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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0. 30. 수요일

이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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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빚독촉의 프로세스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 전화벨이 울렸다. 철수는 재빨리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이 회사에서 일하면서 전화를 받는 반사 신경이 발달했다. 벨소리가 들리기 직전에 전화기의 램프가 깜빡거리는데 가끔은 그 불빛을 감지하고 벨이 울리기 전에 전화를 받을 때도 있었다. 철수는 왼쪽 눈의 시력이 좋지 않은데도 전화기의 램프를 예민하게 느끼고 반응하는 자기의 몸이 신기했다.


전화를 건 남자는 대뜸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우편물 좀 그만 보내. 김혜선 이제 여기 안 살아.”

 

 

하루에도 수 십 차례 이런 전화가 걸려왔다. 채무를 독촉하기 위한 우편물을 주민등록 상의 주소지로 발송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채무자가 주소지를 옮기지 않고 이사를 가버리거나 하면 그 주소에 살게 된 다른 사람이 최고장(독촉장)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런 우편물을 반송처리 한다고 해도, 설령 채무자가 다른 주소로 발송해달라고 요구하더라도, 최고장은 채무자의 주민등록이 된 주소로 날아갔다.


철수는 와이어넷에 접속해서 회원 이름을 조회했다. 그리고 수화기 너머의 남자에게 물었다.

 

 

“김혜선 씨라고요? 생년월일이 어떻게 되십니까?”

 

 

“1969년 7월 11일.”

 

 

남자는 망설이는 기색 없이 정확하게 생년월일을 불렀다. 철수는 이 남자가 김혜선이라는 여자와 잘 아는 사이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남편이거나 전남편 아니면 애인일 것이다. 아버지나 형제일 수도 있겠지. 철수는 판단을 보류하고 사무적인 목소리로 남자에게 물었다.

 

 

“전화주신 분은 김혜선 씨와 어떤 관계입니까?”

 

 

“... 그건 알아서 뭐 하게?”

 

 

남자는 거칠게 말했지만 그의 목소리가 순간 떨렸다. 추심원이 채무자의 주변인에게 채무사실을 직접 알릴 수는 없었다. 그러나 반대로 채무자의 주변인이 다른 경로를 통해 그 사실을 알게 된 경우에는 달랐다. 철수는 채근하는 말투로 남자를 압박했다.

 

 

“왜 남의 우편물을 함부로 뜯어봅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이제 그 사람 여기 없다고요.”

 

 

화가 난 듯 씩씩대며 거세게 말하던 남자의 기세가 한 풀 꺾였다. 철수의 판단은 남자의 말이 거짓말일 가능성이 높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실제로 채무자가 여관이나 고시원 같은 곳에 방을 얻어 놓고 그곳에 주소지를 등록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는 일반 주택에서 통지서를 받아 놓고 다른 집으로 이사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채무자가 빚독촉을 피해 위장전입을 하는 경우는 너무나 많았다. 그러나 남자의 말은 아무래도 미심쩍었다. 철수는 다시 딱딱하게 응대했다.

 

 

“채무자가 주소지에 거주하지 않는다면 주민등록 말소를 신청하십시오.”

 

 

“내가 왜... 시간도 없고...”

 

 

“그럼 우편물 받으셔야죠. 말소신청 안 하시면 나중에는 유체동산 압류도 들어갑니다.”

 

 

철수의 경고는 사실이었다. 채무자가 정말로 이사를 가서 주민등록이 된 장소에 거주하지 않는다면, 주소지에 실제로 거주하는 사람이나 건물주가 채무자의 주민등록말소를 신청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만약 모르는 사람이 자기 집에 주민등록이 되어 있고 독촉장이 날아온다면 반드시 주민등록 말소신청을 해야만 한다. 채권자가 채무자의 주소지나 거주지에 있는 유체동산, 즉 냉장고나 텔레비전 같은 가재도구에 대해서 압류를 신청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채권자가 직접 압류를 집행하는 법은 없었다. 대부업체에서 압류품의 목록을 작성해 보내거나 압류를 진행하겠다는 말을 하며 협박한다면 이에 굴할 필요는 없다. 압류신청은 반드시 채무자의 주소지 관할 법원의 집행관실을 통해야 하기 때문에 제삼자가 채무자의 주민등록 말소신청을 할 시간적인 여유는 충분히 있다. 그러므로 만약 남자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은 김혜선의 주민등록을 말소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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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말소하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남자의 목소리에서 기세등등함이 완전히 사라졌다. 철수는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남자에게 재차 물었다.

 

 

“김혜선 씨와 무슨 관계입니까?”

 

 

“나랑 같이 살았는데... 집을 나갔어요. 집 나간 지 오래 됐어요.”

 

 

“언제 나갔습니까?”

 

 

“작년에... 작년 10월에...”

