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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동기동창이면 꽤 친해야 하는데, 워낙 해외로 떠돌았던 시절이 앞뒤로 길다보니 친하게 지내는 녀석들은 몇 안된다. 그럼에도 딱히 친하지 않았던 동기동창 녀석이 나랑 술 마신 다음날 서울을 떠나 강원도 산자락을 떠돌다가 설악산에서 투신했을 때, 그 녀석 영정 앞에서 무너졌었다. 그래서 안다. 자신이 모셨던 분이 억울하게 구천을 떠돌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세상을 향해 하고 싶은 이야기들은 아주 많을게다. 



2006년 유엔 총장 경선에서 스리랑카 후보의 사퇴를 설득한 배후가 고(故) 성완종 전 경남 기업 회장이라는 증언도 함께 전해졌다. 반 전 총장의 유엔 임기 시작 다음 해인 2008년엔 그의 동생 기상씨가 경남기업 고문으로 취직했다.

노컷뉴스 기사 발췌 <링크>



2009년 스리랑카 내전 당시 반기문 전 UN사무총장이 민간인 유혈사태 개입에 미온적이었던 이유가 과거 스리랑카로부터 받은 조력 때문이 아니겠냐는 주장을 했다는 성완종 회장 측근의 심정은 사실 그래서 이해가 된다.


대한민국에서 기업한다는, 국제적인 사업한다는 사람들치고 자신의 영향력을 과장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당장 커피값이 아쉬운 사람들도 강남 어디 커피숍에서 몇 백억, 몇 천억의 사업을 이야기하며 외국 정상과 찍은 사진을 자랑하는데, 하물며 제대로 된 사업들을 꽤 진행했던 성회장은 어땠겠나.


하지만 이런 주장은 반총장이 사무총장이 되던 그 즈음의 상황, 경쟁자들, 그리고 스리랑카의 국제정치 상황을 조금 아는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안타까워하고 끝낼 이야기다. 사실과 너무 동떨어진 이야기니까.



1. 당시 경쟁자들은 누구였나?


인도 출신의 샤시 타루르 유엔 사무차장, 제이드 라드 알 후세인 유엔 주재 요르단 대사, 수라키앗 사티라타이 태국 부총리, 자야나타 다나팔라 스리랑카 대통령 고문, 바이라 비케 프레이베르가 라트비아 대통령, 그리고 아슈라프 가니 카불 대학교 총장, 이들이 반기문의 경쟁자들이었다. 하나 같이 만만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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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the guardian



먼저 아슈라프 가니(Ashraf Ghani) 당시 카불 대학교 총장은 1991년부터 세계은행에서 일했다.  그는 동아시아, 남아시아에서 사회 변화와 사회 개혁이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연구했고 중국, 인도, 러시아에서 개발 프로젝트, 연구 개혁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사람이다. 2002년 6월부턴 아프간 과도정부 재무장관을 맡았으며 2013년엔 포린폴리시와 프로스펙트지가 온라인 여론조사로 선정한 '세계 100대 지성'에 2위에 오르기도 했다. 그리고 이 분, 지금은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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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The Telegraph



바이라 비케 프레이베르가(Vaira Vīķe-Freiberga) 당시 라트비아 대통령은 7살때 라트비아를 떠나 캐나다 맥길대학교에서 심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5년부터 98년까지 33년간 몬트리올 대학교 심리학과 교수이자 라트비아 민속학자로 활동했다. 그녀는 1998년에 귀국해 다음해인 99년 6월에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고 2003년 6월엔 재선되었다. 재임기간 중 라트비아의 NATO와 EU가입을 추진해 2004년 회원국이 되는데 크게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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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arab news



