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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0. 21. 월요일

알려지지 않은 주시자





 





1. 사형은 반드시 없어져야 하는가


기사를 세 개 정도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미국에서 얼마전에 집행된 사형 장면을 담은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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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2013년 9월 11일


민간인 77명을 잔혹하게 살해한 살인범이 오슬로 대학의 강의를 듣는다는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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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013년 9월 13일


마지막으로 중국을 분노하게 한 어느 노점상의 안타까운 사형 집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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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013년 9월 25일


나는 사형제도에 찬성하는 입장이고 엄격하게 제한된 사형 집행은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첫 번째 기사에 대해서는 조금 위화감을 느낀다. 나는 사형에 찬성하지만 사형이 미화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공지영 작가 님의 소설이 원작인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보면 한 사형수가 두 명의 교도관의 인도를 받으며 조용히 형장으로 가는 장면이 나온다. 실제로 사형을 집행할 때 그렇게 담담하게 형장으로 가는 사형수는 극히 드물다. 가능한 한 모든 노력을 다해 발버둥치는 경우가 더 많으며 한 명의 사형수를 형장으로 이동시키는 데 20명에 가까운 인원이 동원되는 경우도 많다. 국가가 행사해야 하는 가장 끔찍한 폭력을 대행하는 사형 집행자(교도관)들의 고통도 아마 보통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사형은 미화될 여지가 전혀 없는 제도다. 다만 그것이 어쩔 수 없이 필요할 뿐.


두 번째 기사에 대해 나는 정말이지 조금도 동의할 수 없다. 노르웨이 국민들의 아름다운 이상과 뜻은 존중하지만 그들의 행동에 내가 동의할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이 사건이 있은 뒤 오슬로의 드넓은 광장에 모인 수 많은 시민들이 다문화주의를 지지하는 노래를 부르고 꽃을 들고 행진하며 희생자들을 추모했다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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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21년 뒤 브레이비크는 55세의 나이로 자유의 몸이 될 것이고 그에게 희생된 77명이 결코 누릴 수 없었던 평화롭고 번영한 노르웨이의 안락함을 마음껏 누리다 여생을 마감할 것이다. 혹은 그 때까지 꺽이지 않은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 다시 무장을 할 수도 있을 것이고 그렇다고 해도 76살에 다시 한번 사회로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그들이 생각하는 정의라면 나는 그 정의를 그들과 공유할 수 없다.


세 번째 기사는 사실 지난 기사 마지막 부분의 비유를 가져오자면 검이 날카로운가 무딘가의 문제가 아니라 천칭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에 더 가깝다. 엄격한 형벌을 적용할 것인가 이전에 죄가 있는지 없는지 있다면 얼마나 무거운 죄인지를 판단하는 기능부터가 삐걱거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신속하게 사형을 집행하는’ 것은 어찌보면 국가의 이름으로 이뤄지는 더 큰 범죄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사형제에 찬성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이 부분을 간혹 건너뛰거나 경시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사형은 엄격하게 제한된 상황에서 이뤄져야 하고, 집행된다 하더라도 사형수의 인권은 마지막 순간까지 최대한 존중되어야 한다.


한국의 사법 현실은 어떨까. 간단히 정리하자면 세 번째 기사보다는 많이 발전된 상태고, 이제 국가의 방향성을 첫 번째 기사 쪽으로 틀지 두 번째 기사 쪽으로 틀지 고민하고 있는 단계라고 본다. 그리고 내가 판단하기에 이미 국민적 공감대는 두 번째 기사 쪽으로 많이 기울어진 듯 하다. 그 공감대에 작은 의문부호를 하나를 던지고 이 연재를 마치겠다.



사형 폐지론의 가장 강력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잘못된 재판으로 무고한 사람이 사형을 당했을 때 이를 복구할 방법이 없다”다. 가장 통렬한 지적이고 이 가능성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사형 찬성론자도 없다. 하지만 인간의 모든 논리가 그렇듯 이것 또한 100% 완벽하지는 않다.


