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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알고 있다. 이재명 시장만큼 전투적인 인물이 없음을. 그는 이전에 없던 주민자치 시스템을 위해 시와 싸웠고, 더 나은 복지 시스템을 위해 포퓰리즘이라 공격하는 세력에 맞섰고, 여타의 정치인과는 달리 직접 일베와 싸웠고, 지방의 재원을 뺏어가려는 박근혜 정부와 맞섰다. 더 살기 좋은 동네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던 그가, 이제는 더 살기 좋은 나라를 건설하겠다고 한다. 그리고, 이전에 뿌리 깊은 불의의 역사를 청산하고, 시원하게 조지겠단다. 이야기만 들어선 신나고 설레고 호쾌한 기분이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론, 투쟁적인 인생에서 늘 수반하는 구설수나,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닌가 하는 발언들이 일말의 불안감을 주기도 한다.


이재명이란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어떤 대통령이 될 것인지, 그가 살아오며 남긴 일화들을 통해 그 빛과 그림자를 살짝 엿보려 한다. 다만, 사안에 따라 평가가 명확하게 갈리기 때문에,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접근하려고 한다. 필자의 좁디좁은 식견으로는 그에 대한 종합적이고 정합성 있는 총평을 내리기 어렵다.


* 본문 중에서 많은 내용을, 이재명 시장이 직접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내가 살아온 삶을 진솔하게 작성해봤슴다'(링크)라는 제목의 글에서 인용했다. 근데, 원래 주소인 야후블로그가 서비스를 종료(...)하면서 원문을 확인할 수가 없었지만, 다른 자료와 대조해보았을 때 이 시장이 직접 쓴 것이 맞다고 판단되므로, 그냥 쓰겠다. 이 글 만큼 이재명 시장의 솔직한 이야기를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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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시사인)


프로필

 

1964년 출생

1976년 초등학교 졸업 직후 첫 취업

1978년 ~ 1980년 고입, 대입검정고시 합격
1986년 중앙대학교 법학과, 제28회 사법시험 합격

1989년 사법연수원 18기 수료
1989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국제연대위원

1995년 성남시민모임 참여
2003년~2004년 성남 참여연대 집행위원장

2005년 경원대학교 행정대학원 석사 (2014년 논문 표절 혐의로 학위 말소)
2007년 민주당 부대변인
2010년 7월 ~ 2014년 6월 민선 5기 제19대 경기도 성남시장
2014년 7월 ~ 민선 6기 제20대 경기도 성남시장


1964년, 안동에서도 오지인 '지통마'라는 마을에서 출생. 찢어지게 가난했단다. 코를 하도 흘려 어릴 적 별명이 '코찔찔이'였단다. 부친의 도박으로 빚을 지게 되었단다. 모친은 봄에 밭을 갈려고 갔더니 다른 사람들이 쟁기질을 하며 "이제는 자기 땅"이라고 말했단다. 황당하다. 76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머니와 함께 성남으로 이사를 간다.

동시에 첫 취직을 하는데, 목걸이를 만드는 가내공장에서 납땜 일을 하는 '시다'였단다. 월급은 6천 원. 납땜 일이 익숙해지며 조금씩 많이 받는 회사로 옮겼고, 어린 나이에 벨트에 손이 감기는 사고로 왼쪽 중지에 장애를 입는다. 77년엔 프레스공으로 일하다가 좌측 손목이 골절되는 사고를 입는다. 성장판 손상을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한쪽 팔이 자라지 않으면서, 팔이 비틀어지는 장애를 입는다. 이 장애로 그는 군 면제 판정을 받는다.

당시의 공장생활은 철야와, 선배들의 구타와, 놀이를 빙자한 월급 갈취의 안습의 환경이었다. 78년, "관리자가 되면 안 맞을 수 있겠지"라는 단순한 생각으로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압정을 준비해서 졸음을 쫓는 각고의 노력 끝에 1982년, 중앙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한다. 여기가 그의 첫 번째 터닝포인트다.

82년 광주민주화운동을 비롯한 급변하는 사회와 대학가의 새로운 풍경이 그를 휘감았고, 동시에 야상 한 벌로 대학을 다니며 '신분 상승'의 꿈을 꾼다. 그가 택한 것은 사법시험. 구례 화엄사에서 공부를 시작하였고 86년, 드디어 사법시험에 합격한다. 부친은 어릴 때부터 공부하는 그를 방해하며 청소일이나 도우라고 시켜 오다가, 그가 사법시험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 몰래 남에게 자랑을 하셨단다.

87년, 사법연수원에 들어간다. 당시 민주항쟁의 파도를 외면할 수 없었던 그는, 연수생 신분으로 지금의 문병호 의원 등과 함께 사법연수생 집단 서명 등의 활동을 했단다. 배짱 하나는 참 대단하다. 조영래 변호사 사무실에 자원봉사를 가기도 했고, 강의하러 온 노무현 당시 변호사의 말을 듣기도 하며 성남에서 인권변호사를 하기로 마음먹고, 89년에 개업한다. 89년부터 노동현장 자원활동을 하고, 이천상담소와 광주노동상담소의 운영에 참여하기도 했단다. 그러다 1994년, '성남시민모임'에 참여하게 된다. 여기가 두 번째 터닝포인트다.

