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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대선의 유별난 특징은, 대선 일정을 아직 아무도 모른다는 점이다. 일정이 정해진 대선 레이스는 각 시점에 따른 대략적인 전략과 가이드가 있기 마련이다. 예컨대 신인이 너무 일찍 두각을 보이면 정체기가 금방 찾아오므로 페이스 조절이 필요하다든가, 너무 일찍 부터 정책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면 지루해질 수 있으므로 후보등록 전까지는 굵직한 노선만 제시해야 한다든가. 하지만 이번에는 대선이 언제 치러질지 모르므로, 나름의 정치공학적 가이드라인이 무용해진다.


대선이 아닌 일상적인 삶에서 이런 경우엔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학창시절, 수학 선생님이 쪽지시험을 본다고는 말했지만 그게 언제라고는 말을 안한 경우의 긴장감을 떠올려보자. 이런 경우 보통은 학생들 사이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수많은 가설이 제기되고 그 중 공부를 잘하는 애들이나 수학선생과 평소 친하게 지내던 애들의 가설이 좀 더 무게감을 얻는다. 그러다 결국 그 중 어떤 가설이 합리적 이유도 없이 정설처럼 받아들여진다. 어느순간부터 학생들은 그 것을 진리로 받아들인다. 그러다 결국엔 그것이 진리가 아님이 드러난다. 전혀 쌩뚱맞은 (사실은 쌩뚱맞은 것도 아니지만) 타이밍에 쪽지시험을 치르게 되는 것이다.


재밌는 건, 진리로 받아들여지던 그 가설이 틀렸다는 사실에 대해 그 누구도 심각한 절망이나 분노를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두가 그것을 진리 처럼 받아들였지만, 사실은 진리가 아니었다는 걸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애초에 왜 그 가설을 진리처럼 받아들였을까. 첫번째 이유는, 그게 더 편하기 때문이다. 늘상 불안감에 쌓여있는 것보다는, 어떤 가설을 그냥 받아들이고 그에 맞춰 준비를 하는게 심리적인 안정감을 주고, 스트레스를 받는 시간의 총량이 적다. 두번째 이유가 더 재밌다. 그것은 바로 ‘오히려 더 공평’하다는 점이다. 각자가 다른 가설을 지니고 준비한다면, 결국 우연찮게 옳은 가설을 세운 사람이 조금 더 유리해진다. 모두가 같은 가설을 진리로 가정하면서 모두가 같은 조건을 지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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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대선 레이스가, 이런 양상을 보인다. 갑작스레 쏟아져나온 국정농단 사태의 구체적 증거. 역사적인 촛불집회. 그리고 탄핵정국. 이 가운데 도대체 어느 정도 장단에 맞춰야 할지 예상할 수 없는 혼란 속에서 어쨌든 대선레이스는 시작됐다. 누군가는 과감하게 치고 나갔고, 누군가는 숨을 고른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부터 서서히 질서가 형성됐다. 아직 헌재의 판결일정을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지금, 이제 이 가상의 질서는 어느정도 자리를 잡는 추세다.


이 가상의 질서를 누가 주도했는지는, 이 대선의 결과와 아마도 별다른 관련이 없을 것이다. 마치, 수학 쪽지시험에 대한 틀린 가설을 처음 제기한 학생이 시험을 잘 보리라는 보장이 없는 것 처럼 말이다. 하지만 쪽지시험과는 달리 대선은 말 그대로 대통령 선거라는 점에서, 이 혼란 속에 형성된 가상의 질서가 어떤 구도를 보이는지를 파악하는 건, 지지할 후보를 정하는 데에 괜찮은 참고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럼 한번 시작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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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재인 - 독점적 자산의 적절한 활용


작년 늦가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국정농단사태가 그 끝을 알 수 없는 깊이를 드러내면서, 문재인은 본의아니게 그 누구도 지닐 수 없는 묵직한 ‘정서적 부채감'을 지니게 된다. 박근혜의 실체를 진작에 알았다면, 그러니까 새누리당 대선캠프가 최소한의 합리적 사고만 했었더라면,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를 찍은 수많은 유권자들이 선택을 달리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당연히 문재인이 당선됐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 즉, 문재인에 대해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대통령이 되지 못한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형성되는 것이다. 특히나, 당시 새누리당에 박근혜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후보감도 없었다는 사실로 인해, 이 부채감은 사실상 문재인에게 독점적으로 형성된다.