우선 사형 이외의 형벌의 경우에도 사후 복구가 모두 가능한 것은 아니다.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수감자가 1년 반이 지난 시점에서 병사했을 경우 20년 뒤 그 수감자의 형이 지나치게 무거웠던 것이며 징역 1년 정도가 합당했을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고 생각해 보자. 그 시점에서 그 수감자에 대해 국가가 해 줄 수 있는 보상은 사실상 거의 전무하다. 이런 것은 발생하면 안 될 끔찍한 사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사건이 징역형을 없애자는 주장의 논거가 될 수는 없다. 간혹 징역 가운데 무기징역 조차도 인권침해가 너무 심하니 형벌의 상한선은 유기징역형이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노르웨이의 이번 테러가 그 주장의 한계를 드러냈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은 아마 동의하지 않겠지.


인간은 실수할 수 있으니 차후에 복구가 가능한 선에서만 형벌을 부과해야 한다는 주장은 일견 그럴듯하지만, 그런 주장이 극단으로 치닫게 되면 결국 ‘불완전한 인간이 또 다른 불완전한 인간을 심판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라는 식의 철학적인(?) 주장으로 귀결된다. 하지만 형벌 이외에 치안을 유지할 수 있는 효과적인 대응책을 인류가 아직 찾아내지 못한 상황에서 저런 식의 주장을 하는 것은 그저 이상론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이 문제에 대해 추상적인 반론을 하자면 “인간이 쏟을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쏟아서 잘못된 판단으로 사형을 당하는 사람이 없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사형제 자체는 유지해야 한다”정도의 주장을 하게 된다. 그러면 거의 틀림없이 이런 반론이 나온다. “그건 불가능하다는 것을 당신도 알고 있지 않느냐.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고 판사도 불완전한 존재다. 사형제가 유지되는 한 언젠가는 억울하게 사형을 당하는 사람이 나올 것이고 그 사람 입장에서 당신같은 사형 찬성론자는 그저 다른 살인범과 똑같은 살인자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불완전하니까 형사재판도 불완전하다는 주장에 대한 내 기본적인 입장은 윗 문단에서 밝혔으니 여기까지 오면 추상적인 논의는 거의 다람쥐 쳇바퀴 상태가 된다.


그럼 이제 논의의 단계를 다른 방향으로 틀어보자. 추상론이 아닌 구체적인 사건에 대해서 말이다. 간단히 이야기하면 오원춘 사건의 오원춘, 영남제분 사건의 윤길자, 중곡동 주부살인사건의 서진환, 울산 자매살인사건의 김홍일이 진범이 아닐 가능성이 과연 얼마나 될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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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건들을 나열하면 반드시 듣게되는 반론은 “그런 끔찍한 일부 사건들로 논점을 흐리고 논의를 감정론으로 치닫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이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우선 형사재판은 추상적인 논리싸움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법은 실제로 발생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며 추상적인 논의들은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뤄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실제로 발생한 사건을 제대로 해결할 수 없다면 수많은 철학적 논리와 사고와 이성적인 접근법과 그것을 아름답게 정리한 논문들은 다 소용이 없게 된다. 저 사건들의 피해자들은 영화나 드라마의 주인공도 아니요, 우리가 철학적인 논쟁을 하기 위해 가상으로 설정한 어떤 사건에 텍스트로만 등장하는 사람들도 아니다. 저 사건들, 그리고 지면상 미쳐 거론하지 못한 많은 사건들의 피해자들과 그 유족들 입장에서 ‘합당한 재판’을 실현할 수 없다면, 추상적인 논의의 필요성도 크게 후퇴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주장하는 것은 ‘절도범도 사형’이라는 식의 고대 중국 같은 엄벌화가 아니다. 살인도 경우에 따라서는 최소 형량인 5년도 무거운 경우가 있고, 지금의 양형 기준인 10년-16년 정도의 기간은 대부분의 경우 그리 말도 안되게 적은 형량도 아니다. 다만 이 사건에서 사형을 언도하지 않으면 도대체 누가 사형을 받는 것인지 궁금해지는 사건들에 대해 사형을 언도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러자면 당연히 가장 끔찍한 사건들이 거론될 수 밖에 없다. 이것을 지나친 감정론이라고 비난해서는 대화가 성립되지 않는다.


