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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 런던(Jack London)이라는 작가가 있다. 미국 자연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들 중 한 사람이다. 우리에게 친숙한 작품은 개를 주인공으로 한 <야생의 부름>이 있다. 캘리포니아의 한 개가 알레스카로 팔려가 썰매를 끌면서 늑대의 야성을 찾아간다는 이야기이다. 그는 노동자계급 출신의 작가로 사회주의 사상에 투철했으며, 노동자와 농민의 삶을 문학적으로 그리는데 노력했다. 그런 그가 뜻밖에도 조선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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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904년에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약 3개월간 우리나라에 종군기자로 와서 활동했으며, 그때 우리나라에 대한 많은 글을 미국 신문에 실었다. 이쯤 이야기하면 아마 귀가 솔깃해질 것이다. 그러나 조선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당황스럽게도 노동자들을 바라보던 시선과는 전혀 달리 싸늘하다. 나름대로 진보적인 의식을 지닌 그도 당대의 서양인들이 지닌 인종적 우월의식은 어쩔 수 없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백인 여행자가 조선에 체류할 때 겪는 일들은 조선에 도착한 처음 몇 주 동안 기분 좋은 것과는 영 거리가 멀다. 만약 그가 예민한 사람이라면 두 가지 강한 욕구 사이에서 씨름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낼 것이다. 하나는 조선인들을 죽이고 싶은 욕구이고 또 하나는 자살하고 싶은 욕구다. 개인적으로 나라면 첫 번째를 선택했을 것이다."


그가 조선을 바라보는 시선은 철저하게 백인우월주의, 제국주의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또한 당시에 유행하던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의 영향을 받았다. 인간사회의 생활은 본질적으로 생존경쟁이며, 이 경쟁에서 강자가 생존하고 약자가 도태된다는 것이 사회진화론의 기본인식으로 서양 제국주의의 이론적 토대이다. 그의 글에는 약자인 조선인들에 대한 경멸과 강자인 일본인에 대한 우호적인 표현이 가득하다. 그가 보는 조선인은 나약하고 무기력하고 무감각하고 게으르고 “지구상의 모든 민족 중에서 가장 비능률적”이고 무능력하고 비겁하고 쓸데없는 호기심에 가득 차 있다. 이런 견해는 근대 유럽인들이 제3세계인들을 평가할 때 흔히 쓰는 표현이다. 런던은 바로 이런 유럽인들의 제3세계에 대한 고정된 시선으로 조선을 바라보며 더 나아가 아시아인 전체를 바라본다. 비록 일본인들이 아시아인으로서는 뛰어나지만 “그들 역시 결국은 아시아인”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면 다른 글은 어떨까? 우리나라를 서양에 소개한 첫 글은 그 유명한 네덜란드인 하멜의 표류기이다. 하멜의 표류기는 1653년 풍랑으로 제주도에 도착한 때부터 1666년 일본으로 탈출할 때까지의 기록이다. 그의 기록에는 이방세계에 대한 강한 지적 호기심이 보이지 않으며 자신의 처지에만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조선에 대한 그의 관심은 부차적으로 자신과의 관련 하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좋다-나쁘다’의 판단 기준은 조선(인)이 자신에게 어떻게 대우하는 가에 따라 결정된다.


"제주도 사람들은 우리가 사람이라기보다는 괴물과도 같다는 소문을 퍼뜨렸던 것이다. 그들에 의하면, 무언가를 마시러 가면 우리가 귀 뒤쪽으로 코를 돌린다든지, 머리카락이 금발이기 때문에 인간이라기보다는 수중동물처럼 보인다든지 등등의 말을 했다는 것이다."


