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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미국의 관계가 완전히 틀어지게 된 계기가 언제였을까? 여러 가지 의견들이 나올 수 있겠지만, 대부분 그 의견이 모아지는 것이 ‘인도차이나’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일본은 1940년 9월 삼국동맹이 체결되기 직전에 북부인도차이나를 점령했다(나름 형식을 갖췄지만, 침략인 건 사실이다).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는 중국 전선의 반전을 위해(장제스에 대한 원조루트를 차단하기 위해), 또한 인도차이나 지역의 자원을 획득하기 위해. 일본은 칼을 뽑아들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일본은 국제사회의(구체적으로 미국) 눈치를 봤다.


그러나 1941년 7월 일소중립조약을 체결하자마자 일본은 인도차이나의 ‘나머지’도 먹어버린다. 남부인도차이나에 대한 침공과 점령이었다.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1941년 7월 25일 미국은 일본의 재미자산을 동결시켰고, 뒤따라 영국, 프랑스, 캐나다, 포르투갈, 네덜란드도 이에 동참했다. 그리고 대망의 1941년 8월 2일 미국은 일본에 대한 석유금수조치를 선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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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일본이 조금만 냉정했다면, 태평양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점령했던 인도차이나를 반환하고, 병력을 뒤로 물렸다면 미국도 전향적인 자세를 취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일본의 분위기는 ‘전쟁 전야’였다.


당시 군령부총장이었던 나가노 오사미(永野修身)와 히로히토 덴노의 대화를 잠깐 살펴보자.


“전쟁이 일어날 경우, 석유공급원을 잃으면 해군의 석유비축량이 2년 분이므로 1년이나 1년 반이면 석유가 바닥나버립니다. 따라서 지금이 행동에 나서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미국과 싸워서 승산이 있다는 것인가?”


“이길 수 있을지 어떨지는 사실 막연합니다만, 달리 살 길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세간에서 말하는 자포자기의 싸움이 아닌가?”


덴노가 석유금수조치에 대해 질문했는데, 나가노 오사미가 전쟁으로 화답한 것이다. 여기서 무서운 건 ‘달리 살 길이 없다고 생각합니다.’라는 자포자기식 발언이다. 조금만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인도차이나에서 병력을 빼고, 미국과 교섭을 한다면 대화의 여지는 충분히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극단적인 선택만을 말하고 있었다.


이건 미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미국은 석유, 철강 제품의 수출을 전면 중단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수입품 반입 역시 전면 금지 시켰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당시 루즈벨트 대통령은 주미 일본 대사였던 노무라를 불러 정중한 경고를 날렸다. 그 요지는 간단한데,


“지금까지 미국이 일본에 석유를 수출한건 일본이 석유 때문에 전쟁을 일으킬 것 같아 이를 방지하기 위해 석유 수출을 허용했다. 그런데 석유는 석유대로 받고, 전쟁은 전쟁대로 하겠다는 건가? 난 더 이상 우리 국민들을 설득할 자신이 없다. 일본 때문에 우리도 고무 수입에 차질을 빚고 있다. 지금 일본의 행동은 미국과 전쟁을 하자는 걸로 보인다. 내 말이 맞는 건가?”


노무라 기치사부로(野村吉三郞) 대사는 일본 해군 출신이다. 최종 계급이 대장 자리에 있었던 인물이니 그 성격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외교와는 거리가 있는 인물이었다(실제로 영어도 잘 구사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일본 정부는 대미 협상을 위해 부랴부랴 구루스 사부로(来栖三郎)를 파견해 대미협상을 시도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외교관이 노력을 한다 하더라도 본국이 ‘의지’가 없다면, 그 노력은 빛이 바랠 뿐이다.


이 당시 일본은 전쟁을 향해 한발 한발 다가가고 있었다.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라고 해야 할까? 1941년 9월 6일 도쿄에서 히로히토 덴노 주재 하에 일본의 정치, 경제, 군부의 각 수뇌들이 모였다. 어전회의였다. 이 회의의 분위기는 시작 전부터 무거웠다. 이 회의가 앞으로의 일본의 장래와 국가미래를 결정지을 하나의 분수령이 된다는 사실을 참석자들은 모를 리 없었고, 분위기는 시종일관 무거웠다. 이때 결정된 것이 바로 <정세 추이에 따르는 제국 국책 요강>과 대미 외교에 있어서의 <최소의 요구>에 대한 리스트였다.


<정세 추이에 따르는 제국 국책 요강>


1. 자존자위를 달성하기 위해 대미(네덜란드, 영국 포함) 전쟁을 불사할 결심아래, 10월 하순을 목표로 모든 전쟁 준비를 끝마친다.

2. 제국은 이와 병행하여 미영에 대한 모든 외교수단을 다하여 제국의 요구 관철에 노력한다.

