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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던 매체를 나오면서 마지막으로 남긴 글은 페미니즘 이슈를 다룬 인터뷰 기사였다. 1년 차 신입이 전문지에서 다룰 의무도 없거니와 물어봤자 골치만 아파질 아이템을 용감하게 끌고 온 배경에는 개판이던 편집부가 있었다. 당시 상황으로 이를테면 대표는 타부서 사업에 신경 쓰느라 매거진에 참견할 여력이 없었고, 시사잡지를 전전하다 갑작스럽게 아트 관련지를 맡게 된 편집장은 나에게 과분한 호의를 보내고 있었다. 일을 가르쳐주는 사람도 일감을 주는 사람도 없는 조직에서는 굶어 죽기 싫으면 각개전투로 생존을 궁리해야 했는데, 황소 뒷걸음치다 쥐 잡은 격으로 형성된 수평적인 분위기가 오히려 좋은 기회로 작용한 셈이다.


한 명의 남성이 아흔아홉 여성을 지배하는 예술계의 구조를 가시화하고, 그 부조리적 구조에서 기득권을 점한 남성들의 위선-폼 나게 자유, 진보, 전복 운운하면서 뒤로는 자리 챙기기에 혈안이 된-을 꼬집자는 의도에서 출발한 기사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잘된 글은 아니었다. 섭외부터 난항이었다. 취재원으로 알게 된 M씨(남성)는 내 기획을 두고 ‘그런 주제에 나설 사람들이 많지 않을 것’이라며 사기를 꺾었는데, 실제로 대다수 여성 업계인은 차별당한 경험의 여부와 관계없이 자신에게 '페미니스트'라는 낙인이 찍힐까 봐 몸을 사렸다.


기사가 오픈된 후에는 인터뷰이가 '표현이 너무 세게 들리니 순화해달라'든가 '특정 기관 혹은 인물과 이해관계가 얽힌 사안이니 삭제해달라'는 식으로 자신의 발언을 자체검열하며 수정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래저래 고비를 넘고 나니 초장 패기는 어느샌가 사라지고 밋밋한 잡담 같은 기사가 탄생했다. 그럼에도 댓글 창에는 비난 조의 코멘트가 달렸다. 요컨대 '여기서까지 꼴페미 논설을 보고 있어야 하냐', '유리천장 같은 이 사회에 실존하지도 않는 개념을 끌고 오지 말라'며 감정적으로 열을 올리는 코멘트였는데, 몇 마디 덧붙이려다 퇴사도 한 마당에 분탕질하지 말자는 마음으로 접었던 기억이 난다.


솔직히 말하면 댓글을 읽고 나서 아주 잠시 흔들렸다. 내가 범한 논리적 오류로 인해 독자의 심기를 그토록 거슬렀을까 두렵기도 했다. 그러나 확신을 갖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페미니즘 냄새만 난다 하면 귀신같이 맡고 찾아와 물어뜯는 인간들은 예전부터 있어왔는데, 최근 여성주의 논의가 확장되면서 그 정도가 심해진 것뿐이었다. 언젠가부터 페미니즘 관점에서 쓰인 기사는 보이콧을 빙자한 구독 중단 협박과 짝을 지어 다니기 시작했다. 남성 독자들이 댓글을 통해 밑도 끝도 없이 'XX(매체이름)에도 이런 쓰레기/헛소리가 올라오네요, 이제 당신네 기사 안 봅니다’라는 식의 절독을 선언함으로써 매체의 논조를 압박하는 것이다.


그러면 한 번 기사 밖으로 나가보자. 남초 커뮤니티나 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는 '남자도 알고 보면 여자만큼 힘들고, 그러니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자'며 부드러운 말씨로 갈등 중단을 촉구하는 의견을 만나볼 수 있다. 이들은 전형적으로 성적 불평등 이슈를 단순한 언어/신체 폭력(‘남자도 군대(회사)에서 당하고 있다’)이나 명절 노동 문제(‘남자는 귀성길에 장거리 운전한다’, ‘나도 상차림 돕는다’) 따위로 소급시킴으로써 남성의 기득권 전유를 부정한다. 바로 그 태도, 너희가 원하는 거 우리도 없는데 괜히 두드려 맞았다는 억하심정이 현상 유지에 기여하고 있다는 사실은 간과한 채. 마지막으로 ‘난 그런 적 없고’, ‘내 주변에는 그런 남자 없다’는 미시적 경험을 근거로 미소지니(Misogyny)의 존재를 부정하는 눈뜬 봉사들은 물리도록 많이 본 케이스라 하겠다.


인권 감수성이 눈에 띄게 낮고, 그중에서도 여성의 인권은 처참하게 고꾸라져 있는 나라가 한국이다. 과거에 '운동' 좀 했거나 현재 하고 있다는 치들조차 여성 인권에는 무감각의 극치를 발휘한다. 내가 아는 운동가 A는 사회적 약자의 권익 보호를 위해서라면 집안 살림도 내팽개치고 맨발로 뛰쳐나갈 인물인데, A가 사회를 위해 밤낮으로 봉사하는 동안 A의 아내는 혼자 힘으로 악착같이 아이를 키우고 가게를 운영해 가정을 지탱했다. A는 고마워하기는커녕 자신들의 부부관계가 얼마나 어그러졌는지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며 와이프에게도 어떤 문제가 있을 것만 같은 뉘앙스를 흘렸다. 예쁜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며 '꽃'이라 칭찬하고 뚱뚱하거나 못생긴 여자를 가리켜 '공해'라 비난하던 B는 난잡하게 바람피우던 버릇을 남 못 주고 결혼 후에도 불륜을 저지르면서, 술만 마셨다 하면 운동권에 몸담았던 기억을 더듬어 유물론과 마르크스를 들먹거리며 사회정의를 설파하곤 했다.