96년, 서울 남부 저유소 건립저지운동이나 98년, 파크뷰 특혜분양 사건 등에 참여하며 성남의 시민운동을 이끌었고, 2004년 시립의료원 설립조례가 시의회에서 47초 만에 폐기되자 의회를 점거하고 기물을 파손하는 등의 항의를 하다가 특수공무집행방해 전과를 얻고 정치에 뛰어들기로 결심했단다, 이것이 그의 세 번째 터닝포인트다.



[빛]


1. 가족사

이 부분은 그냥 짧게 쓰겠다. 그가 정치인이 아니었다면, 아니, 대통령 후보가 아니었다면 별로 관심도 안 갔을 것이다. 타인의 가족사에 이러쿵저러쿵 하고 싶지도 않고, 가장 부끄러웠을 부분을 직접 나서서 해명하기도 했으니 더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간단히, 무슨 일이 어떻게 발생했는지에 대한 이재명 시장의 해명을 소개한다.

어처구니 없게도 성남시장 후보직 양보를 바라던 이 형님은 불법 문자메시지를 대량발송하는 등 내 선거를 방해하다 2010년 내가 시장선거에 당선되자 취임식장에 청바지에 잠바를 입고 나타나 '가족특별석'을 만들지 않았다고 불만을 토로하더니 취임 직후부터 이권에 개입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녹지를 훼손해 노인 요양시설을 짓는 이권 사업에 셋째 형님이 돈을 받고 밀어준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사업신청이 네 곳이나 들어왔습니다. 큰일이다 싶어 이를 모두 불허하고 규정을 정비해 원천 봉쇄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 형님이 '시장 친형'을 내세우며 공무원들에게 직접 업무지시를 하고 불응하면 폭언을 퍼붓고 직접 백화점 불법영업 단속에 나서는가 하면, 감사관과 비서실장을 통해 공무원 승진과 징계 등 인사청탁을 하고, 관내 대학에 교수 자리를 마련해 달라는 이권청탁을 했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이를 모두 묵살하고 공무원들에겐 통화와 접촉을 하지 말도록 지시했습니다.

여기에 국정원 김 과장이라는 자가 ‘이재명이 간첩이라 곧 구속된다’며 부추기고(통진당 사건으로 추측), 새누리당 고위간부가 시의원 비례대표공천 언질을 주자 형님 부부는 종북시장 퇴진운동을 본격 시작했습니다.

(중략)

근 10년 만에 어머니 집에 쳐들어가 '이재명에게 전화를 해서 바꿔달라'고 했는데 어머니가 거절하자 팔순의 늙은 홀어머니에게 'X할년 개X같은 년'이라며 '집에 불을 질러 죽인다', '다니는 교회에 불 지른다'고 협박했습니다.

겁에 질린 어머니가 내게 전화를 연결해 줘 말다툼이 벌어졌습니다.

내 아내에게 형님은 ‘내가 나온 어머니 XX구멍을 칼로 쑤셔 죽인다'고 하였고 동석한 형수는 이걸 ‘고도의 철학적 표현’이라 극찬하며 시집 식구들을 능욕했습니다.

형님 부부를 피하시던 어머니가 주일에 교회에 가자 형님은 교회에 불 지르겠다고 해 경찰이 어머니를 집에 모셔 보호하다 저녁에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어머니 집에 난입해 기물을 때려 부수고 어머니를 폭행해 입원시키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어머니 신고로 잡힌 셋째 형님 부부가 경찰 조사를 받고 나오던 중 이 끔찍한 패륜 현장에 도착한 나는 도저히 이 부부를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형님과 통화를 시도했으나 형수가 중간에 빼앗아 ‘그 정도 가지고 경찰에 신고하느냐 어머니를 무고죄로 고소하겠다’고 하는가 하면 ‘시어머니 XX구멍을 찢어 죽인다는 건 철학적 비유’라며 약을 올려 심한 말다툼을 했습니다. 당신 아들이 당신에게 XX를 찢겠다고 하면 당신은 어떤 심정이겠느냐, 당신 오빠가 당신 친정어머니에게 그렇게 말했다면 철학적 표현이라고 편 들 수 있겠느냐 등의 말다툼이 수차례 있었습니다.

이 패륜의 현장에서 오간 수많은 통화 중 일부가 왜곡 조작되어 2012년에 한번, 2014년에 다시 한 번, 그리고 2016년 오늘 세 번째 시중에 나돌고 있습니다.

다른 건 다 용서해도, 이제 병들고 늙은 내 가여운 어머니를 욕하고 능멸하고 때리는 건 용서할 수 없습니다.