물론 역사에는 가정이 없으므로, 이건 그냥 ‘정서'일 뿐이다. 그가 다음 대통령이 돼야 할 당위성까지 지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현직 대통령의 메가톤급 스캔들이 터져나오는 가운데, 하루빨리 갈아치우고 싶은 감성적 지형 위에서 이 ‘정서적 부채감’은 확실히 큰 힘을 지니게 된다. 실제로 문재인은, 국정농단 사태에 대한 보도가 이어지던 시기와 비슷하게, 발언의 수위나 강도, 공식 행보의 존재감 상의 변화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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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 압권은 2회에 걸친 기자회견. 11월 중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한달 뒤인 12월 중순 ‘외신 기자 간담회'를 연다. 생각해보자. 문재인의 현재 공식 타이틀은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이다. 더민당 뿐만 아니라 어느 당이든 이 상황에서 단독으로 한명의 상임고문이 ‘시국 관련 긴급 기자회견'을 연다든가, 더 나아가 ‘외신 기자 간담회'를 열었다면 대부분 비웃음을 샀을 일이다. 하지만 사진에서 보듯, 기자들로 빽빽히 찼다. 바로 이것. 이 시국에 한 마디를 한다면 그 누구보다도 무게감을 지니게 되는 그 존재감이 바로, 문재인이 지니는 독점적 자산인 ‘정서적 부채감'이며, 문재인은 이를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사실 그는 아직 대선출마 선언도 안했다. 그런데 정책 구상은 발표했다. 마치 맡겨놓은 자기 물건을 찾아가는 듯한 자연스러운 행보이고, 이 점에서 그가 이 자산을 인식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하지만 본인이 직접적으로 ‘그거 원래 내 거였음'을 언급하는 것은 철저하게 피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통령 행세를 한다'는 식의 일부 비판을 가볍게 무효화시킨다.


현 시점까지 문재인은, 확실히 이번 대선 레이스의 혼란 속 질서를 주도하는 한 축을 맡아왔다. 이후 헌재 판결 일정의 윤곽이 잡히고 민주당 경선이 시작되기까지, 아마도 이렇게 ‘남들이 하면 오바지만 내가 하는 건 괜찮은' 독점적인 자산을 적극 활용하면서, 축구로 치면 그라운드를 넓게 활용하는 행보를 이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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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재명 - 판을 흔드는 자.


이재명은 발언 수위가 세다. 지속적으로 그래왔다. 그 특징이 시너지를 낼 수 있는 다른 자산은, 성남시 운영 성과다. 이재명의 반대세력에서도 ‘성남시니까 그럴 수 있었다'는 식의 논리를 펴지, 차마 시 운영을 못했다고 비판하진 못한다. 학창시절로 치면, 교내 최고의 반항아가 공부까지 잘하는 식이다. 또 다른 자산은, 세월호 참사에 대한 끝없는 관심을 보여왔다는 사실이다. 한번도 공식 석상에서 노란 리본을 뗀 적이 없고, SNS를 통해 늘상 세월호 관련 이슈에 관심을 보여왔다. 몇달 전 ‘지긋지긋하니 그 리본 좀 떼라'는 시민에게 따끔한 한마디를 던지는 모습이 보도를 타면서 이러한 상징성은 강화된다.


국정농단 사태의 증거들이 보도되는 초기만 해도, 이재명의 강력한 발언들은 아슬아슬해 보였다. 혹시라도 이 사건이 적당히 묻혔다면 이재명의 정치생명도 끝나진 않을까 싶을 정도의 강한 비난이 이어졌다. 실제로 본인이 직접 박근혜를 고발하기까지 했다. 이런 행보는 촛불집회가 역사적인 규모로 이어지면서 다수 시민들의 분노에 대한 시원한 대리분출의 역할을 수행했다. 이번 사태 자체가 세월호 참사와 뗄 수 없는 의혹들로 연결되면서 그가 지닌 세월호 참사에 대한 상징적 이미지가 힘을 보탠다. 이에 더해, 시 운영 성과는 ‘무능한 대통령'과 대조되면서 시너지를 폭발시킨다.


그가 이러한 시너지를 계산하고 초기부터 과감한 행보를 보인 것인지,  아니면 그냥 원래 한결 같이 ‘센' 사람이니까 마찬가지로 세게 한건지는 모를 일이다. 어찌됐든, 그의 지지율은 두자릿수를 넘어갔고, 이는 문재인, 반기문에 이은 3위에 해당하는 숫자다. 라이벌처럼 비춰지던 박원순 서울시장은 엉겁결에 큰 격차로 뒤쳐졌고, 국민의당 안철수의원도 지속적으로 뒤쳐지는 중이다.


