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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0. 22. 화요일

타데우스







저번 더 딴지 의 주제가 대결이었다는 글을 읽었다.


필자 이 한몸이 먼 타국에 머무르는 관계로 보고싶어도 보지 못하는 그런 상황에 처해있긴 하다. IT기술이 발달하여 컴퓨터에 대고 "더 딴지" 라고 외치면 알아서 결제 되고 책이 화면에 뜨는 그러한 날을 기다려 본다.


비겁한 변명이었다. 해외도 다 결제 된다.


대결이라는 주제를 듣고 상당히 흥미로운 소재가 하나 생각났다.


자고로 대결이라 하면 뭔가 한 가닥씩 하는 사람들의 대결이라야 흥미롭지 않은가. 그 중에서도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하지만 어느새 잊혀진 대결에 대한 생각이 났다. 


15세기 피렌체


대략 우리는 중기 르네상스를 르네상스의 최고봉이라 칭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전기 중기 후기로 나누지만 알파벳 문화권에서는 중기 르네상스를 High renaissance라고 쓴다. 즉 중기가 가장 완성도 있는 시기라는 뜻이다.


그 중 이탈리아가 이러한 르네상스의 정점에 서 있었음은 말하면 입만 아픈 이야기고, 그 중심은 피렌체와 로마에 있다.


피렌체에서는 메디치 가문이 현대식의 은행을 통해서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간간히 교황에게 개기기도 하며 자신들의 영향력과 힘을 과시하고 로마는 당연히 교황청이 있는 곳이니 둘 사이의 수면 밑에서의 은근한 대결도 역사적인 면에서는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당대의 시기를 온몸으로 겪으며 예술가로서 예술가 이상의 지위를 획득한 이들이 있으니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이탈리아 피렌체를 가보면 지금도 도시의 한 가운데에 팔라쪼 베키오 혹은 베키오 궁이라 불리는 건물이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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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들 보셨으리라 생각된다. 피렌체 가면 한번씩 들린다는 바로 거기다.


팔라쪼 베키오는 당시 피렌체 공국의 국회의사당 같은 곳이었으므로 당연히 아주 아주 공을 들여서 꾸몄음은 말할 필요도 없고 당시의 피렌체를 지배하던 메디치 가문은 미술에 대한 관심이 매우 지대했다.


지금도 피렌체에 가면 볼 수 있는 대표적인 미술관인 우피치 미술관이 당시의 메디치 가문의 소유물에서 유래 되었음을 생각하면 그들의 미술품 수집과 후원의 역량은 심히 대단했음을 알 수있다.


건물의 안으로 들어가보면 Salone dei Cinquecento 라는 방을 볼수 있다. 500의 방 이라고 불리려나? 아무튼 방이 아니라 살롱이고 54x22 미터의 엄청스레 큰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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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홍 멋있다.


여기에는 벽면에 바사리라는 화가의 그림으로 뒤덮혀 있다.


지오반니 바사리 그는 누구인가?


바사리는 화가로서도 나름 충분한 덕력과 공력을 인정받은 당대의 화가 였지만 그의 덕력이 발휘 된곳은 따로 있다.


자신의 선대 화가들에 대한 이름과 작품과 삶을 쭉 정리하여 책을 냈고(르네상스 이전의 화가들은 대부분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아서 작품의 제목을 그냥 이름으로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의 방대한 업적과 끈질긴 덕력을 인정받아 현재에는 최초의 미술사가로 인정을 받고 있다. 즉 진중권 같은 미술사학자들의 선배의 할배의 할배의 할배의 할배의 ....... 할배 쯤 되시겠다.


그런 바사리의 그림이 뒤덮여 있는 이 곳에 원래는 바사리의 그림이 걸려있지 않았고 그 안에는 재미있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으니 그에대해서 함 디벼보자.


1503년의 피렌체.


당시의 피렌체는 메디치 가문의 은행업이 잘 되어서 돈이 많고 그들의 예술가에 대한 후원으로 많은 예술가들이 전에 없던 호황을 누리던 그러한 시기였다.


