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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0. 25.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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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여일기 #3 - 그녀들과 나와의 함수관계]

[잉여일기 #4 - 덕후맨]

[잉여일기 #5 - 제목을 디벼보자]









본 잉여도 화제의 영화, <그래비티>를 보았다. 개봉 전부터 로튼 토마토를 비롯한 해외 반응이 엄청날 정도로 호평이기에 궁금증을 참기 어려울 정도라서, 개봉한 다음 날 심야상영으로 후딱 해치우고 나왔다. 영화를 보고 나니 ‘90분 동안 우주체험을 할 수 있다는 뭇 사람들의 평가가 과장된 것만은 아니었다. 넓디넓은, 아니 끝을 알 수 없는 우주공간에 나 혼자 덩그러니 꿔다놓은 보릿자루마냥 둥실둥실 떠다니는 그 고독과 공포, 영화로 보는 것만으로는 100%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고 있지만, 아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느낌 참 생생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익숙한 제목의 우주영화들이 몇 편 떠올랐다.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라던가, 론 하워드 감독의 <아폴로 13>, 브라이언 드 팔마의 <미션 투 마스>등등.

 

열거한 영화들이 전부 당신의 취향이라면,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그래비티>를 관람할 것을 몹시 추천하는 바다. 당연히 <스타워즈><스타트렉>같은 우주 대 활극을 기대하면 곤란하다. <에이리언>같은 외계 생명체도 당연히 등장하지 않는다.

 

그나저나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대체 누구기에 이렇게 영화 마니아들에게서 시끌벅적 회자되는 영화를 내놓았을까? 궁금해서 한 번 잉여롭게 디벼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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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1961년 멕시코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그는 영화감독을 꿈꾸는 동시에 우주비행사를 꿈꾸었다고 하니, 어떤 의미에서 <그래비티>는 영화감독으로서 우주비행사의 꿈을 대리만족하는 일종의 소원성취로서의 작업이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열두 살 때 생일선물로 비디오카메라를 갖게 된 쿠아론은 눈에 띄는 모든 것을 찍고 돌아다녔다고 한다. 내성적인 성격이었는지 친구가 많지 않았다는데, 어릴 땐 친구네 집에 놀러간다고 엄마한테 뻥치고 극장에 가서 시간을 보내기가 다반사였다고.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더니, 쿠아론 이 양반이 딱 그 꼴이시다.

 

대학시절에는 영화감독이라는 진로를 탐탁찮아 하시던 어머니 때문에 낮에는 철학을 공부하고, 저녁에는 영화를 공부하러 다녔다. 주경야독(晝耕夜讀)...이 아니라 주독야독(晝讀夜讀)? 아무튼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두 배로 부지런히 공부한 열정적 청년이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연애는 필요한 법. 영화대학에서  한 여인을 만나고 사랑하던 중 덜커덩, 아이를 갖게 된다.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고 박물관에서 일하기 시작한 쿠아론. 패기 넘치던 청년은 현실의 벽에 부딪혀 영화감독의 꿈을 접어버린 것 같았으나, 이야기가 여기에서 끝났더라면 우리는 오늘날 <그래비티>를 볼 수 없었다. 삶이란 반전, 반전!

 

우연찮게 찾아온 기회로 영화작업에 잡일과 연출부 등으로 참여하면서 잃었던 열정을 다시금 불태우게 된 쿠아론. 몇 편의 영화작업을 거치며 조감독까지 경험해본 그는 이후 멕시코 영화 협회 I.M.C.I.N.E.(Instituto Mexicano de Cinematografia)의 후원으로 동생 카를로스 쿠아론과 함께 <러브 앤드 히스토리>라는 장편을 완성한다. 원래 쿠아론 형제가 만들고자 한 것은 자신들이 쓴 각본으로 이루어진 다른 영화였지만, 협회의 규정과 여러 가지 제반문제로 이미 결정된 프로젝트를 맡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영화의 뜻밖의 성공과 호평으로 곧 할리우드에까지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그는 <야망의 함정>의 시드니 폴락 감독의 눈에 띄어 <폴링 엔젤스>라는 TV시리즈의 에피소드를 연출하기에 이른다. 그가 연출한 ‘Murder, Obliquely’라는 제목의 에피소드는 훗날 그가 연출한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에서 스네이프 역할을 맡은 앨런 릭맨과 처음으로 만난 작품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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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봐 이 XX? 크룻씌오!”

