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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1. 06. 수요일

이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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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을 지워라

 

어떤 일을 해결해 나갈 때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점은 그 일을 할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이다. 과도한 채무로 고통 받는 여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어떤 부유한 남자는 얼마면 되겠냐고 자신 있게 소리를 지를 것이다. 어떤 남자는 가여운 여자의 손을 잡고 다른 사람들이 찾아낼 수 없는 먼 곳으로 도망을 칠 것이다. 그리고 어떤 남자는 그 여자가 돈을 빌린 회사에 들어가 바짝 고개를 숙이고 일하면서 여자가 빚을 졌던 흔적을 지워 나간다.


철수는 인터넷 공유기의 방화벽 프로그램에 있는 접근제어 설정 항목을 조작했다. 사내에서 사용하는 라우터를 교체하면서 각 컴퓨터에서 사용할 IP 주소를 설정해 둔 사람이 바로 철수였다. 철수는 법무과장의 PC에 할당된 IP 주소를 입력하고 몇 개의 포트를 차단했다. 법무과에서 자주 사용하는 인터넷등기소 홈페이지와 네이버와 다음 등 주요 포털사이트로의 접근을 막아두었다. 그리고 법무과 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무실에서 사용하는 대형 복합기는 창고로 쓰이는 작은 방 안에 있었다. 이 공간에서 평소에 독촉장을 인쇄하고 정리하는 일을 했다. 그리고 주민등록 초본 발급을 위한 문서를 준비하는 작업도 창고에서 했다. 철수가 창고에 가자 고현지가 먼저 와서 일을 시작하고 있었다. 현지의 오른손 검지와 중지 끝이 보라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현지는 언제나 스탬프 잉크를 충전하느라 애를 먹었다. 철수가 푸른빛으로 물든 현지의 손가락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현지가 싱긋 웃으며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또 중독됐어요.”

 

 

철수가 도장을 집어 들며 피식 웃었다.


현지가 처음 이 회사에 왔을 때 손가락에 잉크를 잔뜩 묻히며 도장을 찍어대는 모습이 기특해서 철수는 격려의 말을 건넸었다. ‘열심히 하네요’ 였던가 아니면 ‘열심히 하세요’ 였던가, 그저 지나가며 던진 의례적인 말이었다. 하지만 갓 스무 살 난 사회초년생 아가씨는 다들 맡은 일을 하느라 바쁘게 움직이는 회사에서 저에게 보여준 관심이 무척 반가웠다. 그래서 퍼렇게 물든 손가락을 활짝 펼쳐 보이며 철수에게 말했다.

 

 

"중독된 것 같지 않아요?"

 

 

생뚱맞은 이야기를 듣고 철수는 어쩐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예쁘게 손톱을 다듬고 매니큐어를 칠하고 다니고 싶을 나이인데 말이다. 그래서 원래 자기가 맡았던 일을 현지에게 넘기지 않아야겠다고 결심했다.

 

 

"다음부턴 잉크 떨어지면 이야기해요. 내가 해 줄게요."

 

 

그러자 현지는 배시시 웃으며 시퍼런 열 손가락이 훈장이라도 되는 양 자랑스럽다는 듯 흔들어 보였다.

 

 

"보세요. 제 손가락 완전히 중독됐어요."

 

 

그때부터 스탬프 잉크를 독성물질로 간주하는 두 사람 사이의 농담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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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수와 현지가 나누어 하고 있는 작업은 출력해 둔 서류에 인감과 원본대조필 도장을 찍는 단순한 일이었다. 철수는 이 단순노동을 간소화하기 위해 몇 가지 대안을 고려해 보았다. 문서에 워터마크로 스탬프 이미지를 삽입해서 출력하면 간단하게 해결될 일이었다. 이미지 편집 작업이 번거롭다면 차라리 컬러 복합기를 한 대 추가로 구입해서 인쇄된 문서에 도장 이미지만 다시 한 번 출력하는 방법도 있었다. 이럴 경우 소모되는 비용을 넉넉하게 계산해 보아도 아르바이트 인건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철수는 이런 소소한 개선안을 사장에게 알리지 않았다. 일단 철수 자신이 이 반복되는 일을 좋아했다. 쉼 없이 울리는 전화벨을 피해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똑같은 서식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도장을 찍다 보면 마치 명상을 하는 것 같이 마음이 편안해지기도 했다. 그리고 이 업무가 사라진다면 현지가 일자리를 잃게 되지 않을까 두려웠다. 현지가 아니라 누구라고 하더라도 기계에 밀려 사람이 일자리를 잃는 것은 슬픈 일이었다.


