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2013. 11. 18. 월요일

편집부 홀짝







 






신화가 된 대통령


미국 시각 1963년 11월 22일, 미합중국의 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는 텍사주 주 댈러스에서 유세 도중 저격을 당한 뒤 인근 파크랜드 병원에서 숨을 거둔다. 당시 미국은 물론 전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던 미 대통령의 암살 사건은, 범인으로 지목된 리 하비 오스왈드가 사건 당일 체포된 지 이틀 만인 11월 24일 잭 루비에 의해 암살되면서 숱한 의혹에 휩싸이게 된다. 케네디가 사망한 후 그의 암살에 대한 미스터리를 다룬 책만 수백여 권 이상 출간되었고, 영화화 되기도 하였으며, 여전히 미국 국민의 61%는 케네디의 암살에 거대한 배후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2013년 11월 22일, 케네디 사망 50주기가 다가 오면서 미국은 다시금 케네디에 대한 이야기로 시끌벅적하다. 때를 맞추어 케네디 관련 신간이 이십여 종 이상 출간되었으며, 11월 22일을 전후하여 수십여 곳의 TV 채널에서 케네디 특집 다큐멘터리가 방영될 예정이다.


케네디는 여론조사 기관 갤럽이 미국인을 대상으로 ‘가장 위대한 대통령’을 묻는 여론조사에서 1988년부터 2000년까지 부동의 1위를 차지했다. 2000년대 이후 케네디의 치적에 대해 다양한 각도로 재평가가 이루어지면서 2013년 현재 그 순위가 4위로 떨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그는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고 있다.


역대 대통령 순위.jpg


위 조사 결과를 놓고 봤을 때, 케네디에 대한 미국인의 평가는 상당히 이례적인 면이 있다. 1988년 이래 같은 조사에서 케네디와 꾸준히 순위를 다투었던 역대 대통령은 링컨과 레이건, 클린턴이었다. 클린턴과 레이건은 모두 재선에 성공하여 재임기간이 8년이었고, 링컨 또한 비록 임기 중 암살 당했지만 재선에 성공하여 약 5년간 미합중국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링컨은 남북전쟁 승리와 노예해방이라는 상징적인 업적을 가지고 있다.


그에 비하면 케네디의 재임기간은 3년이 채 되지 않는다. 그가 미국 역사상 최연소 대통령이었다는 점, 20세기에 태어난(1917년) 최초의 대통령이었다는 점, 그리고 최초의 카톨릭 신자 대통령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케네디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면이 존재한다.


그렇다고 필자가 대통령으로서의 케네디의 업적을 무가치한 것이라 판단하는 것은 아니다. 케네디에 대한 대중의 호의적인 평가 이면에는 일촉즉발의 냉전 상황 속에서 대통령으로서 그가 보여주었던 비전과 위기 대처 능력, 뜻을 다 펼치지도 못하고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밑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여전히 존 피츠제럴드 케네디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가장 젊은 미국의 대통령으로 남아있다.


<찌질한 위인전>의 다섯 번째 인물. 미합중국 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1.jpg


호레이쇼 앨저 - 아메리칸 드림의 시대 


호레이쇼 앨저는 1832년에 태어나 1899년 사망할 때까지 120여 편의 소설을 남긴 미국의 대표적인 문인이다. 지금까지 총 4억 권 이상이 팔린 것으로 알려져 있는 그의 작품은 대부분 가난한 소년의 성공담을 주제로 하고 있다.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하나 같이 가난하지만 근면하고 정직하며 투철한 절약 정신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주인공이 온갖 난관을 극복하고 끝내 성공하는 이야기는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미국인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앨저의 소설이 출간되었던 19세기 중반부터 후반까지는 미국 역사상 유래 없는 경제의 황금기였다. 앨저의 소설 속 주인공처럼 누구든 능력과 노력만 있으면 출신 성분과 상관 없이 성공할 수 있었던, 아니 최소한 그런 믿음이 그저 허황된 것만은 아니었던 시대였다. 철강왕 카네기, 석유왕 록펠러 등이 이 시기 미국 산업의 거물로 등장했다. 지극히 평범한 노동자로 시작하여 미국 경제를 주무르는 큰 손으로 성장한 이들의 실제 성공 스토리야말로 소설보다 더 극적인 아메리칸 드림의 신화였다.


당시 미국의 시대정신은 적자생존과 자연 도태의 원리였다. 비단 미국 뿐 아니라 전세계를 지배한 패러다임이 그랬다. 1960년~1980년대 경제 중흥기의 한국이 당시 미국의 모습을 쏙 빼 닮았다고도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시대 정신 속에서 가난은 그저 개인의 불성실과 무능의 소치일 뿐이었다.


성공한 아메리칸 드림의 표본 - 케네디 가문 영광의 시작


존 F. 케네디의 조부인 패트릭 조지프 케네디(이하 PJ)와 부친인 조지프 패트릭 케네디(이하 조지프)는 이러한 당시 미국의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대기근 때문에 고향인 아일랜드를 등지고 보스턴으로 이주해온 아버지 슬하의 막내로 태어난 PJ는 집안 사정 때문에 열네 살에 학업을 중단하고 부둣가 하역 인부로 돈벌이를 시작한다. 이후 뛰어난 수완으로 손 대는 사업 마다 성공을 거둔 PJ는 부를 축적하게 되고, 당시 1년 임기의 하원의원에 다섯 차례 당선, 이후 2년 임기의 상원의원에 세 차례 당선하게 된다. 케네디 가문 영광의 시작이었다.


