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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0. 31. 목요일

논설우원 파토




 

 






- 지난 시간에서 계속


암튼 그런 전차로 우원은 10살 어린 나이에 과학에 눈을 뜨게 됐다. 이후 과학자의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학업에 전념하여 고교 졸업 무렵에는 고등 수학과 물리, 화학에 능통했고 국내 최고 대학에 입학, 3년 만에 학부와 석사를 마치고 프린스턴 대학 박사 과정에 들어간다. 허나 그곳에서 우원의 재능을 시기한 지도교수 에드워드 위튼과의 알력과 뒤늦게 찾아온 사춘기의 일탈로... 머, 이런 건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니 그만두자.


...는 개뿔. 저게 뻥이라는 것이야말로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 장난이여 장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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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 이론의 권위자, 에드워드 위튼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교수.

덕후 같이 생겼지만 원래는 역사와 경제학 전공의 문과생인데

물리학으로 전향하고 단 5년 만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런 사람이 혹시라도 우원을 탄압해 준다면 그저 영광일 뿐.


굳이 저딴 개드립을 한 것은, 냉정하게 보자면 우원이 그때 딱히 ‘과학’에 눈을 뜬 건 아니었다는 점을 말하기 위해서다. 사강 박사의 코스모스를 시작으로 우원이 빠져든 것은 이를 테면 ‘우주의 신비’ 였는데 이건 사실 과학과 동의어는 아니기 때문이다.


왜냐. 우주라는 것은 일종의 ‘주제’다. 그런데 이 주제에는 과학 외에도 다양한 접근 경로가 있다. 수천 년 세월 동안 동서양 문명과 함께 해 온 점성술 류가 있고,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종교와 신비주의들이 있으며, 근래 들어서는 UFO와 그 언저리의 이야기들, 나아가 외계인이 근간이 되는 종교도 생겼으니 말이다. 이들은 나름대로 이런저런 관점으로 우주의 기원과 본질, 미래 등에 대해 이야기한다.


반면 과학은 방법론이요, ‘태도’다. 따라서 과학의 주제는 대우주든 초파리든 기생충이든 관계 없다. 과학이 태도인 이유는 실험과 관찰을 통해 사물이나 현상과 관련된 ‘사실’을 찾아내고, 그 사실에 근거해 엄밀한 논리와 냉정한 이성을 통해 대상을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 적절히 부합되면 과학인 거고, 그게 아니면 설사 과학적으로 보이는 소재나 주제를 다루거나 비슷한 언어를 사용해도 과학이 아니다.


허나 열 살의 우원이 이런 것을 분별해 낼 리는 만무했고, 단지 거대한 우주의 놀라운 모습과 그것을 지배하는 법칙들의 신기함에 빠져든 것뿐이었다. 그러니 과학자가 되기 위해 학업에 열중하는 대신 다른 신기한 것에 곧장 빠져든 것은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른다.


그건 바로 아래의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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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타. 우원이 아직도 울거먹는 음모론/종말론 계통에 대한 관심은 이 시점부터 시작된다. 일본 작가 고도우 벤이 쓴 이 <지구 최후의 날>이 국내에 번역 출간된 것은 1981년으로, 코스모스와 같은 해였는데, 당시 우원의 눈에는 정통 교양 과학서인 코스모스와 중세 의사의 ‘예언’을 다룬 이 책이 얼추 비슷한 걸로 보였다. 동네 서점의 진열장에 놓인 이 두 권을 갈망의 눈으로 들여다보며 저울질하던 기억이 아직도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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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목록.

연배가 좀 있는 사람들이라면 알만한 책들이 많이 보인다.

<지구 최후의 날>이 2위에, <코스모스>가 12위에 랭크.


사실 예언이나 종말론 관련 책들도 나름의 논리적 구조가 있다. ‘XX님이 이렇게 말했으니 그렇게 될 거다’는 식의 선언은 해당 종교나 컬트에 속하지 않은 일반 대중에게는 아무 설득력도 없다. 그래서 주로 등장하는 방법이, 그럴듯하지만 검증되진 않은 ‘적중 사례’들을 짜맞춰 열거하거나 해당 예언이나 종말론, 음모론과 부합하는 현대의 사회상을 증거로 내놓는 방식이다.


