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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기들이 싫었다. 그들의 자연적인 존재, 언어가 기능을 하지 못하고 논리로 통제되지 않는 상태는 야만을 상기시켰다. 어쩌겠는가. 어딜 가든 눈에 띄는 것은 울거나 악을 쓰거나 후다닥거리며 공중도덕을 해치는 사고뭉치이게 마련이다. 불유쾌한 경험의 조각들을 짜 맞춰 완성한 표상은 징글징글했다. 맹세컨대 단 한 순간도 아기를 보며 귀엽다 생각한 적 없었다. ‘아기인데’, ‘아기니까’, ‘아기라서’라는 말을 방종의 방패로 삼는 부모들은 더 미웠다. 감당도 못 하면서 카페며 음식점이며 미술관이며 끌고 나오는 이유가 뭐냐고, 제 욕심에 겨운 ‘맘충’ 아니냐고 예사롭게 눈을 흘기는 수많은 사람 중 하나가 나였다. 그리고 내 인생에 계획하지 않았던 아기가 들어왔다.


출산은 나의 내면에 해일 같은 변화를 가져왔다. 너도 자식 낳아보면 변할 거라며 낄낄대는 첨언을 들을 때마다 더 큰 혐오를 키우며 저항하던 내가, 남의 아이까지 좋아하게 될 줄은 정말이지 몰랐다. 집 밖에 나가면 보이는 작은 생명, 유모차에서 세상 모르고 곯아 떨어진 아이, 아빠 품에 안겨 주변을 둘러보는 아이, 동양 여자가 신기한지 나를 빤히 쳐다보는 아이(편집자 주: 필자는 외국에 거주 중이다), 공원에서 아장아장 걸음마 연습을 하는 아이, 모자 쓴 아이, 풍선 든 아이, 저마다 특별하고 제각기 예쁘다. 어른에게만 매일의 감정 기복이 있을까, 표현이 서툰 아이들이 울고 보채는 모습이 자연스럽다. 조카들마저 소 닭 보듯 하던 내가 이제는 세상 모든 어린 생명의 행복을 기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낙태 시술에 찬성한다. 강간에 의한 임신이 아니어도, 기형아 출산의 위험이 없어도, 여성은 원하지 않는 모든 형태의 임신을 철회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의 신체는 법이나 국가가 관할해서는 안 되는 자기결정권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양육 의무가 부과된 여성의 삶은 급발진하는 자동차처럼 폭주한다. 낳은 아이를 자궁 속에 도로 넣을 수도, 며칠만 쉬었다 키울 수도 없고, 성난 짐승 같은 아이의 욕구가 내 삶을 지휘하기 때문에 정신 똑바로 차리고 핸들을 잡지 않으면 강둑에 처박힐 일이다. 가려진 분만실 문 뒤에서 산모가 비명 몇 번 지르면 우렁찬 울음소리와 함께 아기가 쑤욱 빠져나오고, 그 뒤에는 모든 것이 부드럽게 제자리를 찾는 드라마적 연출은 얼마나 폭력적인가? (그마저도 더럽고 추한 부분은 깔끔하게 도려내어져 있다.) 이 프로파간다 덕분에 고난의 절정이라고 오해되고 있는 분만통은 실제 임신-출산 랠리에서 찰나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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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만통에는 끝이 있지만, 아이와 함께 찾아온 어떤 것들은 평생 사라지지 않는다. 출산 이후 나의 몸은 폐경지(廢耕地)가 된 듯하다. 내 몸 안에 자리 잡은 세포를 3킬로그램으로 키워내 (정부에서 그토록 원하는!) 재생산하는 일은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소모한다. 내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내 육체는 아기 키우기에 총력을 기울이며, 열 달 간의 잉태 끝에 목표를 달성한 모체는 양분이 말라버린 고목처럼 변한다. 피부가 극건성으로 변해서 잠을 이루지 못할 만큼 가렵고, 긁다 보면 돌아가면서 덕지덕지 피딱지가 앉는다. 상처가 더디게 아문다. 하루에 삼십 분은 집에서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 헤매며 보낸다. 출산 전보다 중력의 힘을 몇 배는 받는 듯하다. 민첩성은 떨어지고 가사와 육아로 억척스럽게 근력만 늘었다. 머리 숱이 줄고, 골반이 저리고, 손목 발목이 시큰거린다. 늘 피로하다. 젊음과 건강을 제물로 바쳐 아이를 얻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아기가 그만한 기쁨을 주지 않냐고 반문한다. 출산에 성공하면 기쁨은 자동으로 획득되기라도 하는 양 말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한 몸 건사하기도 힘겨운 세상이다. 자립할 능력이 없는 피부양자와 함께 행복해지려면 더 많은 조건이 요구된다.