- 이재명 시장 페이스북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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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여전히 완전 해결된 문제는 아니지만, 적어도 법원의 판단과 이 시장 가족분들의 호소문(링크)을 보아 이 시장이 '인륜을 저버린' 일을 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워딩이 좀 쎄긴 했다. 그렇지만, 이 시장이 JTBC 토론에서 유시민에게 답했듯, 가족을 지키는 입장이었다면 누구나 그럴 것이라는 점은 공감한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 治國平天下)라는 전통적인 위정자의 가치에서 보았을 때는 미흡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정권은, 아니, 역사 속 꽤 훌륭한 지도자조차도, 가족 문제는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잘 알 수 있다. 성군 중의 성군인 세종은 아버지 대와 자식 대에서 피바람이 불었다. 그래서 가족 문제를 지나치게 공격하는 것은 피하고 싶다. 나아가 굳이 이 점을 '빛'이라 본 것은, 그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적어도 친인척이 음지로 비리를 저지르거나 국정을 농단하는 일은 없을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언론들이, 국민들이 모두 지켜보고 있을 테니, 그런 불상사는 피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형과의 구설수는 계속 있겠지만...




2. 흙수저 청소년의 좌절

아버지 세대의 안타까운 기억이겠지만, 민주당의 대선후보들은 하나같이 흙수저 출신이다. 필자의 아버지나 삼촌들이 가끔 소주 한잔하며 어릴 때 찢어지게 가난했던 이야기를 들려주면, 솔직히 좀 지겹기도 하고(아빠 미안!) 은근한 불편함도 든다. "니들은 훨씬 편히 자랐잖아"라는 자격지심이 발동된다고나 할까. 틀린 말이 아니라서 찔리는 것일 테다. 좌우지간, 그래서 그냥 "아 그랬구나" 하는 수준으로 흘려듣는데, 이재명 시장의 흙수저 시절 이야기는 끝판왕 수준이라 시선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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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 이재명 - 출처(링크)>


당시 우리 가족은 상대원 시장이 생활터전이었는데, 사춘기의 여동생과 어머니는 시장 2층의 화장실을 관리하며 화장실 사용료를 받았고, 아버지는 상대원 시장 청소부 일을 하였으며, 나머지 형제들도 모두 공장생활을 하였다.

상대원 시장 근처 셋방에서 부모님과 6남매가 함께 살았는데, 가족들이 잠든 밤에 혼자 공부를 하다 보니 잠자리에 든 가족들이 방해받지 않게 하려고 등을 켜지 못하고 탁상 조명을 사용하곤 하였다. 너무 눈이 부셔 흰 종이를 붙여 빛을 차단하였는데, 어느 날 아버지가 불필요하게 전기를 낭비한다며 면박을 주셔 화장실에서 사용하는 5와트의 백열전구(그것도 사용하다 버린 붉은 색의)를 끼워 공부를 하였다. 덕분에 책을 보기가 어려웠고, 너무 야속하다 생각을 했다.

당시 다니던 직장이 망해 쉬던 중이어서 아버지와 같이 시장 청소일을 하는 것이 너무 더럽고 힘이 들었다. 특히 사춘기 시절인데 아침 일찍 등교하는 교복 입은 동네 여자아이들을 만나기라도 하면 숨이 막힐 지경이었고, 결국은 대낮에 다락방에 연탄불을 피워놓고 잠이 들었다. 한참 있다 깨어보니 연탄불 바닥이 공기가 통하지 않아 불이 꺼져 있고 골치만 지끈거렸다. (이렇게 첫 번째 자살 기도는 실패로 끝났다.)

이번에는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 며칠간에 걸쳐 이 약국 저 약국에서 수면제를 하나씩 사 모은 다음, 다락방에 다시 연탄불을 피우고 연탄 바닥에 공기가 통할 수 있도록 장치를 한 뒤 수면제를 먹고 잠이 들려고 하는 찰나 이상한 낌새를 느낀 자형에게 발각이 되어 실패하였다.

집을 빠져나와 고통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시도하지 못했던 목매기 방법으로 자살을 해 보려고, 사기막골과 보통골을 헤맸지만 결국 뒤를 쫓는 자형과 고통에 대한 두려움, 엉성하지만 두 번의 시도조차 실패한 것이 하늘의 뜻인지도 모른다는 위로를 스스로에게 하면서 자살할 정신으로 죽음을 각오하고 하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느냐는 마음을 먹고 자살을 포기하였다.

- http://blog.daum.net/kimjiho7/4892605


공장 생활을 하던 시절, 동네 여자아이들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는 그와 미래가 안 보이는 절박한 현실. 사춘기 소년 이재명이 택한 것은 자살이라는 극단적 방법이었다. 그는 장애인, 가난, 저학력 등의 컴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애썼고, 사법시험까지 이르는 그의 고통스러운 공부 기간은 '신분 상승'을 위한 수단이었을 것이다.


