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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0. 07. 월요일

편집부 홀짝







 








여기, 한 사람의 행적이 있다.

 

-제국의 식민 통치를 받고 있는 나라에서 비교적 지배 계급에 속하는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청년 시절, 제국의 본토로 건너가 공부하면서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자국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제국의 통치자인 왕의 즉위 기념 60주년 축제의 준비위원을 맡았으며, 제국의 국가(國歌)를 자신은 물론 아들에게도 가르쳐 부르게 했다.


-그는 제국의 식민 통치가 피치자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 믿기도 했으며, 식민 통치 하의 자국민들은 제국의 신민으로서의 의무와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제국이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자국의 청년들에게 전쟁에 참여하여 제국과 함께 싸워줄 것을 호소했다. 심지어 모병 운동의 선두에 나서 몸을 사리지 않고 전국을 누볐다.


-1929, 제국의 총독이 탄 기차가 폭파되자 그는 총독이 신의 가호로 살아난 것에 감사를 드리는 한 편, 기차를 폭파시킨 이들을 착각에 빠진 애국자이며 폭도라고 비난했다. 또한 국민회의를 통하여 이 폭도들을 겁 많고 비겁한 무리들로 규정하는 결의를 채택하도록 하였다.


 

이 글의 제목이 ‘<찌질한 위인전>-간디편이라는 것을 독자 여러분이 알고 있는 이상, 상기의 인물이 누구인지 궁금증을 자아내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는 설마 간디가 저랬단 말이야?’라는 의구심을 품었을 수도 있겠다. 이미 간디의 이러한 행적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 또한 위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에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가 처음 간디를 접하게 될 때 각인되는 이미지가 위와 같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찌질한 위인전>의 세 번째 인물. ‘마하트마 간디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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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의 간디

 

간디는 <찌질한 위인전>이 처음으로 다루는 위인이다. 물론 이 전에 소개했던 김수영이나 반 고흐가 위인이 아니었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일반적으로 대중들이 생각하는 위인의 이미지를 고려해 봤을 때, 확실히 김수영과 반 고흐 보다는 간디 쪽이 훨씬 위인스럽다’.(필자만 해도 어렸을 적 집에 김수영이나 반 고흐의 위인전은 없었지만 간디의 위인전은 있었다) 그런 이유로, 아마도 이미 많은 독자들은 간디에 대해 어느 정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때문에 지금부터 대략적으로 설명할 간디에 대한 소개 앞에는 독자 여러분도 잘 알고 있다시피라는 전제를 붙여야 할 지도 모르겠다.


간디의 본명은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로 우리에게는 마하트마 간디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마하트마(Mahatma)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으로, 간디는 인도인에게 있어 그 자체로 위대한 영혼이자 위대한 지도자였다. 그리고 우리들에게는 비폭력 무저항 정신이나 물레를 돌리는 모습등으로 흔히 기억된다.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간디는 위대한 정치 지도자이면서 한 편으로는 '성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철저한 금욕 생활(이에 대해서도 나중에 살펴 보겠지만)과 채식주의로 대표되는 그의 고행에 가까운 삶의 행적은 수도자의 그것과 동일시되며, 그 자신이 힌두교도이면서 카스트 제도 내의 바이샤 계급에 속했으면서도 카스트 내에 속하지도 못한 불가촉천민과 동고동락하며 그들의 인권을 위한 활동을 펼쳤다는 것이 그러한 평가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간디의 집안은 카스트 제도 내에서 바이샤에 속했는데, 바이샤는 브라만이나 크샤트리아와는 달리 피지배계급에 속하지만 그의 집안이 대대로 인도 제국 내의 토호국이라 할 수 있는 번왕국 중의 한 곳에서 지금의 국무총리와 같은 자리를 맡아왔기 때문에 사실상 지배 계급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또한 간디의 집안은 바이샤 가운데서도 일종의 부르주아지라 할 수 있는 상인 계통의 '모드 바니아'였다.(카스트 제도는 크게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로 나뉘지만 같은 카스트 내에도 여러 아(亞) 카스트들이 혼재하는 형태를 보인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글의 서두에 소개한 간디의 행적은, 흔히 알려져 있는 간디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이러한 모습 속에서는 영국 제국의 잔혹한 식민 통치에 비폭력 무저항 정신으로 맞선 마하트마 간디는 찾을 수 없다. 이것만 놓고 보면, 간디는 오히려 우리의 역사 속 친일파 지식인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제국의 신민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주장했다거나, ‘제국의 전쟁에 참여할 것을 자국민 청년들에게 호소하는 모습은 일제 식민 통치 하에서 지식인들이 보였던 가장 치졸한 형태의 친일 부역과 거의 똑같다. 영국 총독의 암살을 기도했던 자국 동포에게 가했던 비난의 모습은 어떠한가. 만약 누군가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를 비겁한 겁쟁이착각에 빠진 애국자라고 비난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위대한 영혼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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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로 충격적이다.