 

생활을 위해 계약 감독직도 필요하다고 생각한 쿠아론은 이후 워너브라더스와의 계약을 수락했다. 아무렴, 아무리 예술정신이 어쩌니 해도 사람은 일단 돈을 벌어야 먹고 살 수 있다. 예술가는 가난해야 된다는 편견을 버려!

 

95<소공녀>의 시나리오를 읽게 된 그는 원래 자신이 맡았던 프로젝트를 고사하고 자신에게 <소공녀>의 감독직을 맡길 것을 워너브라더스에 강력히 요구할 정도로 이 영화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그해 <소공녀>는 박스오피스에서 큰 성적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아카데미 시상식의 두 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고, LA 신세대 필름 비평가상을 수상하며 호평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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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공녀, 저도 참 좋아하는데요. 제가 한 번...(철컹철컹)

 

이후 1998년 그는 20세기폭스의 요청으로 찰스 디킨스의 고전을 현대적으로 각색한 영화, <위대한 유산>을 연출하게 된다. 이 작품은 본인에게도 인상 깊게 남은 영화 중 한 편인데, 무엇보다도 바로 이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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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대의 어장관리 소녀 에스텔라가 주인공 핀에게 어린 시절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을 남기는 이 분수대 키스신이 한동안 머릿속에 강렬하게 새겨져 있었다. 10대 때엔 키스는 고사하고 여자 손도 못 잡아본 내가 딱히 부러워서 저 장면을 인상 깊게 본 건 아니라고! , 흐흥!

 

<위대한 유산>은 에단 호크와 기네스 팰트로, 로버트 드니로까지 명배우들이 열연을 펼친 수작으로 그의 이름을 크게 알린 작품이지만, 정작 연출을 하는 내내 고통의 연속이었다고 그는 회고한다. 그 이유는 영화를 촬영하는 내내 최종 탈고된 각본을 받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영화를 연출해본 적은 없지만, 완성된 시나리오 없이 영화를 만드는 건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완성되지 않은 악보로 연주회를 준비해야 하는 피아니스트의 마음이라면 비슷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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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겨웠던 경험을 뒤로 하고 2001년 그는 미국과 멕시코가 합동 제작한 섹시한 로드무비, <이 투 마마>를 연출했다. 이 영화는 제58회 베니스 영화제 각본상을 비롯하여 여섯 개의 시상식에서 최우수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할리우드의 틀에서 살포시 벗어나서 본인의 실력을 제대로 발휘한 셈이다. 본 잉여도 아직 챙겨보지 못한 영화인데, 많이 야하다고 하니 서둘러서 그 예술성을 감상해야겠다...

 

한 편 베니스 영화제 도중 쿠아론은 영화비평가 Annalisa Bugliani(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아시는 분들은 제보 좀 부탁드린다)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하게 된다. 으잉? 앞에서 분명 대학시절 여인을 만나 아이를 가졌단 얘기를 읽은 것 같은데? 그렇다. 언제 헤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여인과는 결별하고 새 가정을 꾸리셨나보다. 원래 남의 집 가정사는 함부로 얘기하는 거 아니니 대충 넘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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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기작으로 <칠드런 오브 맨>을 준비 중이던 그는 워너브라더스에서 <해리포터>시리즈의 세 번째 영화,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 감독직을 제안 받는다. 이미 할리우드 시스템 안에서의 상업영화 경험이 있는 그는 고민 끝에 제의를 수락했고, 결과적으로 <아즈카반의 죄수>는 많은 팬들에게 시리즈 중 완성도가 가장 높은 작품이라 평가 받고 있다. 본 잉여 역시 시리즈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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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즈카반의 죄수>로 상업적, 비평적으로 모두 성공을 거둔 그는 2006<칠드런 오브 맨>을 완성시킨다. 가까운 미래, 인류의 마지막 신생아를 지켜내기 위한 한 사내의 여정을 쫓는다는 내용의 디스토피아적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이 영화는, 거의 촬영이 불가능할 것처럼 보이는 롱 테이크 장면들로 영화광들 사이에서 유명한 작품이다.