 

 

“연락이 안 됩니까?”

 

 

“가끔 되긴 되는데...”

 

 

철수가 재차 묻자 남자의 말문이 막히고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남자가 여자와 따로 살고 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라는 쪽으로 철수의 심증이 굳어졌다. 철수는 남자에게 차근차근 따져 물었다.

 

 

“혹시 김혜선 씨가 다른 남자를 만났습니까?”

 

 

“아니, 무슨...”

 

 

“그럼 도박을 했습니까?”

 

 

“아니오.”

 

 

“혹시 알콜중독?”

 

 

“그런 여자 아니라니까!”

 

 

남자가 역정을 냈다. 비록 채무로 인해 신용이 엉망이 되었을 지라도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여자는 아니라고, 여자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항변했다. 이런 말은 남자와 여자가 아직도 서로를 신뢰하고 있다는 사실을 공표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철수는 확신을 갖고 남자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김혜선 씨가 돈을 다른 데 쓴 게 아니라면 살림하는 데 썼겠네요. 그렇죠?”

 

 

남자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철수가 남자를 달래며 말했다.

 

 

“제가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살림이 어려워서 돈을 좀 빌려 쓰신 것 같아요. 그 돈으로 시장 봐서 밥 해먹고 옷 사 입고 그랬겠죠? 이제와 빚 갚기가 어렵다고 같이 살던 분이 나 몰라라 하면서 주민등록 말소를 해버리면 김혜선 씨는 앞으로 정상적인 사회생활 포기해야 합니다. 당장 형편이 어렵더라도 조금씩 분할해서 납부하실 수도 있으니까 연락해서 다시 상의를 해 보세요.”

 



 


2009년 우리나라에서 주민등록이 말소된 인구는 6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었습니다.(빈곤문제연구소, 국가인권위원회) 주민등록이 말소되면 기초생활보장과 연금, 의료보호 혜택에서도 제외되어 인권의 사각지대로 밀려났습니다. 또한 취업이나 상거래, 혼인, 자녀의 취학 등에서도 정상적인 활동이 불가능했습니다.

 

주민등록이 말소된 국민들의 상당수는 채무관계로 인한 신용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채권자가 채무자를 압박하기 위한 방법으로 주민등록말소 신청을 남발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경제난이 가속화되면서 주민등록 말소자가 꾸준히 증가는 추세였습니다.

 

기존의 주민등록말소제도가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결과를 낳자 관련법이 개정되어 2009년 10월부터 거주불명등록제가 실시되었습니다. 실제 거주지를 가지지 못했을 지라도 최종 신고된 주소지 관할 주민센터에 거주불명으로 등록할 수 있는 제도입니다.

 

따라서 기존에 주민등록이 말소된 사람이라도 거주불명등록제를 이용하면 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고 건강보험에 가입할 수 있으며 기본적인 복지혜택도 받을 수 있습니다. 법 개정 사실이 널리 알려져서 인권의 사각지대로 밀려난 국민들이 권리를 되찾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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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기사: 거주불명등록제 이용률 낮아, 김기현 기자, 전북중앙신문

http://www.jjn.co.kr/news/articleView.html?idxno=562905



 

 

추심원의 악성채권을 추심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확인하는 서류는 주민등록 초본이었다. 보통 대부업체의 대출계약서에 초본열람에 동의한다는 항목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채권자와 같이 이해관계인임을 입증할 수 있는 경우에는 채무자의 사전 동의가 없어도 초본열람이 가능했다.


와이캐피탈에서는 주민등록 초본을 최소 90일을 기준으로 열람하도록 했다. 추심원은 마지막으로 초본을 열람한 지 90일이 지난 채무자들 중에 대상자를 추출했다. 급여압류의 진행이 확정된 사람은 채무감면 안내 우편물이나 독촉장을 발송하지 않으므로 제외되었다. 계약서가 없는 채무자, 채권양도통지서가 없는 채무자도 역시 제외되었다. 지난 기간 동안 채무를 완납한 사람도 추려내고 또한 사망자도 확인했다. 이렇게 초본열람 대상자를 추출해 보면 보유하고 있는 채권에서 20~30% 정도가 빠져나갔다.


다음 단계는 채무자가 채권양도통지서 등기우편을 확인했는지 조회하는 지루한 작업이었다. 우체국 사이트에 접속해서 등기번호 13자리 숫자를 조회했다. 등기우편 수령이 확인되는 경우에는 이 주소지로 계속 독촉장이나 안내서를 보냈다. 하지만 만약 반송된 경우에는 초본열람 단계로 넘어갔다.