예나 지금이나 인도는 면적의 크기와 인구수 만큼이나 다양한 모습이 혼재하는 곳이다. 다양한 언어와 종교(힌두교만해도 그 분파의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는 물론이거니와 각 지방 저마다의 관습과 역사가 공존하는, 어쩌면 인도는 그 자체로 하나의 카오스의 세계라 할 수도 있다.


간디의 삶의 궤적, 정신과 사상 또한 이러한 인도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나의 일관된 신념과 사상에 따라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나 한 편으로는 그 스스로 수많은 모순된 모습(혹은 적어도 그렇게 보이는)을 보였으며, 그에 따른 적지 않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 때문에 우리가 간디를 그저 위대한 영혼이나 성자로 바라보면서 그를 일종의 신성의 영역에 가두어 놓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하다. 물론 그가 몇 가지 사건에서 보인 태도나 생각만을 놓고 이전까지 우리가 생각해왔던 간디의 모습과 완전히 반대편에 서서 그를 평가하는 것 또한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찌질한 위인전>의 간디편, 오늘 (上)편에서는 영국 제국의 식민 통치 하에서 인도를 이끌었던 간디의 논쟁적 모습과 보수주의자로서의 간디를 이야기 하고자 한다.



간디와 영국 제국


간디가 인도의 정치 지도자로서 활동했던 거의 모든 시기는 영국 제국이 인도를 식민 지배했던 시기와 맞물려 있다. 때문에 인도 정치의 지도자로서 간디가 보인 행보는 사실상 영국의 지배 하에 있던 인도를 그 속박에서 풀려나게 하기 위한 행보와 거의 일치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이 시기의 간디가 택한 노선과 행보는 우리가 알고 있는 독립 운동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결정적인 차이는 간디가 영국 제국을 바라보는 시각에 기인한다. 


간디에게 있어 영국 제국은 일종의 '절대악'과 같은 존재는 아니었던 것 같다. 아니, 오히려 꽤 오랜 시간 동안 그에게 있어 영국은 선의 영역에 보다 가까웠다. 때문에 간디는 본인이 속한 카스트의 원로들이 그를 카스트에서 추방하겠다고 경고했음에도 기어이 영국으로 향하는 유학길에 올랐으며, 서두에 밝힌 바와 같이 영국 국가를 부르는 것에 큰 거부감이 없었음은 물론 귀국 후에도 영국 왕실 행사의 준비위원을 맡기도 했다.


간디가 어떤 이유로 영국 제국에 대한 그와 같은 입장을 견지했는지는 완벽하게 파악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간디가 꿈꾸는 인도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는 그가 보인 몇 가지 모습을 통해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간디는 인도의 완전한 분리 독립 보다는 인도가 영국 제국의 커다란 틀 안에서 다른 영연방 국가들과 동등한 지위를 얻고 자치하기를 바랐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가정을 세워 놓고 보면 간디가 취한 몇 가지 의아스러운 선택과 행동들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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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여왕 시대 英 제국의 영토



간디의 참전, 참전 권유


간디가 영국이 일으켰거나 혹은 가담한 전쟁에 적극적으로 동참한 것은 크게 두 번이다. 처음은 영국이 남아공에서 일으킨 보어 전쟁이다. 보어 전쟁은 아프리카 대륙 내에서 종단 정책을 펼치던 영국 제국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네덜란드계 보어족과 충돌하면서 일어난 것으로 당시 간디는 남아공에서 변호사로서 남아공 내 인도인의 권리 보호를 위해 활동하고 있었다.


보어 전쟁이 일어났을 때 간디가 취한 행동은 다소 충격적이다. 자신이 먼저 인도인들로 부상병들을 실어나르는 부대를 구성할 것을 제의한 것이다. 간디 또한 여기에 참전하여 같은 역할을 맡게 된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간디는 비열한 제국의 전쟁을 지지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영국의 신민으로서 인도인의 권리를 주장해왔던 간디가 같은 이유로 영국 신민으로서의 의무를 다 하고자 했다는 것을 충분히 고려하더라도 비판은 여전히 유효하다. 간디는 빅토리아 여왕이 죽었을 때에도 남아공 더반에 마련된 여왕의 조상에 화환을 바쳤다.


