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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도로 귀양을 가서 자산어보를 쓴 정약전에 관한 글을 읽고 있었다. 그가 남긴 원고를 정리하고 주석을 달아 책으로 묶은 것은 정약용의 제자 이청이다. 큰이름에 가려졌을 뿐 혼자서 업적을 이룬 사람은 없다.그 시절 필연으로 여겨지던 사제관계의 무거움이 최몽룡 교수를 구해낸 제자에게서 느껴진다.


상공업과 기술을 발전시켜야 한다던 정약용이 자신의 아들이 의술을 배우겠다는 의사를 보이자 반대하던 것을 보면 오늘날 반미주의를 주장하던 분들이 자식들을 미국유학을 보내는 마음이 조금 이해가 간다. 유전자의 끌림을 외면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보통 정의롭게 살기는 타인에게만 요구한다. 타인과 자신에게 동일한 잣대를 적용하는 사람도 자식에게는 약해지기 쉽다.


정약전이 흑산도로 유배를 당한 이유가 천주교를 믿어서였다. 인식의 틀은 언어로도 이루어지고 종교관으로도 이루어진다. 자산어보에 대한 해설을 읽다가 정약전은 천주교의 세계관을 일부분만 받아드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껍질의 골과 무늬를 보아 새가 변해 조개가 되었다는 사실을 조심스럽게 추측하는 구절이 나온다. 여우가 사람이 되고, 잉어와 이무기가 용이 되는 신화를 믿는 문화에서 자란 탓이지 싶다.


이청의 주석을 보면 대단하다 싶다가도 중국의 고대문헌과 억지로 맞추느라 무리한 부분이 보인다. 그 시절의 최선이다. 실질적인 학문을 하던 지성인들의 수가 부족한 탓이다. 그 시절 대다수가 몰빵하던 과거시험이나 현대의 공무원 시험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서 고위직에 올라간 이들이 일반 국민들을 개돼지로 칭하는 것을 보면 그 시절의 의식에서 그리 크게 변한 건 없지 싶다. 집단이 공유하는 의식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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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이 종의 기원을 완성할 수 있었던 건 그 시대의 유럽 지성들과의 교류에서였다. 다윈평전 추천글에 최재천 교수가 생업에 종사하지 않아도 되는 다윈의 형편을 부러워하는 내용을 보고 웃음이 나왔다. 제법 많이 가진 사람도 자신이 가지지 못한 무언가를 부러워하며 산다.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애초의 생각과는 다른 무언가를 얻기도 한다.


어렸을 적 읽은 탈무드에서 개구리 이야기를 기억한다. 먹이를 먹을수록 몸집이 자라는 개구리는 집채만큼 커지고 개구리를 키우던 남자는 파산한다. 파산한 남자에게 개구리가 은혜를 갚으면서 자신은 아담의 자식이라고 말을 한다. 에덴동산을 만들고 신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아담은 오랜 시간동안 짝이 없이 지냈다. 짝짓기 하는 다른 동물들을 보고 욕정을 깨달아 여러 동물들과 관계하고 많은 자식을 얻었다.그 중에 한 자식이 개구리였다. 아담의 자식인 개구리는 천년을 주기로 커지고 작아지고 잠을 잔다. 아담이 이브랑만 하는 줄 알았는데 개구리랑 했다는 게 어린마음에 인상 깊었다. 개구리랑 가능한 걸까.


구약에 탈무드를 더하면 유대교가 된다. 유대교는 기독교로 변해 유럽인들의 정신을 점령했다. 그 과정에 로마의 신들이 맡았던 역할은 기독교성인들에게 배분되었다. 정약전에게 전해졌지만 완전히 다른 문화에서 자란 성인이 온전하게 그 종교를 받아드릴 수는 없지 싶다.


기독교의 경전은 구약과 신약으로 나뉜다. 구약의 핵심은 모세오경이다. 노예민족을 자립시키기 위해서 법을 신이 내린 것으로 한다. 유명한 십계명 이외에도 지켜야 할 법이 많다.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범죄에 해당하는 것도 있다.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던가 용변을 볼 때 땅에 묻으라는 법은 민족집단의 경제환경을 짐작하게 한다.


