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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6. 30.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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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90년대 MS의 전략적 판단, Windows Everyw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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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S 제국의 빌 게이츠


1990년대 초 MS는 윈도우즈로 자신의 운명을 바꿀 기회를 잡게 된다. IBM 수하에서 DOS 라이센스를 통해 그런대로 많은 돈을 벌고 있었던 MS는 1990년 도스 프로그램(이라고 IBM을 속였던) 윈도우즈 3.0으로 기대 이상의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리고 바로 IBM과 함께 개발하고 있던 OS/2에서 손을 떼버린다. MS가 자신을 양육시킨 IBM과 결별을 선언한 것이다. 물론 MS가 배신한 책임은 공룡기업 IBM에게도 있었다. 관료화 되어 꽉 막힌 IBM은 OS/2 개발에 반드시 필요한 서드파티 하드웨어 기업들을 홀대했다.(OS에 그래픽카드, 프린터가 작동하지 못하면 무슨 소용인가!) 또한, 당시 개발 중이었던 OS/2 버전 1.X에서 차세대 OS라 칭할만한 절대적인 요소인 ‘GUI’를 고려하고 있지 않았다. 일반 사용자들이 보기에는 DOS나 OS/2나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던 것이다.

 

IBM의 태도와 관계없이 MS(빌 게이츠)의 배신은 전략이었다. 빌 게이츠는 윈도우즈를 통하여 자신만의 PC 월드를 구상하고 있었다. 빌 게이츠는 윈도우즈의 상품 가치를 가늠하고 있었는데 1990년 윈도우즈 3.0의 폭발적인 성공으로 DOS를 뛰어넘는 상품이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윈도우즈 3.0의 성공은 빌 게이츠의 전략적인 판단에 힘을 실었다. 하지만 90년대 초 PC환경은 대부분의 사용자들이 DOS와 함께 Lotus 1-2-3 등을 사용하고 있을 때 였다. 컴팩의 클론 PC 성공으로 IBM의 PC산업은 타격을 받았지만 IBM은 컴퓨터 전체 산업에서 여전히 절대적인 최강자였다. 공룡 IBM 앞에서 MS는 윈도우즈에 대한 열망을 철저하게 숨겨왔다. 윈도우즈 30이 성공하기 전까지 도스용 프로그램으로 속인 윈도우즈 시리즈와 함께 내부적으로는 DOS에 의존없이 실행되는 독립적인 OS인 NT를 조용히 준비하고 있었다.


286 컴퓨터에서 실행되는 Windows 3.0: 실행하는데 속터진다.


IBM과 결별하는데는 하드웨어 기업들의 절대적인 지지도 한 몫 하였다. MS는 윈도우즈 저변확대를 위하여 IBM과는 달리 하드웨어 기업의 드라이버 개발을 적극적으로 지원했고 그 결과 프린터, 그래픽 카드 등 하드웨어들이 윈도우즈에 빠르게 적용되었다. PC 하드웨어의 중심인 CPU와 메모리를 만들고 있는 인텔 입장에서도 MS를 지원하는 것이 실보다는 득이 더 많았다. 인텔은 굳이 IBM에 의존할 필요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저렴한 클론 PC가 많아 질 수록 인텔은 더 많은 CPU를 팔 수 있었기에 내심 윈도우즈의 저변 확대를 반기고 있었다. 윈도우즈 3.0의 상업적인 성공으로 MS는 하드웨어기업 뿐 아니라 소프트웨어 기업의 지원을 더욱 적극적으로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제 DOS에서 윈도우즈로 넘어가는 것은 당연한 수순으로 생각되었다.