간디는 인도에 귀국한 후 인도인들의 권리를 위해 앞장서서 투쟁하게 된다. 그것은 물론 그가 줄곧 주장했던 '비폭력'을 기반으로 한 투쟁이었다. 1차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영국 또한 이 전쟁에 참전하자, 간디는 또 다시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선택을 한다. 이번에는 이전 보다 더 적극적이었다. 간디는 스스로 앞장서서 인도 전국을 돌며 인도 청년들의 참전을 독려했다. 이러한 간디의 행동은 당시 인도 사회에서도 이해받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미 민중에게 어느 정도 지지를 받고 있었던 상황이었음에도 간디의 이러한 참전 독려는 별 반응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그럼에도 간디는 자신의 몸조차 제대로 보살피지 않고 참전 독려를 계속하다 결국 병에 걸려 발걸음을 멈추게 된다.


간디가 1차세계대전 당시 보였던 이러한 행동은 또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간디는 왜 인도인의 권리를 위한 투쟁을 전개하며 영국 정부와 대립각을 세우다 전쟁이 나자 오히려 영국 제국을 위한 참전 독려에 나서게 되었는가? 간디는 이에 '영국 제국이 전쟁을 방어하지 못하면 인도의 독립도 없다'고 말한다. 또한 제국이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 빠졌을 때 인도인들이 나서 이를 도운다면 인도의 권리를 주장하는 그들의 목소리에 더 큰 힘이 실리는 한 편, 나아가 영국 제국 내에서의 인도의 지위가 다른 영연방 국가와 동등한 수준으로 올라설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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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세계대전 당시 열강의 각축 구도를 의인화한 지도


이를 통해 우리는 간디가 적어도 어느 시점까지는 인도의 독립을 어디까지나 영국 제국 틀 안에서 꿈꾸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간디는 영국 제국의 붕괴를 원하지 않았다. 때문에 영국 총독의 기차가 폭파되었을 때에도 오히려 암살을 시도한 인도인들을 꾸짖기까지 했던 것일 게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이것이 그의 행동에 대한 모든 비판의 여지를 지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간디의 이러한 입장이 인도의 독립을 원하는 모든 사람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도 아닐뿐더러, 이는 그의 비폭력 무저항 정신과도 맞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간디의 비폭력 저항에 대해서는 下편에서 보다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다)



보수주의자 간디


한 편으로 간디는 보수주의자이기도 했다. 당시 인도의 주류 보수는 정통 힌두교 사상에 입각한 것이라 볼 수 있는데, 종교적 측면에서만 볼 때 간디는 정통 힌두교의 교리와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오히려 당시 힌두교리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행동과 주장을 펼쳤다. 힌두교리에 의하면 카스트 제도 내에 속하지도 못한 불가촉천민들은 절대 다른 계급의 사람들과 어울려서는 안 되었다. 신체 접촉은 물론 같은 화장실을 사용하거나 같은 물건을 사용해서도 안 됐다. 


그러나 간디는 이러한 신념에 동의하지 않았다. 간디는 힌두교도임에도 불가촉천민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렸으며 생활 공간까지도 함께 사용했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같은 힌두교인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의 아내조차도 처음에는 간디와 심하게 다툴 정도였다. 간디는 이에 굴하지 않고 본인의 뜻을 보다 적극적으로 사람들에게 알리고 이에 동참할 것을 호소했다. 간디는 불가촉천민을 '신의 자녀'라는 뜻의 '하리잔'으로 불렀으며 하리잔 운동을 통하여 인도의 독립 못지않게 이들의 차별 해소에도 힘을 쏟았다.


이러한 간디의 행동은 보수주의와는 거리가 멀어보인다. 오히려 상당한 진보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간디의 한계는 그가 카스트 제도의 철폐까지는 주장하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인도가 영국 제국의 통치 하에서 자기 목소리를 어느 정도 낼 수 있게 된 상황이 되었을 때였다. 인도는 영국 정부의 승인 하에 선거를 통하여 각 지방의 대표를 의원으로 선출할 수 있게 되었고, 이에 따라 선거구를 나누는 것에 대한 토론과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불가촉천민의 대표들은 자신들이 독립적으로 선거구를 갖기를 강력하게 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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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카스트 제도의 최하계급은 수드라이지만 그 보다도 아래에 불가촉천민이 있다.