만약 “저 사건들의 피해자 유족들에게는 진심으로 위로의 뜻을 표하지만 그래도 사형제도는 추상적인 관점에서 불완전하니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신다면, 드디어 우리의 논의는 투표가 필요한 단계에 도달했다고 봐도 될 듯 하다. 여기까지 오면 그 다음은 그저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어느쪽에 더 동의하는가의 문제라고 본다. 한국은 다들 아시다시피 내 주장이 소수파에 속한다.


이 문제에 대해 토론을 하다가 흥미로운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내가 들은 질문은 “불안하지 않은가?”였다.


“불안하지 않아? 국가가 언젠가 너를 ‘합법적으로’ 죽일 수도 있는 사회에 살고 있다는 게. 사형이 확정되고 난 다음에 반 년이나 일 년 정도 있다가 형이 집행되는 사회에서 산다고 생각해 봐. 어느 날 국가가 그리고 사회가 작은 실수와 확고한 신념으로 너를 범죄자로 만들어 2, 3년 뒤에 교수대에 올리고 목을 졸라 죽인 뒤 아무런 보상도 해 주지 않을 수도 있는데. 그런 사회에 산다는 게 불안하지 않아?”


내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물론 불안하지. 국가가 나를 합법적으로 죽일 수도 있다는 것. 한국은 사법살인이 실제로 있었던 나라이기도 하고. 내가 아무런 잘못도 없이 내 삶을 살아가고 있는데 어느날 국가가 나를 사형대에 올리려고 할 수도 있으니까. 그 가능성이 완전히 없진 않으니까 불안하긴 해.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정말 그렇게 불안하지는 않아. 정말 행운이지만 나는 한국의 민주화가 어느 정도 진행됐을 때 태어났으니까. 한국이 21세기인 지금 나를 죽이려면 내가 아무런 범죄도 저지르지 않았는데 나를 체포해서 조사하고 검사가 기소를 결정해야 할 거야. 지방법원, 고등법원, 대법원에 가는 동안 변호사가 나를 도울거고 나도 최대한 내 억울함을 주장하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법원에서 다 나를 억울하게도 범인으로 몰았다고 가정해 보자. 그런데 한국의 양형은 아무리 엄격했던 시절에도 한 명을 죽여서는 좀처럼 사형을 언도하지 않았어. 두 명도 경우에 따라 다르고 사형이 거의 확실시 되려면 서너 명 정도의 희생자가 있어야 하는 게 보통이었지. 내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어느 날 세 명의 사람을 죽였다는 누명을 쓰고 세 번의 재판에서 모든 판사와 검사가 치명적인 실수를 해서 나에게 사형을 언도할 확률은 물론 제로는 아니지. 그러니까 불안하기는 해. 딱 그 확률만큼만 불안해.


나도 하나 물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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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하지 않아? 너도 언젠가 범죄의 희생자가 될 수 있는데. 너는 그냥 길을 걷고 있었을 뿐인데 누군가에게 찔려 죽을 수도 있고 몇 시간씩 고문을 당해서 정신이 미쳐버린 끝에 끔찍하게 죽어갈 수도 있어. 이런 말 해서 미안하지만 니 가족이 범죄의 희생자가 될 수도 있잖아. 신문에서 초등학교 다니는 여학생이 잔인하게 강간당하고 살해됐다는 기사를 읽으면 그게 무슨 다른 세상 이야기 같겠지만 그건 몇 년 후 너의 가족일 수도 있어.


한국은 이제 사형을 좀처럼 언도하지 않고 사실 집행도 안하니까 이제 사형이 없는 국가야. 니가 아무리 억울하게 죽어도, 죽기 직전에 널 죽인 살인범을 얼마나 저주하고 미워해도 한국은 그를 사형시키지 않아. 니 가족이 아무리 끔찍하게 짓밟혀도 아무리 어이없는 이유로 평생 끔찍한 고통을 당해도, 절대로 그 범죄자는 사형을 당하지 않는다고. 형무소에서 평생 하루 세끼 밥을 먹으며 살다가 운 좋게 가석방을 받아 나오면 사회에서 다시 평화롭게 살아가겠지.


