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서점에 밀려 몰락하던 군소서점이 살길을 찾는 과정에서 ‘반세계화’라는 명분은 자연스럽게 들리는 것 못지않게 절실한 문제였다. 독서운동은 추상적인 구호로 해결되지 않는다. 자유로운 사상을 중히 여기는 사람이 책을 아끼듯이, 책방이 곁에 없는데 어디서 책을 구할 것인가. 대도시 중심가, 쇼핑센터에 가서 책을 찾는 것과 동네에서 책을 접하는 것은 다르다. 아침 커피를 마시고 신문을 뒤적이며 하루를 시작하듯이, 방과 후나 일을 끝낸 오후에는 서점에 들르는 게 일상이어야 한다.
- 유럽의 책마을을 가다, 정진국 -
12월 마지막 주 월요일. 구근을 심었다. 미처 얼기 전 땅을 삽으로 팠다. 도시출신 40년 아파트 인생은 바깥일이 서툴다.
맥문동이 잔뜩 심어져 있는 화단을 뒤집으니 쌉쌀한 한약냄새가 났다. 호미로 작은 구멍을 파고 그 안에 마늘을 닮은 튤립과 수선화의 알뿌리를 묻었다. 전날 내린 비 덕분에 촉촉해진 흙을 삽등으로 토닥였다. 화원에 문의하니, 따로 짚을 덮지 않아도 월동에 지장 없다고 한다. 알뿌리 식물은 꽁꽁 언 땅 속에서 추위를 견뎌야 오히려 꽃을 피울 수 있다. 그래서 시기를 놓친 구근류는 겨우내 냉동실에 두었다가 이른 봄에 심기도 한단다.
‘엄혹한 겨울도 두터운 껍질도 제 힘으로 뚫었으니 보드라움으로 이겼으니’ 노래한 박노해의 ‘강철새잎’을 몸소 겪어보니 새삼 경이롭다. 정보량과 삶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지식수집자에 불과하다. 인문학을 대하는 나의 태도가 또 다른 종류의 스펙 쌓기는 아니었는지 돌아보게 된다.
지난 일 년 동안, 농촌공동체와 인문학을 접목시키려는 강화 사람들의 독특한 대안 문화에 시선이 머물렀다. 내가 삶의 뿌리를 내리고 싶은 고장이 좀 더 특별했으면 하는 열망을 담아 강화를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질문을 던져본다. 앎과 실천을 일치시키려는 강화 양명학파의 정신이 21세기 강화도 지식인들에게 중요한 화두임은 틀림없다. 그래서 ‘책’을 키워드로 하는 강화의 다양한 실험공간을 눈으로 쫓게 되었다.
도시생활에 찌든 ‘먹물’은 강화읍의 인문학서점을 보자마자 ‘읍내 살이’를 결정했다. 네비게이션도 못 찾는 촌구석, 시침 뚝 떼고 서있는 동네 책방을 발견했을 때는 호들갑스러운 감탄사가 연신 튀어 나왔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기꺼이 가시밭길을 걷고 있는 작은도서관은 낯선 이방인까지 품어 주는 ‘문화사랑방’이다. 거창한 구호 대신 가랑비에 옷 젖듯 사람의 감성을 미세하게 건드리는 책읽기 모임은 인문학 운동의 신선한 시도이다.
‘책’이라는 공통점은 있지만 각각 다른 그림을 디자인 중인 강화의 ‘책 터’를 찾았다.
전편은 인문학서점과 독서모임 소개, 후편은 작은도서관 관련 인터뷰로 구성된다.
이들이 꿈꾸고 있는 인문세상, 지금부터 시작한다.
나들길과 잘 어울리는 인문학서점 <가망불망>
강화산성 4대문 안에는 산책하기 좋은 골목들이 많다. 남문에서 작은영화관 방향 동네 길을 걸으면 초등학교 앞에 <가망불망>이라는 간판을 단 인문학서점을 만나게 된다. <가망불망>은 제주도 방언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는데, 개화기 철학자인 혜강 최한기 선생의 ‘사람은 겉모습이 아니라 그만의 분위기 혹은 아우라로 기억 된다.’는 문장에서 유래하였다. 치장에 현혹되지 않고, 마음의 중심을 살피는 인문학 서점을 만들고 싶다는 박서연대표의 소망이 담긴 이름이다.