아직 갈길이 먼 수치이긴 하다. 그나마도 최근들어서는 다시 10% 초반대로 다소 하락세다. 하지만 이재명이 이 대선 레이스의 혼란 속에서 지니는 의미는 유효하다. 점잖음의 끝판왕이라 할 수 있는 문재인이 1위에, 마찬가지로 ‘세계 대통령을 지낸 신사'의 이미지로 보수세력에게 어필하는 반기문이 2위에 포진한 상황에서 신진 주자에게 있어 점잖고 경우에 바른 이미지는 경쟁력이 될 수 없다는 것. ‘재벌 체제 해체’ 같은 키워드로 드러나는 강력한 캐릭터가, 한국식 점잖음에 답답해진 세그먼트를 사로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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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인지, 슬슬 다른 대권주자들도 점차 강한 발언의 수위를 보인다. 이재명 또한 한 켠에서 이번 대선 레이스 판세에 영향을 끼치는 셈이다. 비유하자면, 포커판에서 판을 흔드는 역할이다. 포커판에서 모두가 보수적인 플레이어인 경우, 결국은 오래 버틸 수 있는 돈 많은 쪽이 유리하다. 이럴 때는 상대적으로 적은 돈을 쥔 플레이어가 변칙 베팅으로 판을 흔드는 수 밖에 없다. 그러다보면 보수적인 상대방이 흔들리기도 하고, 아무도 예상 못한 우연에 의해 힘의 균형이 바뀌기도 한다.


물론 그 반대의 위험도 있다. 판을 흔드는 행위는 치밀한 확률계산에 의한 보수적 플레이에 비해 말 그대로 ‘도박’에 더 가깝다. 판을 흔들었다는 평가 자체도 성공한 이후에 붙는 수식이지, 실패하는 순간 ‘되도 않는 얕은 수법’으로 전락한다. 벌써부터, 대선 출마선언 다음날인 24일 있었던 김부겸, 박원순과 함께한 ‘3야 공동정부’론에 대한 지지자들의 반응이 시원찮다.


여하튼 이재명은 분명 지속적으로 강한 발언과 튀는 행보를 이어갈 터. 전반전의 반짝 스타로 마무리 될지, 뒷심있는 돌풍의 주역이 될지 아직 변수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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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안희정 - 안경선배의 3점슛


개인적으로 불과 몇달 전만 해도, 안희정 지사를 대권주자로 보는 견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독자적인 경쟁력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자체 운영 능력에서는 박원순, 이재명 두명과 묶이고, 노무현 대통령과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감정적 자산이나 명분에 있어서도 문재인에 비해 유리하다고 보기 힘들다. 정책이나 노선에서의 색깔이 다른 민주당 정치인들과 특별히 다르지 않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덧, 그는 민주당 내 대권주자 지지율 3위의 입지를 굳혔다. 그 많은 선배 정치인들을 모두 제치고, 강력한 라이벌 박원순도 제쳐냈다. 묵묵하게 한걸음 한걸음 걸어나가는 모습은, 분명 대중들의 정서 어딘가를 자극하는 힘이 있다. 지금 그 힘이,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바로 대선출마 선언을 통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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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차이로, 안희정 지사의 대선출마 선언은 야권에서 가장 빠른 선언이 됐다. 이재명 시장은 하루 늦은 1월 23일에 선언했고, 박원순 시장은 SNS를 통해 ‘사실상' 선언했을 뿐 공식적인 행위로써 대선 출마를 선언하진 않았다. 그냥 빨랐을 뿐만 아니라, 포맷에서도 독특했다. SNS의 실시간 커뮤니케이션을 접목한 것. 준비한 선언문만 낭독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시대적 상징성을 지니는 모습까지 연출했다. 이로 인해 상대적으로 이재명 시장의 하루 늦은 출마 선언이 다소 묻힌 감이 생겼고, 그만큼 안희정 입장에선 괜찮은 득점을 한 셈이다.


비유하자면 북산:능남전에서 북산고의 교체멤버 안경선배가 3점슛을 넣은 격이다. 이렇게 되면 능남 입장에서 신경이 쓰이게 되고 수비가 붙게 된다. 결국 전체적인 게임의 균형이 새로운 구도를 지니게 된다.