(아 우리나라도 은행이 살면 예술가들의 삶이 좀 나아지려나? ㅡ.ㅡ)


대략 중기 르네상스를 피렌체 중심으로 봤을때 약 1480년부터 1520년까지로 본다. 1480년대는 대략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활동을 시작하던 때'라고 할 수 있으며 1520년은 라파엘이 죽은 해다. 즉 중기 르네상스는 레오나르도에서 시작하여 라파엘에서 끝나게 된다.


거기에 더해 이 시기를 관통한 또 한 명의 남자가 있으니 그 이름도 유명한 미켈란젤로다. 이쯤에서 너님들 도나텔로까지 더해서 닌자 거북이 만들지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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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태어난 년도를 보자면 레오나르도는 1452년, 미켈란젤로는 1475년, 라파엘은 1483년이다. 즉, 1503년에는 각각 50세, 28세, 19세 정도 되시겠다.(아 헷깔려... )


레오나르도는 이미 많은 업적을 싾았고 특유의 화법과 기술력으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한 화가였으며 미켈란젤로는 이제 막 뜨기 시작하는 신생 천재 화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때고, 라파엘은 아직 애기로서 문하생으로 머물던 시기였다.


이러한 시기에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은 각각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에게 작품을 의뢰한다. 저 드넓은 살롱을 전쟁을 하는 그림으로 채워 달라고.


캬 짜식들이 뭘 좀 안다. 이러니 스토리가 나오는거다. 라이벌의 대결 구도 혹은 세기의 대결...


우선 레오나르도에게 앙기아리의 전투의 한 장면을 그려달라고 부탁한다. 앙기아리 전투란 패션의 도시 밀라노와 예술의 도시 피렌체가 벌인 1440년에 벌인 전쟁이며 이 전쟁에서 피렌체가 승리했음을 기리기 위해서 작품을 의뢰 한 것이다.


그 다음 해 가을에 미켈란젤로를 불러서  그 옆면에 카시나의 전쟁씬을 그려달라고 부탁한다. 이때가 그 유명한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이 막 끝난 직후였으니 새로 뜨는 따끈따끈한 아이돌 스타에게 작품을 의뢰한 것이다. 카시나 전투 역시 피렌체가 피사에서 벌인 전쟁이며 1364년에 일어난 일이다.


이렇게 해서 바야흐로 둘 사이의 눈에 보이지 않는 그림 대결이 시작된 것이다.


그럼 라파엘은 뭐 했냐구? 굳이 라파엘은 다 써 놓고...


라파엘은 뒤에서 그림 구경 했단다. 아무튼 라파엘 역시 천재 였기때문에 그리고 중기 르네상스의 정점에 있다가 짧은 삶 동안 빡세게 그림만 그리다 간 젊은이로서 이 세 사람의 한자리에서의 모임은 아무튼 미술계에서는 역사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비단 천재들의 삶이 다 그러하듯 이들역시 그 자존심이 보통이 아니었음을 우리는 쉬이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림의 대결은 아름답게 형님 먼저 아우 먼저의 분위기는 아니고 정말 말 그대로 자존심을 건 대결이었을 테고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의 그림의 세계관 역시 굉장히 달랐으므로 그 둘의 불꽃튀는 대결은 항상 미술사가들에게 많은 주목을 받았다.


그럼 여기서 잠깐 그 둘의 예술관을 살펴보고 가도록 하자.



Leonardo da vinci


먼저 형님인 레오나르도 다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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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워낙 많이 알려져서 그의 예술관에 대해서 크게 논할 부분이 많은 것은 아니다. 다만 주로 하는 오해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천재성이 여러 분야에서 인정을 받았다고 하는 바로  그 오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수많은 스케치를 보고 있으면 이 사람은 해보지 않은 일이 없는 듯 하다. 실제로 해부도 하고 무기도 고안하고 비행기도 만들고 뭐 각종 일을 다 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의 시대성을 한번 천천히 복기해 볼 필요가 있다.