제이드 라드 알 후세인(Zeid bin Ra'ad al-Hussein) 유엔 주재 요르단 대사는 요르단의 왕자로 국제사법재판소를 만드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국제사법재판소가 만들어진 후 회의의 첫 번째 의장이었으며 유고 내전에 투입된 UN평화유지군의 정치담당자로 일하기도 했었다. 이 경력들 덕택에 반기문 사무총장은 그를 UN인권고등판무관으로 지명했다. 마약 사범과 폭력사범 소탕작전이라는 이름으로 필리핀에서 벌어지고 있는 학살극을 두고 두테르테 대통령을 살인혐의로 기소해야 한다고 해서 한국 뉴스도 잠깐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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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The Indian Express



인도의 샤시 타루르(Shashi Tharoor) 유엔 사무차장은 22살인 1978년에 UN난민고등판무관실의 스텝으로 경력을 쌓기 시작해 거의 30년간 유엔의 여러 기구에서 경력을 쌓은 국제 관료였다. 여러 권의 베스트셀러를 포함해 50권이 넘는 책을 썼다. 나이 마흔에 UN의 사무차장에 발탁되었다면, 어느 정도 천재인지 짐작하실 수 있을까? 그는 2007년 1월 UN을 떠나 인도로 돌아가서 외무부장관, 인적자원개발부 장관을 거쳐 지금은 케랄라 주를 대표하는 인도의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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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Asian Correspondent



수라키앗 사티라타이 (Surakiart Sathirathai) 태국 부총리는 1995년 태국의 최연소 재무부 장관으로 태국에서의 정치 생활을 시작했다. 6년 후, 당시 탁신 총리에 의해 외교부 장관을 역임한 그는 2005년 부총리가 되었다. 현재는 AsianSIL(Asian Society of International Law)의 대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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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Sri Lanka BRIEF



자야나타 다나팔라 (Jayantha Dhanapala) 스리랑카 대통령 고문은 1984년 주 스위스 스리랑카 대사로 외교관 경력을 시작해 영국, 중국, 미국, 인도 대사를 역임했다. 1997년에는 코피 아난 당시 UN사무총장에 의해 UN 개혁을 위한 담당자로 지명되어 1998년부터 2003년까지 소화기, 대인지뢰, 확산중지를 위해 활동했다. 2004년부터 2005년 사이에는 스리랑카 평화협정 사무국의 사무총장으로 활동했으며 지금은 마이트리팔라 시리세나(Maithripala Sirisena) 대통령의 외교 고문이다. 


이 양반들, 국제기구에서의 짬밥도 그렇지만 성과도 많이 내놓았다. 고립된 것이나 다름없던 세계최빈국의 직업 외교관으로 시작해 세계 20위권의 경제력을 가진 국가의 외교통상부 장관에 오른 사람이라 하더라도 상대하기엔 버거운 경쟁자들이었다.
 
하지만 화려한 이력의 경쟁자들보다 더 주목해야 할 것은 당시의 상황이었다. UN상임이사국들, 특히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자기가 뭘 하려고만 하면 훼방을 놓는 코피 아난 당시 UN사무총장보다는 훨씬 더 고분고분한 사람을 찾고 있었고, 중국은 아시아 출신의 사무총장이 나와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었다. 


이런 미국의 입장에선 아슈라프 가니, 제이드 라드 알 후세인, 샤시 타루트는 가장 먼저 찍어내야 하는 후보였고, 코피 아난 전 사무총장이 뽑은 자야나타 다나팔라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을게다. 한편 중국 입장에선 바이라 비케 프레이베르가는 해당 사항이 없는 후보였다. 아시아 출신인 수라키얏 사티라타이는 2006년 9월 발생한 태국 쿠테타 때문에 태국으로부터 전적인 지원을 받기 어려운 위치에 있었다. 


판이 이렇게 돌아가고 있는데 한국의 한 기업인이 스리랑카 대통령을 독대해서 반기문 당시 외교통상부 장관을 UN사무총장으로 밀어달라고 한 것이 힘을 얻기나 했을 것 같은가?



