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같은 작업현장에 박근혜 지지자가 한명 있다. 완고하게 굳어진 정치성향을 바꿀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박근혜를 지지한다는 이유로 혐오감을 갖지도 않는다. 처음 각인된 물체를 부모로 인식하는 조류처럼 사는 사람들도 있다. 뭐 그냥 저냥 사는 것은 자유지만 은근히 자신의 믿음을 전하고 인정받고 싶어 한다.


처음 최순실의 이름이 뉴스에 거론되고 촛불집회를 하는 사람들이 나왔을 때의 반응은 최순실이 나쁜 년이지 박근혜가 무슨 잘못이냐는 반응이었다. 데모를 하는 팔자 좋은 것들에 대한 적의를 공감 받고 싶어 했다. 우리야 밥줄걱정에 할 말 못하고 대충 숙이고 구부리고 산다지만 적어도 어렸을 땐 잘못 된 걸 보면 할 말도 하고 데모도 하고 그래야죠. 어렸을 때부터 전부다 굽신거리고 살면 나라에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20161114104148_1LfkzNpt_attach_2.png


고구마 줄기를 당기는 것처럼 돈과 협잡으로 얽히고 설킨 관계들이 조금씩 노출되자 조금은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순수하고 욕심 없는 처녀 대통령에 대한 환상이 조금은 깨졌다. 입으로야 박근혜는 대통령이 아니고 최순실이 대통령이었네 하며 한숨을 쉬었다. 며칠 시간이 지난 후 누구라도 그 자리에 올라가면 해먹을 수 밖에 없을 거야 라며 스스로를 위로 했다.


권양숙이 뒷돈을 먹은 걸 보면 그 자리에 가면 누구나 어쩔 수 없는 건가봐. 그 사람의 믿음이 비로소 조금 아팠다. 믿음이 흔들리는 상황이 오면 자기보호차원에서 더 공격적이고 완고해지는 사람들도 있다. 그 공격성이 발가락에 다이아반지 끼고 들어오다 세관에 걸린 김윤옥 씨나 비비케이의 이명박보다 죽은 노무현에게 향한다. 노무현 시절 솥단지 데모를 하던 자영업자들이 이명박과 박근혜 시절에는 조용히 폐업을 하던 것과 상관관계가 있어 보인다.


그래서 죽었잖아요. 학연 지연 혈연이 안 되니까 다른 놈들은 조 단위로 해먹어도 떵떵거리고 살고 그 사람은 십억 가지고 이리저리 조리 돌림당하다 죽었죠. 못 참고 남 이야기처럼 내뱉었다. 그 조리 돌림하던 검사들이 나와서 다 몇 백억씩 해먹읍디다.


노무현 때 담배 값 500원 인상이야기에는 핏대를 올리던 사람들이 박근혜가 2000원을 올려도 별 소리 못하는 것은 이념과 철학의 문제가 아니다. 그들의 머릿속에 이미 서열인식이 자리 잡았기 때문인 것 같다. 새끼 오리처럼 한번 서열을 인식하면 서열에 균열이 가는 현상에 대해 극도의 불안감을 느낀다. 한번 공주는 영원한 공주고, 고졸 노동자 변호사는 서열 외의 존재다. 세상 인식 참 쉽고 편하게 산다.


한번은 어디서 듣고 왔는지 촛불집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다 일당 받고 나오는 거란다. 그래서 오만원씩 백만이면 집회한번에 오백억인데 어디서 준데요? 우리도 갑시다. 좆 빠지게 일해서 일당 오만 이천 원인데 세금 안 떼고 오만원만 받아도 괜찮겠네.


택시기사들이 세월호 유가족들을 싫어한다는 이야기에서는 한숨을 쉬었다.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심리적 거리가 가까워 안타까움을 더 느끼지만 다른 사회적 타살에 대한 안타까움보다 진한 것은 아니다. 어느 분의 말대로 광주와 삼풍과 대구지하철 참사를 남의 일로 넘기고 모른 채 살아 왔던 결과라면 세월호를 남의 일로만 여기던 이들 중 누군가에게는 반복될 참사고 운명이다. 그 시절에 또 슬피 울고 분노하고 외면 받음을 반복하면 된다. 다만 자식 잃은 죄로 단식을 하던 그들 앞에서 웃는 얼굴로 음식을 입으로 쑤셔 넣던 이들에게는 인과의 사슬이 끊이지 않고 질기게 이어져 운명의 저울이 균형을 이루기를 바란다.


329500_1409286086.jpg


보통의 판단력과 도덕성을 갖고 있다고 판단되는 사람이 유독 판단이 정치적으로 변질되는 문제에 대해서는 외골수로 치닫는다. 개인의 의지나 판단력이 아니라 적대의식을 유통시키려는 특정집단의 의지가 느껴진다. 믿음을 공유함으로 각자 착각 일지언정 소속감을 갖는다.