불안하지 않아? 내가 보기에 내가 국가에게 억울하게 사형당할 확률보다는 너나 나 중에 하나가 범죄의 희생자가 될 확률이 그래도 더 많을 것 같은데. 불안하지 않아? 너나 너의 가족이 어떤 고통을 당하더라도 그 범죄자는 절대로 사형을 당하지 않는 나라에서 산다는 게”


여기서 독자 제위는 한 문단으로 질문하니 다섯 문단으로 대답하는 필자 같은 친구는 만들지 않는 편이 좋다는 좋은 교훈을 얻으셨으리라 믿는다.



2. 사형제도는 반드시 유지되어야 하는가


사형 찬성론을 주장하면 반드시 듣게 되는 지적이 있다. “사형을 주장하는 자들은 그 주장을 통해 자신들이 무슨 대단한 정의를 구현하는 것처럼 굴지만 정작 그것이 범죄의 예방이나 재발 방지에는 전혀 도움을 주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법조인들은 형벌의 목적이 응보, 일반예방과 특별예방이라고 배운다. 첫 번째는 복수를 조금 어렵게 설명한 것이라 봐도 무방하다. 죄를 지었으니 그에 대해 국가가 보복을 하겠다는 것이다. 나머지 두 개는 용어가 좀 어려워 보이지만 개념 자체는 그리 복잡하지 않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일반적인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이런 죄를 저지르면 이렇게 무거운 형벌을 받게 되니 너희들은 범죄를 저지르지 마라!”라고 하는 게 일반예방이다. 어폐가 있겠지만 ‘본보기를 보인다’는 식의 이해도 가능하다. 특별예방은 추상적인 사회 구성원이 아니라 바로 그 범죄자가 본인이 다시 범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하는 기능이다. “너 다시 범죄 저지르면 이렇게 힘든 형무소 생활 다시 해야 하니까 이젠 범죄를 저지르지 마라!”하는 게 후자다.


세부적인 논의에 따라 의견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전자의 ‘본보기’를 중요시 할 경우 엄벌화 경향이 강해지기 쉬우며, 대부분의 문명적인 국가들은 그래서 일반예방 기능을 그다지 크게 강조하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것이 형벌의 가장 중요한 기능 가운데 하나라는 것은 인류의 이성이 아무리 발전해도 아직까지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범죄에 합당한 처벌이 이뤄진다는 것을 사회 구성원 모두가 이해하고 있는 것은 치안 유지의 첫걸음이다.


후자를 강조하면 대부분의 경우 지나친 엄벌화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쪽으로 의견이 기울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일종의 극단으로 기울게 되면 무고한 사람을 77명 죽이고도 세금으로 대학 강의를 들을 수 있는 사회가 된다. 그렇게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후자의 경우는 범죄자를 ‘치료’하는 쪽에 좀 더 중점을 둔다.


이쯤 되면 우리는 한 가지 질문에 봉착한다. “범죄에 대한 응징으로 사형을 집행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 일인가?”


나는 사형 집행이 타당한 사건, 사형이 집행되어야 하는 범죄자도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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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에서 이런 발언을 하는 것은 이제 상당한 비판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 되었다. 야만인 미친놈 하는 욕설부터 “당신도 결국 사람을 죽이는데 동조한 것이니 살인자나 마찬가지다”라는 지금까지 200번 정도 들어본 것 같은 예의바른 지적까지 스펙트럼도 다양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까지 인류가 사형을 포기할 정도로 이성을 발전시키지는 못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혹자는 이렇게 이야기 한다.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것은 신(특정 종교를 지칭한 발언은 아니라, 그저 초월적 존재. 자연이라도 좋다)의 일이다. 인간이 그것을 결정해서는 안 된다”


내 의견은 이렇다.