2. 프로페셔널 우려러


반총장의 외교관 경력은 1970년 5월 시작된다. 그런데 유신 시절은 물론 전두환 정권 시절까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외교'란 딱 두 가지만 의미했다. 


1.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로 인정 받는 것
2. 미국이 시키는 것 하기


자국민과 자국산업 보호, 세계평화에 기여 같은 것은 1990년대 초반까지 우리 외교에 해당되지 않는 영역이었다. 우리가 UN 회원국이 되었던 것이 겨우 1991년의 일이다. 해외여행 자유화 이전이라 여권이라는 것 자체가 특수 신분증이던 1989년까지 해외로 나간 교민들이 몇이나 된다고 교민 안전을 따졌겠는가.


외교의 한 축인 원조도 비슷했다. 원조를 받다가 원조를 제공하는 나라가 된 것도 1991년 4월에 한국국제협력단(Korea International Cooperation Agency, KOICA)가 설립되면서부터였다. 그러니 대한민국이 외교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이라도 하기 시작했던 건 이제 20년 조금 넘는 셈이다. 


이런 상황이라 외교관인데도 세계 외교의 주요 언어인 불어조차 못하는 사람들이 숱했다. 반총장 역시 불어를 거의 하지 못한다. 불어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최초의 UN사무총장이라는 타이틀이 붙었던 것은 그쪽에선 꽤나 말 많이 나오는 사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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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 수 있는 외국어도 하나 밖에 안되는데다, 존나 형이상학적인 미션과 아무 생각 없어도 되는 미션 둘만 하면 되던 20여년을 보낸 분이다. 이런 분이 상당한 전투력을 가진 스리랑카 정규군과 타밀 반군(Liberation Tigers of Tamil Elam, LTTE)간의 내전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사건을 해결하길 바라는 게 말이 되는 이야기인가. 더군다나 타밀반군은 91년에 자국 내전에 개입했다고 인도 총리를 암살한 적도 있는, 국제테러리스트 중에서도 한 칼 하는 조직이었다.


분쟁마다 멍 때리다가 'I condemn~'(나는 규탄합니다~), 혹은 'I have a big concern about~'(나는 심히 우려합니다)으로 시작하는 성명서만 나왔던 것은 그 이상의 활동을 해본 적 없는 오래된 한국 외교관의 한계였다고 보는게 맞다. 개입을 하려고 하면 책임져야 할 문제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나마 반총장이 의욕적으로 추진하던 것들 중에 하나가 UN Global Compact 였다. 유엔이 추진하는 지속균형발전에 기업들의 동참을 장려하기 위해 99년 코피 아난 UN사무총장이 발의했던 것으로 2006년 11월 이후 반기문 사무총장의 중점 추진 아젠다 중에 하나였다. 그런데 문제는 이걸 국내에서 이야기하고 다녔던 분이 2007년 대선 후보로 나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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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크>



문국현. 2007년, 대선이 있던 바로 그 해에 유한킴벌리 문국현 대표는 유엔글로벌컴팩트 정상회의에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발표까지 했었다. 이 분이 은평구에서 이재오 의원을 이겼던 것 가지고도 처절하게 응징했던 MB정권이 글로벌 컴팩트에 화답했을 리가.


반 총장의 업적 중 2011년 아랍의 봄 초기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려고 했던 것은 꽤 높이 평가해줘야 한다고 본다. 적어도 같은 실수를 안하려고 했다는 점에선. 물론 미국이 반군을 지원하고 러시아가 정부군을 지원하는 시리아 같은 상황에서 멍 때리고 있었던 것은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는 우주 명언의 관점에서 볼 때 그의 인간미를 대방출하는 총체적 실패라고 하겠다. 


그나마 흠잡을 것 없는 유일한 성과라고 할 수 있는게 UN기후변화협약이었는데, 이건 뭐… 미국의 새 황상께서 기후변화란 사기(hoax)라고 하고 계시는 판이니 그 성과도 온전히 챙기긴 힘들 것으로 보인다.