3. 전기 외교 교섭이 10월 상순까지 관철되지 아니할 경우, 즉시 대미 개전을 결의한다.


여기에 따른 외교적 <최소의 요구>


1. 중국에 대한 분쟁 해결에 대해서 미국과 영국의 불개입

2. 버마 루트의 폐쇄

3. 장개석에 대한 원조 중지

4. 일본의 원자재 획득의 자유


고노에 후미마로(近衛 文麿) 총리가 다시 전면에 나섰다. 미국과의 마지막 협상에 나서겠다며, 나선 인물이 등장한 것이다(9월 6일 어전회의 전에 움직였다). 덴노와 군부로서도 나쁠 건 없었다. 그들도 개전하기 전 명분 쌓기가 필요했고, 만약 잘 성사된다면 피를 흘리지 않고 일본의 ‘권익’을 얻을 수도 있다. 덴노는 고노에 총리의 대미협상을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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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상


고노에가 갑자기 미국과의 협상에 나선 이유가 뭘까? 이전까지의 그의 모습은 게으름뱅이 귀족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어려운 일이 닥치면, 우선 피하고(어려운 일이 있으면 잠자는 것이 습관이었다), 덴노의 친척이라는 신분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레 몸에 익힌 교묘함은 언제나 ‘꼼수’를 찾아 나서는 전형적인 모사꾼의 이미지까지 보여줬다. 그런 그가 갑자기 의욕을 불태웠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대로 가다간 나라가 망한다.”


중일전쟁이 발발했을 때만 하더라도 강경론자의 모습을 보이던 그가 왜 이렇게 바뀐 것일까? 그건 바로 독일의 對 소련전 개전 때문이었다. 그는 언젠가는 추축국 동맹에 소련도 참여할 것이라 믿고 있었다. 독일, 소련, 이탈리아, 일본. 이 4개국이 손을 잡는다면, 미국도 함부로 덤벼들지 못할 것이라 믿고 있었다. 그런데, 독일이 소련을 공격하면서 고노에의 생각은 물거품이 됐다. 이는 일본에 대한 배신행위라고까지 생각한 게 고노에였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미국과 전쟁을 한다? 그건 일본의 멸망이었다.


고노에는 주일 미 대사를 찾아 루즈벨트와의 정상회담을 부탁한다. 실제로 고노에는 루즈벨트와의 협상을 위해 일본으로선 상당히 양보한 ‘협상안’까지 따로 준비하고 있었다. 이때가 1941년 8월 7일이었다.

 

고노에는 간곡하게 정상회담을 요청했다. 이미 그는 정상회담의 장소로 알래스카의 주노(Juneau)를 염두에 두고, 이를 미국 측에 제안했다. 아울러 요코하마 항에 통신센터 역할을 할 수 있는 니타마루호를 요코하마 항에 대기시켰다며 날짜만 정해달라고 앙원(仰願)하고 있었다.  

 

문제는 당시 미국은 고노에의 회담제안을 거절했다는 것이다. 미국의 국무장관이었던 코델 헐(Cordell Hull)은 자신의 회고록에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일본이 회담을 먼저 개최하고 자세한 사항은 회담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결정하자고 말한 것은 자기 나름대로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일본은 우리를 회담장으로 밀어넣기만 하면 총론적인 성명서는 후에 발표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으며, 그렇게만 되면 그 성명서를 중국 문제의 해결이나 자기들이 별도로 추구하는 사안에 맡게 활용할 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루주벨트 대통령이 성명서의 잘못된 점을 하나하나 지적하지 않으면 일본은 자기들이 유리할 대로 생각한 후 미국 대통령의 승인을 받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회담은 처음부터 실패할 확률이 높았다. 일이 만약 그렇게 진행되면 일본 군부는 모든 잘못을 미국에 떠넘기고 태평양 전쟁을 준비할 계획이었다."

 

헐은 당시 일본의 외교노력을 믿지 않았다. 왜 그랬던 걸까? 이유는 간단하다. 당시 미국은 일본의 외교암호들을 모두 해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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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사진


당시 일본 대사관에서 쓰던 암호는 “J시리즈”의 암호였다. 독일 정부가 일본 대사관의 암호가 해독되고 있음을 경고하자(독일의 암호도 뚫렸지만) 일본 정부는 이 J시리즈의 암호를 이리저리 바꿔가며 사용했는데, 일례로 1941년 3월1일에는 J17-K6 암호가 갑자기 J18-K8로 바뀌더니, 8월이 되자 J19-K9으로 바뀌었다. 그럼 미국은 이 바뀌는 암호들을 다 해독했을까? 그렇다 다 해독해 냈다. 이 암호 해독 덕분에 일본과 미국의 외교 교섭은 틀어지게 된다. 당시 미국은 일본의 협상노력이 ‘외교적 수사’일뿐 실제론 전쟁을 위해 시간을 버는 행위라고 보고 있었다. 게다가 2년 전 연합국은(아직 미국은 참전 전이지만) 히틀러가 영국의 체임벌린 수상을 농락했었던 걸 기억하고 있었다. 미국은 제2의 체임벌린이 되고 싶지 않았다.