르네상스의 어원은 부활이다. 이 부활에 대해서 이견이 좀 있으나 이는 인문주의의 부활이라고 보는 게 맞다는게 어디 책에서 주워 들은 필자의 생각이다. 당시 이탈리아의 많은 공국들은 각자 열심히 돈을 벌어서 어느 정도 로마의 교황청에 개길 수 있는 힘을 기르게 되었고 그에 따라 르네상스 이전의 중세시대까지는 모두가 종교의 원리에 의해 돌아가던 것을 인문주의 혹은 인간중심주의(라고 읽고, '귀족주의'라고 해석하자)의 사상으로 아주 쬐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그에 따라서 갈릴레이 갈릴레오가 우주의 중심이 지구가 아닌 태양이라 외치고 콜롬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고 이런 신의? 혹은 교황청의? 의지와 뜻에 반하는 일이 벌어지게 된 것 아니겠는가.


그렇다. 지식인들 사이에서 과학이 중요해진 것이다. 이에따라 레오나르도는 그림을 어떻게 하면 더 잘 그릴 수 있는지를 연구하기 위해 많은 과학적인 실험과 연구를 진행해 온 것이다. 생각해 보라. 그가 비행기를 스케치 했다면 그리고 그가 알고보니 과학자였다면 비행기는 이미 1500년대부터 세계를 날아다녔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하지 않았다. 비행기를 그린 것은 그러한 원리를 미술에 접목시키고자 했던 것이고 결국 그의 대부분의 산물은 미술에 집중되어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레오나르도의 초기 시대의 아기천사 분수 같은 것을 보면 교묘하게 기계 장치를 숨겨서 희한하게 작동 하는 것을 알 수있다. 시체 해부 역시 근육의 움직임을 연구하기 위해서 또 그로 인해 더 자연스러운 인체를 표현하기 위해서 행해진 일이지 의학과는 별 상관은 없다. 물론 그를 통해 후세의 의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영향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그 자신이 의학에 뜻이 있어서 시체를 해부한 것이 아니란 뜻이다.


물론 그가 나중에 군사 무기 전문가로 활동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가 직접 무기를 만들었다기 보다는 방어를 위한 성벽을 설계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당시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건축·회화·조각에 모두 힘을 쏟고 있었고 이를 미술이라는 한 분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을 말해두고 싶다.


따라서 레오나르도의 미에 대한 관점은 눈에 보이는 신기한 현상들이 아름답다고 생각했고 그에 따라 과학적인 탐구가 곧 더욱 아름다운 미를 창조해 낼 수 있는 수단이라고 믿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항상 많은 얘깃거리를 만드는 그림이 바로 암굴의 성모이다.


이 그림은 두 가지의 버젼이 있는데 하나는 루브르에, 또 하나는 영국의 내셔널 갤러리에 가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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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을 보면 약간의 미묘한 차이를 볼 수 있다. 한 쪽에는 머리 뒤의 성인의 표시도 없고 십자가도 없고 저 뒤앞에 있는 천사의 날개도 없다. 그런데 이러한 그림을 이상한 의미를 붙여서 음모론이니 뭐니 곡해하지는 말자.


일단 레오나르도의 과학적인 눈에 있어서는 실제로 보이지 않는 저러한 심볼들이 당연히 불필요하다고 느꼈을 테고 그것을 빼고도 몇몇의 은유적 표현(위의 그림에서는 아기 예수의 축복을 하는 손 모양, 마리아의 의복 색깔 천사의 어린 요한의 후일을 암시하는 손 모양)을 통해서도 충분히 누군지 알아보리라는 생각을 했을 테고 그러한 방식으로 그림을 그렸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림을 받아든 의뢰인인 수도사는 일반인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난해한 그림이라는 생각에 다시한번 같은 모양의 다른 그림을 의뢰하게 되고 그로 인해 여러 상징물이 들어간 오른쪽의 그림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당시의 종교적 관점에서 예술품은 일반인들의 종교에 대한 믿음을 더욱 고취시킬 수 있는 하나의 미디어로서의 역할을 한다고 인식했기 때문에 교회의 입장에서는 지금까지처럼 사람들이 상징적인 표시를 보고 누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는 그림을 원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에 반해 레오나르도는 현실을 보는 듯한 자연스러운 그림, 상징물들이 없어도 충분히 알아먹을 수 있는 그림을 그리려 했고, 그게 더 그림을 보는 사람에게 많은 감동을 가져다 줄거라 믿었던 이 점이 의뢰인과 화가 사이의 미묘한 입장 차이를 낳았다고 생각된다.