많은 흙수저 출신 정치인들이 금수저가 되면, 언제 흙수저였냐는 듯 올챙이 시절을 새까맣게 지운 채, 기득권이란 이름으로 군림한다. 서민을 생각하는 척은 열심히 하지만, 국회의 청소부 어머니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한 것이 바로 엊그제의 일이었다. 바닥까지 떨어졌던 흙수저 이재명 시장은, 지금도 가장 낮은 곳을 살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그는 아마 정치인생이 마무리되는 날까지 가장 낮은 곳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을 것이다. 그를 만들어낸 것이 바로 그곳에 있으므로.




3. 대학생 이재명, 눈을 뜨다


'공돌이'였던 이 시장은 그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 광주민주화운동을 왜곡해서 전하는 언론들을 보고 그들을 "빨갱이"라 비난했다고 한다. 천신만고 끝에 대학에 들어가서야 눈을 뜰 수 있었다는데, 그 얘기를 들어보자.


이동형 : 어떻게 보면 인권이 없는 시대에, 공장에, 산업화에 내던져지신 것 같은데 나중에 인권변호사로 간 것도 그때 경험이나 추억이 계기가 됐을까요?


이재명 : 영향이 아주 컸죠. 저는 81년까지 공장을 다니고 82년에 대학을 갔는데요. 그 80년, 81년이 묘하게 광주 민주화운동 시기와 겹치잖아요. 그런 영향도 받았지요. 당시 성남에 호남 분들도 참 많았고요. 경상도 사람들은 거의 없었어요.


이동형 : 그때, 호남 사람들이 고향에서 먹고살 게 없어서 압도적으로 많이 올라왔죠?


이재명 : 한 70%이상 그랬던 것 같은데요. 공장을 다닐 때는 텔레비전을 보고 살았잖아요. 텔레비전에서 전해주는 이야기. 그런데 텔레비전에서 "광주에서 폭도들이 북한의 사주를 받아가지고 대한민국을 망치고 반역을 해서 폭동을 일으켰다"는 거예요. 그래서 저도 주변 사람들처럼 욕을 했죠. 저거 죽여야 된다, 빨갱이 새끼들.


그런 식으로 저도 같이 얘기를 하고 했는데, 제가 대학을 가보니까 완전히 반대인 거예요. 진실이 숨겨졌던 거죠. 몇몇 소수의 사람들이 소위 권력이라고 하는 정말 하찮은 것들을 누려보기 위해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 수백 명의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아 갔고 오히려 그 사람들한테 책임을 뒤집어 씌웠단 것을 그때 알게 됐죠. 공장에서 노동하는 것도 법이 다 존재했는데 그걸 다 어기고 사람들 마음대로 패면서 산재가 일어나도 그냥 내쫓고 했던 것들도 잘못된 건지 비로소 알게 되었고요.


그분들이 얼마나 억울했겠습니까. 근데 제가 거기에 한 편을 들고 있었던 거예요. 그게 너무 후회돼서 제 삶을 되돌아보게 됐죠. 아, 인간이라고 하는 게 이렇게 완전히 조종당해서 자기가 아니라 남이 될 수가 있구나. 제가 거기서 "다시는 이렇게 살지 않겠다. 이젠 세상에 기여를 하고 살아야 겠다." 이런 마음을 먹었지요.


이동명 : 그러면 대학에 들어가서 소위 말하는 의식화가 되었다고 봐야 되나요? 아니면 세상을 좀 배웠다고 봐야 되나요?


이재명 : 의식화까진 아니고요. 그냥 좀 세상을 알게 됐고, 제 자신이 너무 창피했어요. 제가 했던 말과 행동 , 그러니까 사람이 조종당한 거잖아요. 주체적인 인간이 못 됐던 거죠. 그런 사람들이 저를 제외하고도 얼마나 수없이 존재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게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그게 대학을 마치고 사법시험에 합격한 다음 다시 인권 운동을 하기 위해 성남으로 갔던 하나의 계기이기도 하죠.


- <이작가의 수첩>(답 출판)사 중 이재명 시장과의 인터뷰 중에서 발췌


"빨갱이" 운운하던 학생이 대학물을 먹고 민주투사로 다시 태어나는 일. 겪어보지 않아서 제대로는 모르지만 주워들은 바로는 꽤 흔했던 일로 안다. 그 다음의 선택은 무엇일까. 정권을 향해 끝없는 분노를 쏟거나, 그냥 모르는 척 살아가거나, 같은 처지였던 사람들을 향해 나서거나. 이 시장은 세 번째 길을 택했다.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에서, 진심으로 슬퍼하는 자가 되었다. 그래서 지금 이 시장의 거친 언행과 거친 행동의 이면에는, 자신이 그러했듯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따스한 시선이 가득하지 않을까 싶다. 남이사 슬픈지 기쁜지 관심도 없고 드라마나 보고 머리나 하러 가던 사람과는 달리, 타인의 슬픔에 같이 동참하는 정치인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정부가 프레임을 짜고 온갖 협잡질을 하는 가운데에서도, 세월호의 깃발을 내리지 않은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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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시민운동가 이재명 - 검사 사칭 방조로 구속되다


이재명 시장은 직접 본인의 전과 기록을 공개한 바 있다. (링크) 그 중 눈에 띄는 것이 '검사 사칭 방조'인데, 요약하자면, KBS의 모 피디가 검사를 사칭해서 당시 성남 시장에게 상세한 이야기를 받자, 이재명 시장이 나중에 이를 받아 공개했다는 것이다. 필자의 의문은, 왜,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만 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이것은 '파크뷰 특혜분양' 사건이 발단이었다.