 

특히나 후반부 5분 가량의 시가전 롱테이크는 거의 기적에 가까운 느낌마저 주는, 감독과 배우, 제작진의 노력이 가히 상상이 되고도 남는 명장면이라 할 수 있다.

 

이 영화의 촬영감독이었던 엠마누엘 루베즈키는 제63회 베니스 영화제에서 기술공헌상을, 전미 비평가협회상을 비롯한 각종 영화제에서 촬영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칠드런 오브 맨>의 위엄이 궁금하신 분들은 직접 영화로 확인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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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드런 오브 맨>의 자동차 씬

 

맛보기로 첨부하는 <칠드런 오브 맨>의 자동차 시퀀스. 카메라의 물리적 위치와 움직임을 가늠해보며 감상한다면 이 장면이 단순한 추격전으로 보이진 않을 것이다. (동영상 링크)

 

쿠아론 감독의 이런 실험적인 롱 테이크 촬영은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에서도 종종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었고, <칠드런 오브 맨>과 같은 해 발표한 옴니버스 영화 <사랑해, 파리>에서 그가 연출한 단편은 아예 원신 원테이크, 즉 단 한 번의 롱테이크로 처음부터 끝까지 진행되는 작품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행보는 마침내 그를 <그래비티>에 당도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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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비티>와 기존에 우주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과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인물들이 거의 우주공간에서만 움직인다는 점이다. ‘중력을 뜻하는 제목과는 역설적이게도 영화는 내내 중력이 없는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세 명의 우주인이 우주망원경을 수리하는 첫 시퀀스부터 영화는 롱 테이크로 진행된다. 마치 카메라가 우주를 유영하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정교하고 부드럽게 인물들의 동선을 쫓는 장면은 어쩌면 <그래비티>에서 가장 강렬한 장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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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공간에서의 장면이 절대적으로 많은 만큼,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우주를 배경으로 한 기존 영화들의 무중력 촬영과는 다른 방법을 고안해야만 했다. 먼저 기존 영화들의 무중력 촬영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는지 간단하게 살펴보자. 본인의 전문분야가 아니라서 얕은 지식으로 핥고 지나갈 수밖에 없다는 점 미리 사과드린다. 오류사항이 있다면 가감 없는 지적 부탁드리는 바다.

 

가장 흔히 쓰이는 방법 중 하나는 비행기의 자유낙하를 이용한 촬영이다. 비행기를 타고 일정 고도까지 상승했다가 하강할 때 순간적으로 무중력 상태가 형성되는데 이 짧은 시간 내에 필요한 장면들을 촬영한다는 것이다. 이는 원래 NASA에서 우주인 훈련을 위해 고안된 방법이라 하는데, 이를 ‘Vomit Comet’, 구토 혜성이라 부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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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비행기가 이렇게 올라갔다 내려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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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렇게 되면서 무중력 상태가 된다고. 학교 다닐 때 물리 공부를 영 안 했더니 무슨 소린지 본인은 잘 모르겠다. 아무튼 뱅기 타고 올라갔다 내려오면서 찍으면 된다는 얘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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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시트콤 <빅뱅 이론>에서 하워드가 우주에 나갔을 때도 같은 방법을 이용해 촬영했다고 한다.