DOS와 OS/2에서 손을 뗀 MS는 윈도우즈로 온전히 집중하였다. 맥킨토시용으로 먼저 개발했던 오피스 프로그램을 윈도우즈 용으로 빠르게 개발하였고(상품가치전쟁 5편 참조) 윈도우즈의 킬러 앱으로 성장시켰다. 사용자들은 OS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킬러 앱을 사용한다. 킬러 앱이 있는 한 PC에 한번 설치된 OS는 절대로 바뀔 수 없다는 것을 MS는 MS-DOS에서 Lotus 1-2-3을 통해 경험했기 때문이다. 빌 게이츠는 윈도우즈와 킬러 앱 오피스의 상품가치를 철저하게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1990년 중반이 되자 빌 게이츠는 윈도우즈로 사용자들을 'Lock-In'하고자 한다. 1995년 8월 24일 빌 게이츠는 Windows 95를 대대적으로 발표한다. 윈도우즈 95는 기술적으로는 전작인 윈도우즈 3.1과 똑같이 DOS에서 실행되었지만 독립적으로 실행되는 완전한 OS로 마케팅 하였다. 어쨌든 일반 사용자들은 DOS 위에서 실행되건 말건 간에 컴퓨터 부팅과 동시에 그래픽 화면과 마우스를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감화되었다.(반면 OS/2는 DOS와 전혀 다른 OS였다.) 윈도우즈 95는 발표와 동시에 빌 게이츠의 야심작이자 최고의 성공작이 되었다. 11년 전, 1984년에 맥킨토시가 먼저 발표한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DOS를 사용하고 있는 많은 PC 사용자들이 지금 바로 GUI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에 흥분하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GUI를 사용함과 동시에 기존에 사용하고 있었던 DOS 프로그램 또한 그대로 사용할 수 있었다. (물론 이는 시스템을 매우 불안하게 만들어, 공포의 블루스크린의 원인이 된다.) 시스템은 불안하지만 현재 가지고 있는 PC에 DOS 명령어를 몰라도 컴퓨터를 맘껏 사용할 수 있다는 것에 소비자들을 열광하게 된다.




2. (MS가 원하는) 미래로 가는길


빌게이츠의 미래로 가는 길을 가장 잘 묘사한 키노츠(Comdex95)

대세인 웹은 빠져있다. 전부 보기엔 다소 길다.


참조: 컴덱스 95에서는 웹브라우저인 넷스케이프가 대세였다.


윈도우즈 95의 전 지구적 발표를 성공시킨 빌 게이츠는 자신(만)의 미래 상을 1995년 11월 24일 <미래로 가는 길> 라는 한 권의 책으로 제시한다. (위 영상은 <미래로 가는 길>에 대한 내용으로 Comdex 95 라스베가스, 11월 15일에 발표한 영상이다.) 당시 컴덱스 95의 중심은 웹브라우저인 넷스케이프였다. 하지만 빌 게이츠는 10년 뒤 2005년 미래를 예측하면서 웹브라우저 역할을 빼버린다. 모든 네트워크는 웹 브라우저가 아닌 기기 중심 즉, PC에서 발전한 TV, 태블릿 등 중심이 될 것으로 선언 함으로써 웹 대신에 당시 클린턴 정부의 ‘정보고속도로’를 전면에 내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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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게이츠가 말하는 미래로 가는 길

 

- ‘정보고속도로’ 확산으로 통신비용이 비약적으로 줄어들고 서로 연결된 컴퓨터가 생활의 중심이 될 것이다.

 

- 모든 장소(학교, 도서관, 집, 사무실, 식당 등)와 모든 물건(카메라, 핸드폰, TV 등)은 네트워크가 될 것이다.

 

- ‘TV’는 생방송 처럼 정해진 시간에만 보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언제든지 볼 수 있게 된다.

 

- ‘PC지갑’이 등장하여 열쇠, 신분증, 손목시계, 크레디트 카드, 주소록, 수첩, 메모지, 카메라, 워크맨, 휴대폰, 계산기, 나침반, 사진 등 모든 것을 합친 것보다 많은 정보를 넣을 것이다.

 

- PC지갑안에 있는 ‘디지털 화폐’로 물건을 거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PC 지갑은 만능이 될 것이다.

 

- ‘쇼핑’은 컴퓨터를 이용 전세계의 물건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주문생산 체제의 발달을 가져올 것이다.

