무척 흘륭한 차트를 만들었을 것 같았다. 환자 상태 양호, xx약 투여 요망, 뭐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노트 첫 장을 열자마자 서지숙은 자신의 생명에 대해, 위독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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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이 위독하다.

선생님은 틀림없이 나를 죽일 것이다.

나의 전부, 나의 여신, 나의 어머니, 나의 여왕, 그 선생님이.



나는 다시 숨이 훅 하고 막혔다. 이 여자들은 얼마나 나를 놀라게 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일까.







PS

저의 첫 소설이 출간되었습니다. <말해봐 나한테 왜 그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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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정국 때문에 출판시장은 더 망해간답니다. 문화계를 다 쑤셔놓은 최순실도 딱 하나, 출판계 만은 건드리지 않았지요? 왜 그랬게요? 아 눈에 땀이 날라 그래... 광화문 가셨다가 서점에 들르시게 된다면, 관심 가져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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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진입니다


편집 : 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