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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가 웃을 일이다. 황교안이 무려 15퍼센트를 넘는 대선후보다. 이만한 인물에게 키보드를 두드려야 하나. 심지어 그의 생애를 다룬 자료조차 희소하다. 그의 지지율이 오르는 소리는 국격이 살살 녹아 마리아나 해구를 향해 뚝뚝 떨어지는 소리로 들린다. 정권교체도 대선 승리도 다 중요하지만, 기왕이면 그럴싸한 보수 후보가 나와서 뭔가 의미 있는 이야기라도 좀 던졌으면 하는데, 과한 욕심인가 보다.

 

그래도 글을 쓰면서 깨달은 게 있다. 필자는 그가 태생적으로 바지의 삶을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바지, 최순실-박근혜가 임명한 모든 바지들의 공덕을 뛰어넘는 월등한 바지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그는 노회찬 의원 말 대로. '확신범'이었다. 빛나는 바지의 세월을 지낸 국무총리로서의 일들도 그에게는 바지 총리로서의 소임을 다 한다기보다 바지인 것이 곧 국가를 위한 일이라는 강한 확신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물으신다면, 지금부터 필자가 준비한 에피소드들을 읽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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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필]

 

황교안(黃敎安)

 

1957년 출생

1981년 성균관대학교 법학과 졸업, 23회 사법고시 합격

1992년 서울지방검찰청 검사

1999년 서울지방검찰청 북부지청 형사5부 부장검사

2000년 대검찰청 공안1과 과장

2001년 서울지방검찰청 컴퓨터수사부 부장

2002년 서울지방검찰청 공안2부 부장검사

2003년 부산지방검찰청 동부지청 차장검사

2006년 수원지방검찰청 성남지청 지청장

2009년 창원지방검찰청 검사장

2011년 법무법인 태평양 형사부문 고문 변호사

2011년 선거방송심의위원회 위원장

2013년 제63대 법무부 장관

2015년 제44대 대한민국 국무총리



1957년 서울 출생. 부모님은 한국전쟁 때 황해도에서 내려온 피난민이었다.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가 별로 없는데, 본인이 직접 밝힌 바로는 "어머님께서 북한에서 내려와 피난민으로 어렵게 살았다"며 "초등학교 시절의 꿈은 돈을 많이 벌든지, 아니면 공무원이 되는 것이었다.", "중고등학교 학생이 되면서부터 법조인이 되려고 열심히 공부했다"고. 어린 시절의 꿈을 이룬 것을 넘어 이제 대통령까지 노리고 있으니, 본인과 가족들은 참 뿌듯할 것 같다. 조용하고 차분해서 어머니로부터 노잼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카더라. 중딩 때는 학원 문학상을 타기도 했다. 현재 수준급의 색소폰 연주를 즐기기도 하고, 테니스도 좋아하는 것으로 보아 예체능에 능한 기질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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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잇



초딩 4학년, 누나를 따라 독실한 침례교 신자가 되었다. 성경을 접하게 된 이때가 그의 인생 첫 번째 터닝포인트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인정한 신실한 신자이자 전도사다. 사법연수원 시절에는 수도침례신학교 신학과(야간)에 3학년으로 편입 후 졸업하기도 했다. 명문 경기고에 입학해 학도호국단 단장을 지냈다. 공안 검사가 될 떡잎은 일찌감치 달랐다.

 

80년, '만성 담마진'(두드러기)로 군 면제 판정을 받는다. 지난 10년간 360만 명의 신검 대상자 중 4명뿐이라는 무려 그 질병이다. 성일 교회의 김정곤 목사는 황 총리가 군대에 못 가게 되니까 눈물까지 흘렸다는데, 아무래도 기쁨의 눈물이지 않을까 싶다. 81년, 성균관대 법학과를 나와 사시에 패스한다. 두 번째 터닝포인트다. 83년에 청주지검으로 발령을 받고, 87년에 서울로 올라와 공안 1부에 배속되니, 그의 공안검사 인생은 일찍부터 시작되었다. 이때 맡은 사건들이 졸라 굵직하다. KAL기 폭파사건으로 김현희를 수사하고, 89년에는 임수경 방북 사건을 담당한다. 90년에는 전민련 국제협력국장 김현장 씨에게 징역 10년을 구형하고, 92년엔 남한조선노동당 사건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의 개인비서 이근희 씨에게 징역 10년을 구형한다. 모두 국보법으로 조졌다. 그래서인지 그의 별명은 'Mr. 국보법'. 김기춘이 'Mr. 법질서'라고 불린 것이 오버랩된다. 당시 고딩 동창인 노회찬 의원을 수사하며 "교도소를 따뜻하게 지으면 안 된다고 했는데"라고 말한 것은 유명한 일화. 93년엔 12.12 사태를 수사하고, 94년에는 조계종의 폭력 분규 사태를 맡아 130명이 넘는 승려를 모두 사법처리했다. 