(1) 엄마는 정신적으로 건강해야 한다


아기 키우기는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한다. 잠들었다가도 바닥에 등만 닿으면 울어 젖히는 통에(아기 엄마들은 이것을 ‘등 센서’라고 부른다) 하룻밤에도 수십 번을 아기를 들었다 놨다 기합을 받는다. 아기는 엄마가 달래주는 사이에 발을 동동 구르며 만들어 바친 이유식을 엎어버리게 만들고, 지붕이 떠나가라 울면서 이유를 알려주지 않는 무자비한 존재다. 수면 교육을 시킨답시고 우는 아기를 내버려 두려 하면 남편이 잠 좀 자자고 짜증을 내거나 이웃집에서 신경질적으로 벽을 두드린다. 아기에게 화내지 않으리라 수천 번 다짐하면, 아기는 수만 번이나 당신을 화나게 할 것이다.


(2) 엄마는 육체적으로 건강해야 한다


아기 엄마는 적어도 한 달간 잠을 포기해야 한다. 한두 시간에 한 번씩 젖을 먹고, 밤에도 열 번 이상 깨는 아기가 24시간 보살핌을 요청하고 있기 때문이다. 멀쩡한 몸으로도 고된 이 중노동을 산모는 분만 직후부터, 회음부가 스티치로 꿰매있고 생리 양의 몇 배에 달하는 오로가 밤낮으로 쏟아지고 조금 오래 걸었다 싶으면 밑이 빠질 것처럼 아픈 ‘산욕기(분만 후 6주까지의 회복 기간)에 해내야 한다. 당신이 쓰러질 듯이 피곤하다거나 죽을 만큼 아프다고 애원해도 아기가 사정을 봐 줄 일은 없다. 애초에 눈치껏 덜 안아달라고 하거나 혼자 놀거나 조용히 잠들 아기였다면 엄마의 도움도 필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엄마에게는 ‘아픈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몸이 아프면 아기 보기가 힘들고, 아기 보기가 힘들면 마음에도 병이 든다.


(3) 아기는 신체적으로 온전해야 한다


누구에게는 상처가 될 말이기에 입 밖에 꺼낸 적 없지만, 나는 임신 기간 내내 아이가 기형일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사로잡혀 있었다. 소두증, 두개골유합증, 귀가 안 들리지는 않을까, 지능이 낮지는 않을까, 초음파로 잘 옹그리고 있는 아기를 몇 번이나 확인해도 두려움을 떨쳐낼 수 없었다. 출산을 앞두고 단 한 가지만 기도했다. 아프지 않은 아이로, 건강한 아이로 태어나게 해 주세요. 분만이 끝나고 새빨간 아기가 내 가슴 위에 올라왔을 때 이목구비와 손가락 발가락 열 개를 열심히 확인했다. 물론 세상에는 다양한 형태의 삶이 존재하고, 장애아를 키우는 부모도 행복할 수 있다. 하지만 장애아의 어머니는 ‘돌봄노동’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하며, ‘긍정적인 마음가짐’, ‘원망하지 않기’, ‘극복하기’ 등 멘탈을 컨트롤하는 과제에 추가적인 에너지를 써야 한다. 더 많은 노력이 요구되는 것이다. 


(4) 경제적으로 고달프지 않아야 한다


대부분 여성은 출산을 기점으로 경력이 단절되고 이로써 가계 수입이 반토막 난다. 그런데 군식구가 늘었다. 아기 침대(침구), 유모차, 젖병 소독기 등 육아 장비들을 갖추려면 꽤 목돈이 필요하고, 일 년 내내 기저귀와 물티슈를 박스로 쌓아놓고 쓰면서 꾸준한 지출이 생긴다. 발달상황과 월령에 맞는 생활용품과 장난감이 필요하다. 아기한테 건강한 음식 먹이고 싶고 예쁜 옷 입히고 싶고, 엄마도 사람이라 가끔은 집안일에서 해방되어 외식도 하고 여행도 가고 싶다. 집에 틀어박혀 아기만 보고 있어도 미칠 노릇인데 천 원 백 원 단위 쪼개가며 시름에 잠겨야 한다면 너무도 가혹하지 않은가.