"조선인은 물건을 훔치고, 거짓말하고, 속이는 경향이 강하다. 그들은 지나치게 믿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남에게 해를 끼치고서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영웅적인 행위라고 여긴다... 또한 조선인은 성품이 착하고 매우 곧이 잘 듣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가 원하는 어떤 것이나 믿게 할 수 있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조선인과 하멜이 서로를 바라보는 두 가지 다른 시선을 볼 수 있다. 그 두 시선은 서로 충돌한다. 조선인에게 하멜은 ‘괴물’이며 하멜에게 조선인은 도둑이고 거짓말쟁이이다. 백인을 처음 접한 조선인들은 당혹감에 사로잡혔고 정상적인 판단으로는 정의를 내릴 수 없는 새로운 인간에 대해 그들은 자연스럽게 ‘괴물’로 묘사하고 받아들인다. 자신들의 인식 범위를 벗어나는 존재에 대해 사람들은 쉽게 ‘비정상’이라는 범주로 일반화하게 된다. 그러므로 하멜 일행을 ‘괴물’로 보는 시선에는 조선인들의 당혹감이 묻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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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에 대한 하멜의 시선 역시 내적인 혼란을 보여준다. 그에게 조선인은 도둑이고 거짓말쟁이이고 수치심을 모르는 민족인 동시에 성품이 착하고 남의 말을 잘 믿는다. 이런 그의 시각에는 암암리에 우월한 문명을 지닌 사람이 열등한 문명을 바라보는 시선이 반영되어 있다. 근대의 여명기에 들어선 유럽인의 눈에 비유럽적인 세계는 흔히 그렇게 비쳤다. 비유럽인은 순박하고 남의 말을 잘 믿는 동시에 게으르고, 거짓말을 잘 하고, 더러운 야만인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가 원하는 어떤 것이나 믿게 할 수 있다”는 하멜의 말이나 인디언을 가리켜 “뭐든 우리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게 할 수 있습니다”라는 콜럼버스의 말은 놀라울 정도로 일치한다. 그들에게 비유럽인들은 자신들의 뜻에 따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인간들이다. 결국 콜럼버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하멜 기록의 바탕에 깔린 것은 ‘유럽-기독교’의 시각에서 ‘야만-이교도’의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물론 그가 한글의 우수성을 인정하고 조선 지식인들이 지닌 학문에 대한 숭상을 높이 평가하지만 그의 시각에서는 조선은 우상을 숭배하는 야만의 나라이다.


한 가지 사례만 더 보자. 우리는 가끔 우리나라를 묘사할 때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고 말한다. 얼마나 멋진 표현인가! 그 말은 뭔가 평온하고 신비롭고 신선한 느낌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이 유명한 말을 남긴 이가 새비지-랜도어라는 영국인이다. 그에게 ‘고요한 아침’이란 어떤 의미일까?


"이 국호[조선]의 뜻은 매우 싯적인데 ‘고요한 아침의 나라’를 의미하며 현재의 조선 사람들에게 알맞은 표현이다. 왜냐 하면 정말로 그들은 그들의 선조인 고구려의 정열과 힘을 전적으로 상실한 듯이 보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는 말에서 기대했던 이미지는 이 글에서 단박에 깨지고 만다. 고요한 아침이란 그에게는 정열과 힘의 상실을 의미한다. 그의 눈에 비친 조선은 과거의 영광을 잃어버린 무기력한 나라이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은 1890년에 조선을 방문한 그의 기행문이다. 그는 이 글에서 잠재적인 독자(유럽인들)를 염두에 두고 독자들의 흥미를 끌기 위해 자연히 조선과 서양의 ‘다름’에 주목하고 있다. 기이한 것, 색다른 것, 낯선 것을 눈에 보이듯이 선명하게 그려냄으로써 독자가 조선의 풍광과 문물과 인물을 눈앞에 보는 것처럼 제시한다. 그러나 그 역시 계몽된 유럽인으로서 미개한 조선을 바라보고 있다. 그의 시선은 산업화된 사회의 인간이 산업화 이전 단계의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술에 거나하게 취하게 되면 그는 나머지 돈으로 도박을 한다. 그리고 나서 그는 대(大)자로 누워 24시간 동안 숙면하고 다음 날 12시쯤 땅 위에 쪼그리고 앉아 그의 지게 옆에서 햇볕을 쬐면서 아직도 반쯤 졸린 눈으로 자기의 어리석음을 곰곰이 생각하며, 짐을 나를 인간 짐승의 봉사를 요구할지도 모를 행인으로부터 새로운 주문을 찾게 된다."


당연하지만 그의 모든 판단기준은 유럽이다. 유럽과의 비교를 통해 조선의 우열을 이야기한다. 그럴 경우 ‘조선’은 타자로서만 존재한다. ‘조선’의 목소리는 무시되고 조선을 바라보는 ‘유럽’의 목소리만 존재한다. 조선은 철저하게 유럽적 기준에 의해 판단되고 규정된다. 그리고 조선의 목소리는 침묵을 강요당한다. 그의 시선은 사회과학자 내지 자연과학자의 시선이다. 그런 시선으로 보아 유럽적인 규범에 어긋나는 모든 조선의 모습은 야만으로 전락하고 조선인은 ‘인간 짐승’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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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비지-랜도어의 글에는 장점이 많다. 이 글은 조선에 대한 미시적이고 치밀한 관찰과 분석을 하고 있다. 조선에 대한 그의 세심한 관심은 분명 칭찬할 만한 미덕이다. 그건 애정이 없으면 하기 힘든 일이다. 그 당시 우리나라를 이만큼 분석한 글이 어디 달리 있겠는가? 이 점은 분명히 인정하고 들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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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우리나라 진출은 미국 팽창주의의 종착지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말에 대륙팽창을 마친 미국이 태평양을 건너 하와이, 필리핀, 중국, 일본을 거쳐 최종적으로 닻을 내린 곳이 조선이다. 그곳에서 미국은 마침내 자신을 자유와 민주주의와 평등이라는 근대적 가치의 구현자로 각인시키는 데 성공했다.