광야를 유랑하는 집단이 먹이가 인간의 식량과 겹치는 돼지를 사육하는 건 금기해야 할 범죄다. 분배의 문제로 내부갈등이 생기면 집단은 쪼개지고 작아진 무리는 확장성이 떨어지고 소멸한다. 용변을 볼 때 땅을 파고 묻으라는 법은 위생과 밀접한 관계가 보인다. 신의 이름으로 강제해야 할 만큼 심각한 문제였던 것 같다. 웬만하면 죄의 댓가로 죽음을 지불하던 신명기에서 처녀를 강간하면 은으로 부모에게 값을 치르고 아내로 삼으라는 법은 인구가 힘이고 집단의 생존과 직결되던 시대 상황을 유추하게 한다. 여성의 인권은 남성의 갈비 한 쪽 만한 시대이기도 했다.


사사들과 왕들의 이야기가 이어지고, 신의 은혜를 찬양하고 신의 분노를 두려워하는 이야기들이 이어진다. 그들 민족을 영광으로 이끌어 왕중의 왕이 될 메시아를 예언한다. 미래에 대한 희망은 현재의 고통을 버티게 한다.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간 녹지 않고 육지로 토해진 요나의 이야기를 보면 구약에 포함되는 이야기와 탈무드의 경계가 보인다. 외경이 수도원의 신학자들에게만 연구되던 것도 비슷한 맥락이지 싶다.


노예민족에게 주어진 법은 냉혹했지만 수 천년 후 식민지 민족에게 새로 주어진 법은 좀 따사롭다. 이집트를 탈출해 새로 정착지를 찾을 수 있던 시절과 동방의 군주들과 비교해 그나마 나은 로마제국의 통치를 받는 식민지인들의 처지가 다르다.


신약은 에수의 가르침을 적은 제자들의 복음서와 예수 사후 조직 확장과 운영의 역사를 적는다. 세상의 마지막 날에 악한 자에게 죄를 내리고 선한 자에게 복을 내리는 신의 나라를 예언한다. 예수의 가르침은 약한자들끼리 서로 사랑하기를 가르친다. 이웃 뿐만 아니라 원수마저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너희 중에 약한자를 신을 섬기듯 하고,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이웃의 정의를 묻는 이들에게 선한 사마리아인의 예를 든다. 불신자를 살육하여 씨를 말리라던 구약의 법이 사랑으로 진화했다. 먼저 선을 행한 이가 불신자인 사마리아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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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제자 중 베드로가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적통임을 인정받지만 유다와 도마에게 눈이 간다. 유다는 은 삼십 냥에 스승으로 따르던 예수를 식민지 이스라엘의 기득권에게 판다. 수천명의 무리에서 재무담당을 하던 유다에게 크지 않은 돈이다. 막상 예수가 십자가형에 처해지자 목을 맨다. 유다에게서 혁명가의 냄새가 난다. 예수를 적대적인 식민지 기득권계층에게 넘기면 그의 이적으로 상황을 돌파하던지 예수를 따르던 군중의 폭동으로 사회 변동을 기대했던 것 같다.


유다의 기대와는 다르게 예수는 인류의 원죄를 대신해서 죽었고 이스라엘 민족은 신의 아들을 죽인 죄를 지었다. 죽음은 사람의 것이다. 유다는 예수를 신의 아들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의 계획으로 식민지 민중들의 절망을 위로하던 의인이 죽었다. 목숨 값은 목숨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도마는 예수의 죽음 후 부활을 증언하는 다른 제자에게 직접 만져보아야 믿겠다는 대답을 한다. 예수가 죽어가는 고통의 과정을 지켜보았지 싶다. 그 고통을 간접체험하는 동안 희망을 버리고 냉소로 현실을 인식한다. 그에게 직접 부활한 예수가 손과 발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자국을 만지게 해준다. 유다에게도 도마와 같은 은혜가 베풀어졌더라면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가르침이 좀 더 은혜로웠을 것이다.