 

02년에는 미 상공회의소 점거한 대학생들을 구속하고, 전국공무원노조를 때려잡는 데 앞장섰으며, 집회와 파업을 주도한 혐의로 당시 민주노총 위원장이었던 단병호 전 민노당 의원을 구속하여 징역 5년을 구형하기도 했다. 2009년엔 단병호 전 의원의 딸인 단정려씨가 검사가 되었는데, 당시 황교안은 창원지검장으로 있었고 단정려 씨와 지검장과 신임 검사로 만났다. 이때 황교안의 말이 명언이다. "딸처럼 여겨 훌륭한 검사가 되도록 지도하겠다." 졸라 인자하다. 

 

2013년엔 법무부 장관으로서 이석기 의원에 대한 체포동의안을 요청하고, 국정원 댓글 수사를 적극적으로 방해하다가 윤석열 검사에게 폭로 당하기도 했다. 2014년엔 통진당 해산의 선봉으로 활약한다. 2015년, 안대희-문창극으로 이어지는 총리 후보 안습의 시기를 끝내고 국무총리에 취임한다. 세 번째 터닝포인트다. 이후의 이야기는 다들 잘 알 거다.

 

주요저서가 졸라 쌈박하다. <교회가 알아야 할 법 이야기>, <국가보안법>, <국가보안법 해설>, <집회 시위법 해설>, <종교활동과 분쟁의 법률지식>, <검사님 이럴땐 어떻게 해야 되나요>가 있다. 마땅히 읽고 책을 써야 훌륭한 필진의 자세겠지만, 그냥 게으른 필진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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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교안 저, 국가보안법

 

 

[빛]

 

1. 황교안의 선행

 

그는 독실한 침례교인이다. 교인으로서 가져야 하는 정신이 있다. 95년부터 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전칠례 장학금'을 17년간 지급하고, 2002년 공안2부장 시절엔 '체불임금 청산 중재제도'를 도입하여 검찰이 사업주에게 고액의 벌금을 납부하게 하는 대신 근로자와 합의할 것을 권유하고 체불임금이 청산된 경우 고용주를 기소유예하는, 황교안이 맞나 싶은 융통성을 보이기도 했다. 사실은 고용주에게 강한 벌금과 함께 체불 임금도 지급하게 하는 것이 바른 조치이겠지만, 검찰이 가진 능력으로 이 정도 융통성을 발휘한 것은 당장 임금이 밀린 노동자에게는 실효성 있는 조치이기도 하다. 법무부 장관 시절엔 법률 서비스 취약 지역을 위한 '마을변호사' 제도를 도입해 전국 1500여 명의 마을변호사를 배정하기도 했다. 여러 선행 중 가장 눈에 띄는 기사를 찾아보았다.

 


지난 2005년 황 후보자가 서울중앙지검 2차장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자신의 휘하에 있던 공안부 검사로부터 “대검찰청 앞에서 몇 달째 시위를 계속하는 사람을 구속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중략)

A씨는 철야농성은 물론 자신을 제재하는 구청 공무원이나 경찰관을 폭행하고 오물을 투척하거나 심지어 소복을 입고 시위하는 등 극단적인 모습을 보이며 시위 강도가 점점 강해져 구속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특히 아침이면 검찰총장의 출근 차량을 가로막고 길바닥에 드러눕기 일쑤여서 대검찰청도 곤혹스럽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는 것. 


당시 수사를 담당했던 김웅 검사(현 해남지청장)는 “그때 황 후보자가 ‘새가 우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고 말했던 게 기억난다”며 “그때 일을 생각하면 황 후보자께 너무나 감사하다”고 회상했다.


당시 A씨의 억울한 사정을 전해 들은 황 후보자는 김 검사에게 A씨의 아들과 관련된 사건의 재조사와 가능한 법률적 지원 방법을 강구할 것을 지시했다고 한다. 

 

-아시아 투데이, 법조계 "황교안, 약자 배려하는 따뜻한 인간미 갖춰"(링크)


 

'새가 우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는 명언이 진심 황교안의 입에서 나온 것인지 의심스럽다. 뜨악이다. 그래도 선행은 선행이므로, 폄하하고 싶지 않다. 그가 국보법과 집시법을 앞세워 수많은 사람들을 구속하고 기소한 사례를 덮기엔 너무 약한 빛이지만, 이런 면모도 있다는 것은 알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더하여 국무총리라는, 바지지만 그럼에도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수단을 가졌을 때에도 그가 사회적 약자를 위한 어떤 정책을 폈는가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에, 이런 선행들이 그동안 빛을 보지 못한 것이 아닐까 싶다. 황교안 개인이 선한가 악한가에 대한 문제는 알 바가 아니다. 대통령이 된다면(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 믿고 있다) 어떤 정책을 펼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 그런 것들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이 빛마저도 사족을 덧붙일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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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빛이 더 없다. 바로 그림자로 들어가겠다.