“현재 한국에서 사람을 죽일지 살릴지 결정할 수 있는 존재는 딱 두 종류가 있다. 신과 살인범이다”


사형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가장 큰 이유는 역설적이지만 그것이 인간이 인간에게 끼칠 수 있는 가장 큰 해악이기 때문이다. 만약 인류가 다른 범죄는 다 저질러도 살인은 절대로 저지르지 않는 존재로 발전한다면 사형제도는 그 순간 전혀 아무런 논의의 필요도 없이 바로 없어져야 한다. 하지만 살인이 여전히 여러가지 형태로 자행되고 있는 가운데, 국가가 범죄 피해자 개인의 보복은 법으로 엄격히 금지하고 형사재판에 대한 피해자와 유족들의 참가 또한 엄격히 배제하면서 정작 국가는 사형을 포기한다는 것은 범죄자에게 든든한 보호막을 선사하는 것과 다름 없다. 그리고 나는 “국가가 당신에게 끼칠 수 있는 해악의 상한선은 당신이 피해자에게 끼칠 수 있는 해악의 상한선 보다 항상 낮다. 당신은 절대로 국가에 의해 살해당하지 않는다”고 범죄자에게 알려주는 것이 위험하지 않다는 발상에 도저히 동의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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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사형을 집행해도 희생자들은 살아돌아오지 않으니 무의미하다는 말을 하시는 분들이 있다. 나는 이 말에서 휴머니즘을 읽기도 하지만 동시에 끔찍하리 만큼 차가운 셈법이라는 생각도 든다. 결국 “죽은 자는 이미 죽었으니 어쩔 수 없고 산 자는 어찌 되었건 살아야 한다”는 것이 전제고, 죽은 자가 죽기 직전에 느꼈을 분노와 슬픔을 사회가 대신 갚아주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발상이니까. 그렇다면 결국 죽은 것이 가장 큰 잘못이요, 살아있는 것 만이 자신의 존엄을 끝까지 유지할 수 있는 방책이라는 말인데, 나는 그것이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믿기 힘들다.


종신형을 주장하는 분들도 계시다. 하지만 아무리 종신형이라도 문명국가인 이상 몇 가지 ‘사후대책’을 마련해야 하는 것은 무기징역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간단히 말하면 종신형을 도입한다고 해도 형 집행정지와 같은 무기징역에 적용되던 제도들은 똑같이 적용되어야 하며, 이런 헛점을 가지고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우리는 영남제분 사건을 통해 매우 비싼 값을 치르고 배우게 되었다.


사형이 집행되면 범죄자들이 사형을 두려워 한 나머지 그렇지 않았으면 살려뒀을 피해자를 살해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사형은 범죄 예방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저런 식의 가정법은 결국 한 두가지 반론으로도 ‘경우에 따라 다르다’는 정도의 결론밖에 도출하지 못한다. 나주 초등생 성폭행 사건에서 범인 고종석은 피해자를 살해하려 했으며 죽은 줄 알고 현장을 떠났다. 이 사건은 2012년에 발생했고 한국에서 마지막 사형이 집행된 것은 1997년이었으니 한국에서 더 이상 사형 집행이 없을 것이라는 공감대가 거의 형성된 2007년 기준으로도 5년이 지난 뒤의 일이다. 나는 고종석이 “한국에선 더 이상 사형이 집행되지 않으니 나는 잡혀도 죽지는 않아. 이쯤에서 내 죄를 뉘우치고 죽이지는 말자”는 식의 사고를 할 가능성이 있었으리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울산 자매 살인사건과 같이 그리 떨어지지 않은 시간대에 두 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살인사건의 경우 “두 명을 죽이면 사형에 처해질 확률이 매우 높아진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있었다면 적어도 두 번째 살인 만은 막을 가능성이 있지 않았을까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런식의 가정법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그래도 “사형은 범죄예방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주장에는 그다지 동의할 수 없다.


사형을 언도받을 정도의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은 많은 숫자가 자포자기의 상태에 빠져 범행을 저지르기 때문에 최고형이 사형이던 무기징역이던 범죄 예방 효과는 그리 다르지 않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나는 1심에서 사형을 언도받은 범죄자가 항소하지 않았다는 말을 아직 들어본 적이 없다. 1심에서 “사형이 마땅하나 인간의 생명은 소중하니 무기징역을 언도한다”는 판결을 받은 범죄자도 그 판결을 들을때는 고개를 숙이고 반성하는 표정을 짓다가 며칠 뒤 “그래도 형이 무겁다”며 항소를 한다. 범죄자가 자포자기해서 사형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은 나는 그저 가정법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사형을 두려워한다. 사형을 완벽하게 폐지하거나 지금처럼 계속해서 사형제도를 ‘실질적으로 폐지’한 사회는 결국 그들의 두려움 중 하나를 제거해 준 것이며 피해자를 끔찍하게 살해한 살인범이 “내가 사회에 나올 때 어떤 휴대폰이 나와 있을지 기대된다”는 식의 사고를 할 수 있는 배경이 되기도 한다.