Michelangelo Buonarroti


이제 아우? 혹은 거의 아들 뻘인 미켈란젤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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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는 당시에 건축·조각·그림 모든 분야에서 거의 최고의 클레스에 이른 르네상스 시대의 스타다. 건축 분야에서는 우리가 잘 아는 성 베드로 성당의 돔을 제작하였고 조각은 뭐 워낙 많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바티칸의 피에타(성모 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무릎에 올리고 슬퍼하는 그 조각상)가 유명하고 그림은 시스티나 천장벽화 등이 있지 않은가. 즉, 모든 분야에서 인정을 받은 스타다. 그에 따라 성격도 조금 지랄맞고 자존심도 굉장히 강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 지랄맞은 성격 때문에 말년에 힘들었다고 한다. 성격들 좀 죽이고 사시라~


일단 미켈란젤로의 미학관은 레오나르도와는 조금 다르다. 인간의 신체(당시의 사상에서는 하느님이 만들어 낸 피조물)가 진정한 아름다움을 담고 있으며 어떻게 하면 이 신체의 아름다움을 극대화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치열한 연구를 진행했다고 볼 수 있다.


레오나르도와 달리 과학적인 접근법보다는 인간의 몸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게 궁극의 목표였으며 그의 이러한 생각은 옛날 고대 그리스 로마의 조각상에서 많은 힌트를 얻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잘 아는 바티칸의 라오콘 상을 한번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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봐라 이 오바된 포즈들을. 적어도 난 뱀이 온다면 이런 포즈로 있지는 않을 것이다.


위의 라오콘 상이 유명해서 고른 것이지 시기적으로 딱 들어 맞지 않음을 미리 변명처럼 적어 놓고 시작한다. 그리스 로마 시대의 그러니까 미켈란젤로가 살던 시기로부터 약 1500년 이상 이전의 시대에 만들어 놓은 작품들을 보면서 미켈란젤로도 인간의 신체가 가지는 그 아름다움에 눈을 떴던 듯 하다.


그리하여 미켈란젤로의 미에 대한 관점은 순수하게 인간 그 인간의 외형적 모습에 그 의미가 부여되기 시작한다.


따라서 미켈란젤로의 그림들을 보면 그 포즈가 상당히 기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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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탄생한 그림들은 이러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가운데의 천지창조를 중심으로 양쪽의 네 명의 사람을 보라.


어찌보면 굉장히 오바스러운 포즈이지만 그림에서 하나의 건축적 요소로써 그리고 마치 움직이는 사람의 사진을 찍어 놓은 듯한 이러한 효과는 사진이 개발되기 이전에 사람들에게 상당한 시각적 감명을 주었다. 따라서 레오나르도에 비해 한참 어린 꼬꼬마 화가에게 레오나르도의 옆에서 대결을 할 수 있는 명성이 주어진 것이다.


위의 그림을 보고 '저 정도의 포즈는 자연스러운 거 아냐?'라고 생각하는가? 그건 우리의 눈이 워낙 사진 등의 메체를 통해 역동적인 것에 길들여져 있어서다.