 

1. 교인 황교안


그가 가진 기독교적 정신이 일부 흐뭇해지는 장면이 있지만, 그가 공직자로서 밝혀온 종교에 대한 견해가 지나치게 편향적이다. 관련한 많은 이야기 중에서도 샘물교회 피랍사태 때 황교안 본인이 직접 쓴 글을 가져왔다.



이들의 피랍사태를 놓고 인터넷에서는 정부에서 아프가니스탄(이하 “아프간”으로 약칭함)에 가지말라고 했는데 왜 정부의 만류를 듣지 않고 아프간에 들어갔느냐는 류의 비난이 빗발치고 있고, 심지어는 교계에서도조차 한국교회의 “공격적 선교정책” 때문에 이런 문제가 발생한 것이 아니냐 하는 자성의 목소리가 있다. 마치 분당샘물교회가 해서는 안될 일을 한 것처럼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납치된 그들은 그런 비난을 받을 일을 한 것인가? 예수님은 이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중략)


물론 아프간은 참으로 위험한 나라이다. 미군에 의해 축출된 탈레반과 정부군 사이에 전투가 끊이지 않고 있어 치안이 극도로 불안하다. 여기에 현지에 주둔중인 나토 및 동맹군이 탈레반군을 소탕하기위한 對테러전을 본격 전개중이고, 이에 탈레반이 납치와 자살폭탄 테러로 대항하면서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을 만큼 위험한 지역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스스로 기아와 질병을 해결할 수 없고 복음이 없어 영적으로도 죽어가는 그들을 그대로 방치한다면 그들은 어떻게 살아갈 것이며,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먼저 복음을 받은 누군가가 아프간으로 갔어야 했다. 피랍된 23명의 젊은이들은 주님의 지상명령을 기억하고, 마땅히 가야 할 곳에 갔던 것이다. 그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내전으로 피폐해진 중동의 한 후진국 영혼들을 모른척하고 살아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죽어가는 이웃을 돌보지 않을 수 없어 의약품과 구호품을 들고 들어갔다가 위험에 직면하게 된 “선한 사마리아인(Good Samaritan)”인 것이다.
무엇이 그들의 문제인가? “공격적 선교”가 문제인가? 최고의 선교는 언제나 공격적일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도 영국의 토마스선교사등 선진국 크리스천들의 공격적 선교에 의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민족이 되었다. 선교에는 위험이 따를 수 밖에 없다. 예수님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고 하는 상황 속에서(요 10:29~33, 11:8), 위험을 아셨지만, 나사로가 병든 것을 도우시기 위해 베다니로 들어가셨다. 위험에도 불구하고 나아가야 한다. 더욱이 그들은 공격적 선교 때문에 피랍된 것이 아니라 단지 “외국인”이기 때문에 피랍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먼저 우리는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들이 무사히 귀환할 수 있도록, 붙잡혀 있는 동안의 안전과 건강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이 일을 게을리하지 말자. 그들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바로 기도뿐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에 대한 부당한 공격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의 그럴 듯한 비난에 넘어가 부화뇌동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저들과 교회를 옹호해야 한다. 인터넷에도 글을 올리고 댓글도 달아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사역을 우리도 감당해야 한다. 즉 우리도 주님의 지상명령을 기억하며 선교의 정신을 갖고 “아프간”으로 가야 한다. 그러나 이제 아프간은 법적으로 들어가는 길이 막혀 버렸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우리의 아프간”으로 가야 한다. 우리의 아프간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복음 전하기에 여전히 어려움이 있는 곳, 복음 전하기 힘든 사람들, 그리고 참으로 버거운 주님의 사역이 바로 우리의 아프간이다. 이번 일로 중단하지 말고 여전히 단기선교나 오지선교를 추진해야 한다. 교회의 선교헌금예산도 계속 늘려야 한다. 우리의 “인적 아프간” 즉 주변의 복음 전하기 힘든 사람들에게 담대하게 나아가 복음을 전해야 한다.


성경은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느니라.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히 13:12~13)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도 아프간으로 가자. 우리의 아프간으로 나아가자.
 

- <아프간으로 가자!!>, 황교안 블로그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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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당시엔 정부의 결정에 관여할 수 없는 검찰의 구성원이었지만, 지금은 국무총리, 그리고 대통령을 넘보는 사람이다. 중동 선교가 옳고 그르냐에 대한 판단은 종교적인 신념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국가의 결정권자는 당연히 이를 만류해야 한다. 황교안의 개신교 편향성이 염려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국가의 이익과 개신교의 이념이 충돌할 때, 그는 고민하지 않고 국익을 위할 것인가. 아니면 개신교의 이념을 수행하는 것이 곧 국익을 실현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할 것인가. 필자는 후자라고 본다. 지금까지 본인이 밝혔듯, 검찰 내에서는 '검찰의 복음화', 교도소 제소자들에게는 '교도소의 사역화'를 위해 노력했기 때문이다. 아시아 최초 민영 교도소인 소망교도소 설립을 위해 애쓴 것도 그 일환이다. 어쩌면 그의 머릿속엔, 교회법이 국가법을 우선하는 가치일지도 모르겠다. 하긴야, 장로인 전직 대통령은 수도 서울을 봉헌했는데, 전도사인 황교안은 대한민국을 봉헌한다 해도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닐 것이다. 