장학회 감사를 사퇴한 후 1999. 4-5월경 어떤 사람으로부터 재미있는 제안을 받았다. 제안의 요지는 “분당에서 땅을 사 건축사업을 하려고 하는데 최소한 투자금의 30배가 남는 일이니 함께 투자하자”는 것이었다. 30배라는 어처구니 없는 숫자도 그러했지만 뭔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어 단호하게 거절했다. 당시로써는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백궁정자지구의 용도변경이라는 거대한 비리가 시작되는 것이었고, 거기에 나를 참여시키려는 작전이었음을 나중에 알게 된다.


기초적인 조사에 착수하고, 성남시와의 공식적인 토론회를 통해 잘못된 정책임을 확신하고 저지작업에 착수했다.


즉시 서울 남부 저유소 저지운동에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주민 조직에 착수했다. 용도변경과 아파트 건설로 인해 직접적인 피해를 입게 될 상록마을, 느티마을 주민에 대한 설득과 조직작업을 시작하고, 분당 전역의 아파트입주자대표회의 회장단을 전화로 일일이 접촉했다. 단 1주일 만에 분당의 140여 개 단지 중 120여 개의 입주자 대표회장, 십수 개의 시민사회단체들이 참여한 대책기구로 ‘분당백궁역일대 용도변경저지공대위’가 구성되었고, 나는 저지운동의 중심인 공동집행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이때는 아직 2기 민선 시장체제에 대한 신뢰가 남아 있었다. 공대위가 구성되어 주민들의 반대의견을 명백히 조직한 후 시장에게 정책철회를 요청했다. 그에 따라 시장은 ‘최종적으로 시민들의 의사에 따라 추진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며칠 후 성남시는 분당지역 용도변경의 시범지역이라고 하는 ‘로얄팰리스’부지에 용도변경에 따른 아파트 건축허가를 내 줌으로써 백궁정자지구에 대한 용도변경추진 의사를 분명하게 밝혔다.


용도변경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실력행사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언론사와 정치권으로부터의 도움을 받아 자료 소집과 사건실체의 조사에 나섰고, 사건의 거대한 실체를 짐작할 수 있는 핵심자료를 공개하였으며, 시위와 집회를 조직했다. 버스 28대를 동원해 1,000여 명의 주민들이 민주당사를 찾아가 철회를 요구했으며, 성남시청의 집회에서 1,000여 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집회, 수백대의 차량이 참여하는 차량시위 등이 벌어졌다.


그러나 2000. 5. 16. 용도변경은 확정되고 말았고 곧이어 아파트 건축이 시작됐다. 주민들은 지쳐 나가떨어졌고 싸움은 패배로 끝난 듯했지만 대상면적과 용적율이 대폭 감소하는 큰 성과를 거두기도했다.


모 방송국의 피디는 이 사건을 취재하기 위해 나의 사무실에 오던 중 검찰을 사칭해 취재를 하려고 김병량 시장과 통화를 시도하다가 연결이 되지 않아 연락처를 남겼다가 나의 사무실에 도착한 후에 그로부터 연락이 와 통화를 하게 되었다. 당시 그는 검사라며 김병량 시장에게 여러 가지를 물었는데 그 통화에서 김병량 시장과 사업주와의 관계, 검찰 간부들과 사업주 및 김 시장과의 관계 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방송사에서 이를 인용보도했지만 별로 반응이 시원치 않아 나는 기자회견을 통해 이를 폭로하기로 마음먹고 그로부터 테이프의 사본은 건네받아 이를 녹취한 후 기자회견에서 그 내용을 그대로 틀었다. 기자들의 이목이 나에게 집중되어 있던 시기였고, 이 사건은 세인의 주목을 받고 있던 터라 기자회견 내용은 모든 언론에 대서특필 되었고, 당시 시장출마를 준비하고 있던 김병량 시장에게 치명적인 정치적 타격을 입히게 되었다.


만회를 위해 김병량 시장은 나를 선거법 위반, 공무원 자격사칭의 공범이라며 고소했고, 나를 구속하기 위한 음모가 진행 중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도피했다. 내가 구속되면 고소인인 김병량에게 아무 잘못이 없는 것으로 비쳐져 지방선거에서 그가 당선될 우려가 있었다.