우리나라가 미국과 사실상 처음 공식적인 접촉을 한 것은 1866년에 벌어진 제너럴셔먼호의 침략이다. 이 배는 20명의 선원을 태우고 ‘통상’을 구실로 8월 9일 중국을 떠나 조선으로 향했다. 그들은 대동강 입구에 이르자 우리 측의 경고를 무시하고 평양감사와 직접 담판하겠다며 평양을 향해 항해했다. 그 사이 평양감영은 그들이 필요로 하는 양식을 공급하며 돌아갈 것을 종용하였지만 오히려 그들을 추적하던 우리 군인들을 납치해 감금하였으며, 8월 30일에는 지나가는 상선의 식량을 약탈하고 총을 마구 쏘아대어 우리나라 사람 7명이 사망하고 5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에 분노한 평양시민들이 대동강으로 몰려들어 군졸들과 협력해 포로를 구출하고, 배를 불태우고 선원 20명을 모두 살해했다.


미국은 제너럴셔먼호 사태를 빙자해 1871년에 미국 공사 로우가 콜로라도 호를 포함한 5척의 함대를 이끌고 우리나라를 침략했다. 그것이 신미양요이다. 이 사건은 당시 미국이 추구하던 전형적인 포함외교(gunboat diplomacy)였다. 일본 나가사키를 출항한 5척의 미국 군함이 5월 19일 우리나라 서해안에 출현했다. 조선 정부는 미국 측과 몇 차례 협상을 벌였지만 미국과의 어떤 통상도 할 의사가 없음을 거듭 밝혔다. 이에 미국은 6월 10일 초지진을 점령하고 다음날 덕진진을 점령했다. 그리고 곧 광성진을 공격해서 수많은 병졸이 전사하고 부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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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으로 조선은 전국에 ‘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이라는 척화비를 세우고 쇄국정책을 강화했다. “저들의 배가 비록 백년을 내침한다 해도 우리는 변함없이 굳게 지킬 것이며, 천 척의 배가 또 온다 해도 우리 또한 병력을 증강하여 지킬 것이다”라고 고종은 쇄국정책을 천명했다. 그러다가 결국 1876년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은 후인 1882년 5월 22일에 14개조의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 체결에 따라 미국은 다음 해인 1883년 5월에 푸트(L. H. Foot)를 초대 전권공사로 보냈으며, 우리나라는 6월에 민영익을 전권대신으로, 홍영식을 부관으로 한 보빙사라는 사절단을 미국에 파견했다. 그들은 몇 개월간 미국에 채류하면서 아서(Chester Alan Arthur) 대통령을 접견하고 [그 일행이 미국 대통령에게 엎드려 절하는 장면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미국의 문물을 둘러보았다. 그 일행 중 한 사람이 <서유견문>을 쓴 유길준이다.


유길준은 1881년에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시찰했으며 곧 이어 보빙사의 일원으로 미국을 방문하여 그곳에서 약 1년간 유학생활을 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당대의 어떤 조선인보다도 서양의 근대문명을 현장에서 생생하게 목격하고 학습했다. 그러므로 그의 <서유견문>은 단순한 기행문이 아니라 당대 서양의 거의 모든 문물에 대해 광범위하게 소개하는 백과사전적 글이다. 그의 글에는 서양의 새로운 사상을 소개함으로써 조선을 근대화하려는 열망이 가득 배어 있다.


그의 글은 약소국 조선의 지식인이 갖는 자괴감과 분노와 그것을 넘어서려는 의식이 깊이 깔려 있다. 그는 조선이 비록 국가의 생존을 위해 청에 조공을 바치지만 조선은 청의 속국이 아닌 독립국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속국은 스스로 다른 나라와 조약을 맺고 외교사절을 교환할 권리가 없지만 조선은 그런 권리를 당당하게 소유하고 있는 만큼 청으로부터 독립국의 지위를 인정받고 그에 상응하는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당시 청나라 사신들이 보이는 행태를 이렇게 서술한다.