 

 

2. 그의 눈에 비친 촛불

 

2009년 6월 10일과 15일, 전국에서는 광우병 촛불시위 1주년과 6.10 민주항쟁을 기념하는 촛불 문화제가 전국에서 열렸다. 그런데 창원지검장으로 있던 황교안은, 창원에서 열린 촛불집회를 불법 집회로 규정하고 이를 조사한다.



창원지검은 지난 1월과 2월 한나라당 당사 앞에서 연 미디어법 관련 기자회견과 용산참사 관련 기자회견, 창원 정우상가 앞 촛불문화제 등을 주도했거나 발언을 한 이유로 시민·사회단체 대표에게 경찰 출석을 요구했고, 지난 5월에는 국토부 주최 '4대 강 설명회' 행사장에서 시위를 벌인 환경단체 회원 9명에게는 공무집행방해 혐의로 역시 출석 통지서를 보냈다.


앞서 시민·사회단체는 3월 창원지검 앞에서 이를 규탄하는 1인 시위를 하는 등 반발해왔다.


30일 오후 2시 역시 창원지검 앞에서 연 기자회견에서 민생민주경남회의(대표 이경희)를 비롯한 시민·사회단체 대표들은 창원지검의 검찰권 남용을 규탄하면서 '황교안 지검장'을 목표했다. 전국에서 열린 6·10 촛불문화제를 창원지검만 문제 삼은 것은 <집회·시위법 해설>이라는 책을 내면서 야간 옥외집회 금지법 등을 옹호한 황 지검장 역할이라는 판단에서다.


이경희 대표는 기자회견문을 읽기에 앞서 "이른바 '공안통'이라 불리는 황교안 창원지검장에게 이 내용을 전한다"고 밝혔다.

 

- 경남도민일보, <전국서 켠 촛불, 왜 창원만 위법인가>(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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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그는 5.16을 혁명으로, 4.19를 혼란 상황으로 적었다

 


필자는 이 사건이 매우 상징적이라고 생각한다. 검, 경찰이 집회와 시위의 권리 행사를 방해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창원지역의 촛불집회만 위법으로 규정했다는 것이다. 법치의 기본은 일관성과 형평성이다. 황교안 앞에서 법 얘기를 한다는 것은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격이겠으나, 황교안은 일관성과 형평성 모두를 저해하는 단독행동을 취했다. 바지인 줄로만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의 신념은 굳건했다. 통진당 해산을 신나게 주도한 것은 바지로서의 소명을 다 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그것보다 더한 행동을 취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차라리 의전만 신경 쓰는 바지라면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3. '특별검사' 황교안


황교안은 특검에 참여한 적이 있다. 무려 국내 최초 특검이었다. 1999년, 한국조폐공사 파업 유도 사건이 바로 그것인데, 간단히 사건을 소개하자면, 외환위기로 구조조정이 몰아치던 당시 조폐공사에서 파업이 일어났고, 이를 대검찰청 공안부장이었던 진형구가 '구조조정에 대한 불만을 단칼에 제압하기 위해 국가가 조직적으로 나섰다'며 술김에 내뱉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사상 첫 특검은 참여한 외부 특검 인원이 검찰 내부 인사에게 쫓겨나는 등 맛이 간 상태로 진행되다가, 국가의 조직적인 개입은 없었다는 결론으로 마무리되었다. 현재 박영수 특검과 함께 거론되던 김형태 변호사가 이때 참여했다가 쫓겨났는데, 그 이야기를 들어보자.



당시 특검보를 중도 사퇴하기까지 무슨 일이 일어났나?


파업 유도 사건과 관련된 공안검사들이 서울중앙지검과 대검 공안부 소속 6명이었다. 수사 결과 그들이 기소돼 재판을 받아야 할 처지였다. 나는 검찰 내에 존재하던 그들의 파업 유도 개입 증거 문서들을 임의제출 형식으로 입수해 내 방에 쌓아두었다. 그러자 검찰에서 조직적으로 난리가 났다. 당시 내가 검찰을 너무 안일하게 봤다. 검찰이 어떤 조직인데 그 증거를 가만 놔두겠나. 공안검사 출신인 민간 특검 조사관이 앞장서고 수사 대상 공안검사들이 내 방에 와서 임의제출 형식으로 가져간 자료 다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나는 “압수한 장물을 도둑이 내놓으라는 거랑 똑같지 않으냐, 당신들이 피의자인데 어떻게 이걸 달라고 하느냐”라며 거부했다. 강원일 특검이 돌려주라고 지시했다. 여기에 반발해 민간 출신 조사관들이 전원 사퇴하고 특검을 나왔다.


