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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1. 18. 월요일 

NISS








백수의 겨울은 기댈 곳이 필요하다.


가끔 더럽게 잠이 오지 않는 날에는 품안에 따뜻한 사람 하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이 든다. 하지만 사람은 망설여지는 것이 되었다. 오직 친구와 술만이 위로가 된다.


비슷한 시기에 같이 백수가 된 우리는 영화를 보고 나오다 -그때가 아마 낮 세 시쯤이었을 것이다- 영화에 대한 감상을 나누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영화관에 꽉 차 있던 사람들이 백수일까 아닐까...를 궁금해 했다. 길을 걸으면서도 지나가는 사람을 보며 저 사람은 백수일까 아닐까 하는 실없지만 심각하기도 한 이야기를 하며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옮겨 다녔다. 최종 목적지는 없었고 점점 밤이 되어갔다. 기온이 내려갔고 우리는 술 생각이 났다.


이대로 가다간 곧 그지가 될 게 뻔한 상황에서 술이나 마시며 홍야홍야 하는 것이 그리 좋은 방법인 것 같진 않다. 하지만 이제 술은 삶을 유지하는 필수조건이다.


정종은 백수의 지갑엔 당치 않은 술이다. 맥주는 어느 마트에나 어느 편의점이나 구비되어 있는 것이라 애틋함이 없다. 막걸리는 다음 날 무엇을 하던 간에 방해가 된다. 어떤 술을 마시는 게 좋을 까. 왠지 소주는 잘못 마시면 개처럼 기다 낯선 곳에 쓰러져 다음 날 새벽, 머리에 피를 흘린 채 발견 될 것 같은 기분이라 되도록이면 마시지 않게 된다. 골골 거리다 마침내 결핵이 올 것 같기도 하고. 자취생의 결핵 이야기는 흔한 이야기이지 않던가. 이젠 나이가 들어 건강도 챙겨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계속 술 생각이 났다.

 

지갑이 점점 얇아지는 상황에 무언가 생각나면 더 간절해지나 보다. 이제 더 이상 물러 설 곳이 없다. 비용 대비 양을 생각할 때 직접 제조하는 방법 말고는 다른 방법이 생각나질 않는다. 그렇게 막다른 골목에 다다라 입맛을 다시며 일어나니 어느새 눈앞엔 샹.그.리.아 네 글자가 떠올라 있었다.

 

샹그리아(sangria)는 버려질 만한 와인에 과일과 탄산수 등을 섞어 희석해 마시는 스페인의 대표 와인 칵테일이다. 스페인어로 sangre는 피를 의미하는데, 핏빛 와인을 사용해 만들기 때문이겠거니 짐작한다. 이 술을 직접 만들어 먹는다면 비용 대비 양도 그만이고 레몬, 사과가 들어가기 때문에 겨울철 감기 예방에도 좋을 것 같다. 정해진 레시피도 없어 과일과 와인의 종류나 혼합 비율에 따라 맛이 달라져 설마하니 망친다 해도 무난히 넘어갈 수 있다. 만드는 시간은 10분 이내. 여유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백수에게 여러모로 완벽한 술 아닌가.



백수 둘은 바로 날을 잡는다. 사실 특별히 날을 잡을 것도 없다. 그 날이 그 날이라...


10월 30일 수요일 D-day


잉여2

 

친구와의 ‘의’를 상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자취방을 북북 닦아 놓는다. 묵힌 때를 풀고 달래느라 약속 시간이 간당간당해졌다. 할 수 없이 최소한의 예의를 지켰다 자위하며 활동비 1만 원을 챙겨 서둘러 방을 나섰다.


잉여1

 

과일 자를 식칼을 챙겨들고 친구네 자취방으로 향한다. 여기에 추석 때 선물용으로 들어와 이 집 저 집 구르다 지금까지 살아남은 사과와 배, 마트에서 가장 저렴하고 양 많은 붉은 와인, 레몬 한 개, 토닉워터 한 병, 취향에 따라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을 사이다 한 병으로 준비물 완료.

 

오랜만에 집 밖에 나왔더니 한 일도 없는데 피로감을 느낀다.

 

친구네 집에 쳐들어가자마자 주저앉아 사각사각 배를 깎아 먹고 잡담을 하다 문득 떠올랐다. ‘여기 술 만들러 왔지.’ 하긴 만든다 말하기도 민망하다. 껍질 벗긴 과일이 잠기도록 포도주를 쏟아 붓는 게 오늘 할 일의 전부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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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깎고, 사과도 깎고. 모양은 중요하지 않다.


얇으면 얇을수록 과실이 포도주와 잘 어울리게 될 것 같은 그런 생각에 그냥 얇게 저민다. 레몬을 써는데 향긋함이 코에 와 닿았다. 코가 젖도록 킁킁거리다가 문득 마약을 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친구는 말한다. 이렇게 작게 감각을 자극하는 일도 고파하는데, 약 같은 걸 빨게 된다면 우린 큰일 날 거야.


"우리가 약을 한다면 어떤 모습일까?"


"어떤 사람은 베란다 밖으로 지나가는 공룡을 봤다고 하던데..."

 

"난 왠지 이 과도를 들고 밖으로 나갈지도 몰라."

 

"그러면 안 되지."

 

"..."

 

"야동이나 볼래?"

 

시덥잖은 이야기들을 나누다가 자극에 굶주린 처지를 돌아봤다. 실업자가 되지도 못하는 비경제활동인구인 우리에게 자극이 필요해. 책을 읽거나 외국어를 공부하는 것으로는 부족한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아.