당시 16세기 이탈리아의 다른 그림들과 비교해 보면 미켈란젤로의 저러한 자연스러운 포즈가 실로 대단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가 생각한 아름다운 인체는 그의 조각에 대한 깊은 이해와도 관련이 있다. 즉 많은 조각 작품을 통해서 단련된 형태를 보는 높은 눈은 아름다운 포즈를 만드는 데에 많은 힘을 쏟아붓게 만들었고 그러한 것이 자연스럽게 회화에 다시 녹아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이 두 사람의 대결은 누구의 승리로 끝났고 그들은 도대체 어떠한 그림을 그렸을까?

 

당시 피렌체에서 둘이 실력 대결 한판 붙었지만 당시의 문화, 예술, 경제, 권력 그 모든 것의 중심은 로마였다. 물론 각각의 이탈리아 공화국들이 호시탐탐 자신들의 세를 넓히려 안간힘을 쓰긴 했지만 뭐 어쩌겠나. 신 앞의 한낮 작은 미물이라는 의식이 지배하고 있는 시대였는 걸.

 

하지만 특이하게도 르네상스 시대의 유수의 예술가들이 결국은 피렌체에서 많이 나왔다는 것은 그만큼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이 예술가들에게 많은 후원을 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의 미학에 관한 입장차가 있으니 그 둘 중에서 동시대에 한 사람이 더 잘나갔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 하겠다


여기서 더 잘나갔음이 누구의 예술이 더 뛰어나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은 누가 더 돈 많은 권력자에게 사랑을 받아 그 앞에 불려가서 비싼 그림을 그리게 되었는가를 의미하는 것임은 두말 할 필요가 없겠다


그렇다. 그때나 지금이나 돈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임은...인간사 다 그런 것 아니겠는가

 


그림대결

 

1504년부터 시작된 레오나르도의 작업은 1506년까지 계속 된다. 한 사람이 3년 동안 한 그림을 그린다고 생각해 보라. 으아... 참 지겨운 일이다


하지만 그림의 크기가 워낙 크고 레오나르도는 원래 굉장히 세밀하게 그린다는 점을 알아두자. 결국 그는 3년 동안 첫 번째 에피소드인 '깃발전쟁'(내 마음대로로 해석한 것이다. 이걸 쳐봐야 그림이 안 나온다고 욕하지 마시라.)이라는 한 씬만 그리게 된다. 게다가 레오나르도는 회반죽이 마르기 전에 위에 유화로 그림을 그리는 프레스코화로 이 그림을 그렸다.


레오나르도는 본래 실험 정신이 아주~ 드럽게~  강해서 그 이전의 작품인 최후의 만찬에서는 마른 벽 위에 그림을 그리는 세꼬 테크닉을 이용했다. 그런데 이 기법은 너무 내구성이 약해서 그림이 완성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그림이 떨어지고 망가지고 하는 문제를 발생시켰다. 따라서 이탈리아에 놀러 가서 밀라노에서 최후의 만찬을 보더라도 너무 감동하지는 말자. 현재의 그림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부분은 거의 없을 뿐더러 초반의 복원 작업이 원래의 형태를 많이 망가뜨려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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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렇게 프레스코로 그렸던 그림은 앙기아리의 전투라고 불리며 대략 위의 모습으로 남아있다.

 

뭔가 다빈치스러운 그림이다. 현재는 루밴스가 나중에 베껴 그린 위의 스케치만 남아 있으며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있다고 하는데 가도 볼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이도 전체를 베껴 그린 게 아닌 부분도라고 알려져 있어서 전체의 모습이 어떤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아무튼 루벤스 그림이다


루벤스 다들 아시지 않는가? 플란다스의 개에서 주인공이 좋아하던 그 화가... 가 루벤스 맞을껄? 에헴

 

위의 그림을 잘 보면 알겠지만 말의 움직임이 상당히 역동적이다. 말끼리 서로 포옹하고 애무(?)하는 듯 한 저 장면을 보면 그림 자체가 상당히 움직임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moti anima 라고 한다. '영혼의 움직임'이라는 뜻 정도로 풀이되겠다. 즉 전쟁에서의 열정과 정신을 저런 움직임으로 극대화하려는 컨셉이다. 별 감흥이 없는가? ... 그 시대에는 저런 역동적인 그림이 잘 없었다.  