검찰은 나를 체포하기 위해 합동단속반을 꾸려 집과 사무실, 성남시민모임의 사무실을 압수 수색하고, 내가 도피하면서 고의적으로 휴대전화를 사용한 장평휴게소 인근은 물론 용평 등지의 모든 숙박업소를 뒤지는 등 총력을 다해 나를 체포하려 했지만 나는 원주, 설악산과 강릉, 서울 등지를 돌아다니며 2차례 검거위기를 피하고, 결국 지방선거가 끝난 후 성남검찰에 자진 출두해 구속됐다.


1달여간의 도피수배생활, 11일간의 짧은 구속수감생활은 참으로 많은 것을 깨우치고 얻는 계기가 됐다.


http://blog.daum.net/kimjiho7/4892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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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 성장의 상징이던 아파트는, 이제 욕망의 상징이 되었다. 수십 년 간 아파트 사업을 끼고 얼마나 많은 이권이 개입되고 쓱싹했는지 상상도 하기 힘들 지경이다. '파크뷰 특혜분양' 사건은, 간단히 말해서 내 집 마련의 꿈을 힘들게 이룬 사람들의 노력을 배반하는, 고위층의 부정부패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엘시티' 되시겠다. 이 시장은 이것을 막기 위해 애썼고, 그럼에도 저지에 실패하자 검찰과 사업주와 결탁한 김병량 시장만은 저지하기 위해, 그를 폭로했다. 그 대가로 돌아온 것은 검찰의 추적과 도피, 그리고 11일간의 짧은 구속 수감을 했다. 정의가 사라진 시대에서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의 정의감은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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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1. 직장 상사 이재명

필자는 축덕이다. 해외 리그도 K리그도 관심 깊게 본다. 성남FC를 키워낸 일등공신은 누가 뭐래도 이재명 시장임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2015년 1월, 성남FC의 트위터 관리자가 이재명 시장에게 갈굼을 받는 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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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는 이렇다. 휴무인 일요일, 이재명 시장은 성남FC 트위터 관리자에게 멘션으로, "성남시청 SNS 담당자에게 교육을 받아라", "맞팔은 바로바로 하고, 소통에 더 노력을 기울여라"는 등의 공개적인 질책을 했다. K리그 구단들이 SNS를 매우 효과적으로 사용한다고는 볼 수 없고 성남FC의 담당자도 그 수준에서 활동했지만, SNS를 매우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이 시장의 눈에는 몹시 부족했을 것이다. 정당한 업무다. 시민의 세금이 들어가는 구단의 구단주로서, 구단 내 직원의 업무가 미흡하다고 판단되면 개선하는 것도 구단주의 책임이다.

다만, 그것을 꼭 공휴일에, 담당자에게 직접, 해야만 했냐는 생각이 든다. 이 시장은 그에게 공개적인 지적을 주어서 담당자에게는 빠른 개선 효과를, 성남FC의 팬들에게는 구단주가 노력하는 모습을 기대했을 것이다. 다른 방법으로는, 성남FC의 업무지시 라인을 준수하며 문제 제기를 할 수도 있다. 이 경우에는 이 시장의 언행에 따라 내리 갈굼이 될 수도, 정당한 업무 지시가 될 수도 있다. 필자는 아직 상사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필자가 SNS 담당자라면, 사단장에게 직접 갈굼을 먹는 것보단 맞선임이나 소대장에게 갈굼 먹는 것을 택하겠다. 또, 재난 재해 같은 위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조직의 업무 시스템을 준수하는 것이 최종 결정권자의 바람직한 태도가 아닐까. 필자는 시스템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 해결이 잘 되지 않으면 그 시스템을 개선해 나가는 것이 민주주의적 사고라고 믿는다. 시스템을 운영하는 사람들 역시, 시스템을 통해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정답은 없다. 트집이라고 비판하셔도 받아들이겠다. 그렇지만, 이 시장이 대통령이 되어서 특정 말단 공무원을 콕 찝어, 그의 업무 내용을 지적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다수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지만, 지적받은 당사자에게는 굉장히 큰일이 될 수도 있으니.



2. 음주운전


이재명 시장은 자신의 음주운전 전과에 대한 내용도 해명한 바 있다.


이 부분은 변명여지 없는 잘못임을 인정합니다.


다만 굳이 밝히자면 2005년경 이대엽시장의 농협부정대출사건을 보도한 권모 기자가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한 사건을 무료변론중 시장의 측근을 만나 증언을 수집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대가는 혹독했지만 그 일로 대출부정을 밝혀내 기자는 무죄선고를 받았습니다.


농협대출 특혜의혹 사건은 이대엽 시장 취임 직후인 지난 2002년 11월 6일 농협 성남시지부가 제한경쟁입찰로 선정되던 시 금고 계약을 성남시와 체결한 바로 다음 날 이 시장의 조카 A 씨에게 38억 원을, 아주 낮은 이자율을 적용하던 엔화 대출로 해줬던 사건이다. 농협을 시 금고로 선정해주는 대가로, 조카에게 담보물 감정가의 80%라는 파격적인 자금을 대출해줬다는 것이다. 이대엽 시장은 호화 성남 청사를 짓는 등, 성남의 재정을 방만하게 경영한 것으로 유명했던 정치인이다.