철수와 현지는 말없이 서류더미에 콩콩 도장을 찍어 나갔다. 손목이 뻐근해질 정도로 부지런히 도장을 찍어야만 그 날의 분량을 맞출 수 있었다. 바쁘게 종이를 넘기면서도 철수는 몇 번이나 살짝 열어 둔 문틈을 흘끔흘끔 바라보았다.


마침내 법무과장이 창고로 왔다.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고 철수를 찾았다.

 

 

“김주임, 지금 바빠?”

 

 

“괜찮습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갑자기 인터넷이 안 되네. 아침에는 아무 이상 없었는데 점심 먹고 들어와 보니까 먹통이야. 특별히 설치한 프로그램도 없거든. 왜 이러나 이상하지? 김주임 안 바쁘면 와서 한 번 봐주겠어?”

 

 

철수는 기꺼이 도장을 내려놓고 법무과장의 자리로 갔다. 법무과장이 의자 등받이에 팔꿈치를 걸치고 기대서서 철수가 하는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철수는 가장 상식적인 처방으로 일단 백신 프로그램을 클릭했다. 그러자 등 뒤에 있던 과장이 답답하다는 듯 끼어들었다.

 

 

“백신은 벌써 돌려봤지. 바이러스고 악성코드고 걸리는 건 없더라고.”

 

 

법무과장은 삼십대 중반의 여자로 눈치도 빠르고 일 처리도 빨랐다. 부하직원을 독촉하고 수시로 업무진행 사항을 확인하는 스타일이라 법무과의 여직원들은 과장을 싫어했다. 특히 성격이 꼼꼼하고 일손이 느린 성격의 직원들은 법무과장 아래서 배겨나질 못했다. 그녀는 사내의 과장급 중에 유일한 여자 직원이었다. 남자들의 위계질서를 잘 이해하고 수직적인 분위기에 쉽게 적응하는 마초 여자, 철수는 법무과장을 보는 순간 부시 정부의 국무장관 콘돌리자 라이스가 떠올랐다. 매서운 눈매와 넙죽하게 벌어진 코, 양쪽으로 쳐진 두툼한 입술이 비슷한 인상을 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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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돌리자 법무과장은 입이 걸었다. 다른 사람을 몰아세울 때는 거침없이 욕을 하기도 했다. 때로는 일부러 위악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하게 될 정도로 가혹하게 여직원들을 휘어잡았다. 그럼에도 가끔은 사무실에서 울음을 터뜨려 다른 남자 과장들과 사장을 긴장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렇게 유약한 모습을 연출하는 것은 의견이 대립해 갈등이 팽팽해지는 상황을 돌파하기 위한 나름의 방법일 거라고 철수는 짐작했다.


아무래도 만만하지 않고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라 철수는 가능한 한 콘돌리자 법무과장을 피하곤 했다. 그래서 미루고 미루다 마지막으로 법무과장의 PC를 탐색하기 위한 계획을 세운 것이었다.

 

 

“그럼 제가 수동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철수는 윈도우 시작버튼과 R키를 누르고 실행창에서 ‘CMD’를 입력했다. 검은 바탕에 흰 글씨만 있는 DOS 창이 떴다. 그리고 나서 철수는 곁눈질로 법무과장의 표정을 살폈다. 윈도우 이전의 운영체제를 알지 못하는 법무과장은 인상을 찌푸렸다. 철수는 법무과장에게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여기서 문제가 있는지 찾아보려고 합니다.”