얘기했듯이 위의 그림은 큰 그림의 '부분도'지만 위의 그림이 가장 중심이 되는 사람들이 엉켜있는 부분이며 요 부분부터 레오나르도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자 다음 미켈란젤로의 그림으로 넘어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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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이 미켈란젤로의 카시나의 전투신이다.

 

위의 그림은 카툰이라고 하는 큰 그림의 밑그림으로 그려진 그림이다. 그렇다. 우리가 지금 쓰는 카툰(만화)이라는 단어는 중세시대에는 큰 그림을 그릴 때 보고 베끼는 약간의 단순화시킨 밑그림 정도 되시겠다


위의 두 그림 모두 전반적으로 7m 높이에 17m 넓이니 그 그림의 크기가 얼마나 큰지 알 만하지 않은가?

 

앙기아리의 전투와 마찬가지로 카시나의 전투 역시 일부분이라고 한다. 원래는 더 많은 부분이 있었는데 위의 원본 그림은 조금씩 잘라서 여러 잘 사는 높으신 분들이 사이좋게 나눠 가졌다고 한다.  


아무튼 위의 카툰은 Bastiano da Sangallo라는 별로 유명하지 않은 화가에 의해서 베껴 그려진 것을 렝케스터 경의 콜렉션이 현재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보고 싶으면 렝케스터 경에게 전화 함 해 보시라

 

그림을 찬찬히 디벼보면 사람들이 막 뒤엉켜서 움직이는 것이 보인다. 이는 전쟁 중에 휴식하라고 목욕을 허락받은 병사들이 이딸리아의 아르노 강에서 간만에 때 빼고 광내는 도중에 갑자기 적이 쳐들어왔다고 진돗개 하나 발령되어서 허겁지겁 옷도 주워입고 갑옷도 메고 나팔도 부는 그런 장면이다.

 

원래는 위의 사람들 외에 옆에 허겁지겁 준비하는 기병대의 모습도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

 

아무튼 대략 둘은 이런 그림으로 대결을 펼쳤다

 

그런데 둘의 자존심 대결이 매우 심했는지 아니면 성격들이 삐뚤어졌는지 기록에 의하면 미켈란젤로는 이 곳에서 그림을 그리는 레오나르도가 보지 못하도록 벽을 세워서 앞 뒤로 막힌 방을 만들고 그 안에 들어가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미켈란젤로의 나이가 더 어림을 감안해 본다면 선배 앞에서 이 어디 싸가지 없는 짓인가? 서로 사이 좋게 지내면 될 것을... 


거기에 더하여 둘의 그림도 상당히 달랐다. 레오나르도는 여러 명의 사람과 말들이 한데 뒤엉켜서 싸우면서 그 하나하나가 모여서 하나의 큰 씬을 만드는 데 반하여 미켈란젤로의 그림은 각각의 인물들이 하나하나의 조각상들처럼 서로 연관없이 따로 놀았다. 이는 화가로 주로 활동한 레오나르도와 조각가로 더 큰 명성을 얻은 미켈란젤로의 차이가 그림에 드러난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물 속에 삐죽 나와 있는 두 손은 마치 구해달라고 하는데 다들 쌩까는 그런 분위기인 듯. 손 좀 뻗어 주지... .)

 


바사리의 등장 

 

어쨋든 위의 그림은 미켈란젤로가 1504년에 그리기 시작했는데 1505년에 돌연 로마에서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묘비의 장식을 하라는 의뢰를 받고 밑도 끝도 없이 그리다 말고 다 때려치고 가버린다


