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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교도소에서 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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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소’ 또는 ‘감옥’

살면서 한 번 가볼까 말까 한 곳인데도 모르는 사람은 없는, 친숙한 장소다.



낯선 곳에 대한 이 알 수 없는 친숙함은 그간 교도소를 배경으로 한 영화와 드라마를 꾸준히 접한 탓일 수도 있겠다. 쇼생크 탈출, 프리즌 브레이크의 석호필, 드라마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 정확히 어떤 작품인지 모르겠으나 이 중 무엇인가에는 책임이 있다. 구치소와 교도소의 차이를 널리 알린 최순실 여사의 공도 조금은 있을지도 모른다.

 

밖에서 보이지 않도록 높이 쌓아 올린 담장, 쇠창살, 손석희가 떠오르는 청색 수의, 치열한 서열 다툼, 간수들이 진압봉을 현란하게 휘두르며 죄수들을 작신작신 밟아대는 풍경, 그리고 방금까지 두들겨 패던 간수들과의 암묵적 합의 하에 이루어지는 밀거래.

 

교도소라는 단어가 환기시키는 이미지는 대충 이렇다. 상상일까 아니면 현실일까. 미디어를 통해 생산되어 마치 진짜일 것만 같은 이 이미지가 현실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지, 일반인은 알 길이 없다.

 

교도소만큼 선명하게 떠오르면서 동시에 와 닿지 않는 공간도 잘 없지 싶다. 이 단어가 무엇을 뜻하는지 모두가 정확히 알지만 실제로는 아무도 모르는 곳. 이곳은 머릿속에서는 익숙할지 모르겠으나 현실에서는 미지의 공간이다.

 

그곳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그곳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실체를 파악할 수 없는 궁금증에 대해 합리적 상상이 가능하도록, 지금부터 그곳에 잠겨있는 사람들에 대한 글을 이어가려고 한다. 


나는 교도소에서 일한다.



셀프’ 그리고 ‘감금’

 

우리는 일상을 통해 닫힌 공간을 지속적으로 경험한다. 아침에 집을 나서기 위해 문을 열고 밖에서 다시 잠근다. 자동차 문을 열고 닫는 일, 엘리베이터에 타고 내리기 위해 문을 닫고 여는 일은 일상이다. 이런 식의 잠금과 열기를 반복하며 공포에 비명을 지르거나 경기를 일으키는 사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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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적인 열고 닫기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공포와 불편함이 아니라 안락함이다. 벽과 잠금장치는 타인과 나의 경계, 외부와 내부의 경계를 결정지으며 내가 들어앉은 공간을 나만의 개인적인 공간으로 만든다. 때로는 안락함 따위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기도 한다. 이 행위가 갖는 일상성 때문에 특별한 감정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닫힌 공간이 ‘감금’을 의미하지 않는 이유는 문을 걸어 잠그는 주체가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직접 걸어 잠근 문은 언제든 직접 열 수 있고, 열고 닫음을 통해 한 공간에 머무르지 않고 개인과 공공의 공간을 오갈 수 있다. 이 열고 닫음을 결정하고 실행하는 의지는 온전히 문을 걸어 잠근 개인에게 있고, 거기에는 타인의 의지나 강제가 끼어들 틈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인지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셀프’는 ‘감금’과 공존하는 말이 아니다.

 

닫힘과 열림이 일상만큼 빈번한 교도소의 공간이 일반인의 공간과 다른 점은 문을 열고 닫는 주체가 다르다는 것이다. 이곳의 열림과 닫힘은 자유 의지에 의해 이뤄지지 않는다. 교도소에는 ‘셀프’ 대신 ‘감금’이 있다.


 

아무나 올 수 없는 곳 

 

머무는 동안은 '셀프'를 앗아가는 곳이니, 교도소에 어떤 사람들이 갇혀있는지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개개인의 사연은 다르겠으나 위법 행위를 해 법적 처벌을 받는다는 공통점이 있어야 한다. 수감되기 위한, 일종의 기본 요건이라고 할 수도 있다.