충만한 선의로 포교를 하는 이웃과 친인들에게 마음속으로만 유다와 도마를 이야기 한다. 직접 옷자락을 잡고 따르며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제자들도 온전히 믿지 않았는데 나의 불신정도야 큰일이겠습니까. 그분이 필요하시면 내 앞에도 나타나셔서 손과 발의 못 자국을 만져보게 하시겠지요. 애써 원하고 기도하지 마시고 그분의 가르침대로 고아와 과부들과 사회적 약자들에게 그분을 대하듯 섬겨주십시오. 그 분도 행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셨지요.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기적을 이루리라 하셨지요. 가끔은 저도 기적이 보고 싶어집니다.


한 뿌리에서 갈라져 다르게 변한 유대교와 이슬람과의 갈등도 그렇지만 외경을 제하더라도 신약과 구약 66권의 조합은 무궁무진한 종파를 낳았고 종파들은 각자의 생존경쟁으로 도태되거나 섬멸되거나 각 지역의 토속신앙과 더불어 변화하였다. 인류의 진화 계통과정과도 닮아 보인다. 한국의 대형교회들은 신과 자본을 함께 섬기는 2신교로 진화했다. 혹은 성부 성자 성령과 성금이 일체가되는 사위일체의 새로운 종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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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을 정점으로 가장 교세가 강성하던 시절 유럽인들이 세상을 보는 관점은 기독교신앙이었다. 지성인들은 유일신의 섭리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기 위해 별의 운행을 관찰하고 피조물로 창조된 생물들의 구조와 생활과 생식을 연구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노역에 신음하고 죽어가는 모습은 선교사들의 보고로 최고 지성이었던 종교인들의 토론이 있었다. 인강 형상에 가까운 인디오는 인간의 영을 지닌 존재이니 농장과 광산의 노예로 고통 받게 하는 일은 옳지 않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그들의 눈에 보다 짐승에 가까운 아프리카인들이 노예로 대체되었다. 다행히 지금은 아프리카인들도 인간의 영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여성의 인권도 남성의 것과 동등하다고 인식한다.


신학에 예속되었던 과학은 지식이 쌓이면서 신학의 틀을 벗어난다. 천문학은 적대자들을 죽이기 위해 태양의 운행을 멈추어버린 신의 역사를 설명할 수 없었고, 생물학자들은 신이 창조한 원형으로 가지고 살아가지 않는 수 많은 변종과 아종들을 발견하였다. 실리주의자들은 창조된 대로 살아가던 돼지와 가축들을 인위적으로 교배해서 요크셔니 바크셔니 하는 신품종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과정을 거치지 않은 문화에서 천주교를 받아들인 정약전이 믿었던 신앙이 어떠한 것일지 모른다. 신의 섭리를 연구하다 자연스레 정형화된 신의 존재를 의심하게 된 다윈과는 다를것은 분명하다.


종교나 철학이나 학문이나 목적은 인간이다. 간혹 목적과 수단을 혼동하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스스로의 존재의미를 찾고자 하는 인간의 질문과 노력으로 만들어지고 발전한 것들이다. 나는 누구인가. 왜 태어났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죽어 가는가. 내가 살아가는 세상은 무엇으로 이루어지고 어떠한 법칙으로 움직이는가. 다시 그 속에서 살아가는 나는 누구인가.


종교는 명확한 답을 주지만 그 답에 모두가 만족하는 것은 아니다. 술을 마시고 내가 누군 줄 아냐고 자아탐구를 타인에게 의존하는 게으른 사람들도 있지만 보통은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는다.


본질적으로 사회적 존재인 나를 구성하는 것들은 실물인 육체와 의지인 정신과 의지의 동인이 돼는 타자와의 관계다. 우주를 구성하는 다른 모든 것들처럼 무엇 하나 고정되어 있지 않다. 육체를 이루는 백조개의 세포는 순차적으로 죽고 태어나 결국 모든 구성 물질이 교체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모든 세포가 교체된 육체와 과거의 육체는 동일하지 않다.