 

 

“어, 그래.”

 

 

법무과장은 고개를 끄덕거렸지만 이 상황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 기색이 역력했다. 철수는 빠르게 키보드를 눌렀다. 폴더를 변경해서 파일을 검색하는 명령어를 입력했다. 수아의 회원번호와 일치하는 파일을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원칙적으로 채무자의 개인정보가 담긴 디지털 파일은 메인 서버에 저장해 두고 필요할 때만 찾아서 사용한 뒤에는 삭제해야 했다. 그러나 그런 원칙을 지키는 직원은 드물었다. 이미지 파일 몇 개를 저장해둔다고 해서 하드디스크 용량이 부족해지지는 않았고 나중에 다시 그 파일이 필요해질 때 서버에서 다운받는 일은 무척 귀찮았기 때문이다.


메인 서버에 저장된 수아의 파일은 이미 철수가 처리해 둔 지 오래되었다. 하지만 누군가 그 사본 파일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때문에 철수는 이 사무실의 모든 컴퓨터를 하나 씩 확인하며 수아의 개인정보를 기록하고 있는 파일들을 삭제하기 시작했다.


용산 전자상가의 조립PC 전문점에서 근무했다는 경력 덕분에 철수는 입사한 첫 날 부터 사내의 컴퓨터 수리 기사로 불려 다녔다. 컴맹에 가까운 직원들이 상당수라 단순히 컴퓨터가 느려졌다거나 인터넷 익스플로러 첫 화면이 바뀌었다는 정도의 이유로도 철수를 찾았다. 철수는 인터넷 쿠키를 삭제했고 윈도우 레지스트리를 정리했으며 그리드 딜리버리 프로그램이나 액티브 X를 제거했다. 그러는 사이에 아무도 모르게 수아와 관련된 파일을 지워 나갔다.


윈도우에서 파일을 삭제했을 때는 실제 파일이 삭제되는 것이 아니라 메타데이터만 삭제되었다. 메타데이터란 해당 파일의 이름, 크기, 접근권한 디스크에 기록된 위치 등 파일을 관리하는 정보를 담고 있는 파일이다. 메타데이터를 삭제하면 해당 파일은 디스크 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처리되며 일반 사용자는 이 정보에 접근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새로운 파일이 덮어쓰기 전까지 이 파일은 얼마든지 복구할 수 있는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이다.


철수는 파일을 완전히 삭제하기 위해서 보안삭제 프로그램을 이용했다. 파일의 데이터를 일괄되게 00이나 FF로 수정한 뒤 랜덤 데이터로 덮어쓰는 3단계 알고리즘을 거쳤다. 그리고 파일의 이름을 아무 의미 없는 다른 이름으로 수정하고 파일에 할당된 테이블 영역을 수정하여 이 파일이 존재했다는 흔적조차 없애버렸다. 보안 삭제 과정을 거쳐 사라진 파일을 다시 복원해낼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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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했던 대로 콘돌리자 법무과장의 하드디스크 드라이브에는 수아의 회원번호로 저장된 계약서와 양도통지서 사본이 있었다. 철수는 커맨드 창에 쓸모없는 명령어를 이것저것 입력하며 시간을 보냈다. 계속해서 검은 화면에 흰 글씨만이 깜빡거렸다. 법무과장은 따분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자리를 비웠다. ‘화장실 좀 다녀올게.’ 철수는 이 틈을 타서 문제의 파일을 완전히 삭제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터넷 설정을 바꾸었다.

 

 

“과장님, 해결했습니다.”

 

 

법무과장이 인터넷 창을 열어 보았다. 대법원 인터넷등기소를 보고 엄청나게 기뻐하며 감탄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김철수 주임은 안철수 연구소 들어가도 되겠다.”