아... 저노무 아름다운 성격... 기냥 때려친다. 그럼 돈주고 맡긴 사람들은 어쩌라고


게다가 미켈란젤로가 나날이 상종가를 치고 있었기 때문에 그림을 그리는 작업장에는 그의 카툰을 연구하려고 정말 많은 화가들이 몰려왔었다고 한다. 그 중에는 나중에 유명한 닌자거북이 화가가 된 라파엘도 포함되어 있었다이런 저런 거 다 때려치고 더 돈 많이 준다는 놈한테 가버린 미켈란젤로... 그의 시크함 때문인지 아니면 한쪽 벽에만 붙어서 주구장창 3년내내 그렸지만 젊은 놈에게 발려주신 레오나르도 형님 때문인지 두 그림 모두 미완성인 채로 팔라쪼 베키오의 500년의 방은 그대로 방치된다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는데... 이 홀을 그대로 방치하기 너무 아깝다고 생각하던 삐에르 소데리니는(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에게도 직접 돈을 준 사람이다.) 결국 바사리라는 화가에게 방 전체를 다시 그려줄 것을 요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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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지오 바사리


바사리가 누구인가. 인류 최초의 마술사학자이자 화가던 그는 이것들을 그냥 덮어버리기에는 너무 아깝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이놈 저놈 불러다가 그림을 베껴 그리게도 하고 나름 기록으로도 두 사람의 대결을 나름 자세히 남겨 놓았다.

 

조르지오 바사리라는 이 화가는 메디치 가의 '궁정 화가'기도 하였지만 그의 그림이 후기 르네상스(매너리즘이라고 지칭되기도 하는 후기 르네상스는 어느 정도 르네상스의 몰락기라고 평가될 정도로 약간 폄하 되어 있는 시기다.) 스타일이고 그림의 질에 있어서도 '엄청 뛰어나서 당대의 한 획을 긋는' 그런 타입의 화가는 아니었다


다만 그의 오덕질은 매우 뛰어나서 그 전의 시대의 화가건축가, 조각가 들의 작품을 분류·카테고리화하여 나눈 것을 기술해 책으로 펼쳐 내게 된다


따라서 그 이전까지 그림이 하나의 기술로 평가받던 사회의 분위기를 예술로 격상시키고 학문적인 연구로 발전을 시킨 최초의 학자라고 할 수 있다


그의 그러한 성정때문인지 학문적으로도 깊은 고찰을 했을 그는 결국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의 그림이 이대로 묻히거나 버려지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그의 저서의 중요한 부분이 당시 최고의 르네상스 화가들이던 레오나르도, 미켈란젤로, 라파엘의 미학에 관한 연구였음을 감안한다면 바사리가 자신의 선배들의 작품 또한 매우 존경하고 아꼈음을 알 수 있다


그럼 그가 그림을 그리러 도착하였을 당시 완성이 되어 있던 레오나르도의 그림과 미완성으로 스케치만 되었던 미켈란젤로의 그림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그 그림들의 가치를 충분히 알고 있는 바사리는 미켈란젤로의 그림은 어쩔 수 없었겠지만 레오나르도의 그림만은 보존하고픈 마음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벽에 그려진 그림을 뜯어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질적이게 한 벽면은 레오나르도의 그림을 놔두고 자신의 그림으로 나머지 벽면을 채우는 것도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현재 

 

시간은 흘러흘러 어느덧 저 대결이 있은 지 500년이 흘러버렸다. 베키오 궁에 있는 500년의 방은 이제 모두 바사리의 그림으로 둘러쳐져 있다. 그리고 위 두 화가의 그림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음모론 덕후이신 마우리치오 세라치니가 나타난다


옛말에 덕중에 덕은 양덕이라 했던가.... 


이 세라치니라는 교수는 바사리의 그림에서 한 부분에 완전 꽂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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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위 그림의 저 부분이다.


CERCA TROVA라고 쓰여진 라틴어 문장인데 우리말로는 "찾아라 그러면 찾을 것이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저런 쌩뚱맞은 곳에 저렇게 콩알만한 글씨로 쓰여진 저 부분에 꽂힌 세라치니 교수는 70년대부터 레오나르도의 그림을 찾으려고 시도했다. 앞서 바사리의 그림에 대한 연구와 풍부한 도상학적 깊이를 생각해 본다면 바사리가 아무 의미없이 저런 글귀를 그림에 남겼을 리 없다는 것이 그의 추정이었다.