3. 개입이란


26년 간 계속되던 스리랑카 내전은 2009년 5월 18일에 종전됐다. 하지만 LTTE가 패배를 선언했던 것은 그로부터 두 달이 넘은 7월 22일이었다. 종전되기 직전부터 LTTE가 패배를 선언한 7월 22일 사이 수 개월동안 최소 4만명 이상의 무고한 타밀인들이 스리랑카 정부군에 의해 학살된 것으로 추정한다. 


이런 일이 벌어지면 국제적인 제재 조치가 바로 떨어진다.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섬유 쿼터였다. 개발도상국가들 중에서도 가난한 나라들에 주는 섬유쿼터를 없애버렸다. 옷 만들던 회사들은 모조리 스리랑카를 떠났다. 


2012년 9월 스리랑카에서 58차 영연방 회의(Commonwealth Parliamentary Association)이 열렸을때, 대부분의 영연방 국가 원수들은 스리랑카 대통령 라자팍사를 만나려고 하지도 않았다. 나도 스리랑카에 있었는데... 아, 볼만했다. 캐나다 총리와 호주 총리는 타밀 난민촌으로 직행했다. 이에 분노한 싱할리 민족주의 영자신문들은 최소 4만명의 목숨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라자팍사 대통령을 마치 고난 받는 선지자 비슷하게 묘사하는 사설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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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2016년 4월 7일, 라닐 위크레메싱게 (Ranil Wickremesinghe) 스리랑카 총리가 베이징을 방문했을때, 시진핑 주석과 리커창 총리 등 중국 지도부는 3군 의장대 사열까지 포함한 최고 수준의 의전을 했다. 이런 환대는 스리랑카 언론에 어떻게 보도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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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이런 환대를 하는 이유, 군사적인 것이다. 구글 어스를 켜고 스리랑카 옆의 몰디브 밑으로 쭈욱 내려가다보면 차고스 제도(Chagos Archipelago)라고 섬들이 나온다. 이 제도에서 가장 큰 섬이 디에고 가르시아 섬이다. 인도양, 동부 아프리카와 중동, 인도네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커버하는 전략공군기지 Camp Justice가 있는 바로 그곳이다. 아프가니스탄 전 당시 탈레반 잡겠다고 B52와 B2 폭격기도 바로 여기서 출발했다. 


스리랑카는 디에고 가르시아섬과 중국 본토 사이에 있다. 그러니 여기다가 중국이 이지스 함대를 뻔질나게 출동시킨다면 USCENTCOM(미군중부사령부)과 USPACOM(미군태평양사령부) 사령관 둘을 골아프게 만들 수 있다. 


게다가 스리랑카는 중국의 에너지 수송로 한 가운데에 있다. 이른바 진주목걸이 (String of Pearls) 또는 진주사슬이라고 불리는 아프리카, 중동, 동남아시아와 중국을 잇는 해상수송로의 한 가운데다. 그래서 서방과의 관계가 틀어질 대로 틀어졌을 때, 중국은 세게 배팅했다. 


2014년 9월 스리랑카를방문한 시진핑 주석이 라자팍사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통해 총 40억 달러의 직접 투자 계획을 밝혔던 것. 사실 중국은 그전에도 푸탈람에 화력 발전소 3기를 개발 원조로 지어줬고, 반다라나이케 국제공항에서 스리랑카 제1의 도시 콜롬보를 잇는 스리랑카의 두 번째 고속도로인 E03번 고속도로를 건설할 때도 펀드를 제공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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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MW급 3기가 돌아가는 푸탈람 화력발전소



라자팍사 대통령 재임기간 (2005~2015)동안에 중국이 스리랑카에 제공한 차관만 47억달러였다. 그리고 중국은 이 중 상당수를 중국 기업이 스리랑카의 사회간접자본을 건설하는 자금으로 전환하겠다고 약속했다. 