 

단, 내가 일하는 교도소는 조금 특별하다. 이곳에 수감되라는 법원의 결정. 그게 있어야 이 ‘정신 병원 감옥’에 갇힐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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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수감자의 절반 이상은 ‘정신적인 무능력자로서, 현재의 정신 상태로는 법적인 절차를 밟을 수 없으며 처벌을 내리는 것 역시 법으로 금한다’는 판정을 받았다. 쉽게 말해 범죄에 대한 혐의는 있지만, 법정에 설 정도로 정신적 ‘정상’인 상태가 아니라서 일정기간 동안 치료를 받은 후 법정에 서야 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아직 형량을 선고받지 않은 상태의 사람들이다.

 

나머지 수감자는 치료를 받아 현재는 법정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해할 정도의 상태다. 최소한의 이해력을 갖춘 이들은 조금 다른 판결을 받는다. 법원은 ‘이들의 유죄는 인정하지만, 범죄를 저지를 당시에 정신 상태가 온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반 교도소가 아니라 정신 병원 감옥에서 형량을 마친다. 형량을 마쳤더라도 사회에 나갈 만큼 치료가 진행되지 않았다고 병원이 판단할 경우 더 길게 복역할 수 있고, 반대로 사회에 나가도 해를 끼치지 않을 정신적 상태라 병원이 판단할 경우 이르게 석방될 수 있다’는 결정을 내린다. 그게 나머지 수감자가 법정에서 일어나는 일을 인지할 수 있음에도 이곳에 머물러 있는 이유다.

 

그렇다면, 범죄를 저지르고 정신 이상이라고 주장해버리면 어떨까. 한국에서는 몇 해 전만 해도 성범죄자가 범행 당시 술을 마신 상태라 심신이 미약해 범죄를 저질렀다고 항소하는 염치없는 경우가 있었다.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정신’의 영역이기 때문에 악용 가능성에 대한 의문이 생길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정신 병원 감옥에 들어오는 기준은 분명하다. 법원의 결정을 받고 이후 수감될 때 지정된 검사를 받아야 하고, 치료 중에 정해진 기간 별로 거쳐야 하는 검사들이 있다. 수감자가 받는 모든 치료와 그의 일상은 관찰과 기록의 대상으로, 그에 대한 평가 역시 까다롭다. 수감자로서는 반드시 이곳에 있어야 함을 매 순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기준을 거쳐 미대륙에서 1년에 약 6천여 명이 이런 시설에 수감된다. 전국에서 일어나는 범죄 사건 피의자 중 2~15%에 해당하는 이 규모는 매 해 증가하는 추세다. 범죄 사건을 맡은 변호사 중 8~15%는 피고가 법정에 설 능력을 의심하는데, 이 중에서 10~30% 정도의 피의자만 법정에서 “Incompetent to Stand Trial”(법정에 설 수 없을 만큼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상태)이라 인정받는다.

 

정신 병원 감옥의 수감자를 관리하는 일은 더 힘들거나 혹은 더 야만적인 행태를 보일 것 같지만, 실제로는 교도소라는 장소가 흔히 환기시키는 장면, 가령 간수가 수감자를 구타하는 일 등은 절대 생기지 않는다. 대신 환자와 신체적 접촉만 잘못 해도 밥줄이 왔다 갔다 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교도소에서 유일하게 사용하는 무력은  “Therapeutic Strategies and Interventions (TSI)다. ”수감자, 혹은 환자가 정신 발작을 일으키거나 정신병 증세가 악화되어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에 환자 자신과 타인 모두에게 해를 입힐 수 있기 때문에 간수가 환자를 최대한 안전하게 제압하기 위해 행사하는 최소한의 무력이다. 영화에서 흔히 보는 폭력 사태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방어적인 무력, 그리고 치료.


이제 슬슬 평화롭게 느껴지기 시작할 이 시설 안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다음 편에서는 외부적 환경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다. 그 안에서 ‘잠겨있는’ 사람들의 상황을 이해하거나 최소한 상상이라도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Boss

편집: 딴지일보 인지니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