 

 

밑도 끝도 터무니도 없는 찬사를 들으며 철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콘돌리자 법무과장은 그녀의 하드디스크에서 한 채무자의 개인정보와 관련된 파일이 완벽하게 삭제되었다는 사실을 결코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랬듯이.


이제 다 끝났다. 철수는 다시 창고로 돌아왔다. 하지만 창고에서 도장을 찍고 있던 현지가 뜻밖의 질문을 던졌다.

 

 

“주임님, 인터넷 접속이 안 될 땐 CMD 모드에서 어떻게 해요?”

 

 

철수는 놀라서 스탬프를 떨어뜨릴 뻔 했다. 현지가 잠시 밖에 나와 철수가 하는 일을 살펴본 모양이었다. 철수는 현지가 언제 다녀갔는지 눈치도 채지 못했는데 말이다. 철수는 도장을 꽉 움켜쥐고 현지와 조심스레 시선을 맞추며 물었다.

 

 

“컴퓨터 잘 하나 봐요?”

 

 

“헤헤헤. 현지는요, 정보산업고 컴퓨터과 나왔지요.”

 

 

현지의 또랑또랑한 얼굴이 낯설고 이상했다. 이 계획을 세우면서 몇 번이나 시뮬레이션을 해보았다. 그 과정에서 현지는 전혀 위험요소가 아니었다. 사무실의 어린 여자 알바, 철수가 하려는 일이 무엇인지 알아차릴 리가 없을 터라 조금도 염려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가장 중요한 순간에 현지가 그 자리에 있었다. 마치 목격자라도 되는 것처럼.


철수의 심장이 쿵쿵쿵 울리기 시작했다. 할 말을 찾으려고 바쁘게 머리를 굴렸다. 문득 티벳의 속담이 떠올랐다. ‘두려워 할 이유가 없는데도 두려워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하지만 두려워할 이유가 있는데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더욱 어리석은 일이다.’ 철수는 이 상황을 다시 한 번 곱씹어 보았다. 현지의 질문은 아주 단순했다. 그런 호기심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아무 것도 아닌 일에 과민반응해서 그녀의 궁금증을 더 키운다면 두려워해야 할 상황이 될 수도 있었다.

 

 

“사실은, 아무 상관없어요.”

 

 

철수가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비밀을 고백할 때의 몸짓, 고개를 숙여서 현지의 귓가에 가져갔다. 현지도 철수를 따라 몸을 낮추고 귀를 쫑긋 세웠다. 철수의 눈알이 뜨거워지고 입가에 경련이 일었다. 철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은밀하게 속내를 드러냈다.


“회사 공유기가 가끔 문제라 그냥 인터넷 설정 들어가서 IP 주소 수정하면 해결됩니다. 그런데 그러면 너무 쉬워 보이잖아요. 사람들이 자기는 못 하면서도 그렇게 간단하게 해결되면 이게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한다니까요. 그래서 누가 컴퓨터 봐 달라고 하면 일부러 도스 커맨드로 들어가요. 현지 씨도 나중에 누가 물어보면 그냥 ipconfig라고 쳐봐요. 꼭 전문가 같잖아요.”

 

 

이야기를 듣고 현지가 큭큭 작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언제나 현지와 다른 여직원들을 채근하고 닦달하는 법무과장이 바보처럼 속아 넘어간 모양이 우스웠다. 게다가 우직하고 성실한 직원인 줄만 알았던 김철수가 감쪽같이 과장을 놀려먹다니.


철수는 키득거리는 현지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다행히 현지는 철수의 말을 믿은 것 같았다. 이 세상에 진실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완벽한 사실이라 부를 수 있을 만한 것도 드물었다. 어떤 사실이 완벽해지기 위해서는 완벽한 거짓말이 필요했다. 가장 완벽한 거짓말은 99%의 진실과 1%의 거짓이 혼합된 것이었다. 그렇게 지독하게 스스로를 속이면 다른 사람들도 쉽게 속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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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작가


편집 : 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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