그 뒤 특검은 어떻게 진행되었나?


진형구 공안부장이 조폐공사 사장을 시켜 파업을 유도했다는 사실을 본인이 떠들었고, 이를 뒷받침하는 공문서도 많아서 충분히 기소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수사 대상 검사들이 쳐들어와 자료를 내놓으라고 하는 과정에서 강 특검이 이를 막아주지 않아 나는 사실상 쫓겨난 셈이다. 내가 사퇴하자 검찰 출신 중심 특검은 공안부장의 파업 유도 자백은 취중 거짓말이고 공문서도 허위라고 이상한 결론을 내버렸다. 그 과정에 황교안 총리(당시 특검 파견 검사)가 있었다.


황교안 총리가 당시 어떤 역할을 했나?


조폐공사 파업 유도 특검이 망가진 핵심 이유는 황교안 총리 때문이었다. 황교안 총리는 당시 부장검사로 특검 수사팀에 파견돼 내 지휘를 받았다. 나와는 사법연수원 13기 동기이기도 해서 그를 배려해주는 차원에서 “당신 손으로 검사들 다치게 하고 친정에 어떻게 돌아가느냐? 여기서 손을 떼고 관여하지 마라”고 했다. 겉으로는 본인도 좋다고 수락했다. 그러나 그 뒤 수사 대상 공안검사들의 반격이 들어오자 황교안 부장과 다른 파견 검사들이 모여 그동안 확보된 증거를 다 뒤집고 면죄부를 줬다. 황교안 부장검사가 검찰 조직을 위해 완전히 뒤집어쓴 것이다. 한국조폐공사 파업 유도 특검은 그렇게 망했다. 그런 전력으로 보면 이번 박근혜 게이트 특검에서도 황교안 총리가 시간을 끌면서 이것저것 뒤엎으려 작전을 짜지 않을까 걱정된다.


시사인, <“황교안 총리, 특검 망친 전력 있다”> (http://www.sisain.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27829)


 

당시 책임자였던 강원일 특검은 황교안에게 수사 지휘를 맡겼다. 지금 특검으로 따지자면 윤석열 검사 포지션이다. 윤석열 검사는 자신의 영달을 포기하고 황교안의 국정원 댓글 수사 방해를 폭로하며 "개인이 아닌 조직에 충성한다"고 말했고, 황교안은 조직을 지키기 위해 해당 사안을 묻었다. 참으로 극명한 대비다. 황교안은 얼마 전 윤 검사의 자질을 운운했는데, 그의 눈에는 사건을 눈치껏 덮지 않고 강직하게 수사하려는 모습이 검사의 자질이 부족한 것으로 판단했나 보다.

 

특검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가 역대 최고인 것은 다른 한편으로 검찰 개혁의 필요성이 역대 최고에 이르렀다는 말이 된다. 황교안은 검찰 개혁은 개나 주고 2~30년 전으로 퇴행하는 것을 서슴지 않을 것이다. 그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검찰의 모습이 그 시절이었으므로. 또한 특검 연장 등에 대해서도 승인하지 않을 것은 물론, 박근혜 정권의 사수를 위해 낙동강 전선의 국군들처럼 애쓸 것이다. 속한 조직을 보호하는 미련한 충성심으로 똘똘 뭉친 남자, 황교안이다.

 

 

 

4. 공안검사의 자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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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권한대행으로서 자부심이 빛났지만, 그는 공안검사였다



황교안은 기자들에게 "여러분들이 싫어하는 舊 공안검사입니다"라는 인사를 하기도 했단다. 김대중 정부가 국보법의 폐지 또는 유연적인 적용을 주장하며 新공안이라는 개념을 내놓고 舊 공안 검사들의 인사에 불이익을 주었는데, 황교안은 그것을 피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맞았다. 그만큼 공안 검사로 활약한 과거를 부끄럽거나 신경 쓰지 않고 자랑스러워 했을 것이다. 그가 동기들에게 승진이 밀리는 등의 일을 겪자, 부산지검장이 된 후 전직 대통령들을 폭풍 뒷담화하는 일화가 있다.

 


"YS 대통령의 뒤를 이어가지고 김대중씨가 대통령이 됐어요. 근데 김대중씨는 계속 재야활동을 했기 때문에 경찰에도 조사를 받고 검찰에도 조사를 받고 정부와 계속 갈등해왔던 분 아닙니까? 


이런 분이 대통령이 딱 되고 나니까, 그 대통령이 되기 얼마 전에 1년 채 안 돼서 이 분이, 서경원이라고 하는 북한에서 가져온 돈을 받았다 그것이 문제가 돼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서울지검 공안부에서 수사를 받고 그 담에 재판에 회부된 일이 있었어요.