냉정하게 보자면, 아직까지도 안희정 지사의 존재감은 약한 편이다. 순위상으로도 5위라면 사실은 대선에서 순위권 밖이라고 보는게 맞겠다. 하지만 이번 득점은, 괜찮았다. 대선 판도에 큰 영향을 끼치진 못할지라도, 최소한 다른 대권주자들에게 좋은 자극이 됐을 것이라 생각된다. 무엇보다도, 언제 치러질지도 모르는 이번 대선의 ‘공식 출마 선언’의 타이밍을 먼저 만들어냄으로써 판세 전체의 흐름에 발자국을 남겼음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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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안철수, 박원순 - 전략적 침묵인가, 기세의 부족인가


지난 대선 당시 ‘새로운 정치'의 상징과도 같았던 두 인물이, 영 눈에 띄지 않는다. 김어준 총수가 파파이스 방송을 통해 언급했듯, 박원순 시장은 자신의 홈그라운드에서 벌어진 광화문 촛불 집회에서 별다른 정치적 이득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대선출마 결심도 SNS를 통해 넌지시 알리고, 라이벌들이 본격 행보를 시작하는 동안 눈에 띄지 않다가 갑작스레 김부겸 이재명과 함께 공동정부를 제안하는 자리에 모습을 드러냈다.


안철수 의원 또한 일방적인 말 몇마디를 남길 뿐 어떤 구체적 행보를 보이지 않고 있다. 지지율 역시 4위로 답보상태. 본인 뿐만 아니라 국민의당 정당지지율도 쪼개진 새누리당과 바른정당 모두에게 뒤쳐진다. 자신들은 탄핵을 주도했다는 명분에 기대를 걸었을테지만, 여론은 별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 하다.


어쩌면 이 둘은, 각자의 라이벌인 문재인과 이재명이 만들어가는 페이스를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만약 헌재 판결이 3-4월 이후로 늦어진다면 이런 전략이 효과를 얻을 수도 있다. 반전이 벌어질 시간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슬램덩크 비유를 한번 더 쓰자면, 처음부터 후반전에 모든걸 건 서태웅의 페이스 조절이다.


하지만 선거는 개인의 기량만으로 득점을 하는 것이 아니기에, 한발짝 늦게 간다는 이미지는 이미 그들에겐 꽤 무거운 짐이 될 수 있다. 나름대로 숨고르기를 하는 동안 자칫 선두주자들의 ‘들러리’로 낙인이 찍혀버릴 지도 모를 일이다. 더욱이, 헌재 판결이 앞당겨지기라도 한다면 기다리던 그 후반전은 우리와 함께 벤치에서 지켜보는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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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반기문 - 시대착오적 낙관론


반기문의 최대 자산은 UN사무총장이라는 ‘자리’다. 이 자리의 화려함은 보수세력 내에 이렇다 할 차기 주자가 없다는 사실에 더해 사사로움의 끝을 보여준 지난 9년의 기억까지 어우러져 기막힌 조합을 이룬다. 그래서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도 20%대의 지지율을 확보한 채 레이스에 가담한다.


문제는, 막상 뚜껑을 열고보니 그 ‘자리’ 외에 아무 무기가 없다는 점이다. 아무 것도 안 하고 획득한 20%대의 지지율은, 어떻게 해도 더 늘어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 대선 판에 암묵적으로 형성된 질서가 지니는 특징 때문이다.


이 판에는 죄인이 확실하다. 그 죄인과 등을 돌리는 순간 이미 캐릭터가 확고한 야권 주자들이 있어 반기문 입장에선 발 디딜 틈이 좁다. 결국 그 빈 틈, 새누리당에 분노를 느끼지만 민주당을 지지하기엔 부담스러운 그 틈새를 노려야할텐데, 그 세그먼트는 안철수와 겹친다. 여기서 안철수까지 빗겨간 틈새를 찾는다면 그 틈은 너무 좁아진다.


그래서 그는 누구나 예상할 수 있었고, 그래서 전혀 신선하지 않은 ‘정치교체’를 외친다. 짜여진 판세를 초월하고 싶은 것이겠다. 하지만 지금의 판세는 앞서 논의했듯, 정치공학적 전략에 의해 공허하게 형성된 것이 아니라, 불확실한 혼란 속에서 각각의 주체들이 직접 형성한 실체다. ‘정치교체가 필요하다’는 말 한마디로 해체될 성격의 것이 아닐 뿐더러, 그런 시도 자체가 스스로의 외연을 가로막아버린다.


이래저래 좁아져만 가는 입지. 이쯤 되면 대략 10% 가까이 되는 ‘죄인을 지지하는 유권자들’이 아쉬울 법도 하다. 하지만 이마저도 녹녹치 않다. 여기서 친박계와 손을 잡는 순간 빠져나갈 지지율이 더 클지 모르기 때문이다. 결국 어부지리로 황교안의 지지율이 오르는 블랙코미디적 현상이 발생하고 반기문은 20%대에 고착된다.