이들은 'Outcastes'의 존재,  다시 말해 카스트 내에 속하지도 못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를 극렬하게 반대하고 막아섰던 것이 간디였다. 간디는 만약 그렇게되면 불가촉천민들이 영원히 카스트 제도에서 분리될 것이라며 반대의 이유를 밝혔다. 간디의 의견은 일견 타당해보이기도 하나 이는 어디까지나 카스트 제도의 존속을 가정한 주장에 불과하다. 여지껏 상상할 수도 없는 차별과 모욕을 당해왔던 불가촉천민들에게 카스트 제도는 그저 그러한 비합리적인 대우를 정당화하는 쓰레기일 뿐이다. 그들에게 카스트 제도 안에서의 지위 회복은 이전 보다 조금은 덜한 차별을 의미할 뿐,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은 아무 것도 없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디는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목숨을 건 단식을 감행하기에 이른다. 


간디가 가진 영국 제국을 바라보는 관점, 인도의 독립을 생각하는 방식, 그리고 카스트 제도에 대한 입장을 모두 살펴보면 간디는 기존의 틀 자체를 무너뜨리는 데에는 큰 관심이 없었던 듯하다. 지속되어 온 가치를 고수하는 틀 안에서 억압 받는 사람들의 지위를 회복하는 것 이상의 변화를 그는 원하지 않았다.


이는 영국을 상대로 그가 이끈 비폭력 무저항 운동에서도 잘 드러난다. 영국의 식민 통치 하에서 인도의 민중은 계급과 지위를 막론하고 모두 고통 받고 있었다. 때문에 인도의 모든 민중은 단합하여 간디의 지도에 따라 제국에 맞서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행동할 수 있었다. 인도 대륙 전역을 그림자로 물들인 제국이라는 거대한 구름 장막을 걷어내기 위한 그들의 싸움은 그렇게 끈끈하게 지속되었다.


그러나, 제국이라는 구름 장막을 완전히 걷어내더라도 문제는 남는다. 인도인 내부에 존재하는 소유와 지배 관계는 여전히 남게 되는 것이다. 당시 인도 농민들은 영국에 내는 세금과 함께 지주들에게 바치는 소작료 또한 감당해야 했다. 이는 상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여서, 사실상 영국 정부의 횡포가 완전히 사라진다해도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 글에서 인도의 지주와 자본가를 통칭하여 '부르주아지'라고 부르기로 가정한다면, 인도의 부르주아지에게 있어 이들의 운동은 잠재적 위협이기도 했다. 당장은 공통의 적에 맞서 함께 움직였던 그들이 언제 자신들에게 그 화살을 돌릴지 모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의 비폭력 무저항 노선은 어쩌면 이들에게 궁극적으로 가장 이상적인 것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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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폭력 무저항 운동의 절정, 소금행진에서의 간디


그러한 면에서 볼 때 간디가 영국 정부와의 협상 조건으로 내걸었던 요구는 부르주아지들 입장에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토지세 감면과 소금세 폐지와 같은 것들은 자신들에게 전혀 해롭지 않은 것이었고, 외국 의류에 대한 보호 관세 조건은 오하려 이들에게 매우 유익한 것이었다. 이미 인도인들이 펼치고 있었던 수입품 불매 운동은 원래의 의도와는 상관 없이 인도인 사업가의 배를 불리고 있었다. 이들의 요구 조건에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 소작료 경감이나 노동 조건 개선, 고리대금 해결 같은 것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를 모두 간디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는 것이겠지만 간디의 사유가 여기에까지 미치지 못한 것은 어디까지나 한계였음이 명백하다. 


간디가 청소부 파업을 비판했던 사건 또한 간디가 가진 사유의 한계를 증명한다. 간디는 대부분의 노동자 파업에 찬성했지만 공공의 선에 위배된다고 생각하는 파업에는 그렇지 않았다. 청결을 미덕으로 여겼던 간디에게 청소부들의 파업은 공공의 선에 위배되는 것이었고, 때문에 이들에게 '파업을 할 거면 차라리 그만 두고 다른 일을 하는 것이 옳다'는 주장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청소부는 불가촉천민들이었다. 이들이 가질 수 있는 직업은 극히 제한적이었으며 그들만이 종사했던 청소부 이외에는 다른 대안조차 막막했다. 그러한 이들에게 단지 공공의 선에 위배된다는 이유만으로 파업을 반대하고 퇴직을 권유한 것은 간디의 몰이해의 결과다.