 

- ‘학교’는 멀티미디어 방식으로 이루어 지고 선생과 학생과의 수업은 디지털 정보교환을 통해 진행될 것이다.

 

- 정보고속도로에 연결된 컴퓨터는 사용자에게 관심분야(레저 등)를 즉각적으로 정보제공을 할 것이다.

 

- ‘집’의 모든 구성요소는 컴퓨터와 연결될 것이다. 주문형 비디오은 필수고 음악은 당신의 분위기에 맞추어 흐를 것이다. 방마다 있는 전화기, TV 등 기기들은 사용자를 인지하고 반응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빌 게이츠가 <미래로 가는 길>을 통해 10년 뒤 세상을 정확히 예측했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빌 게이츠는 <미래로 가는 길>에서 90년대와 2000년대를 아우르는 ‘웹’과 ‘검색’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21세기는 결국 (윈도우즈가 깔린) PC 혹은 PC역할을 하는 기기들이 모든 공간과 가전제품에 결합되어 '정보 제공'의 중심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사용자가 웹을 통하여 스스로 정보를 검색하는 것은 빌 게이츠가 원하는 미래가 아니었다. 빌 게이츠에게 컨텐츠는 정보고속도로를 통해 컨텐츠 제공자를 통해 중앙집중식으로 사용자인 소비자에게 전달되는 것이지 사용자들이 스스로 만들어 제공해선 안되는 것이었다.


왜냐! 사용자들이 스스로 컨텐츠를 제작하는 것은 MS에게 절대 득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컨텐츠를 소비자인 사용자가 제작하고 인터넷을 통해 자유롭게 배포하게 되면 컨텐츠 가격은 떨어지고 유통마진은 사라진다. MS가 처음에는 웹에 관심이 없었던 이유는 민주적인 컨텐츠 배포로는 MS의 수익 모델을 만들 수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컨텐츠 제작은 민주적이지 않았다. 예를 들어 지금까지 음반과 영화산업은 전세계의 몇 개 회사만 유통권을 장악하고 있다. MS는 유통권을 가지고 있는 몇몇 미디어 기업들 편에 있어야만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 할 수 있었다. 윈도우즈 PC 혹은 하드웨어를 통해 컨텐츠를 MS가 독점적으로 유통하게 되면 중간 수수료를 챙길 수 있기 때문이다. MS가 웹TV, MSNBC와 XBOX에 투자한 이유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그 역할을 90년대에 죽 쑤던 애플이 하고 있다.)


모든 사람과 모든 기기에 공개된 ‘웹’은 빌 게이츠가 꿈꾸는 미래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멀티플랫폼인 웹이 발전하면 할 수록 MS에 돈을 가져다주는 윈도우즈의 Lock-In 효과는 사그라 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빌 게이츠는 결국 넷스케이프가 '위험'하다고 판단하게 된다.




3. 넷스케이프의 플랫폼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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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vascript와 SUN의 Java


1995년 넷스케이프는 웹브라우저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앤드리슨의 복수심과 짐 클라크의 열망(궁금하면 전편을 읽어보자)이 모자이크의 아성을 여지없이 무너트린 것이다. 1995년 8월 9일 MS가 윈도우즈 95를 발표하기 2주 전 역사적인 넷스케이프는 기업공개를 한다. 28달러에서 시작한 주식은 74.75달러의 고지를 찍고 58.25달러로 첫날 장을 마감했다. 잭팟이 터진 것이다. 벤처기업 넷스케이프는 특별한 수익이 없음에도 오직 황금 빛 미래만으로 하루 아침에 23억 달러를 벌어 들인 것이다. 물론 넷스케이프는 기업공개를 하기 앞서 웹의 미래를 나름 준비하고 있었다. PC에서의 DOS가 가진 지위, 바로 플랫폼을 만드는 것이다.