강화에 아무 연고가 없는 박대표는 대학원을 졸업하자마자 강화도로 이주했다. 원래는 전공인 문화산업분야를 살려 화문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 하는 사업을 구상했지만 녹록치 않았다. 그래서 열정만으로도 운영할 수 있을 것으로 오해 하고 덜컥 서점을 연다. 서점에 관해 쥐뿔도 몰랐던 처지라, 개업 당일 서가에 책이 달랑 다섯 권 꽂혀있었다. 큰 돈은 못 벌어도 망하지는 않을 거라는 근자감으로 일 년 째 서점을 운영 중인데, 개점 초기에는 40대, 50대 선생님들이 가끔 왔지만, 근래부터 학부모, 학생들이 서점을 찾는다. 특히 서점 앞 초등학교 학생들이 일없이 와서 숙제도 하고, 고양이도 구경하고, 그림도 그리다 간다. 초딩들이 순한 인상의 박대표를 편한 삼촌처럼 느끼는 모양이다. 지난 달 결혼을 해서 자랑스럽게 유부남이 된 박대표는 고운 신부와 함께 알콩달콩 서점을 운영하고 있다. (새신랑 얼굴이 확 폈다.)
얼마 전에는 강화도 문인 중 한명인 이승숙 작가 에세이 출판기념회가 이곳에서 열렸는데, 새댁의 고급진 꾸밈 솜씨가 유감없이 발휘되어 상당한 호평을 받았다.
최근 들어 책을 매개로 다양한 커뮤니티 공간이 늘어가는 추세다. 상암의 ‘북바이북’이 좋은 예. 박대표도 창업을 앞두고 ‘북바이북’ 대표를 만났다고 한다. 하지만 지역특성이 달라 ‘북바이북’의 사례를 그대로 접목시키기는 어렵다고 판단, 강화읍에 알맞는 인문학서점의 모델을 찾기 위해 다방면으로 시도 중이다. 모쪼록 누구나 오며가며 부담 없이 차 한 잔 마시다 가는 강화읍의 문화쉼터가 되길 바란다.
구불구불 논길 따라 작은 북스테이, 동네책방 <국자와주걱>
강화도 시인 함민복 작가는 유명세를 꺼린다. 어지간한 언론 인터뷰도 완곡하게 거절하지만, 강화시민사회의 요청에는 최선을 다한다. 특히 함시인은 ‘책’과 관련된 지역모임에서 자주 출몰한다. <국자와주걱>과 다음에 소개할 독서모임 <100books>는 모두 함시인과 인연이 깊다.
<국자와주걱>은 양도면 한적한 촌에 위치한 동네책방이다. 어릴 적 시골 외갓집을 가면 간판도 없는 점방에서 포장지에 하얀 먼지가 쌓인 새우깡을 사먹곤 했다. <국자와주걱>, 외모는 딱 그렇게 신작로 점방 포스인데, 실내는 뜻밖의 아늑한 서재다.
<국자와주걱> 김현숙 대표는 쓰리잡까지 뛰는 질풍노도의 도시생활을 접고 10년 전에 강화도로 온가족이 이사를 왔다. 강화도에서 첫 일은 포도밭 과수원. 인생 사전에 ‘눈치’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 강철 멘탈의 소유자답게, 텃새도 모르고 동네 할머니들이랑 잘 지냈다. 나이가 들면 다 내려놓을 줄 알았는데, 여전히 심장이 팔딱 거려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 즈음, 괴산에서 ‘북스테이’ 하는 친구네로 여행을 갔는데, 이거다, 싶어서 도전! 팔자에 떼돈은 없는 것 같으니 욕심 부리지 않기로 하고 살던 집을 동네책방으로 변신 시킨다.
아직은 ‘북스테이’가 대중적이지는 않지만 벌써 전국적으로 네트워크가 연결되어 있다. 일 년 전 오픈한 <국자와주걱>은 그중 규모가 작은 편이다. 카드기 설치하러 온 기사가 "이 촌구석에서 왜 이런 걸 하냐."고 물을 정도여서 누가 올까 싶었는데, 책 좋아하는 사람들이 알음알음 오고 있다. 블로그도 하다가 곧 접었다. 어느날 문득, 내 맘 편하면 손님도 저절로 늘어 날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기 때문인데, 이 집 주인장도 근자감 쩐다.
‘헬조선’에서 누군들 미래가 불안하지 않을까. 김현숙 대표 역시 두려움에서 100프로 자유롭지는 않다. 청주에서 초등학생 자녀를 둔 가족이 하룻밤 쉬었다 갔는데, 그 집 아빠가 그랬단다. 인터넷에서 여기를 검색 했는데 ‘오면 오고 말려면 마라’는 비범한 기운이 되레 호기심을 자극시켜, 날 이렇게 막대한 건 니가 첨이야 와보니 역시 기대 이상이라고 엄지 척 했다나.