간디의 독립 운동, 보수주의. 그리고 대한민국


영국 제국의 식민 통치를 바라보는 간디의 관점과 그의 행동을 돌이켜 볼 때, 일견 일제 치하의 우리나라 친일인사의 행적과 유사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영국의 존속 없이는 인도의 독립도 없다고 생각했던 '한 때의' 간디의 생각과 살아 생전에 일본이 망하게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고백하는 친일 인사의 해방 후 고백 사이에는 큰 차이점이 없어 보인다. 그리고 더 우려스러운 것은, 이것이 우리나라 친일인사에게 일종의 면죄부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논조로 주장을 펼치는 글을 필자 또한 접한 적이 있으며, 그것과는 별개로 우리 사회에서는 이미 뉴라이트 계열의 사학자들이 일제의 식민 통치 자체를 그들 나름대로 재해석하려는 움직임을 활발하게 벌이고 있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이러한 생각과 주장은 극히 단편적인 것이다. 일제에 부역했던 대다수의 친일 인사들과 간디 사이에는 명백한 차이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간디는 기본적으로 영국 제국에 맞서 인도인의 권리를 신장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언제나 착취 당하고 억압 당하는 사람들의 입장에 서서 보다 효과적인 방법으로 그들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싸웠다. 물론 그 주장이 영국 제국에서의 완전한 분리 독립까지 나아가지 못한 것은 사실이나 간디는 영국 제국조차 '자신들의 편'이라고 생각하는 인사가 아니었다. 때문에 수차례 투옥당한 것은 물론 윈스턴 처칠 같은 영국의 정치가들에게는 '사악한 악마'라는 평가를 듣기까지 한 것이다.


1차세계대전에 인도인들이 참전할 것을 호소했던 행동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간디는 그것이 자신들의 요구에 정당성을 실어주고 주장을 관철시키는 데에 효과적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그러한 '전술적' 행동을 했던 것이지 결코 자신의 명예와 지위, 나아가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다. 물론 그 의도와는 별개로 그러한 행동 자체의 모순과 비판 받아야 할 점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지만 그것이 일제에 부역했던 대다수의 친일 인사들의 그것과 같은 선상에서 평가 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간디는 영국 제국으로부터 어떠한 개인적인 보상이나 혜택을 요구하지도, 받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친일 인사들은 어떠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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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주의자로서의 간디의 면모 또한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보수를 자처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비교하면 이해가 더 빠를지 모르겠다. 보수주의가 무엇인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가치와 제도적 틀을 유지하려는 생각이다. 그리고 그 틀 안에서 기존 가치와 제도 때문에 상처 받고 억압 당하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이를 개선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보수주의자다.


간디는 당시의 인도 사회와 영국 제국의 식민 통치 하에서 기존의 큰 틀을 무너뜨리고자 하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기존 가치와 제도의 피해자와 함께 했다. 비록 카스트 제도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누구 보다 먼저 불가촉천민들의 손을 잡았던 것은 간디였다. 인도의 노동자와 농민들이 그를 라마 신(힌두교의 신 중 하나)의 현신으로까지 추앙하고 그를 지지했던 이유 또한 마찬가지다.


간디는 그가 지키고자 하는 가치를 위해서는 목숨을 건 단식을 감행하기도 했다. 흔히들 말하는 '진짜' 보수주의자의 모습이란 이런 것이다. 그때 그때 때에 따라 신념을 바꾸고, 자신의 이익에 유리한 쪽으로 자세를 고쳐 앉는 사람을 보수주의자라 말할 수는 없다. '상투를 자르느니 차라리 내 목을 자르겠다'라고 외쳤던 개화기 유생들의 모습을 생각해보라.  


마지막으로, 간디는 자신이 지켜야 할 가치에 대해서는 그 누구 보다 앞장섰으면서도 그 자신을 위해서는 어떠한 것도 남기지 않았다. 간디는 부의 축적이라는 개념자체를 스스로에게 허용하지 않았을 뿐만아니라 생전에 그의 가족들에게도 허용하지 않았다. 현재 우리 사회의 '보수'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어떤가?


판단은 독자들께 맡기기로 한다. 다음에 이어질 (下)편에서는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 정신과 간디주의로 명명되는 그의 사상, 그리고 간디 개인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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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발


연재를 시작하면서 밝힌 '연재의 변'에서 가능하면 반드시 매주 월요일 연재를 지키고 싶다고 말해 놓고 불과 한 달 만에 약속을 어기고 말았습니다. 닿지 않는 능력으로 무언가를 계속 해나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절감하고 있는 요즘입니다. 혹시나 제 연재를 기다리신 분이 계시다면 죄송하다는 말씀을 전합니다. 그만큼 더 좋은 글로 인사를 드려야하겠지만 그 또한 자신있게 약속을 드리지 못하니 그저 또 한 번 죄송할 따름입니다. 노력하겠습니다. 관심 가져주심에 거듭 감사드립니다.






편집부 홀짝

트위터 : @holjjak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