57세 파주 출신이다. 어린 시절 미군과의 접촉이 많았고 훈련중인 미군을 집안에서 재워준 적이 있다. 그때 미군이 준 전투식량과 부식을 기억한다. 용주골이 파주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래들은 포주인 친구엄마의 눈을 피해 사춘기 무렵부터 용주골 출입을 했다. 한 번 출입에 200원 300원 하던 시절이다. 학생 할인 가격인지는 모른다. 15살 무렵 성병에 걸린 친구는 고름이 나오는 성기를 잡고 고민하다 농약을 마시고 죽었다. 그런 시기였다. 그 시기가 완고한 믿음을 선택하는데 영향이 없지는 않겠지만 개연성이 작아 보인다.


자연스레 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의경 혹은 전경출신이다. 반대편에 섰던 대학생들에 대한 열등감과 분노도 조금은 있었겠지만 지금은 자신의 아드님도 대학을 졸업한 사회인이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 호루라기를 불며 통금 위반자를 잡으러 뛰어다녔던 완장의 힘을 기억한다. 제복을 입고 서울 지하도를 활보할 때 도망치던 노점상들에게 자존감을 충족한 기억도 이야기한다. 아마 그 부분이지 싶다. 언젠가 인상 좋던 열쇠 집 할아버지도 계엄군 상사로 마을을 호령하고 유지들이 벌벌 기던 그 시절을 이야기했었다. 그 자신이 가장 빛나던 시절이라 생각하던 시기에 자신이 빛나던 이유가 누군가의 빛을 받아서 반사되었었을 뿐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감지한다. 그 빛이 수용소의 서치라이트처럼 차가웠는지 바위섬의 등대 불처럼 따뜻했는지는 중요한 사람에게만 중요하다.


content_1446017725.jpg


힘들여 어렵게 사는 게 좋은 것은 아니다. 보통은 삶이 쉽고 편하고 행복하길 원한다. 스스로 무력감을 통감하고 잘나가는 다른 사람의 위세를 빌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종교에 기대 심리적 위안이라도 얻는 편이 편하다. 권위와 실익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종교는 확장성이 떨어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질과 메이커를 추종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신흥종교에 가깝다.


문재인이 자기가 대통령이 된 것처럼 건방지게 군다는 이야기를 할 때 그래도 나는 문재인이 대통령 돼서 이명박이 조졌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 동정을 살피는 의아한 눈빛 앞에 부연 설명을 한다. 전임대통령을 조져야 현직이 사는데 박근혜가 그걸 못했다. 아니 하려다 되려 당했다. 다음에 누가 되든 이명박을 터치할 사람은 없어 보인다. 사대강에 자원비리에 방산비리로 해먹은 게 엄청난데 그냥 잘 먹고 잘 살다 자식들한테 물려주기까지 하는 건 벨이 꼴린다. 문재인이 아니라도 상관은 없는데 그만한 사람이 아직 보이지 않는다. 그 사람에게 맞는 언어로 설명을 했다. 완고한 믿음을 바꿀 수 있을거란 생각은 하지 않는다. 따로 적이라는 판단을 갖게 하지는 않은 것 같다.


우리가 남이가란 말의 힘은 질기고 강하다. 당당하게 우리를 표방하는 사람들과 우리 안에 들어가길 원하는 사람들 우리 안에 포함되지 못해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동일한 위력을 갖는다. 학연 지연 혈연으로 확고한 연결점을 찾지 못한 사람들이 동원하는 마지막 방법이 동일한 믿음의 증명이다. 뒤처짐이 불안할수록 믿음을 증명하려는 노력은 처절해진다.


아무리 봐도 우리라는 말은 울에서 나왔다. 초가집 마당에 싸리나무 울타리가 아니라 부족시대 해자를 파고 통나무를 깎아 세워 만든 목책 안에 함께 사는 사람이 아니면 적으로 판단해야 생존하던 시절의 유산이다. 역사는 울타리를 지키기 위한 노력과 울타리를 허물기 위한 노력이 공존해왔다. 민족과 국가는 부족사회의 보통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울정도로 확장된 개념이다. 이해를 강제 하기 위해 종교가 동원되었지 싶다. 천손의 후예는 따를 만한 권위를 홍익인간의 건국이념은 실익이 된다.


12885383571354732818.jpg


집단의식을 바뀌기 위해서는 혁명적이고 종교적인 열의가 필요하다. 신석기 혁명의 기원에도 종교가 있다. 신성한곳에 제단을 세우고 붙박이로 신을 섬기는 사제계급에게 안정적으로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 몇 백년간 수렵채집을 하던 사람들이 농경을 시작했다. 그냥 어쩌다 우연히 깨달았다는 이야기보다 설득력이 있다.


리처드 도킨스가 밈이라고 말한 문화 혹은 정신의 바이러스는 우리말로 믿음이라고 번역할 수 있겠다. 필요한 곳에 필요한 믿음은 유익균의 군집과 같다. 생명은 서식지를 변화시키고 환경은 다시 생물에게 영향을 강제한다. 인간은 미숙하지만 변화의 방향을 조정할 수 있다. 그 변화의 방향을 가늠하려는 군집적인 의지가 믿음의 형태로 나타나고 세상을 조금씩이나마 변하게 한다. 그 변화가 기왕이면 조금 더 공정하고 공평하기를 바란다. 






범우


편집 : 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