 

아무튼, 롱 테이크 신이 많고 카메라가 끊임없이 움직이는 <그래비티>의 특성상 이런 촬영방식으로는 완성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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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생긴 로봇 카메라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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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렇게 생긴 라이트 박스를 만들었다고 한다. 물론 혼자서 만든 건 아니고, 여러 전문가들이 서로가 합의 하에, 창조적으로다가 잘... 만들었겠지?

 

쿠아론은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로봇 팔에 카메라를 달아서 화면의 회전과 수직, 수평으로의 이동을 자유롭게 함으로써 마치 우주공간을 유영하듯이 인물의 움직임을 쫓으며 촬영을 가능케 했고, 배우들을 그린스크린이 아닌 특수 제작한 라이트박스 내에서 연기하도록 하였다. 라이트박스는 실시간으로 조명을 통제함과 동시에 LED 화면에 지구, 우주정거장 등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면서 배우들이 자연스럽게 연기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도 했다고.

 

산드라 블록의 말에 따르면 라이트박스 안에서 혼자 고립되어 연기하는 환경이 캐릭터에 몰입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물론 이 두 개의 장비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조지 클루니와 산드라 블록은 우주복 헬멧에 핀을 달고 의상에도 역시 모션 캡처 장비를 달아야 했으며 프리비즈(’Pre-Viz’, Pre-Visualization의 약자)’에 의해 CGI로 먼저 제작되어 계산된 움직임을 익혀 그대로 정교하게 연기해야만 했다. 이후 우주의 배경화면과 CGI로 만들어진 우주복의 이미지를 오차 없이 합성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무중력 상태의 움직임을 표현하기 위해 촬영 내내 특수한 기구에 매달린 채로 연기했음은 물론이다.

 

이렇게 글과 이미지 몇 장으로 설명해도 도무지 어떻게 촬영했다는 것인지 그림이 잘 안 그려지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답답한 심정, 사실 본인 또한 마찬가지다. 더 자세히 <그래비티>의 무중력 촬영을 파헤치고 싶지만, 접할 수 있는 정보가 아직 그리 많지 않다. 영화가 개봉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점과 맛집은 그리 쉽게 요리의 비결을 공개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당연한 일이다. 아마도 DVD와 블루레이가 출시될 때 즈음이면 쿠아론 감독이 촬영비법을 더 자세히 공개할까? 너무 짜게 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지금껏 알폰소 쿠아론의 필모그래피를 보며 작품의 성향이 다소 중구난방이라는 생각을 해왔다. 그러나 감독이자 한 사람으로서 그의 이력과 함께 생각해보니 그의 작품들이 한 편으로는 꽤 일관성을 갖고 발전해왔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감독과 우주비행사를 꿈꾸던 소년은 이제 역사에 남을 우주영화 한 편을 완성시켰다. 이제 고작 일곱 편의 장편영화를 만들었을 뿐인 그가 앞으로 또 어떤 영화를 들고 나타나 우리를 놀라게 할지, 궁금하고 기대되지 않을 수 없다. 아무튼 감독님 다음 영화도 잘 부탁드리며, 그때까지 잉여잉여 하게 기다리고 있겠다.

 


부록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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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에서 쿠아론 감독은 아내를 초상화 속 여인으로 특별출연 시키기도 했다. 영화감독들이 제작비 절감 등을 위해 가족친지를 엑스트라로 등장시키는 건 사실 꽤 흔한 일.

 


부록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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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폰소 쿠아론과 함께 <그래비티>의 각본을 완성시킨 조나스 쿠아론은 바로 그가 영화대학에서 만났던 그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다. 갓 태어난 자신과 가정을 지키기 위해 영화의 길을 포기하기까지 했던 아버지가 수십 년 후 필생의 역작을 만드는 데에 일조를 한 셈이니, 인생은 참 알 수 없는 것.

 




참고자료


IMDB

http://www.digitaltrends.com/movies/gravity-director-alfonso-cuaron-on-how-to-creatively-fake-zero-gravity/







햄촤

트위터 : @hamchwa


편집 : 홀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