잉여 중에서도 상 잉여인 우리가 뭘 할 수 있을지 고민해 본다. 온갖 쓸데없는 것들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쓸데없는 일 하는 걸로 국정원이 요즘 제일 핫 하다던데, 댓글 알바는 말할 것 없고 국정원 직원이 신종 마약을 들여오다가 단속되었다는 기사도 떠오른다.


"그럼 국정원을 라이벌로 삼아야겠다."

 

"국가정보원은 National Intelligence Service 의 약자로 NIS를 쓰니까, 우리는 National Ingyeo Super Service를 줄여서 NISS라고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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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구의 자취방에서 우리에게 소속감을 줄 조직이 생겼다.

 

샹그리아를 만드는 동안 이십여 분도 지나지 않았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냉장고에 술을 모셔두고 그저 숙성 될 때까지 기다리는 일 뿐이다. 네이버 지식인의 레시피에 의하면 하루 정도 묵혀두고 깊은 맛이 우러날 때까지 기다리라 하는데 우리에게 그런 참을성은 없고, 두 시간 후에 마시기로 합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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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 안에서 샹그리아가 빚어지는 동안 생각했다. 후진 포도주와 쭈글쭈글한 과일들이 만나서 각자 지닌 것을 능가하는 하모니를 냈으면 좋겠다고. 요즘 버릇이 하나 생겼는데 그건 온갖 비루하고 모자란 대접을 받는 것들과 동일시하는 일이다. 마트 와인코너 중에서도 가장 구석에 놓여 먼지 쌓인 와인의 처지에 감정을 이입하는 일이 상큼발랄할 리 없다. 이 꿀렁거리는 기분을 오래 보듬고 싶지는 않다. 본래 지닌 것은 보잘 것 없는 와인이지만 못난 것들이 더해져 샹그리아로 숙성된 맛난 술을 마시면 순간이나마 위로가 되겠지.


두시간 후,

 

"이게... 아닌데?"

 

"이거 맞아?"

 

맛이 읍써. 정말 맛이 없다. 술을 마셨는데 피클 국물마시는 기분이 드는 건 왜지???? 사이다를 부어 본다. 그래도 맛이 없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토닉워터를 섞는다. 이제야 먹을 만하다. 술맛과 신맛과 애매한 과일향이 맛없는 맛을 자아내는데, 숙성 좀 덜 시켰다고 이런 재앙을 불러올 줄이야.


잉여2

 

샹그리아는 우리가 상상했던 그 샹그리아가 아니었다.


다시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과일도 괜찮았고 와인도 괜찮았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언가 잘못했다는 소린데... 로 시작한 불협화음이 또 다시 우릴 고심하게 했다.


'왜 샹그리아 하나도 맘대로 되질 않는 거지? 왜 당연히 잘 될 거라고 생각했던 거지?'


떠오는 물음표를 잡아매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다시 침묵 속에... 사이다와 토닉워터를 섞기 시작 했다. 여러 번 섞고 돌리고 마시고 한 끝에 좋은 맛이 간신히 간신히 찾아졌... 아니, 맛이 이상할 땐 입맛을 바꾸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평온을 찾고 한 잔 두 잔 홀짝이자 괜히 행복했던 시간들을 추억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잘 기억 나질 않았다. 너무 시간이 지나서인지 아님 취기가 올라서인지 모든 게 희미하게 느껴졌다. 그게 말야 그렇고 그런 거래 에서 그랬다가 저랬다가 왔다갔다로 변했다가 무엇이 진짜인지도 헷갈려졌다. 이 세계는 단 하나뿐일 텐데.


우리는 오늘의 향기만 추억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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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그리아를 두 병으로 나누고 나오는 길은 벌써 어둑해졌고 지나가는 바람에 목덜미가 다 추웠다.


사람들 행복해 보인다. 다행이다. 너희들은 행복해 보여서. 그래, 그렇다면 나까지 행복해 보일 필욘 없겠지. 습관처럼 찾아오는 끝없는 열패감 뒤의 부정적인 생각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디테일해 지고 고약하게 버무려 진다. 짜증이 밀려왔다. 무의미한 농담을 늘어놓고 가슴으론 ‘부동심’, ‘부동심’을 외웠다. 근데 행복이란 말 좀 촌스럽지 않냐? 행복 같은 거 없는 삶도 시퍼렇게 계속 되는데. 나까지 영역 표시할 필요는 없는 거잖아...? 과연 우리의 영역이란 게 있을까?


이 세상엔 누구 하나 버릴 사람 없고 각자의 역할이 있다는데 그렇다면 우리의 역할은 무엇일까? 또 다시 떠오른 물음표를 달고 우린 계속 걸었다.

 

 

문득 영화<친구>의 대사가 생각났다.

 

"니...건달(백수)의 역할이 먼질 아나? 그거는 바로... 자신들은 비록 음지에 있으면서... 양지를 더욱 밝고 환하게 해주는 기... 그게 바로 건달(백수) 아이가... 안 그렇나...?"

 

하면서 낄낄 거리다 언젠가 가족과 친구들에게 한 번쯤은

 

"니... 의리가 먼질 아나? 이긴기라... 필요할끼다... 쓰라!"

 

하는 장면을 꿈꾼다.






준비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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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양 칼로로시 1.5L   /   롯데 칠성사이다 500ml   /   진로 토닉워터 300ml   /   레몬 1개       

  10,500원                        1,300원                           800원                  1,390원  



1/2 = 6,995원








NISS


편집 : 꾸물, 보리삼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