이런 것들에 작가의 주관적인 느낌과 두려움을 적당히 섞어 목소리 촥 깔아 전달하면 웬만한 사람은 걍 설득돼 버린다. 우원 같은 얼라를 포함해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들이 진짜 과학의 합리적 명징함과 이런 이야기의 논리적 비약간의 차이를 구별해내는 건 쉽지 않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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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기억하는 이 페이지. 올 칼라로 뭔가 무시무시한 내용을

담은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극적인 느낌만 있을 뿐 별 내용도 없었다.


<지구 최후의 날>이 소재로 삼은 중세 예언가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은 4행시로 구성돼 있는데, 프랑스 고어로 쓰인 데다가 내용도 애매하기 짝이 없다. 따라서 번역하는 사람의 시점이나 의도에 따라 제 맘대로 해석될 가능성이 열라 크다. 예컨대 ‘도로스에서 살해되는 위대한 왕’은 달라스에서 죽은 케네디가 틀림없고 ‘히스터’라는 이름은 히틀러의 변형이 분명하다는 식인데, 이런저런 주변의 유사성을 강조하면서 갖다 맞추면 아주 그럴싸해진다. 물론 엄밀한 의미에서는 우연이라고 봐도 무방한 수준의 모호한 정황들일 뿐이다.


이런 식으로 해석해서 저 책의 저자 고도우 벤의 결론은, 표지에 나온 것처럼 1999년 8월 18일이라는 정확한 날짜에 인류가 멸망한다는 거였다. 그게 어린 우원에게는 잠시나마 서른 살 너머의 삶을 포기하게 만들 정도의 임팩트가 있었는데, 책을 처음 본 지 18년이 지난 99년 그 해까지 우원은 이 날짜를 기억하고 있었고 당시 캐나다 록키 산맥에 있다가 문득, 무슨 일이 생겨도 이런 데는 좀 안전하지 않을까 생각했던 기억도 난다. 암튼 그때로부터 이미 14년이 지났고 우리는 아직 멀쩡히 살고 있다.


이런 예언 류의 것들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으면서도 그럴싸하게 포장되고 또 맹목적으로 소비되는지의 예는 많다. 아는 넘은 알겠지만 작년에는 ‘싸이 종말론’이라는 것마저 등장했다. 안 그래도 떠들썩했던 마야 종말론과 맞물려 꽤 화제가 됐는데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집에 들어있다는 아래의 글에 근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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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아침으로부터 종말이 오리라.

춤추는 말의 원의 숫자가 9가 될 때.


이 ‘시’는 싸이 말춤의 유튜브 조회수가 0이 9개, 즉 10억에 도달하는 시점에 인류가 멸망한다는 뜻으로 해석됐는데, 실제로 노스트라다무스의 시들과 분위기가 비슷하다. 그래서 국내 유수의 언론들도 앞다퉈 다뤘지만, 문제는 그의 저작 중에 저런 시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사실.


하지만 대중들은 물론 언론도 저 시의 진위에는 관심조차 없었고 확인하려 들지도 않았다. 그저 해외에서 누군가가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시라고 퍼트리니까 그런가 보다 하면서 싸이의 인기와 연결되는 것 같은 기묘한 내용에 감탄하고 오싹해 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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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은 급기야 아래의 불쌍한 초딩에게 극한의 두려움과 공포를 선사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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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디 비웃지들 마시라. 머 저 나이 때 고도우 벤의 책을 읽고 우원이 빠진 상태도 이 친구와 별 다를 바 없었다. 다만 종말이 온다는 날을 불과 20여일 남겨둔 이 녀석과 달리 1981년의 우원에게는 1999년까지 아직 18년이라는 긴 세월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두려움이 즉각적인 공포가 되지 않고 서서히 사라져 갈 여유가 있었던 것뿐이다.


이런 것은 경이감의 함정이자 논리의 덫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에 대한 경이나 호기심은 열정과 에너지의 원천이지만 자칫 사람을 이상한 방향으로 치닫게 할 수도 있고, 논리적 설득력이라는 것도 오용되면 잘못된 신념을 정착시키는 무기로 쓰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원은 어려서 이런 것에 깊이 빠져 봤기 때문에 그 속성을 일찍 깨달은 편이고, 항상 관심을 두고 경계하는 입장을 유지하며 산다.