진열된 책들은 책방 주인의 개취로 간택된 것들인데, 손님들이 책등에 적힌 제목들을 보면 눈을 반짝인다. 끼리끼리 모인다고, 굳이 여기까지 찾아오는 사람들은 책방 쥔장과 코드가 맞는 사람들일 터. 비슷한 이들이 방문하니, 좋아하는 책도 같은 것은 당연 지사다. 김현숙 대표는 ‘북스테이’를 하면서 아들 뻘 20대 청년들과 교류가 늘었다. 최근에도 환경운동을 하는 공대생들이 2박 3일 동안 베개 사이즈 원서로 세미나를 했는데, 매일 밤 유쾌한 뒷풀이가 이어졌단다. 김대표와 청년들은 이 친교를 ‘양자역학적 만남’으로 규정하고 절친이 된다.
<국자와주걱>은 누군가에게 뭔가를 퍼주는 살림도구인 국자와 주걱처럼 지식과 사랑을 나누는 책방이 되라고 함민복 시인이 지어준 타이틀이다. 가끔 방명록에 ‘이 책방이 사라지지 않고 오래 오래 있었으면 좋겠어요.’라는 글이 적혀 있는데, 그럴 때마다 주인장은 뜨끔 한다. <국자와주걱>은 이름처럼 이 터를 찾아온 사람들과 오래오래 지혜와 정성을 나누고 싶다.
강화도 구석구석까지 지혜의 빛을 밝히고 싶은 <100books> 독서모임
원래 <백북스>는 2002년 대전에서 설립된 전국적인 열린 학습 공동체다. 대전의 한 대학 교수가 학생들 취업 추천을 위해 기업 CEO들을 만났는데, 공통 요구 사항이 '기본적 업무 능력은 와서 배우면 되는데, 책 좀 많이 읽어서 생각 할 줄 아는 인재였으면 좋겠다.' 였다. 그래서 한 명의 대학생이 입학부터 졸업할 때까지 한 달에 두 권 씩 꾸준히 독서를 하면 백 권을 클리어 할 수 있다는 단순 계산으로 독서 모임을 출범했는데, 평범해 보이는 이 아이디어가 의외의 방향을 일으켜서 전국적으로 확산 되었다.
<강화백북스>는 함민복시인이 <대전백북스>행사에 강연자로 초청 받았다가 좋은 인상을 받고 돌아와서 책을 좋아하는 강화의 문화예술인들과 2016년 초에 시작했다.
서강대 명예교수인 <심도학사>의 길희성 교수님, <강화문학관>의 양태부 선생님, 강화 시민사회의 열린사랑방 <이웃사촌>카페지기 홍성환 선생님과 함민복 시인 등이 운영진인데, <강화문학회>, <인문학서당>, <강화나들길> 회원들을 비롯하여 책을 좋아하는 강화사람들이 매달 한번씩 <백북스>가 진행되는 강화문학관을 찾는다.
2016년 2월, 신영복 교수님의 ‘나무야 나무야’를 시작으로 총 11권을 읽었는데, 중간 중간에는 저자 직강 특강도 진행되었다. 12월은 <백북스>의 고문이신 길희성교수님이 직접 내방하셔서 교수님의 저서 <보살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이날 뒷풀이는 송년회를 겸한 포트럭 파티였는데, 90년대 학번인 필자에게는 신선한 문화충격이었다. 젊은 사람들이 많지 않은 강화도의 특성상 회원 연령이 높은 편인데, 그날의 회합은 뭐랄까... 60년대 70년대 대학 뒷풀이 체험 현장이었다. 스스럼없이 가곡을 부르고 떨리는 목소리로 수줍게 시를 낭송하는 어른들의 모습은 오글거림은커녕 뜻밖의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때로는 이렇게 흉금을 터놓고 다른 세대가 향유하는 문화를 경험하는 것도 필요할 것 같다.
현존하지는 않지만 최초의 금속활자로 알려진 ‘상정고금예문’, ‘동국이상국집’의 이규보, 강화양명학파, 근현대 문물의 관문 등 강화의 인문학 역사는 뿌리가 깊은데, 오늘날은 왜곡된 한국 현대사 때문인지, 북한과 접경지대여서 그런지, 강화의 인문정신이 눈에 확 드러나지는 않는 것 같다.
<백북스> 회원들은 큰 욕심이 없다. 지역에 공부의지를 심어 주는 것이 강화의 역사와도 어울리고, 거쳐 가는 이들 한 명 한 명이 불씨 되어 이 보수적인 동네를 조금이라도 아름다운 방향으로 변화 시키지 않을까 하는 소박한 기대를 갖고 있을 뿐이다.
<백북스> 회원들의 바람처럼 2017년 새해도 행복한 책읽기 모임이 오래도록 지속되길 기원한다.
(후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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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러킴
편집 : 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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