모자이크와 넷스케이프 1.0은 순수하게 하이퍼 텍스트, 문자와 사진 등을 뿌려주는 웹브라우저였다. 사용자는 하이퍼 링크를 마우스로 클릭하여 연결된 페이지에 접근할 뿐이었다. 물론 이 기능만으로도 문서의 비선형을 이룬 쾌거지만 사용자들은 그 이상의 것, 게임과 프로그램 같은 다양한 기능들을 원하고 있었다.


게임, 프로그램과 같은 인터렉티브 기능을 웹에서 구현할 수 있는 기술이 먼저 있었는데 바로 1991년 제임스 고슬링이 개발한 ‘Java’였다. Java는 웹을 위해 만들어진 언어는 아니었지만 멀티플랫폼 지향인 웹의 성질과 매우 닮아 있었다. 어느 기기에서든지 동일하게 작동한다는 것. Java는 웹브라우저에 없는 ‘인터렉티브’ 구현이 가능하도록 했다.

 

넷스케이프는 웹브라우저에 인터랙티브를 가능하게 하는 자바를 네비게이터에 이식시키기 위해 개발사인 Sun과 협상을 시작했고 결국 넷스케이프 네비게이터 2.01B에 자바가 구동되게 하였다. 이후 넷스케이프 임원들는 웹브라우저에 두 가지 언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PC환경을 보자면 C는 전문적인 프로그래밍을 가능하게 하였고 BASIC은 보다 간단하게 일반 사용자들로 프로그래밍을 가능하게 했다. 넷스케이프는 JAVA를 전문적이라 판단했고, 일반인이 접근하기 쉬운 ‘스크립트’언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1995년 4월 자바나 C처럼 보이지만 쉬워보이는 언어를 개발하기 위해 브랜든 에이크가 입사하게 된다. 에이크는 1995년 5월, 10일만에 프로그래밍 언어를 만든다. 최종적으로 만든 언어는 ‘자바 처럼 보이는’ 언어였지만 보다 가벼운 스크립트 언어를 개발한다. (에이크가 만든 언어는 일반인이 다룰만한 손쉬운 것은 아니었다. 이는 에이크가 최신 언어의 특징들(함수형언어, 프로토타입 기반 객체 등)을 넣었기 때문이다. 엉뚱하게도 쉽지 않은 기술 특징들이 이후 브라우저 2차 전쟁(Web2.0)의 초석이 된다.) 그는 급조한 이 언어를 (커피이름인 자바와 비슷하게) ‘모카’라 명명하였다가 9월 ‘라이브스크립트’로 이름을 변경했다. 그해 12월 문법이 자바와 비슷한 새로운 언어를 넷스케이프와 썬은 서로 썩 마음에 들었는지, 아니면 자바의 인기를 이용하려고 했던지 간에 최종적으로 ‘자바스크립트’라 결정한다. 그리고 네비게이터 2.0B3에 포함시킨다.


자바와 자바스크립트는 MS를 겨냥해서 만든 언어는 아니었지만 궁극적으로 MS의 윈도우즈 비전과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MS Word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Windows OS가 필요하고 Windows OS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Intel CPU가 달린 PC가 필요하다. MS Word는 오직 Windows라는 단일 플랫폼에세 작동한다. MS, 빌 게이츠의 비전은 단일 플랫폼으로 PC를 지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영역을 넓혀 지금의 태블릿, 모바일폰에 까지 하나의 윈도 플랫폼으로 지배하는 것이었다.

 

자바와 자바스크립트가 하드웨어 종속 없이 어느 기기에서든지 동일한 기능을 하는 프로그램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빌 게이츠는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4. 1995년 6월 21일, MS 넷스케이프에게 칼을 빼 든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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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E 1.0

 

밤비가 고질라를 만나다.