범죄자가 진정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사회에서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이 가장 큰 용서고 보복이다. 사형은 그저 끔찍한 야만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있다. 내가 어느 정도 동의하면서도 아직까지 끝내 설득은 당하지 않은 주장이 이것이다.


용인 살인 사건을 기억하시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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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2013년 7월 12일


이 사건의 범인은 미성년자였고 범행 내용 등으로 봐서 지금 한국의 양형 기준으로는 사형이 나올 확률은 거의 없다. 범인은 19세였으니 무기징역이 언도된다 해도 그가 형무소에서 건강하게 삶을 영위한다면 평생 갇혀 지낼 가능성 또한 거의 없다. 아무리 늦어도 40대나 50대에는 한국 사회로 돌아와 다른 시민들과 함께 삶을 영위하게 될 것이다.


이것도 사실 너무 안이한 관측일 수도 있다. 미성년자를 보호하고 재도전의 기회를 줘야 한다는 사회적인 공감대는 이제 나 같은 소수파가 몇 번의 투고를 한다고 해서 바꾸기는 힘들 만큼 거대한 흐름이 되었다. 무기징역 선고 이후 10년 정도 형이 집행되고 사회 복귀가 허락될 가능성이 훨씬 높다. 물론 치료나 보호관찰 등의 조치가 따라 붙겠지만 중곡동 주부살인사건을 통해 그런 조치들이 범죄 예방에 별다른 도움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용인 살인 사건의 가해자가 진심으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30대 이후에는 한국 사회에 잘 적응해 모범적인 삶을 영위할 가능성도 물론 없지는 않을 것이다. 대기업 입사는 힘들다 쳐도 자영업을 하거나 한두 개 자격증을 따서 취직도 할 것이다. 결혼도 하고 자녀도 낳을 것이고 취미삼아 운동을 하거나 동호회에 가입해 주말마다 나들이를 떠날 수도 있다. 국가대표 축구 경기가 있는 날에는 함께 광장에 나와 응원을 할 것이다.


나는 이것으로 그가 저지른 범죄에 대한 가장 큰 용서와 가장 큰 보복이 동시에 이뤄졌다는 주장에 아직은 도저히 동의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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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이 10년 후, 피해자의 유족들이 가해자와 같이 담담하게 자신의 삶을 즐기며 살아갈 수 있을 가능성은 전무하다. 이런 사건의 경우 친인척 가운데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이 나오지 않을 가능성은 거의 없을 정도로 피해자들은 남은 삶을 끔찍한 고통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하지만 “그건 이미 발생하는 것이 확정된 고통이니 위로는 하지만 사회가 도와줄 수는 없고, 나머지 한 쪽, 그러니까 가해자가 지금부터 받게 될 고통은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이 사회 정의를 위해 필요하다. 결국 고통의 총량을 줄여 가해자가 떳떳하게 사회에서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것이 옳은 것 아니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렇지 않다”라고 대답하겠다.


간혹 “저런 용서는 물론 가해자의 반성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듣기도 한다. 크게 보면 맞는 말이지

만 사실 이것도 개별 사건을 해결하는 데는 그다지 큰 도움을 주지 못한다.


가해자의 반성은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국가가 개인에게 양심을 강제할 수는 없다. 가해자가 매일 피해자에게 반성의 편지를 쓰면 반성을 한 것일까? 그냥 반성문 작성이라는 신종 형벌에 불과하다. 피해자 앞에서 무릎꿇고 사죄하며 울면 반성한 것일까? 그런 연기로 사형이 무기징역으로 낮춰질 수 있는데 그것을 하지 않을 범죄자가 어디 있겠는가.