음주운전은, 본인이 말했듯, 빼박이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다만 이 시장이 "증언을 수집하는 과정"이라는 말을 덧붙여서, 해당 사건을 찾아보았다. 그래서 더 우려가 된다.


이 시장은 다들 아시다시피, 자신이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불사른다. '검사 사칭'으로 구속되었던 전과는 그의 성격을 잘 나타낸 좋은 일화이다. 이 음주운전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과정에서 나온 실수이지만, '검사 사칭 누명'과는 별개라고 인식될 정도로 중대한 실수다. 완전히 관련 없는 사람들에게도 큰 피해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시장이 정의감으로 똘똘 뭉쳐있는 사람이란 것은 대단히 신뢰가 가지만, 정의를 관철하는 가운데 관련없는 사람에게 불의를 끼친다면, 그것 역시 정의라고 볼 수 있을까. 이 시장이 전과를 얻은 다른 사안들은, 자신의 힘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던진 것이기 때문에 감정적으로 이해가 가지만, 이 음주운전만은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과거다.




3. 차떼기, 박스떼기


가천대 논란, 판교 철거민 논란 등 다른 비판 거리가 있지만, 필자가 생각하기에 이 차떼기 사건 만큼 끝판왕인 그림자가 없다고 본다. 그래서 이것으로 마무리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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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n 뉴스를 참조하시라 (링크)


민주당이 가진 흑역사 중에서도 순위권을 다투는 2007년의 대통합민주신당 17대 대통령 경선. 사건을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다. 당시 정동영 캠프에서 활약하던 '정동영과 통하는 사람들' (이하 정통)이란 조직이 있었고, 이들이 선거인단 명부를 여기저기 떼서 실어나르는 '박스떼기', 차로 정동영 지지자들을 실어날러서 다른 지역의 선거인단을 늘리는 '차떼기' 등, 정당 정치의 근간인 선거의 공정성을 훼손했던 사건이다. 워낙 흑역사인지라 자료가 많다. 10년 전의 이 시장은 이를 어떻게 해명했을까.


그는 경선과정에서 후보 간 공방을 두고 “개혁진영의 감정적 골이 깊어진 안타까운 일”이라면서 “당내 문제가 한나라당 경선의 고소고발 이상으로 외부에 의존했다. 집안망신, 누워서 침뱉기, 자해행위 같은 나쁜결과를 초래했다”고 말했다.


반성으로까지 들렸지만, 조직동원 선거가 경선 파행의 원인이라는 의견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부정했다. 이 변호사는 “준비하지 못한 진영과 준비한 진영이 있는데 준비한 사람을 왜 운동을 많이 했냐라고 차마 말은 못하고 반칙을 한 것처럼 덧씌운 것”이라고 반박했다. 그는 “조직동원이란 것이 선거인단을 참여시켜 투표한 것이라면 사전적 의미에서 동원은 권장하고 싶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중략)


폭력사태로 얼룩진 부산 차량동원 사건에 대해서도 “부산 경남 경선에 참여 가능한 모든 정통 회원들이 모였다. 추천한 사람 명단도 있고 누구한테 (차량을)부탁을 할 것인지 얘기하는 자리를 마치 돈을 주고 동원을 했던 것으로 몰아붙인 것이다. 이것이 부산 차량동원 모의 사건의 진실이다”고 밝혔다. 이 변호사 조차도 그 자리에서 그렇게 많이 모일 것이라고 예상치 못했단다.


정 후보가 “조직간 과잉경쟁이 빚어진 결과”라고 밝힌 노무현 대통령 명의 도용 사건에 대해서도 기존 정치권 인사들의 내부경쟁으로 성과를 과시하기 위해 일부 오바한 것“이라며 기존 정치권 인사와 정통들과 거리를 뒀다.


정통들은 2002년 노사모를 꿈꾸고 있을까? 실제 정통들의 창립멤버는 노사모 출신이 상당수다. 이 변호사는 정통들과 노사모의 차이점에 대해 “노사모가 자발적 헌신성은 높았지만 자연발생적인 비조직적인 측면이 강해 규모에 따른 효율성이 떨어졌다면 정통들은 규모는 작지만 조직적 측면에서 효율성이 크다”면서 노사모를 분기탱천한 농민군, 정통들을 조직화된 기병이라고 비유했다.


- 민중의 소리 인터뷰 중에서(2007.10.18)  (링크)


한 발 양보하겠다. 10년 전의 일이고, 당시의 민주당은 개판이었고, 정당 정치에 뛰어든 지 얼마 안 된 사람으로서 열정이 지나쳤을 수 있다. 항상 민주당보다 더 개혁적이라고 주장했던 진보진영은 5년 뒤, 비례대표 부정선거라는 진보진영 최악의 흑역사를 만들기도 했으니까. 이런 흑역사들이 대중에게 비판을 받아 왔기에, 지금 민주당의 대선 경선을 국민 모두가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는 것이리라.