빌 게이츠는 1994년 모자이크와 넷스케이프 1.0이 나왔을 당시만 하더라도 웹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은 인정했지만 당시까지 수익 모델이 없었기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웹 기술의 개방과 넷스케이프의 인기로 많은 홈페이지가 생겼지만 웹브라우저를 만드는 넷스케이프의 경우 기업에 판매하는 서비스와 앱이 주 수입원이었다. 초기 웹 브라우저 기술은 플랫폼이라 생각할 수 없었다. 빌 게이츠는 윈도우즈만이 플랫폼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넷스케이프는 신생 벤처회사였지만 MS를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웹이 활성화 되면 될수록 윈도우즈가 힘을 잃을 것으로 판단했다. 95년 8월 이후 윈도우즈 95가 어떻게 세상의 중심이 될지 미쳐 깨닫지 못했다. 넷스케이프의 판단은 옳지도 않았고 스스로를 거만하게 만들었다.

 

1994년 여름 MS는 브라우저 관련하여 넷스케이프 마케팅 담당자에게 연락을 취했는데 미팅을 미루자며 거절 메일을 보낸다. 그해 가을 다음해에 발표할 윈도우즈 95용 내비게이터를 개발 협의 차 미팅을 가졌는데 MS 부서장 브래드 실버버그는 넷스케이프가 여름에 보냈던 거절 이메일을 찾아내 넷스케이프 관계자들에게 읽었다. 회의 자리는 서로 아웅다웅 하기 바빴다. 긴장관계인 협상자리에서 MS는 MS답게 어이없는 계약조건 내걸었다. MS는 네비게이터의 소스코드 공개와 독점 판매권을 넘겨주는 대가로 100만 달러를 넷스케이프에 제시했다. 주식공개로 23억 달러를 하루아침에 얻을 기업에게 제시할 금액은 아니었다. 넷스케이프는 MS의 제의를 단칼에 거절한다. 넷스케이프는 MS와 처음부터 척을 진 것이다.


협상은 계속되었지만 제대로 협의된 건 없었다. 1994년 여름부터 1995년 6월까지 지난한 협상이 꼭 비생산적인 건 아니었다. MS는 쓸데없이 거만한 넷스케이프와의 협상 과정에서 웹, 인터넷의 가능성을 조금씩 깨닫게 된다. 1995년 초 MS는 자체 웹브라우저를 만들기로 한다. 그리고 그 사실을 넷스케이프에 통보한다.

 

1995년 6월 21일 MS는 이빨을 완전히 드러냈다. MS는 넷스케이프사에 2개월 후에 발표할 윈도우즈 95에 돌아가는 내비게이터를 만들지 말것을 지시했다. (1998년 반독점 재판에서 박스데일 증언) 그리고 말도 안되는 조건을 내세운다. 처음에는 윈도 95용으로 내비게이터를 만들지 말라고 했다가 당근이랍시고 


“MS가 미리 확보한 시장에는 접근 하지 않는 조건으로 내비게이터를 공급한다. 동의한다면 윈도우즈 95 기술 문서를 넷스케이프에 넘겨주겠다.”


는 호의(?)를 베푼다. 넷스케이프는 윈도우즈 3.0의 성공으로 윈도우즈 시장을 놓칠 수 없었다. 하지만 MS는 윈도우즈 95의 기술 자료를 윈도 95 발매이후로 미루었다. MS가 내비게이터를 윈도 95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1996년 넷스케이프사에서 기술적으로 밝힘)

 

그날 회의에서 MS는 이도저도 안된다면 넷스케이프의 주식을 20% 사겠다고 했다. 넷스케이프 중역회의 의석을 차지하려는 속셈이었다. 이는 빌 게이츠가 직접 지시한 내용이었고 주고 받은 이메일이 1998년 법정에서 증거로 나왔지만 빌 게이츠는(우리나라 청문회에서 배웠는지) 기억이 없다며 끝까지 오리발을 내밀었다. 오히려 진실을 알려야 한다며 기자회견을 요청하기도 했다. (1998년 반독점 소송 중 휴식시간에 빌 게이츠는 화장실을 가는 도중 넷스케이프 박스데일과 마주쳤다. 빌 게이츠는 화장실 문을 먼저 들어가면서 “이러면 화장실도 내가 독점한 거네?” 라고 했다고. 이것도 빌게이츠식 유머라고 이해해야 하나?)