국가는 형벌은 강제적으로 집행할 수 있어도 반성은 강제적으로 집행할 수 없다. 판결문에 나오는 “가해자도 반성하고 있다”는 문장은 사실 정확히 이야기하면 “법정에서는 반성하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을 보였다”가 맞다. 그런 식의 타인이 정확하게 판단할 수 없고 그저 외관상의 행동을 보고 추측을 할 뿐인 추상적인 개념으로 “가해자도 반성하고 있으니 피해자와 유족들도 어서 용서를 해라”고 주장하는 것은 피해자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비열한 폭력에 지나지 않는다. 반성을 강제적으로 집행할 수 없다면, 반성의 기색을 보이는 것이 반드시 용서를 해야하는 이유도 될 수 없다. 설사 가해자가 10년 후 통렬히 반성한다 해도 피해자가 살아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면, 그 또한 형벌이 가벼워져야 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3. 엄격하게 제한된 사형


이제 정리를 해 보자.


내 주장은 간단하다. 아직 사형제도를 폐지해서는 안 되고 현재 사형이 언도된 사건들에 대해서는 형의 집행이 이뤄져야 한다. 그리고 앞으로 발생할 끔찍한 범죄들을 조금이나마 예방하기 위해서도 지금의 양형 기준을 어느 정도 수정해 사형이 합당한 범죄에 대해서는 사형이 언도되도록 해야 한다.


영화 <소원>덕분에 조두순 사건이 재조명을 받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재심을 청원하는 사람들이 쏟아져나오고 있다고는 하지만 재심은 불가능할 것이다. 일사부재리의 원칙은 바로 이런 사건에서 지켜져야 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재심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사건에서 일사부재리가 지켜진다 해도 그것을 ‘원칙’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국민 모두가 조두순에게 부과된 형량이 너무 약하다고 생각해도 그가 이 사건으로 다시 법정에 서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 일사부재리의 이념이며 이런 극악한 범죄자에게도 그것이 지켜지기 때문에 ‘원칙’이라 불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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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두순에게 12년형을 선고한 이 사건의 1심 판사가 사회적인 책임을 지고 판사직에서 물러난다면 나는 그것을 말릴 생각이 조금도 없다. 사실상 재심 청구는 불가능하니 서명 운동을 한다면 이쪽이 더 합리적일 것이다. 하지만 저 판사가 책임을 느껴 스스로 법복을 벗어 법원의 지나친 온정주의를 자성하는 계기를 마련할 수는 있어도 이 사건을 이유로 그가 타의로 파면당할 일도 없을 것이다. 그저 법원이 다른 사건에서 이 사건을 교훈삼아 제대로 된 판결을 내려주길 바랬지만 나주 성폭행 사건에서도 끝내 사형은 언도되지 않았다.


이쯤에서 당연한 사실을 다시 한번 재확인하고 싶다. 형사재판은, 피해자와 그 유족들에게 있어선 ‘마지막 기회’라는 점이다.


적당한 온정주의로 반성과 재도전의 기회를 주고, 만약 그것이 실패하면 안타까운 일이다고 고뇌하는 표정을 몇 번 지으면 끝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뉴스로 보도되는 사건들은 영화나 드라마가 아니다. 범죄 피해자와 그 가족들에겐 자신들의 삶이 송두리째 망가진 순간이며, 재판은 그것을 조금이나마 회복할 수 있게 그들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다. 적절한 형벌이 아니라 무조건 가해자에게 유리한, 가능한 한 가장 가벼운 형별만이 정의롭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된 사회에서 범죄 피해자들이 어떤 고통을 받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때다.


슬프게도 사형이 유일한 대답인 사건들도 이 사회에는 존재한다. 그런 사실에서 눈을 돌리고 “그래도 합법적으로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말을 하는 것은 당신의 자유다. 하지만 그 더없이 도덕적인 말이 그 사건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삶에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제발 단 한 번 만이라도 생각해 보시길 바란다.