당시 헐 장관의 심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발언이 있는데, 그가 자신의 보좌관에게 했던 말이다.


“무력 이외에는 일본 사람들을 막을 방법이 없다. 문제는 유럽에서 군사적인 충돌이 해결될 때까지 우리가 얼마동안 이런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냐이다. 일본 사람들의 말은 단 한마디도 믿어서는 안 된다. 다만 그들의 행동개시를 지연시키기 위해서 믿는 것처럼 보일 필요가 있다.”


이미 미국은 일본과의 전쟁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협상이 진행될 수 있을까? 고노에 총리의 입지는 점점 줄어들었고, 마침내 1941년 9월 18일 육군 소장파 장교들이 고노에 총리를 암살하려 한 저격 미수 사건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 얼마 뒤인 10월 6일 고노에 내각은 총사퇴를 했고, 그 뒤를 이어 도조 히데키가 수상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 五十六)


영화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를 보면 그는 가족과 부하들에게 인자하고, 국가를 사랑하며, 대국을 볼 줄 아는 넓은 시야를 가진 군인으로 그려져 있다. 일본인들이 만든 영화이니 당연한 것이겠지만, 조금 더 ‘나갔어도’ 되지 않았을까란 아쉬움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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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라와 비서에게만은 위인(偉人)은 존재하지 않는다.”


란 말이 있다. 아무리 위대한 영웅이라도 개인 사생활로 들어가면 허점이나 실수가 드러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는 당연한 것이다. 위대한 영웅 이전에 사람이지 않은가? 그들에게도 인간적인 실수나 감추고 싶은 치부가 있는 것이 당연하다. 아니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 동양권 문화에서는 위인이란 존재는 곧 성인(聖人)의 다른 말이기에 위인들의 일탈이나 치부에 대해서 알레르기 성 반응을 보인다. 그리곤 이를 묵살하거나 은폐한다.


그런 의미에서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예외는 아니다(한국인 입장에서 그를 위인으로 바라보는 건 아니지만, 일본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위인이 맞다).


그는 기인(奇人)이었다. 연합함대 기함인 나가토에서 해군 사열을 받은 직후 ‘낮잠’을 자기 위해 담을 타고 집에 들어가기도 했고, 그 시대의 평균적인(?!) 여성편력도 자랑했다. 당시 긴자의 게이샤들과 마담들은 실세였던 육해군의 고위 장교 혹은 장래가 촉망되는 장교들에 한해서 ‘실비’로 술과 여자들을 제공했는데, 야마모토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확인된 것만 3명의 여인들을 데리고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은 첫 만남 때 나이가 12세였다(게이샤 훈련생이었을 무렵에 그녀를 만났다. 이 정도면 범죄다). 그는 자신들의 여인들을 자랑했고, 소문이 새어 나가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가 사망한 직후 그를 추종하던 해군 장교들은 게이샤를 찾아가 야마모토가 건넨 연애편지를 모두 회수(압수란 표현이 더 어울리겠지만)하고, 자살을 종용했다. 야마모토를 ‘군신軍神’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의 허물을 모두 지우려 했지만, 야마모토의 사생활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의 기행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돈이 없을 때에는 포커나 브리지 게임으로(한마디로 도박으로) 생활비를 충당했고, 직무 관련해서도 조금은 ‘황당한’ 짓들을 했는데, 해군 항공대를 지원한 예비 조종사들을 선발할 때는 관상쟁이와 손금 보는 사람을 고용해 예비 조종사들을 검증했고, 물로 휘발유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기꾼에 속아 실제로 연구비를 대주기도 했다. 압권은 히로히토 덴노와의 만남에서인데,


진주만 공격에 성공한 뒤 히로히토는 야마모토를 만나 성공을 치하했는데, 야마모토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정말로 나를 기쁘게 해주려면 싱가포르에서 카지노를 운영할 수 있는 허가증이나 내주면 더 좋았을 걸.”


보면 알겠지만, 당시 군인들과는 약간 다른 정신세계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 그가 미국과의 전쟁에 대해서만은 냉철한 현실인식을 보여줬다(전쟁 찬성파들을 회유하기 위해 독일과 추축국들을 팔아가면서까지 노력하는 모습도 보였다).


“미국과 싸우기 위해서는, 일본은 세계 전체에 도전하는 의지를 가지고 싸워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가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맺었다고 하나 일단 전쟁이 발발하면 소련이 우리의 배후에서 공격하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하겠는가? 일이 이 지경이 된 이상 나는 최선을 다하겠지만, 아마 내 기함 나가토에서 싸우다가 죽을 것 같다. 그러는 동안 도쿄는 불바다가 되겠지.”