이 와중에 그는 ‘외교 전문가’의 이미지만 강화한 채, 경제나 사회문제에 대한 질문에 ‘전문가와 국민의 뜻을 물을 것’이라는 공허한 대답을 반복한다. 본인의 자산을 과신한 채 이번 대선 판의 특성을 전혀 읽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 전문가를 당장 만나서 밤을 새서라도 전문용어 몇마디 쯤은 읊어야 될까 말까한 상황에서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반기문이 어떻게든 이번 대선에 후보등록을 했으면 하는 야비한 생각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고백한다. 보수층 20%가 사표가 될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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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유승민, 남경필, 오세훈 등 기타 등등


갈피를 못잡는 반기문, 죄인의 하수인 황교안이 보수 주자 1,2위를 다투는 상황이라면 ‘이 판돈 내가 먹을 수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 법도 하다. 어쨌든 투표장에서 ‘민주당은 안 찍을’ 사람들이 30-40%는 족히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새로운 바람’만 불어준다면 나름의 핑크빛 미래를 기대해 봄직하다.


하지만 앞서 말한 ‘죄인을 지지하는 유권자들’ 덕분에 이는 10%와 20-30%로 나뉜다. 이 표를 한 번에 먹을 방법은 생각하기 힘들다. 박근혜 정권을 측은히 여기면서 동시에 척결의 대상으로 삼는 방안을 찾는 건 양자역학이나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이 필요한 레벨의 문제다.


그 와중에 반기문은 아마도 출마를 할 것으로 보인다. 그 20-30% 마저 갈라먹게 생겼다. 왼쪽으로도 오른쪽으로도 외연을 넓히기가 녹록찮은 상황.


결국 이들이 레이스에서 두각을 나타내려면, 박근혜를 감싸면서도 척결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재벌을 수호하면서도 해체해야하고, 복지를 늘리면서도 줄여야한다. 이 불가능한 것을 그나마 비슷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은 ‘경제를 살린다’는 슬로건의 새로운 버젼을 만드는 것이 될 게다.


유승민은 아마도 특유의 슈뢰딩거의 고양이적 면모를 살려 분배를 내세운 성장 정책을 내세울 것이고, 남경필은 경기도에서 나름 열심히 밀었으나 아무도 모르는 글로벌 창업 지원과 4차산업 육성을 내걸 가능성이 높다. 오세훈은, 뭐 잘 모르겠다. 망국적 복지 포퓰리즘을 내걸지 않을 것임은 확실하겠다.


이들이 자신들에게 닥친 모순적 숙제를 어떤 모순적 정책으로 풀어보려 할지, 그리고 반기문과의 관계를 어떻게 유지할지, 주목해볼만한 재미요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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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심상정 - 화이팅, 이 말 밖엔


정의당 심상정 대표는 지난 19일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사실 제일 빨랐다. 하지만 언론의 집중을 받지는 못하고 있다. 아무래도 당의 영향력이 작기 때문일 것이다. 국정농단, 탄핵정국에 꾸준히 멋진 발언을 이어왔지만 여론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심상정에게 기대할 수 있는 건, 특유의 내실있는 진보적 정책들이다. 진보노선만을 내세운 구식 진보정책이 아닌, 데이터와 현실성을 기반으로 한 구체적 진보정책 말이다. 그러한 정책들이 하나씩 발표될 때마다, 지금의 주요 야권 주자들이라면 그 내용을 면밀히 검토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한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은 심상정이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또 다른 형태의 개인적인 정서적 부채감을 심상정에게 갖는다.


아직까지 이번 대선 판세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보기 힘들고 아무리 탄핵정국이라고 해도 정의당에게 까지 수혜가 돌아오는 것 같진 않다. 하지만 기대해 본다. 발표되는 정책만큼은 그 어느나라 유명 지도자들에 뒤쳐지지 않는 높은 수준의 정책들로 가득해 있기를. 그리고 그 수준이 보다 많은 대중들의 눈에 띌 수 있기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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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번 대선 레이스는 다분히 야권 주도의 새로운 질서가 자리잡았다. 판세가 복잡한 만큼, 피로감도 클 가능성이 높다. 부디 더이상의 절망은 털끝 만큼도 없이, ‘한국은 평화적 집회만 잘하는 나라가 아니었다’는 자타공인 평가가 자리잡는 대선 레이스로 진행되길, 한명의 유권자로서 기대해본다.






춘심애비

트위터: @miiruu


편집 : 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