5. MS Way, 시장 망가트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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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S는 웹브라우저를 만들기 위해 넷스케이프와 더이상 협상할 이유가 없었다. MS는 웹브라우저의 라이센스를 스파이 글라스(NCSA 모자이크 소스코드 보유, 판매)사와 미리 체결하였다.(MS는 IE를 공짜로 배포했으니 스파이 글라스에 라이센스 비용을 많이 지불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소송 끝에 결국 1997년에 이르러 8백만불에 합의한다.) 1995년 8월 MS는 인터넷 익스플로어 1.0을 윈도우즈 95와 별도로 발표한다.(Windows Plus!에 포함)

 

1995년 11월 익스플로러 2.0을 윈도 95와 NT용으로 발표한다. MS가 IE 2.0을 급히 발표한 이유는 95년 10월 첫 선을 보인 내비게이터 베타버전 2.0B1이 자바 등 인터렉티브 기술을 선제적으로 선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IE는 버전 숫자와 달리 넷스케이프에 비해 기능이 뛰어나지 않았다. MS는 전략적으로 IE를 개인 사용자와 기업 모두 공짜로 풀어버린다. 당시 내비게이터는 기업용은 라이센스 비용을 받고 있었다. 이 향후 공짜 전략은 매우 유효하게 적용된다. 넷스케이프는 기업시장 이외에서 수익 모델을 찾지 못하게 되었고 유료 라이센스 비용을 지불했던 기업들이 MS로 떠나자 기반이 매우 취약해지기 시작했다.

 

1996년 MS는 IE 3.0을 발표했는데, IE 3.0은 향후 웹표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CSS(Cascading Style Sheets)라는 기술을 처음 선보였다. MS는 3.0에 넷스케이프 자바스크립트를 그대로 구현한(복사한) JScript와 SUN의 JAVA 기능을 추가했다.(MS가 만든 VBScript와 우리나라 IT를 발전시키고 망가트린 Active X도 이때 선보였다.) 하지만 사용자들은 IE 3.0과 내비게이터의 차별성을 못느끼게 되었다.

 

1997년 6월 내비게이터 4.0을 선보이자 IE 4.0을 9월에 바로 내놓는다. 하지만 1997년 당시 점유율을 70%이상 내비게이터가 차지하였다. IE는 10~20% 수준에 머물렀다.




6. Windows 98에 포함된 IE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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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S는 수세에 몰리자 처음에는 IE용으로 만든 홈페이지는 넷스케이프 내비게이터에서 제대로 작동 못하게 하였다. 물론 넷스케이프도 마찬가지로 응대했다. 하지만 MS는 더 악질적으로 SUN과 넷스케이프 기술을 일부러 오용함으로써 반칙을 하였다. SUN의 JAVA는 내비게이터와 달리 IE에서 비정상적으로 작동하게 하였고 JScript는 넷스케이프 자바스크립트를 그대로 구현했지만 고의였는지 실수였는지 호환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MS는 JAVA와 Javascript의 원래의 취지를 철저히 망가트려 IE와 넷스케이프 간 호환되지 않는 사이트를 만들게 하였다. IE에 최적화된 사이트 넷스케이프에 최적화된 사이트가 난립하게 하였다.


이렇게 웹 브라우저 호환성이 결여된 이유는 전적으로 MS와 넷스케이프 두 회사의 싸움 때문이다. 결국 홈페이지 제작자는 웹 브라우저 둘 중 하나를 선택적으로 지원해야 했다. 이로 인하여 2000년대 웹표준 운동이 급부상하게 된다. 웹표준 운동에 웹의 아버지 팀 버너스 리가 다시 등장한다. 웹표준, Active X 등은 브라우저 2차 전쟁에서 다룰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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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우저 1차 전쟁 점유율: 97년 72% 차지한 내비게이터


MS는 웹 브라우저 기술로는 넷스케이프를 이길 수 없다고 판단했다. 결국 특단의 결단을 내린다. MS는 처음 싸움이 윈도우즈를 살리기 위한 싸움이었으니 자신이 구축한 윈도우즈 플랫폼을 적극 활용하고자 했다. 윈도우즈 95 는 발표후 줄곤 PC산업의 독점적 지위를 확보했다.