"이따금 수공국 사람이 자기 나라의 잘난 척하는 체제를 남용하여 증공국을 깔보고, 그 나라의 국법을 법으로 여기지 않거나, 그 나라의 예법을 예로써 여기지 않으며 받들어 공경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심한 경우에는 자신이 수공국의 벼슬이나 사신의 직함을 가지고 오면서, 증공국의 군주에게 동등한 예를 남용하기도 한다."


<서유견문>을 흐르는 일관된 사상은 계몽주의이다. 그는 그 사상에 따라 국가의 독립성과 만민평등 사상을 설파하고 있다. 그는 인간은 생명과 자유와 언론 같은 천부인권을 타고 났으며 하늘이 내린 그 권리 앞에서는 모든 인간은 왕과 서민에 이르기까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평등하다는 주장을 설파한다. 그는 법에 의한 지배를 강조하며 그 법은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하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천자도 사람이고 서민도 사람이며 그들의 차이는 타고난 것이 아니라 “인간 세상의 법률이나 (인륜이라고 하는) 커다란 벼리를 가지고 지위를 구별”한 것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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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의 이런 시선은 독창적이기보다는 서양인의 시선을 그대로 답습한다. 그는 서양을 쉽게 문명으로 간주하고 그렇지 못한 것은 야만으로 구별한다. 조선을 문명으로 생각하고 서양을 야만으로 생각했던 그의 예전 생각은 이 여정에서 완전히 역전되었다. 한 예로 미국의 원주민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백인의 시선을 여과 없이 답습하고 있다.


북아메리카주의 적색인은 대대로 게으름만 익혀온 족속이라서 공부하는 기력조차 스러져 버려, 미국의 백색인들이 학교를 세우고 교육할 길을 훌륭히 갖추어 놓았다. 농사짓는 방법이라든가 물건을 만드는 기술을 부지런히 가르쳤지만, 성공하는 자가 아주 드물었다. 교사가 타이르는 것과 공부하는 과정을 꺼리고 피하였다. 엽총 한 자루 가지고 산속으로 들어가 일생 동안 가난하고도 괴로운 생활을 벗어나지 못한다. 아아, 교육받지 못한 폐해가 이 지경에 이를 정도로 심하다.


유길준의 이런 시선은 미국적 가치의 내면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근대화는 좋든 싫든 미국적인 가치를 받아들여 세계를 그 시선으로 보고 받아들이고 우리의 시선으로 고착시키는 과정이었다. 우리에겐 미국은 모든 가치의 기준이고 최상의 표현이었다. 그러므로 구한말 개화 사상가들에게는 조선의 모든 기존 가치체계는 비판과 타파의 대상이 되었다. 미국을 바라보는 이런 시선은 유길준 이래 우리에게 하나의 규범적인 시선이 되었다.


일례로, 우리나라 신소설의 효시인 이인직의 <혈의 누>를 보자. 이 소설이 강조하는 것은 신학문의 성취에 의한 국권의 자주적인 확립이다. 이 소설에 비친 조선사회는 무기력한 봉건사회이다. 조선의 위정자들은 백성은 안중에도 없으며 외세의 침입에 무기력하게 끌려 다니며, 그 결과 조선은 다른 나라의 전쟁터로 전락하고 그 전쟁으로 죄 없는 백성들이 무참하게 죽어나간다. 백성들 역시 자신의 안위에만 관심이 있으며 그 이상의 공동체에 대한 각성이나 인식이 전혀 없다.


조선사회에서 상놈과 여성은 봉건적인 남녀 차별에 묶여 사람다운 삶을 살지 못하며, 양반들은 가렴주구로 백성들의 고혈을 착취한다. 이인직의 시선에는 조선 사람은 “이렇게 야만되고 이렇게 용렬한” 민족이 되었다. 이인직에게는 문명은 미국(과 그것의 충실한 계승자인 일본)으로 나타난다. 조선의 것을 모두 버리고 미국(과 일본)의 문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개화이고 문명화이며 근대화이다.