물론, 중국은 돈을 깔끔하게 주는 나라가 아니다. 개발원조로 지었던 푸틀람의 화력발전소는 국제석탄 가격의 3배가 넘는 원료비를 스리랑카 전력청이 지불하도록 하는, 사실상 EPC (Engineering, Procurement, Construction) 사업이었다. 고속도로를 비롯한 화력발전소 건설같은 대규모 공사에서는 중국의 노동자들이 스리랑카로 못 하나까지 몽땅 다 갖고 와서 지었다. 그나마 제대로 지은 것도 아니었던지 푸틀람 화력 발전소는 심심하면 정지했다. 


대규모 사회간접자본 확충과 함께 일어날 줄 알았던 스리랑카인들의 고용 규모가 잠잠하자, 꼭지가 돌았던 라자팍사 대통령은 종종 중국인 집단 합숙소를 털어서 TV로 내보냈었다. 30여평 정도 되는 아파트 한 집에 15명 이상이 모여 살고, 그 노동자들을 상대로 하는 매춘여성까지 본토에서 왔다는 것을 고발하는 프로그램이 종종 스리랑카 TV를 장식했다. 그럼에도 인도에 비하면 아낌 없이 주는 나무였던 중국을 향해 스리랑카는 기울 수 밖에 없었다.


적어도 ‘개입’이란 걸 하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 대통령 좀 만난다고 아무거나 할 수 있는 거 아니라고. 



4. 못한 거 이야기하지 말자


이 이야기, 나만 아는거 아니다. 반 총장을 차기로 만들고 싶어서 안달이 난 쪽에서도 이 지역 전문가들 숱하다. 이런 상황에서 어림없는 이야기들이 반 총장에 대한 공격거리로 활용되면 좋을 거 하나도 없다. 거기다 반총장은 그의 시대가 가질 수 있었던 최상급 외무 공무원이었다. 


물론 이 최상급 공무원은 그보다 45년전에 아시아 최초의 UN사무총장이 되었던 우 탄트와 비교하면 한숨만 나오는 수준이다. 개인의 품격과 덕성, 그리고 비전. 모든 면에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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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UN



우 탄트는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에는 긴급 중재에 들어가 미소가 서로 체면을 세운 상태로 해결의 실마리를 만들어냈다. 인도주의적 구호활동에 대한 안보리나 유엔총회의 결의안을 기다리거나 성명서만 읽지 않고 바로 구호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와 수차에 걸친 중동전쟁 기간 동안 UN사무총장을 맡았던 우 탄트가 가졌던 운신의 폭은 반 총장의 그것보다 훨씬 좁았다.


그럼에도 그 시대의 한계를 인정하는 선에서 이야기를 꺼내야 한다. 상대 후보에 대한 이런 식의 공격이 최소화되지 않으면, 그리고 새로운 세상이 어떻게 가능하다는 것을 제대로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선거는 망한다. 2012년의 우리가 그랬고 2016년의 미국 민주당이 그랬다.


2012년 대선에서 인구의 수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영감님들 꼭지를 돌려놨던 것은 '다카키 마사오의 딸'이라는 공격이었다. 그것을 자신의 의지로 자긍심을 가질 수 없었던 시절에 대한 경멸로 받아들인 이들이 몰려가 현재 청와대 임대계약 만료가 코 앞에 있는 그분을 거기로 보냈었다. 그것을 뛰어넘어야 한다.


이번 설 연휴에 만들어진 어르신들의 여론이 이번 대선 투표일까지 거의 그대로 연결될게다. 이런 판에 이런 국제관계도 엉망인 기사들에 낚이면 되겠는가?






거의 모든 재난으로부터 살아남는 법의 저자이기도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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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국제부 
Samuel Seong
트위터 @ravenclaw69

편집 : 딴지일보 인지니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