몸을 새로 구성하는 물질은 먹어서 얻는다. 음식을 선택하고 먹는 다는 것은 미래의 육체를 구성하는 일이다. 첨가물을 확인할 수 없는 인스턴트와 건강하지 않은 식자재로 몸을 구성하는 건 좋지 않다. 생존 앞에서 의지보다 본능이 앞서지만 절대적이진 않다.


몸을 구성하는 물질 중에서 어디까지가 나인지 명확하지 않다. 손톱, 머리카락, 눈물과 침, 소화 효소 , 잘려나간 약간의 살점 ,의술의 발달로 주고받은 신체 조직들. 혈액, 몸 밖으로 나온 혈액 중 타인이 수혈 받은 피, 상처 바깥에서 굳어가는 딱정이가 된 피, 뭉뚱그려 나라고 말하지만 쉽게 정의 내릴 수 없다. 신체인 피부와 노폐물인 각질의 차이처럼 그 경계는 모호하다.


시야를 확장하면 다른 개체의 생명활동에도 물질 교환이 이루어져 전 지구적인 교환이 이루어진다. 나를 이루던 구성 물질이 타인을 만든다. 나를 만든 구성 물질 또한 타인에게 온 것이다. 생태주의자가 낯설지 않고 지구의 생태환경자체가 하나의 생명이고 의지라는 가이아 이론 또한 수긍할 점이 보인다.언젠가 인공지능이 지구상의 모든 책과 욕망의 기록들을 흡수하면 초자아에 근접한 모습이 될런지도 모른다.


의식속에서 자아가 명확하게 자리 잡던 날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긴 한 걸까. 배움과 경험의 폭에 따라 세계관이 확립된다. 세계관의 틀 안에서 인생관이 정립된다. 그것 역시 고정된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경험과 배움의 충격으로 변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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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시절의 김구와 안진사의 영향을 받은 김구가 다르고, 군왕에 대한 충심을 품고 일본인을 죽이던 김구와 38선을 넘던 민족주의자 김구가 다르다. 일본군 첩자를 명확한 죄 없이 죽이지 않으려고 풀어주던 안중근과 그 첩자로 인해 부대원들을 잃은 안중근은 다르다. 노동운동가 김문수와 현실정치가 김문수가 다르다. 숨이 끊어지기 전까지 한사람이라 칭해지지만 삶과 죽음에 대한 태도와 타인을 대하며 살아가는 방식이 같지 않다. 한순간은 진심이었다던 사람들이 변해가는 과정을 지켜보다 보면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삶의 굴곡을 겪기 전후의 내 모습 또한 다르지 않다.


타인과의 관계에 따라 다른 행동과 모습을 보인다. 동일한 사람이 부모와의 관계와 자녀와의 관계가 다르고 연인에게 대하는 방식과 배우자에게 기대하는 바가 다르다. 필요한 가면을 쓴다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지만 자아의 파편 중 상대와 상황에 맞는 부분이 전면에 나서는 것 같다. 관계는 일방적이 아니다. 상호적 반응을 연쇄한다. 자신을 넘어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 그중에서도 약하고 죄없이 고통받는 자들의 처지를 이해하는 것은 모든 종교가 내세우는 덕목이다.


개인과 집단과의 관계는 개인과의 관계보다 더 변화의 폭이 크다. 이건희 회장이 성매매를 한 건물의 소유주로 등기되어 있던 전 임원은 천주교 미사를 마치고 선비같은 표정으로 인터뷰를 했다. 그 건물은 자신의 소유가 아니고, 자신의 이름이 도용된 것에 아는 바와 책임도 없다는 내용이었다. 개인, 가장, 신앙인. 조직원 중 무엇에 가까운 입장일지 생각을 한다. 각각의 입장은 일정 부분 중첩될 수도 있고 서로를 변명 할 수도 있다.


이데올로기나 과확이론도 종교와 같은 속성을 가졌다. 믿음을 유지하고 확장하려한다. 그 과정에서 변화하고, 변화는 시대와 상황에 맞추어진다. 확장된 시야로 촛불집회와 반대집회를 바라보니 항아리 속에서 발효균과 부패균이 싸우는 양상이다. 발효균이 이기면 한 철 지낼 양식이 마련되고 부패균이 이기면 푹 썩어 다음 세대 혹은 다른 나라를 위한 거름이 된다.