(중략)


그런데 이런 분이 대통령이 딱 되고 나니까 그 당시 서울지검 공안부에 있었던 검사들 전부 좌천되는 거예요. 본래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는 굉장히 우수한 사람들이 가는 곳이기 때문에 그 다음 인사에서 다 잘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특별히 실수가 없었다면. 


(중략)


그때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미련한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하던 환란으로부터의 도피성을 내게 허락해주신 것을 감사드렸습니다. 사법연수원 교수라는 한직은 내가 원하지 않던 자리였지만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도피성이었다라고 하는 걸 뒤늦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중략)


김대중 대통령 다음의 대통령이 누굽니까. 노무현 대통령인데, 노무현 대통령은 검찰에 의해 구속까지 됐던 분이에요. 앞의 김대중 대통령은 불구속기소, 구속되진 않고 재판에만 회부됐는데, 이 노무현 대통령은 공안부 검사들에 의해서 구속까지 됐던 분이에요. 대우중공업사태와 관련해서 구속까지 됐던 분이에요. 이런 분이 대통령이 되니까 공안부에 오래 있던 사람들에 대해 또 여전히 곱지가 않겠지요. 


(중략)


그러던 중 제가 사건 하나 잘못 처리했어요. 그분이 볼 때. 서울중앙지검 2차장이었는데, 공안부에서 어떤 교수 하나를 구속하겠다는 거예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석 달쯤 전에 대통령이 국무회의 석상에서 "이런 거를 처벌하면 되겠느냐, 세상이 바뀌었는데", 이런 말을 공개적으로 했습니다.


(제가) 보고를 받아보니까 구속 사안이 맞아요. 구속하겠다는 의견을 올렸어요. 검찰총장도 보고를 딱 받아보고 "구속하는 것이 좋겠다"고, 이런 생각 들었어요. 그래서 법무부 장관에게 "수사를 해보니깐 구속을 해야 되겠습니다"라고 했더니 장관은 "대통령의 뜻을 극단적으로 거스를 수는 없다", 이래 가지고 (총장은) 이건 부당한 결정이라고 생각하기에 사표를 쓰고 나가버렸어요.


(중략)


2006년으로 넘어와서 검사장 승진인사가 있게 됐는데, 서울중앙지검 차장 검사가 3명이 있어요. 이 서울중앙지검 차장은 반드시 검사장으로 승진하는 그런 자리예요. 검사장이 되기가 굉장히 어려운데, 서울중앙지검 차장들은 거의 100% 검사장이 되는 자리인데, 제가 검사장이 돼야 할 때인데 나중에 결과가 어떻게 나왔냐면 검사장이 안됐어요. 탈락했어요. 


제가 고검장 된 뒤에 조선일보에 검찰 인사 분석기사가 났어요. 한 면 거의 다 차지한 굉장히 큰 기사인데 큰 제목이 두 그룹으로 있었는데, 첫번째 그룹은 '젊어진 검찰'. 그때 노무현 대통령 투신 사건 때문에 갑자기 인사를 했기 때문에 젊어졌어요.


그 옆에는 '전 정권 미운털 복귀' 이렇게 돼 있어요. 전 정권의 미운털이 누구였겠습니까. 그 밑에 보면 저라는 게 딱 나와 있어요. 그만큼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는데 그것이 내 능력에 의한 것이다. 내가 인사에 대해 노력한 것도 없는데.(이하 생략)"


 


- 오마이뉴스, <황교안 "김대중·노무현 이런 분이 대통령 되니까...">(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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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씨', '노무현 대통령 투신 사건' 등의 표현은 이해하자. 원래 그런 양반이니까. 여기서 중요한 일화는, 그는 만년설이나 남산 위에 저 소나무처럼, 불변의 꿋꿋한 공안 신념을 지켰다는 것이다. 민주 정권이 구 공안 검사들의 인사 불이익을 준 것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검찰도 변화하기를 바란 요구였다. 어떤 이는 청와대가 검찰의 독립성을 저해한다고 비판했지만, 냉전은 일찌감치 해체되고 남북 간의 관계도 성큼성큼 달라지는 상황에서, 여전히 케케묵은 사고로 국보법을 적용하는 검찰을 그대로 놔두는 것이 더 이해가 안 가는 조치다. 하지만 황교안은 변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황교안의 시계는 예전보다 지금 더 거꾸로 간다. 그가 통치할 대한민국의 시계 역시도.



5. 의전덕후

 

황교안이 어깨 뽕 꽉꽉 넣고 로봇 걸음으로 뚜벅뚜벅 걸으며 휘황찬란한 의전을 중시하는 것은 널리 알려진 바다. 이전까지는 시민의 불편만 초래했다면, 과잉의전으로 인해 시민의 재산권을 침해한 사례가 있어서 가져와 봤다.

 


<미디어몽구>

 


(총리가 탄 차가) 맞는지 확인하려고 차를 세웠는데, 경찰들이 먼저 달려와서 무작정 차를 앞으로 밀기 시작하더라고요.
 
저는 브레이크만 밟고 있는 상황에서 차가 앞으로 계속 밀리잖아요.
 