글고 그 관심의 간접적인 결과로 우원은 지난 2010년 이 주제와 관련해 나름의 실험을 벌이게 된다. 본지에 6개월간 18회에 걸쳐 연재되었던 <외계문명과 인류의 비밀> 시리즈가 바로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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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에 책으로도 발간되었는데 현재 수급상황이

여의치 않아 새로운 출판사를 물색 중이다.

사진은 우원의 책을 들고 포즈를 취한 봉모 감독.


이 연재물은 그간 쌓아온 음모론 방면의 내공과 SF 팬으로서의 기호에 이런저런 실제 과학 팩트 등을 동원해 최대한 그럴싸하게 엮은 가상의 태양계 역사다. 원래 의도는 독자 열분들을 위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쓰겠다는 거였지만, 과연 이런 스토리가 얼마나 먹힐까 내심 궁금했고 중간부터는 일부러 논리적 비약을 하면서 어디까지 통하는지 관찰해 봤다.


그 결과는 우원의 예상을 훨씬 뛰어 넘었다. 미리 가상의 이야기라고 설명을 했음에도 많은 독자들이 사실에 가까운 무엇일 거라고 믿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독자들은 일단 스토리에 빠져들고 나서는 우원 스스로 보기에도 심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충격 위주로 이야기를 끌고 가도 저항이 없었다. 나아가 ‘이 이야기는 실제일 수 밖에 없습니다’ 라고 저자인 우원을 설득하려 드는 사람들마저 등장하기에 이른다.


이건 본지 독자들이 무식하거나 지적 능력이 낮아서 벌어진 현상이 아니다. 우원을 포함해 우리 모두가 사안에 따라 각자 이런 상태에 놓여 있다. 이유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실제로 과학과 상상, 합리와 미신, 논리와 협잡이 마구잡이로 뒤섞인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음모론엔 안 속지만 어설픈 사기꾼에게는 속고, 비즈니스엔 냉정하지만 허망한 종말론에 빠져드는 경우들이 생겨난다. 그러다 보니 우원과는 달리 지어낸 이야기를 진짜처럼 목소리 깔고 이야기하는 자들도 있고, 자칫 거기에 속절 없이 빨려 들어가 이용당하는 일도 벌어진다.


꼭 종말론이나 음모론이 아니더라도 세상에는 모든  분야에 걸쳐 크고 작은 이런 함정들이 널려 있다. 따라서 우리가 중심을 제대로 잡고 살기 위해서는 똥과 된장을 잘 구별하는 능력이 필요하고, 그걸 얻기 위해서는 과학 지식을 암기하고 방정식을 푸는 것 보다 과학적 사고에 익숙해지고 생활 속에서 써먹을 수 있어야 된다. 이 ‘호모 사이언티피쿠스’를 쓰는 것도 그런 부분에 쪼금이나마 일조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다.


머, 오해하지 말자. 글타고 서양식 과학만이 절대적이고 나머지는 다 헛소리라는 과학 지상주의를 추구하자는 건 또 아니다. 엊그제만 해도 아파서 한의원에 갔는데 왼쪽 허리가 아프다고 했더니 오른쪽 손등에 침을 놓는 거다. 근데 거짓말처럼 그 자리에서 바로 나았다. 서양의학이나 과학의 관점에서는 있어서는 안될 이런 일이 현실에서 벌어진다면 거기에는 다른 해답이 필요하다. 우린 아직 갈 길이 멀다.


머 알다시피 우원은 여전히 음모론도 좋아하고 이상하고 괴이한 상상도 많이 한다. 그러다 보니 과학과 비과학의 경계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도 드는데, 타고난 성향이 이래서 어쩔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가지 늘 견지하고 있는 입장이 있고 그게 우원으로 하여금 이 줄타기 놀이를 죄책감 없이 즐기게 해 준다.


그 입장이란 건, 줄에서 내려서야 할 때는 언제나 과학 쪽으로만 뛰어내린다는 점이다.








...다음 주 목요일에 다시 뵙자





파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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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홀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