아기 낳기 전으로 돌아가기를 꿈꾸는 엄마들은 대체로 어떤 조건을 결여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기혼자의 성공적인 결혼생활은 늘 외부적 변수의 영향을 받는다. 게으르거나, 경제관념이 엉망이거나, 난봉꾼이거나, 폭력적이거나 등등, 파트너가 뿌린 불행의 씨앗은 ‘엄마와 아기가 행복하기 위한 조건’들을 아주 손쉽게 파괴한다. 이것이 출산에 절대적으로 계획이 필요한 이유다. 여성의 이기심을 무출산 및 저출산 경향의 용의자로 지목하는 것은 심각한 헛다리다. 우리는 일관성이 없는 엄마, 히스테릭한 엄마, 우울한 엄마, 의기소침한 엄마의 손에서 자랐고, “너 때문에 산다”는 한숨 뒤에 숨겨진 막다른 골목을 알고 있다. 엄마가 겪은 불행의 순간들을 기억하고 있다. 여성은 일생에 단 한 번뿐일지 모르는 귀한 아기를 가장 이상적인 환경에서 키우기를, 그렇지 못할 거라면 차라리 낳지 않는 선택지를 원할 뿐이다. 출산은 ‘남들도 낳으니까’ 식의 순진무구한 역할 계승이나 ‘대 잇기’ 혹은 ‘국가 유지’라는 뜬구름 같은 대의명분으로는 투자자들을 설득할 수 없는 고수익 고위험 종목인 것이다.


그럼 다른 경우를 생각해보자. 운 좋게 만반의 준비가 된 상태에서 아기를 가지면 행복은 보장될까? 놀라지 마시라. 사회적 자아를 중요시하는 여성은 ‘재생산’에서 위대함이나 경이로움을 발견하지 못한다. 육아의 기쁨은 근본적으로 사회보다 자연에 가까운 무엇이기 때문이다. 그 단순하고도 강렬한 충만감이 목적이라면 인간이 아니라 원숭이나 수달로 태어났어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자연의 번식 개체 일반이 공유하는 이 원초적 감정이 육아의 ‘동력’으로 작용하는 순간, 여성은 깨닫게 된다. 내 인생의 주인이 된 기쁨, 자아를 실현하는 성취감, 타인에게 인정받는 유쾌함 같은 가장 인간적인 즐거움이 실종되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출산과 동시에 여성의 정체성은 ‘출산 이전의 나’와 ‘출산 이후의 나’로 분열된다. 그가 출산 전에 어떤 인간이었는가와 상관없이, 다른 엄마들과 똑같이 기계처럼 젖 물리고 똥 치우며 하루를 보내게 된다. 그 절망감과 자괴감을 극복하는 것도 본인이 알아서 해야 할 몫이다.


그래서 나는 불행한 엄마들을 이해한다. ‘아기가 생기면 다들 좋다던데 전 왜 행복하지 않은가요?'라는 애처로운 질문에 마음이 쓰인다. ‘비정한 엄마’니 ‘인면수심 30대女’니 하는 손가락질을 받을까 누구에게 털어 놓지도 못하고 앓다가 키보드를 두드리는 모습들을 상상할 수 있다. 괜찮다고, 당신은 비정상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다. 독립적인 개인으로서의 여성은 아이가 행복이고 기쁨이고 희망이라는 강요된 공식 하에 억압되어 왔다. 자궁 달고 태어났으니 암컷으로서의 소명을 다 하라는 소름 끼치는 폭력에 휘둘려 왔다. ‘태어날 생명이 우선’이라는 강자의 도덕 앞에 굴복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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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생존 문제에 눈 하나 깜짝 하지 않던 국가가 낙태 금지를 인권 운운으로 열심히 포장해봤자다. 정부는 아기를 인구증가율로, 노동력으로, 세수 확보로 계산하고 출산을 종용하는 일을 중단해야 한다. 그들에게는 숫자에 불과한 아기가 한 인간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집어 놓는다는 사실을 이제는 제발 좀 인식하길 바란다. 낙태수술 금지 법안이 왔다 갔다 하고, 가임기 여성 지도를 만들고, ‘여성의 사회 진출을 막아 출산을 유도하는 음모’를 꾸미는 국책 연구 보고서가 발표되는 곳이 한국이다. 이렇게 국가 주도로 여성에 대한 몰이해를 적극적으로 확산한다면 여성의 출산 의지는 점점 더 감소할 수밖에 없다. 출산을 장려하고 싶으면 아이를 낳고 싶은 나라를 만들 일이지, 아이를 낳지 않으면 벌을 받는 나라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아이를 낳아 기르더라도 지금의 한국은 아니다. 이민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 일그러진 나라는 싫다. 이러한 생각에 빠져 있는 것이 나 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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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딴지일보 챙타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