그래서 안 되겠다 싶어 사이드를 당겨 놓았어요.
 
당겨놓고 있는데 경찰이 바로 그냥 뛰어 와가지고 차량 유리창을 발로 차기 시작한 거예요.
 
그래서 창문 열고 애들 있다고 내리려고 하니까 못 내리게 차를 발로 차고 나중에는 곤봉을 들고 와 깨더라고요.
 

깨고 나서 뒤에서 차 들이받고 도망을 갔어요."


 

이에 대한 경찰의 해명이 걸작이다. “김 경위가 발로 승용차 유리창을 차다가 무언가 도구를 가져와 유리창을 부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씨가 그 상황에서 후진을 하면서 앞으로 가고 있던 황 총리의 승용차와 부딪힌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란다. 황교안이야 그냥 움직이는 사람이고, 의전과 경호는 경찰과 경호팀의 업무이므로 이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면 전적으로 황교안의 책임이라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런 사안이 확인되고 기사까지 났다면, 조용하게라도 사과와 보상을 해야 할 것이 아닌가. 성주 사드 배치로 본인이 계란까지 맞아서 영 불편한 심기였다 하더라도 말이다. 피해자는 결국 보상은커녕 법정공방을 벌이며 공무집행 방해를 했다는 경찰 측 주장을 들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국민 알기를 앞길을 막는 잡초 정도로 여기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공직자로서 국민을 섬기는 자세가 이 정도 수준일 수 있을까.



6. 삼성X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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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편의 하이라이트 되시겠다. 삼성 X파일 때 황교안의 행보. 일화라기보단 그가 어떻게 사건을 처리했는지 정리해보고자 한다.

 

그가 국정원의 도청 의혹을 수사한 것은 200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나라당에서 국정원의 도청을 폭로한 것과 관련한 것인데, 황교안은 '국정원 도청 사건'을 '국정원 기밀 유출 사건'으로 바꿔서 유출자들을 구속했다. 

 


국가정보원 도·감청 의혹을 수사 중인 서울지검 공안2부(부장 황교안)는 21일 국정원 이아무개 광주지부장(1급)이 대선 직전 한나라당 폭로문건과 관련한 국정원의 내부 감찰 결과를 한나라당 쪽에 유출한 혐의를 확인하고, 국정원법 위반 혐의로 이씨의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국정원의 현직 고위간부가 국정원의 정보를 유출해 구속영장이 청구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검찰은 또 이 사건과 관련해 최근 신건 국정원장을 상대로 서면조사를 벌였다. 검찰은 이씨가 대선 직전인 지난해 12월 11~12일 친분관계가 있는 박아무개씨에게 도청 의혹 사건과 관련한 국정원의 내부 감찰조사 진행 상황을 알려준 혐의를 받고 있다고 밝혔다. 검찰 조사 결과, 이씨는 휴대전화로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방식으로 기밀을 유출한 것으로 드러났다. 검찰은 이씨가 빼돌린 국정원 기밀이 한나라당 누구에게 전달됐는지 파악한 상태이며, 곧 관련자를 소환해 조사할 것으로 알려졌다.
 

- 국정원 광주지부장 구속영장 / 문자메시지로 기밀유출…신건 원장도 서면조사, 한겨레(2003.03.22)



공안 검사다운 수법이다. 황교안은 이때의 일 처리에 대해, “당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결국, 2005년, 삼성 X파일 사건이 터진다. 황교안은 그때보다 더 뻔뻔하게 일을 처리한다.

 


이번 수사의 단초가 된 ‘X파일’에 대한 수사는 주객이 완전히 전도된 결과를 낳았다. 검찰은 삼성그룹의 불법대선자금 제공을 직접 지시하고 보고받은 이건희 회장에 대해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이 회장에 대해서는 소환 조사조차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면피성’이 짙은 서면 조사를 했을 뿐이다. ‘X파일’ 주인공인 이학수 삼성 부회장과 홍석현 전 주미대사에 대해서도 불기소 처분이 내려졌다.


시민단체들은 이씨와 홍씨의 대화에 등장하는 기아차 인수 로비 부분이 ‘대가성’을 의미하는 만큼 시효가 남아있다고 판단, 검찰의 적극적인 수사를 거듭 촉구했다. 또 지난 97년 대선 당시 삼성이 정치권에 건넨 100억 원 이상의 불법정치자금이 회사돈이라는 정황이 드러난 만큼 ‘횡령’ 혐의 적용이 가능할 것이란 분석이 적지 않았다. 검찰은 그러나 삼성 측의 손을 들어주었다.


삼성은 모든 자금이 이건희 회장의 ‘개인돈’이었다는 논리를 들이댔다. “회사 기밀비로 처리했다”는 세풍 수사 때 진술을 스스로 뒤집은 것이다. 반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불법적 보도’를 감수한 MBC 이상호 기자와 월간조선 김연광 편집장은 불구속기소 됐다.