이런 그의 시선은 이광수에게도 그대로 이어진다. 근대화는 이인직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미국화 내지 일본화이다. 그는 <민족개조론>(1922)에서 우리민족의 낙후성을 비판하였다. 그는 우리 민족의 위선, 비사교성, 낙후된 과학, 배타성을 공격하며 민족성의 개조가 독립보다 더 중요하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우리의 전통, 특히 유교를 진보와 발전의 장애로 생각했다. 그 대신 그는 서양의 개인주의와 자유의지를 옹호했다. 그의 소설 <무정>에서 조선은 야만의 상태이며 조선인은 아직 ‘사람’의 상태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에게는 조선의 옛 지식은 아무런 소용이 없으며, 오히려 야만의 표시일 뿐이다. 그는 인간의 자연상태는 야만의 상태라는 믿음을 지니고 있다. 조선은 바로 그런 무기력하고 숙명주의적인 태도를 지닌 사람들의 땅인 야만의 땅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퇴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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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의 주인공 이형식이 유학을 가다가 삼량진에서 홍수가 나 기차가 멈추었을 때 수재민을 바라보며 느낀 소회는 그의 이런 시선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유길준의 인디언이나 이광수의 조선인과 아이누는 결국 동일선상에 있다.


"그네의 얼굴을 보건데 무슨 지혜가 있을 것 같지 아니하다. 모두 다 미련해 보이고 무감각해 보인다. 그네는 몇 푼어치 아니 되는 농사하는 지식을 가지고 그저 땅을 팔 뿐이다. 이리하여서 몇 해 동안 하느님이 가만히 두면 썩은 볏섬이나 모아 두었다가는 한 번 물이 나면 다 씻겨 보내고 만다. 그래서 그네는 영원히 더 부하여짐 없이 점점 더 가난하여진다. 그래서 미련하여진다. 저대로 내버려 두면 마침내 북해도의 ‘아이누’나 다름없는 종자가 되고 말 것 같다."


이광수의 주인공 이형식은 우리의 전통문화가 습득하고 구축해놓은 모든 가치를 무의미한 것으로 폄훼한다. 그에게 문명은 기독교이며 영어이다. 그에게 문명은 ‘성인’으로 표상되고 비문명은 ‘어린애’로 상징된다. 그리고 성인은 기독교와 영어로 연결된다. 그러므로 선형은 "좋은 양복을 입고 새 깃 꽂은 서양 모자를 쓰고 미국에 가서 저와 같은 서양 처녀들과 영어로 자유롭게 이야기하기"를 꿈꾸고 이형식은 영어로 저술활동을 해서 그 원고를 미국이나 영국의 출판사에서 출판할 꿈을 꾼다.


이인직과 이광수는 서양과 일본이라는 ‘근대’ 문명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과거를 부정해버린다. 그 밑바닥에는 선진문물 앞에서 왜소한 인간으로서의 자기비하가 깔려 있다. 그들은 당시에 유행하던 사회적 다윈주의의 적자생존 논리를 받아들였다. 그들에겐 문명화될 능력이 없는 약소국을 강대국이 지배하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다. 그들의 그런 시선은 유럽인들이 수백 년에 걸쳐 제3세계에 주입해온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자신의 나라인 조선을 바라보는 이인직과 이광수의 시선은 런던이나 하멜 같은 미국인과 유럽인이 조선을 바라보는 시선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그들은 백인 미국인들이 인디언이나 다른 유색인들을 바라보던 바로 그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본다. 그들은 백인의 시선을 내면화했다. 그들은 어느 사이 정신적으로 미국인(과 일본인)이 되었다.


그들은 조선이 근대화를 위해 몸부림치던 모든 역사적 과정을 도외시하고 조선을 미개하고 타율적인 존재로만 바라본다. 그들의 시선에는 미국문명에 대한 경이만 있을 뿐 그것에 대한 어떤 비판적 수용도 없다. 그들에겐 미국은 오직 ‘아름다운 나라’이다. 그런 점에서 미국이 추구해온 팽창주의 욕망은 우리나라에서 이상적인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그러나 한 가지 기억해둘 것이 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가장 먼저 공사관을 철수한 나라가 미국이다.





지난 기사


[1부]

콜럼버스의 두 얼굴, 미국의 두 얼굴

먹기 위해 찬양하는 백인 정복자

영국신랑과 포카혼타스

신의 나라를 원했던 청교도들

아메리카 드림과 인종청소

흑인, 노예가 되다

마녀를 찾아라


[2부]

차(茶)를 바다에 처넣다

백인과 기득권만의 미국 독립

미국, 헌법을 제정하다

미국, 영국과 다이다이를 뜨다

미국 노예제도를 흔든 '내트 터너의 반란'

서부영화, 팽창야욕의 낭만적(?) 재현

여성, 세네카폴스에 모이다


[3부]

남북전쟁(civil war), 그 시작과 이면

KKK, 출현하다

대륙횡단철도를 건설하다

메이데이(May Day)의 탄생

이민의 물결과 게토(ghetto)문화

운디드니(Wounded Knee)를 기억하라

미국, 하와이를 탈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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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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