 

그가 처음 학계에 이러한 의견을 제시했을 때 주류 학계에서는 가능성이 있을지라도 너무 음모론적이고 불확실한 추정일 뿐이라고 그의 의견이 많이 무시되어 왔었다.


게다가 그는 미술사학자라는 정통성보다는 기술자의 능력이 강했던 사람이라서 학계에서 그의 의견도 조금은 무시당했을 확률이 높아보인다.

 

게다가 미술분야에는 저러한 음모론들이 너무 많아서 검증이 되지 않은 음모론의 경우 철저하게 무시되기도 한다.(사실상 대부분의 음모론 혹은 발견 자체가 허위 혹은 조작으로 드러나는 경우도 수도 없이 많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 세라치니라는 교수는 굉장히 오랜 시간 자료 수집과 탐구를 통하여 레오나르도의 그림이 아직 바사리의 그림 뒤에 벽속에 숨어서 보관되어 있을 것이라고 강하게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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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사이언스 타임즈)


그리고 마침내 문화재에 대해서 엄청 보수적인 이탈리아의 정책적 반대를 무릅쓰고 200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인 탐사를 시작했다


처음에 필자가 이 이야기를 접했을 때에는 베키오 궁의 밖에서 벽에 구멍을 뚫어서 벽 내부를 조사해 본다고 하던 기사를 접한 기억이 난다. 그게 이미 4-5년 전 이야기였다.

 

그런데 아마도 이탈리아의 문화재 관리소가 이를 불허했는지 아니면 기술의 부족인지 아직까지 그에 대한 결과를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돌연 작년쯤부터인지 바사리의 그림에 직접 미세한 구멍을 뚫어서 내부를 조사한다는 기사를 접했다


그리고 최근에 바사리의 그림에 아주 작은 구멍을 뚫어서 벽 뒤에 물감층이 있는 것까지 확인을 했다고 한다.(작년 312일 피렌체에서 언론을 상대로 연구자들이 벽 뒤에서 모나리자에 사용된 물감과 유사한 성분의 물감층을 확인했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 


따라서 벽 뒤에 레오나르도의 잃어버린 그림인 앙기아리 전투가 세상에 다시 나올 가능성이 엄청 높아진 셈이다


그에 따라 현재는 그림 전체를 막아놓고 그 뒤의 그림인(앙기아리의 전투로 강하게 추정되는) 그림을 다시 발굴하는 작업이 한창 진행중이라고 한다.

 

하지만 바사리의 그림이 액자에 그려서 벽에 건 그림이 아니기에 벽 전체를 조심스럽게 해체한 다음 그 뒤의 그림을 밖으로 끄집어내고,(이 역시 하나의 벽일 것이라고 추정한다면 손상없이 떼어내기란 쉽지 않을 것 같다.) 다시 바사리의 그림을 그 위에 붙여야 하는데 길고 지루하고 고된 작업이 예상된다

 

다만 이 그림이 나오면(아직도 복원 가능한 상태로 보존이 되었다면) 이는 21세기의 미술계에서 나온 최고의 발굴이 될 것임이 틀림없을 듯하다.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의 대결에서 시작된 이 이야기는 결국 바쁘신 미켈란젤로와 김빠진 레오나르도의 파탄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바사리라는 미술사 덕후와 세라치니라는 음모론 덕후의 아름다운 이야기로 마무리 된다

 

 

당대 최고의 주가를 달리던 화가들의 대결... 


그리고 그들의 대결의 승패와 전혀 상관없는 오늘날의 결과...

 

그 후에 나타난 어느 양덕의 집착... 

 


세상은 만화속 세상처럼 항상 승자와 패자가 나뉘는 건 아닌 것 같고 시간이 흐르면 그 승패 또한 아무 의미가 없는 듯 하다


따라서 오늘의 결론. 덕질을 졸~라 열심히 하자. 그럼 빛을 볼 날이 온다는 훈훈한 결말쯤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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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데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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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보리삼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