 


- 막내린 안기부·국정원 ‘도청사건’ / ‘법리’ 한계 못넘은 ‘미완수사’, 문화일보(2005.12.14) 

 


요즘, 참여정부가 삼성 X파일 수사를 막았다는 이상호 기자의 주장으로 시끌시끌했다. 필자는 참여정부가 이 수사를 막았든 안 막았든, 황교안이 내놓은 수사결과에 대해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것만으로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황교안이 청와대의 직접 지시를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후 승진이 계속 밀린 것을 보면. 삼성 X파일은 검찰 자신의 발등에 불이 떨어진 사건이었다. 황교안은 1999년 특검에서 그러했듯이, 조직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총대를 멨다. 2003년 국정원 도청 수사에서는 '무혐의'로 사건을 덮었지만, 삼성 X파일 사건 때는 그 결정을 스스로 뒤엎는 굴욕을 감수하면서까지 이런 결과를 내놓았다. 황교안은 수사 결과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기자의 "정말 하늘 아래 부끄러움이 없느냐"라는 질문에, "부끄러운 것 없는 수사를 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조직을 구했으니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그가 부끄럽지 않은 이유는, 하나 더 있다.

 


참여연대는 2일 '안기부 X파일'의 수사를 담당하고 있는 서울중앙지검의 수사 라인과 삼성그룹이 영입한 검사 출신 변호사의 근무경력과 학연이 서로 얽혀 있어 수사의 공정성을 해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중략)


서우정 삼성구조본 부사장은 황교안 2차장검사와 서울고검(2004년)에서 함께 근무한 경력이 있고 수사팀장인 서창희 공안2부 부장검사와 법무부(1996∼1997년)에서 함께 근무했고 서울대 선후배 관계라는 것이다. 


김수목 삼성구조본 상무는 황교안 2차장검사와 대검(2000∼2001년)에서 같이 근무했고 서창희 부장검사와 부산지검 울산지청(1993∼1994년)에서,정재호 특수3부 부부장검사와 서울지검 북부지청(1998년)과 대검(2000∼2001년)에서 함께 근무했다. 


이기옥 삼성구조본 상무 역시 황교안 2차장검사와 성균관대 선후배 사이며 이용주 특수1부 검사와는 사법연수원 24기 동기다. 


 


참여연대는 "이번 조사결과는 삼성이 검사를 영입해 온 이유를 반증한다"며 "이런 연고관계 때문에 이번 수사를 축소·왜곡한다면 그나마 회복한 검찰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무너지고 말 것"이라고 지적했다. 


 


- 같이 일하고 동문수학한 우린 선·후배, 부산일보(2005.08.02)


 

참여연대는 삼성의 고위직원과 수사 검사들과의 관계를 밝혔는데, 황교안은 이 커넥션 중에서도 핵심으로 보인다. 기자들이 삼성 관계자들이 모조리 빠져나간 것에 대해 질문하자, 황교안은 "검사는 법대로 해야 한다. 통비법이 바로 이런 걸 상정하고 만들어진 것이다. 이걸 법대로 처벌 안 하면 뭘 법대로 처리하겠나."고 답했다. 즉, 삼성 관계자를 처벌할 법이 없고, 이상호 기자나 노회찬 의원을 기소할 법은 있다는 얘기되시겠다. 황교안이 자서전을 쓴다면, 삼성 관계자를 처벌하지 않은 일은 통진당 해산 만큼이나 자랑스러운 일로 적힐 것이다. 다시 한번 당연한 얘기겠지만, 지금 삼성을 때려잡고 있는 특검을 연장해줄 리 만무하다.



그리고 노회찬은 복수를 꿈꾸는데...



재벌과 검찰을 개혁하는 일이 시급한 당면과제로 떠오른 상황에서, 황교안이란 존재는 그 모든 것과 1%도 부합하지 않는 인물이다. 그가 적어도 시대에 뒤처지지는 않는 인물이었다면, 대중의 소망에 올라타는 일만 하는 사람이었다면, 이렇게 신나게 까지는 않았을 것이다. 황교안은 바지인 척했지만, 신념이 투철한 '공안 투사'였다. 단지 적당한 권한을 가진 공직자였다면, 그가 했던 몇몇 선행처럼 명암이 있는, 그냥 그런 공직자 정도로 남을 수 있겠지만, 그가 대통령이 된다면 박근혜를 뛰어넘을 지도 모른다. 박근혜가 아빠만 좀 챙기고 나머지는 최순실한테 맡겨둔 채 드라마나 봤기에 이 정도이지, 황교안처럼 지나치게 성실한 사람이 신념을 가지고 국가를 뜯어고치면, 회생 불가능 수준으로 퇴보하리라 확신한다.

 

이제는 좀, 그만 보고 싶다. 그냥 지금 그 위치에 있는 순간을 열심히 즐기시라. 그 자리에 있을 날도 얼마 안 남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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