4. 마치면서


엄벌과 사형을 주장하면 듣게 되는 수많은 지적들 중에는 “범죄자도 똑같은 사람이다. 너는 너무 잔인한 주장을 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것이 있다. 내 대답은 이렇다. “범죄 피해자도 똑같은 사람이다. 게다가 그들은 운이 나빴던 것을 제외하고 아무런 잘못도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한국 사회의 희한한 인식의 저변에는 운이 나쁜 것이 전생의 죄라느니 신이 주신 시련이라느니 팔자라느니 해서 피해자를 탓하는 저열한 사고방식조차 있다. 하지만 그들은 정말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들이고, 그저 길을 가고 있거나 집에서 잠을 자고 있다가 모든 삶을 빼앗긴 사람들도 많다. 그들의 슬픔은 왜 그렇게 ‘이미 일어난 일이니 잊어버려라’고 쉽게들 재단할 수 있는가”


다시 한번 반복하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내가 소수파에 속한다. 한국의 법원이 내리는 판결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그 말은 저 위의 논쟁에서 내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한국에는 더 많고, 그들은 “나도 슬프다”는 식의 자기 방어는 하겠지만 지금 한국의 법원이 내리고 있는 판결들에 적어도 결론에 대해서는 동의하고 있다는 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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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재를 시작한 이유는 서두에서 밝혔듯이 이젠 소수파가 되어 언젠가 사장될 운명인 ‘사형제’와 ‘엄벌론’에 대해 내 나름의 마지막 변명을 해 주기 위해서다. 이것이 유일한 대안이라는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이 의견이 한국 사회의 주류 의견으로 받아들여지기엔 이미 시기가 너무 늦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게다가 사회 구성원의 ‘적어도 비교적 다수’가 그 사실에 만족한다면, 이를 뒤엎을 명분도 사실 없다.


묻고 싶다.


이것이 과연 정의로운 일일까.


끝으로 내가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사건에 대해서 조금만 이야기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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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뉴스 2010년 5월 12일


2010년에 발생한 사건이다. 그저 길을 가던 여중생이 아파트 옥상으로 끌려가 강간 당하고 금품을 뺏긴 뒤 아파트 아래로 떨어져 사망한 사건.


이 사건 자체는 매우 끔찍한 사건이지만 저 위에 거론한 사건들과 비교해 특출날 정도로 범행 내용이 상식을 벗어난 것은 아닐 것이다. 한국에서 강간은 자주 일어나는 사건이다. 청소년 범죄는 이제 별다른 뉴스거리도 되지 못한다. 추락사의 경우 자살인지 타살인지 탈출하려다 실수한 것인지 분간하기 힘든 사건은 얼마든지 있다. 그 모든 것이 합쳐진 사건이라 해서 신문 1면에 대서특필될 만한 사건도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저 사건은 정말 몇 개월을 내 뇌리를 떠나지 않고 괴롭혔다. 아침에 지하철에서 여중생들의 웃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게 괴로울 정도로. 피해자는 그저 길을 걷고 있었을 뿐이다. 왜 죽어야 하는가. 가족들은 왜 저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이 사건의 가해자들은 감형 이유의 종합 선물 세트였다. 미성년자. 가출 청소년. 짐작컨대, 성장 환경상 트라우마가 될 만한 일들이 있었을 것이고 살해 의도를 증명할 증거도 사건 특성상 적었을 것이다. 잘해야 몇 년 징역을 살까 말까한 수준이다.


저 사건에 대해 몇 주 동안 고민하면서 피해자의 입장에서 가해자들을 용서하기 위한 이유를 찾아보려고 내 나름대로 노력을 시작해 본 것이 사형제에 대한 고민의 시작이었다. 현재 시점에서의 그 결론을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읽으셨고, 나는 한국 사회가 나와는 다른 결론을 내리고 있고 앞으로도 내릴 것이라는 걸 이제 지겨울 정도로 확인하게 되었다. 저 가해자들이 한 때의 비행을 딛고 한국 사회에서 떳떳하게 성공하며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것이 가장 큰 용서고 가장 큰 복수라는 그 ‘정답’ 말이다. 이젠 모든 사람들에게 ‘A양’ 따위의 이름으로 기억되게 된, 꿈 많고 아직 하고 싶은 일과 경험해 보고 싶은 일 투성이었을 어린 피해자는 절대로 누릴 수 없는 그 모든 것들을 가해자는 누리는 것. 나는 전혀 정의롭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한국의 법원과 비교적 다수의 시민들이 동의하는 그 정답.


내 마지막 질문은 이것이다.


여러분도 저 결론에 동의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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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음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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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보리삼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