 

MS는 사용자를 끌어들일 가장 간편한 방법을 실행에 옮기는데 1996년 10월 이후 발표한 IE는 윈도우즈 95의 번들로 제공하였다. 그리고 윈도우즈가 확산되도록 도와주었던 하드웨어 기업들을 상대로 내비게이터를 지원하지 못하도록 협박했다. MS의 주 고객이었던 컴팩은 윈도우즈 95 바탕화면에서 내비게이터의 형평성을 위해 IE 아이콘을 삭제하려고 하자 MS가 윈도우즈 95 라이센스 계약을 파기하겠다고 하자 바로 철회했다. MS는 PC 제조회사의 절대적인 갑이 되었다. 결국 모든 PC 제조사들은 MS의 말을 들을 수 밖에 없었다. 내비게이터 입지는 더욱 줄어들었다.


결정적으로 MS는 1997년 11월에 발표한 IE 4.01를 1998년 5월 11일에 발표한 윈도우즈 98에 통합한다. 번들 수준이 아니라 아예 OS와 통합하여 끼어팔기로 발표한 것이다. 이제 사용자들은 인터넷을 사용하기 위해 내비게이터를 따로 설치할 필요가 없었다. 이렇게 되자 IE 점유율은 치솟기 시작한다.


1998년 넷스케이프 내비게이터의 점유율이 하락하자 근본적인 수입원인 기업 고객이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1995년 1/4분기에 $230만였던 내비게이터 기업 라이센스 비용은 1996년 4/4분기에 $5,850만까지 치솟았다가 1997년 4/4분기에 1/3인 $1,850만으로 급감하였다. 넷스케이프는 웹 브라우저 말고도 수익을 위해 기업용 인트라넷 서비스 등을 추진하여 좋은 성과를 얻었지만 넷스케이프를 상징하는 내비게이터의 인기가 떨어지자 기업들은 더이상 넷스케이프에게 머물지 않게 되었다.


1998년 미 정부는 MS를 반독점법 위반으로 기소하지만 이미 넷스케이프 내비게이터는 상품으로 가치를 상실한 이후였다.(소송에서 MS가 패했다고 한들 의미가 없었다.) 결국 넷스케이프는 회사를 아메리칸 온라인(AOL, 미국 최대 PC 통신사)에 매각하고 내비게이터 소스코드 일체를 공개하기에 이른다. 이 결정으로 오픈소스 운동을 주도하는 모질라 재단이 탄생하게 된다.




6. 또 다른 전쟁의 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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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신화의 주인공이었던 넷스케이프의 웹 브라우저 플랫폼 구축은 실패로 끝났다. 넷스케이프는 웹에서 인터렉티브를 가능하게 하는 JavaScript를 만들고 SUN과 협업하여 JAVA를 인터넷의 중심언어로 만들었다. 분명히 인터넷의 현재를 만든 건 넷스케이프 내비게이터 웹 브라우저이다. MS는 자신이 구축한 윈도우즈 플랫폼에게 위협이 될 것으로 판단하고 내비게이터를 무자비한 공세로 퍼부었다. 힘의 논리였다. 넷스케이프사는 MS에 살해당했고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MS는 2000년대에 브라우저 점유율을 96%에 다다른다. 근본적으로 윈도우즈의 승리였다. 플랫폼을 장악한 완벽한 승리였다. 미정부와 싸운 MS는 반독점법 소송에서 실질적인 승소를 하여 기업은 쪼개지지 않았다.

 

하지만 IT 세상을 정복한 MS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적수를 만나게 된다. 그 기업은 IE가 Widows 98과 통합했던 그해에 태어난 Google이다.



다음 편은 Yahoo와 Google이다.


이 시리즈는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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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딴지일보 너클볼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