중요한 것은, 대통령 후보로 나서는 지금의 이 시장은 10년 전을 어떻게 생각하냐는 것이다.



[01:07:00]


이재명 : 제가 노무현을 공격한 "반노"다, "이명박이 보낸 아바타"다 별의 별 소리가 다 있어요.


최강욱 : 그거는 금방 정리 될 문제인 것 같고, 오히려 제가 보기에는 예전에 정동영 지지해서 활동하실 때 차떼기 사건 있었잖아요.


정봉주 : 차떼기만 있었어요? 그 다음에 박스떼기가 있었고 차량 동원, 그것 때문에 저하고 싸운 거 아니에요.


최강욱 : 그러니까요. 그거는 어떻게, 지금 반성하시는 거예요? 그때도 팩트가 잘못된 거에요?


정봉주 : 그때는 나랑 경찰서에서 만났거든요. 그때 이재명씨 처음 봤죠. (중략) 제보가 들어온 거에요. 정동영 일파가 전국에서 모여들고 있다.


이재명 : 그건 자원봉사자들이었어요. 다 자기 차에요.


정봉주 : 전북 차가 많이 왔어요. (중략) 정동영 지지자들 한 3-400명 있는데 멱살 잡고 질질 끌려나온 거에요. 싸움이 나서 경찰서에 갔더니 법률 자문으로 이재명 변호사가 와 있었던거야. 나중에.


이재명 : 그때 현장에 왔었고, 나중에 경찰서로 왔지.


정봉주 : 난 그때 법률자문위원인줄 알았더니 정동영 팬클럽 회장이었어요?


이재명 : 그때 당시에... 내가 회장이었나? 몰라... 회장은 아니었지.


정봉주 : 지금 기록 보니까 그때  "정통 회장" 이었다 그러드라구.


이재명 : 그때 회장인지 그 후에 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정봉주 : 회장은 했었어요? 그래서 말이 나오던데, 오래전 일이지만.


이재명 : 10년 전 일이에요, 10년 전.


정봉주 : 10년 전 일이지만, 차떼기, 박스떼기 하는 정치행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재명 : 그거야 그때 잘못 한 거지. 근데 그거 10년 전 얘기 가지고. 심지어 그걸 키워가지고 '이재명이 정동영이 영입한 사람이다' 이런 소리까지 해요. 난 그 전에 입당한 사람이에요. 2007년 이후엔 정동영 의원과 끊어지고 정세균 의원 조직책임자였잖아요.


정봉주 : 아, 그 이후엔 그랬어요?


이재명 : 아니, 당원이 상황에 따라 자기 판단대로 하는거지, 한번 묶였다고, 내가 뭐 졸도 아니고...


이건 아니다. 비판의 핵심은 '정동영 지지자였다'는 것이 아니고, '차떼기'와 '박스떼기'라는 형태를 반성하냐는 것이었는데, "그거야 그때 잘못한 거지"란 짧은 말 한마디와 웃음으로 털기에는 행위가 너무 무겁다. "10년 전 일"을 반복한 말도 실망스럽다. 10년 전 일이라 해서 지금의 민주당과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 것일까? 어차피 누가 되었든 참패할 대선이었으니, 그냥 웃고 갈 일일까? 필자는, 그가 과거에 정동영의 핵심 지지자였다 하더라도, 정당인으로서 정당의 후보를 지지하고 지원하는 일을 욕하고 싶지 않다. '박스떼기', '차떼기'의 형태가 그 이전까지 매우 횡행했던 것도 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행위가 잘못되었음을 인식하고 사과하는 것이, 앞으로 대선 경선을 앞두고 있는 유권자에게 믿음을 주는 행보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대략 이재명 시장의 빛과 그림자를 살펴 보았다. 이재명 시장은, 현재의 정치인에게서 볼 수 없는 그만의 특별한 장점이 있다. 모든 정치인에게 장단이 있지만, 이 시장만큼 극명하게 대비되는 정치인도 흔치 않다. 그는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서 첫번 째 촛불집회부터 참석한 유일한 대선 후보다. 그의 발언에 불편을 느끼는 사람도 많지만 처절했던 흙수저 시절을 잊지 않고 이를 바탕으로 꾸려온 시정과 정의감의 진정성은 인정해야 할 부분이다.   


이재명 시장은 성남의 오리엔트 시계공장 마당에서 19대 대통령 선거 출마 선언을 했다. 그가 12살 부터 어머니 손을 잡고 학교 대신 노동자로 일했던 곳이다. “약자의 희생으로 호의호식할 수 없었고, 빼앗기지 않고 누구나 공정한 환경에서 함께 잘 사는 것이 저의 행복이기 때문에 저는 저의 행복을 위해 싸웠을 뿐이다”라고 말한 그의 바람을 위해, 요양 보호사로 일하는 누나, 청소회사 직원인 둘째 형, 환경 미화원으로 일하는 동생을 위해, 민주당 경선에서 멋진 승부를 보여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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