천년 후 미륵이 다스리는 세상을 위해 침향목을 묻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사라졌고. 베드로가 예수의 말을 듣고 그물을 던져 잡아 올렸다는 물고기 숫자는 볼펜에 박혀 거의 모든 사람들의 손에 들린다. 그의 가르침이 명분상 시대의 주류인 까닭이다. 그의 가르침을 믿는 자들에게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라는 주문은 현실적이다. 가로등을 설치하는 것으로 범죄율이 낮아지고. 항아리속의 소금은 발효를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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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이가 콜로라도강의 협곡을 관광하고 텍사스로 가겠다는 계획을 밝히고 미국으로 떠났다. 미국 생활이 조금 익숙해진 다음에야 관광을 다니는게 어떠냐니 어차피 직행 항로가 없어서 환승해야 한다고 발통달린 가방 두 개를 끌고 씩씩하게 떠났다. 다음 날 아침 시애틀 공항에서 환승할 비행기를 기다린다며 아내의 전화기로 사진을 보내왔다. 표정이 밝다.


몸이 안 좋거나 견디기 힘든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돌아오라고, 프로그램을 끝까지 이수하지 못할 경우 발생한다는 배상책임은 함께 갚으면 금방이라고, 꼭 훌륭하거나 잘난 사람이 될 필요는 없는 거라고, 네 주위 사람들에게 있어서 좋은 사람이면 족한 거라고, 여비를 조금 보태면서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콜로라도 강가에 도착했겠구나 하는 즈음에 플로리다 공항에서 총기 난사가 있었다. 플로리다와 콜로라도가 어감이 비슷하다. 지도 검색을 해보니 거리가 있어 좀 안심을 했다. 내 마음이 아직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한 사람들의 죽음을 슬퍼할 정도로 크지 않다. 아내는 콜로라도 공항으로 듣고 불안해했다. 협곡지형은 통신상태도 좋지 않다. 막연한 불안감이 속에 있지만 무덤덤하게 플로리다와 콜로라도의 거리가 서울부산 왕복하는 것보다 더 멀리 떨어져 있다고 안심시켰다. 하루 좀 더 지나고 씩씩한 얼굴을 사진으로 보내와서 마저 안심을 한다.


그 사이 촛불집회에서 정원스님이 분신을 하고 죽었다. 자신은 우주의 원소로 돌아간다며 남은 사람들의 염원과 평안을 바란다. 그분이 자신의 육체를 소신공양함으로 바라는 건 박근혜의 구속과 민주주의의 회복이다.


자살은 이타적인 존재들이 한다. 이기적인 성향이 더 강한 이들은 궁지에 몰리면 타인을 죽인다. 도저히 어쩔 수 없는 구석으로 몰렸을 때나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상대에게 같이 죽자는 공격을 한다. 성완종씨의 주머니에서 나온 리스트와 정원스님 문수스님의 유언은 방향이 다르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 그 아수라장에서 피 묻은 귀금속과 돈을 훔치던 사람들, 대구 지하철 참사 때 지하상가의 상품을 검은 연기로부터 지키기 위해 지하철에서 올라오는 출입구 셔터를 내리고 추모객에게 국화꽃을 팔던 상인들, 팽목항의 셔틀버스를 공짜로 타고 죽은 아이들 잿밥으로 바쳐진 과자와 음료수를 배낭에 우겨넣던 사람들처럼은 아직 살고 있지 않다고 스스로를 다독거리다가도 마음이 불편해진다.


얼마나 더 인식의 틀을 넓혀야 그런 마음들을 조금이나마 이해 할 수 있을지 자신도 없다. 측은지심도 다른 재능처럼 타고나는 것이다. 광신적이지 않은 이념도 종교의 속성을 갖는다. 종교가 지향하는 것은 누군가의 죽음이나 희생이 없어도 유지되는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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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우


편집 : 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