처음에는 후진 성 평등 의식을 가지고 제법 깨어있는 척하는 군상이 단순히 웃겼지만, 나는 곧 깨닫게 됐다. 남성 운동가들이 꿈꾸는 이상은 수컷이 평등한 사회였다. 남성이 위대한 역사를 쓰는 동안 여성은 밥 짓고 빨래하고 애 보는 ‘2등 시민’으로서, 남성이 성취할 대의를 생각하면 ‘비교적 덜 중요한’ 자신들의 삶을 희생해 왔다. 가부장제가 지휘하는 남성중심사회는 여성이라는 식민지를 착취해 꽃 피운 땅이었다. 이 부도덕한 땅에서 여성은 남성의 기득권을 침범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역량을 발휘하도록 ‘허가’ 받는다. 진취적인 여성에게는 목소리 큰 여자, 나대는 여자, 기 센 여자, (비꼬는 의미에서)무서운 여자라는 딱지가 붙는다. 여성에게 덧씌워진 순종적인 조력자 판타지는 가정 내에서 가장 극단적으로 유통된다. 집안일 잘하고 애 열심히 키우고 시부모한테 효도도 좀 하면서 외벌이가 힘들지 않게 경제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되 가장의 자존심이 상하지 않도록 남편 연봉보다는 좀 덜 벌어오는 와이프라는 이상향 속에서 여성의 역할은 딸린 식구로 굳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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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포커스> '혐오심'


성차별 문제가 곪고 곪다 터진 상황에서 '좋게좋게 가자’는 어깨동무는 평화주의를 가장한 반동이다. 페미니즘은 메갈리아의 발명품이 아니다. 남성들이 그토록 원하는 '온건한 페미니즘'은 늘 존재해 왔다. 착한 여학생의 목소리에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았을 뿐이다. 페미니즘은 전략적으로 ‘어그로’를 끌지 않으면 혼잣말 잔치를 벗어나지 못할 운명이었다. 메갈리아가 일베화되기 이전, 초기 메갈리아가 제시했던 ‘미러링’ 자체는 효과적인 무기였던 것이다. 미러링은 천지가 개벽한 이래 늘 리더이고 주체였던 이들에게 대상화 ‘당하는’ 굴욕감을 되돌려줬다. 남성들이 일부 여성의 행동을 빌미로 그룹 전체를 단죄해 온 역사를 보자. ‘된장녀’, ‘김치녀’, ‘맘충’, ‘김여사’ 모두 그 연좌제의 유산이었다. 남성의 입맛에 맞는 개념을 갖춘 여성이 아니면 좀 혼나도 된다는 폭력적 발상에 동조하거나 침묵하던 이들이, 이제는 되레 남성을 일반화하지 말라며 듣게 좋게 설득시키지 못하겠냐고 호통을 친다. 심지어 너희들이 추구하는 페미니즘은 진정한 페미니즘이 아니라며 여성운동에마저 훈수를 두려 하니, 여전히 ‘개념녀’ ‘무개념녀’ 타령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불특정 다수가 몰려다니며 사상을 검열하고 그것이 조리돌림, 신상털기와 직장 해고로까지 이어지는 작금의 사태는 진흙탕 개싸움으로 흘러가고 있다. 열심히 호소하면 남녀가 핏대 세우며 성 대결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올 거라는 희망을 품은 이도 있겠지만, 현재 속도라면 우리 세대의 여성들은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고통받을 것이다. 이미 성 평등 문제는 개개인의 인격을 비난해서 해결될 단계를 넘어섰다. 남성은 수천 년간 듣기보다는 말하도록 교육받아 왔고, 우리 사회는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지고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 여성의 말에는 내용이 없고, 논리가 없고, 무게가 없고, 그러므로 들을 가치가 없다고 가르쳐 왔다. 페미니즘이라고 하면 뚜껑 열어보기 전부터 화부터 내거나 내용을 읽고도 핵심을 파악하지 못하는 남성이 수두룩한 것도 그런 이유다.


그리고 지금도 누군가는 귀를 닫은 채 한국의 여권이 남권을 압도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그들에게 묻고 싶다. 여성이 태어난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 그 일생을 진지하게 이해해보려 한 적이 있는지 말이다. 한국에서 여성으로 태어난 나는 이런 땅에서 딸 키우는 것이 너무나도 두렵다. 내 딸이 성희롱을 당하면서 그것이 성희롱인 줄도 모르고 살까 봐, 성추행을 당하고 신고도 하지 못하고 속으로 앓을까 봐, 사랑을 볼모로 잡혀 억지로 첫 성경험을 하고, 진짜 처녀 맞느냐는 질문에 쩔쩔매며 그에게 확신을 주려 하고, 술자리에 나갔다가 연락이 끊겼다는 이유로 걸레라고 욕먹고도 잘못했다고 빌어야 할까 봐 두렵다. 젊은 여자라는 이유로 급여를 적게 받거나 술 시중을 들어야 할까 봐, 기혼녀라는 이유로 취직이 안 되거나 승진이 느려질까 봐, 임신과 함께 사직서를 내야 할까 봐, 아이를 낳고 다시는 사회로 돌아가지 못할까 봐 화가 난다. 여자가 하는 말이라고 가볍게 흘리는 사람들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며 좌절만 맛볼까 봐, 너무 일찍 혹은 뒤늦게 그 모든 부조리를 발견하고는 분노와 슬픔에 힘쓰는 삶을 살게 될까 두렵다. 약자가 약자임을 인정조차 하지 않는 사회에서 약자로 사는 일은 정말로 고되다.




탱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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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딴지일보 챙타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