채무자 쪽에서 생각해 보면 부채를 변제할 능력이 없더라도 등기우편으로 날아온 채권양도통지서는 반드시 받아두어야 한다. 일단 자신의 빚이 원래 돈을 빌린 회사에서 다른 회사로 넘어갔다는 사실을 확인해 둘 필요가 있다. 또한 추심업체에서 발송한 채권양도통지서를 수령하지 않는다면 주소지에 살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되기 때문에 초본열람 대상자가 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채무자와 실제로 동거 중인 상황이 아니라면 가족이라고 해도 채권양도통지서를 대신 받아주지 말고 반송시켜야 한다. 채권양도통지서를 한 번 받아두면 그 뒤로 독촉장이 계속 날아오기 때문이다. 와이캐피탈과 같이 다수의 불량채무자를 관리하는 큰 회사에서는 귀찮은 우편물을 보내고 전화를 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직접 찾아가는 추심회사로 양도된 채권의 양도통지서를 괜히 수령해두었다간 집 주변에 해결사들이 어슬렁거리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초본열람 대상자를 간추린 뒤에는 동사무소에 제출할 서류를 만든다. 먼저 ‘7호서식’이라 부르는 ‘등본 및 초본 열람용 교부신청서’를 작성했다. 철수가 일을 시작하기 전에는 주민등록 초본이 아니라 등본 발급도 가능했다고 한다. 그러나 주민등록 등본에는 채무자 외에도 가족들의 정보가 기재되어 있기 때문에 개인정보 유출이 문제가 되었다. 지금은 이해관계인으로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등본을 발급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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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호서식이 마무리되면, 대출 당시의 계약서, 채권양도통지서, 등기우편이 반송되었다는 확인증, 거래이력서를 준비했다. 거래이력서는 채무자가 부채 상환을 연체하고 있다는 내용을 입증하는 문서였다. 문서 작성은 매크로를 이용해 어렵지 않게 처리할 수 있었다. 매크로를 만든 것은 철수가 이 회사에 입사한 뒤 세운 공으로 반복되는 업무를 상당 부분 줄여 주었다.


그러나 자동화할 수 없는 업무는 바로 도장을 찍는 것이었다. 7호서식에 회사의 인감도장을 찍었고, 계약서·양도통지서·거래이력서(사본)에는 인감과 원본대조필 도장을 찍었다. 한 채무자의 초본을 열람하기 위해서는 무려 7번의 도장 찍기 작업이 필요했다. 초본열람 대상자가 1000명이라면 모두 7000번 도장을 찍어야 했다. 와이캐피탈에서는 매일 대략 1000~1500명의 서류를 준비했다.


서식이 완비되면 동사무소를 돌면서 열람신청을 했다. 한 동사무소에서 1000건이 넘는 초본열람신청을 받아주지는 않았다. 많아봐야 100건 정도였고, 그나마도 민원이 많은 서울 지역에서는 잘 받아주지 않았다. 동사무소에서 처리해야 하는 업무이지만 담당공무원과 실랑이하기 귀찮은데다 담당자가 깐깐하게 서류를 확인하면 일이 번거로워지기 때문에 와이캐피탈에서는 경기도 지역의 동사무소에 찾아가 일을 맡겼다. 초본열람은 한 건 당 수수료가 500원이었는데(이해당사자의 경우, 본인일 경우 400원) 와이캐피탈 같이 다량의 채권을 보유하고 있는 추심업체에서는 발급비용 지출도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각지의 동사무소를 돌아다니면서 채무자의 초본열람을 신청하고 그 결과를 회수하는 일은 채권추심의 시작에 해당하는 일이었다. 발급 받은 주민등록 초본을 사무실로 가지고 들어오면 주소가 변동된 채무자의 정보를 입력했다. 그러나 이렇게 최종주소지를 확인해도 채무자가 실제로 그곳에 거주하지 않는 경우는 많았다. 반대로 김혜선처럼 채무자가 거주하고 있지만 이 사실을 속이려고 하는 경우도 있었다.




오후에 철수를 기다리고 있는 일은 초본열람을 위해 7000번 이상의 도장을 찍는 것이었다. 늘 반복되는 단순노동이지만 철수는 이 업무가 싫지 않았다.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서 움직일 수 있었고 쉬지 않고 울려대는 전화를 받지 않아도 되었으니 말이다. 매일 처리해야 하는 분량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철수는 이 일을 현지와 나누어서 했다.


철수는 조심스레 책상 서랍 맨 아래 칸을 드르르 열었다. 서류가방 속에는 방금 전에 몰래 빼돌려 놓은 수아의 채무 관련 서류 파일이 들어 있었다. 과연 고현지는 그 장면을 목격했을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지 이해하고 있을까? 철수는 서랍을 닫고 숨을 깊게 들이 쉬었다. 철수의 책상 위에 현지가 가져다 준 종이컵이 놓여 있었다. 종이컵에 남아 있는 커피는 미지근하게 식어 있었다. 철수는 커피를 단번에 들이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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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작가


편집 : 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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