-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진주만 기습작전을 준비하며 남긴 메모


“목재와 종이로만 지어진 일본의 도시들은 쉽게 타 버릴 것이다. 육군은 허풍을 치고 있지만 일단 전쟁이 터져 공습이 일어나면 어떤 사태가 일어날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해군 비행기들이 충돌해서 해상에 기름이 뿌려지면 불이 물 위에서 어떻게 타는지 보지 못했느냐? 말해 주마, 그것은 물 위의 지옥이다.”


-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보좌관에게 말했던 내용


“내가 보건대 미래의 전쟁에서 해군 작전의 주요 과제는 섬들을 점령하여 활주로를 재빨리 닦는 것이다. 되도록 일주일 안에 항공부대를 설치하여 제공권을 확보한 다음 다른 해상의 제공권도 차츰 확보해 가는 것이 가장 핵심 전략이다.”


-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태평양 전쟁 개전 전에 예측한 태평양 해전 전개 방향

 

“미국인의 강한 정신력과 과학적 사고방식을 일본인은 따라잡을 수 없다. 일본은 미국의 적수가 될 수 없다.”


- 1940년 9월 18일 동경에서 열린 동창회에서 한 발언


그는 앞으로 벌어질 전쟁에 대해서 정확히 예측하고 있었다. 그가 태평양에서의 해군 작전과제에 대해 말한 대목은 이후 맥아더 장군이 시행했던 개구리 점프(Frog jump) 전략개념과 놀랍도록 유사했다(물론, 지리적 특성과 현대전의 전장 상황을 고려한다면 야마모토만 떠올릴 전략은 아니지만 말이다).


이렇게 미국과의 전쟁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던 그가 진주만 기습 작전을 준비했다는 것이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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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1. 전쟁국가 일본/ 살림출판사/ 이성환

2. 호호당 선생의 ‘프리스타일’

3. 세계전쟁사/ 육군사관학교 전사학과/ 황금알

4. 러일전쟁과 을사보호조약/ 이북스펍/ 이윤섭

5. 조선역사 바로잡기/ 가람기획/ 이상태

6. 다시 쓰는 한국근대사/ 평단문화사/ 이윤섭

7. 대본영의 참모들/ 나남/ 위텐런 지음, 박윤식 옮김  

8. 나모위키

9. 쇼와 16년 여름의 패전/ 추수밭/ 이노세 나오키 지음

10. 『중일 전쟁』 용, 사무라이를 꺾다/ 미지북스/ 권성욱 지음

11. 나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이었다 / 서해문집/ 김효순 지음

12. 석유전쟁/ 매일경제신문사/ 정기종 지음

13. 우리의 눈으로 본 일본제국 흥망사/ 궁리/ 이창위 지음

14. 연합함대 그 출범에서 침몰까지/ 가람기획/ 박재석, 남창훈 지음

15. 프레시안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24246

16. 일본의 이중권력, 쇼군과 천황/ 살림출판사/ 다카시로 고이치

17. 히로히토 신화의 뒤편/ 을유문화사/ 에드워드 베르 지음

18. 일본의 가장 긴 하루/ 가람기획/ 한도 가즈토시 지음





1부 

[러일전쟁]


2부

드레드노트의 탄생

1차 세계대전, 뒤바뀐 국제정치의 주도권

일본의 데모크라시(デモクラシー)

최악의 대통령, 최고의 조약을 성사시키다

각자의 계산1

8년 의 회, 던 축 

일본은 어떻게 실패했나2

만주국, 어떻게 탄생했나



외전

군사 역사상 가장 멍청한 짓

2차대전의 불씨

그리고, 히틀러

실패한 외교, 히틀러를 완성시키다

국제정치의 본질



3부

태평양 전쟁의 씨앗1

태평양 전쟁의 씨앗2

도조 히데키, 그리고 또 하나의 괴물

일본을 늪에 빠트린 4명의 '미친놈'

대륙의 각성완료, 다급해진 일본

대동아(大東亞)의 환상에 눈 먼 일본

일본, 건드리지 말아야 할 걸 건드렸다 1

일본, 건드리지 말아야 할 걸 건드렸다 2

일본의 패배

일소중립조약이 파기되던 순간 1

일소중립조약이 파기되던 순간 2

천조국, 움직이다



4부

왜 일본은 미국과 전쟁을 하려고 했을까

신성불가침으로 만들어진 권력, 덴노(天皇)

일본의 반인반신, 덴노(天皇)의 오판과 태평양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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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더가 디비주는 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


조약, 테이블 위의 전쟁

러시아 vs 일본 한반도에서 만나다





펜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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