PJ의 아들이자 존 F. 케네디의 부친인 조지프는 십대 때부터 뚜렷한 야망을 가지고 자신의 성공을 개척해나간 인물이었다. 부친 PJ의 수완을 그대로 물려 받은 조지프는 자신의 아버지만큼이나 이른 나이부터 출세와 성공의 가속 페달을 밟았다. 경제 사정 때문에 학업을 포기했던 PJ와는 달리 조지프는 돈 많은 아버지에게서 태어났으니 오히려 여건은 더 좋았다고 할 수 있겠다. 하버드를 졸업한 조지프는 금융계에 종사하며 능력을 발휘하여 성공가도를 달린다.


조지프는 1914년 로즈 엘리자베스 피츠제럴드와 결혼하게 되는데, 로즈의 가문은 케네디 가문보다도 명망 높은 아일랜드계 보스턴 상류층이었다. 로즈의 부친은 보스턴 시장까지 지낸 유력 인사였으며, 때문에 사윗감으로 조지프 케네디는 함량미달이었다. 그러나 결국 조지프 케네디는 로즈와의 결혼을 허락 받게 되는데, 이는 그 와중에 더욱 가속도가 붙은 조지프의 출세가도의 영향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일 것이다. 이로써 조지프는 결혼을 통하여 한 단계 더 자신의 신분을 상승시키게 된다.


2.jpg

조지프 케네디


존 F. ‘잭’ 케네디 - 갑부집 도련님의 호사


조지프와 로즈는 슬하에 9남매를 두게 되는데, 존 F. 케네디(이하 잭)는 장남 조 케네디에 이어 케네디 가문의 차남으로 1917년에 태어난다. 아버지 조지프의 성공은 그 끝을 모르는 듯 했다. 잭이 태어나서 자라는 동안 조지프가 벌어들인 돈은 가히 천문학적인 액수가 되었다. 잭은 그가 마음 먹기에 따라 무엇이라도 될 수 있는 환경에서 성장한다. 설령 그것이 대통령이더라도 말이다.


9남매의 아버지인 조지프는 진작부터 아들 중 한 명을 미합중국의 대통령으로 만들어 내고 싶어했다. 다만 형제 가운데 장남에게 정치를 맡기는 당시 사회의 관례상 조지프의 꿈을 이루어줄 대상은 차남 잭이 아닌 자신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 받은 장남 조지프 패트릭 주니어였다(이하 조 케네디).


그렇다고 해서 잭의 교육환경이 형과 달랐던 것은 아니다. 어찌됐든 조지프는 자녀들을 모두 최고로 키워내고 싶어했으니 말이다. 조지프의 재력은 9남매 모두를 최고의 환경에서 교육시키는 데 있어 부족하기는커녕 차고 넘쳤다. 아마 조지프가 자녀를 백 명쯤 두었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잭의 성장과정은 전형적인 갑부집 도련님의 그것이었다. 어찌나 집안이 부유했는지 잭은 돈 한 푼 가지고 다니지 않아도 생활하는 데 전혀 불편함을 느낄 수 없었다. 보스턴 지역의 사람이라면 잭이 케네디 가문의 아들이라는 것을 모를 리 없었고, 어딜 가나 그것을 보증 삼아 외상을 걸고 다녀도 됐기 때문이다. 그저 가문의 재무 담당 일꾼이 일일이 돈을 지불하고 다니기가 바빴을 뿐이었다.


3.jpg

케네디 일가


잭은 형에 비해 학업이나 운동에 있어 뛰어나지 못했지만 그것도 문제될 것이 없었다. 비록 모든 면에서 자신보다 뛰어난 형에게 열등감을 느끼기는 했지만 어차피 정계 진출을 놓고 형과 다툴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다.


잭, 즉 존 F. 케네디가 성장하여 정치적으로 성공하기까지 부친 조지프와 그의 재력이 끼친 영향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지역 명문가의 자제들만 다니는 학교이기는 했으나 동급생 110명 중 석차가 65등에 불과했던 잭이 하버드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은 조지프 본인이 잘 나가는 하버드 동문이었던 것과 함께 조지프와 가까운 저명 인사들이 잭의 신원 보증인으로 나설 수 있었던 영향이 컸다.


1937년, 만 스무 살의 잭은 당시 상류층 자녀들이 대학 재학 중 견문을 넓히기 위해 밟는 필수 코스나 마찬가지였던 유럽 그랜드 투어를 다녀온다. 절친한 친구인 빌링스와 함께였는데, 조지프는 형편이 넉넉하지 못했던 빌링스의 경비까지 모두 책임져주었다. 태어나서 하버드에 입학하기까지 최고의 교육환경에서 가능한 모든 지원을 받으며 생활한 잭은 대학 생활 중에도 경험하고 싶은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젊은 시절부터 외교 문제에 큰 관심을 보였던 잭이 원하는 만큼 국외를 누비며 견문을 넓힐 수 있었던 배경은 조지프의 재력을 빼놓고는 도무지 설명할 길이 없다. 


같은 해 12월, 조지프는 루스벨트 대통령으로부터 영국주재 미국 대사에 임명된다.


미국 최상류층 가문의 하버드 학부생으로서 잭이 누렸던 호사의 절정은 그가 학부 학위 논문을 쓸 당시였다. 잭은 평소 관심을 가졌던 외교 분야를 논문의 주제로 다루고자 했는데, 구체적인 논문의 방향은 2차세계대전 직전 ‘영국이 유화정책을 취하게 된 원인’을 규명하는 것이었다. 당대에나 지금에나 미국 최고 명문 대학 중 하나인 하버드 대학의 학위 논문이긴 했지만 잭은 ‘일개’ 학부 논문을 쓰는 것 치고는 분에 넘치는 지원을 받는다. 


런던 주재 미국 대사에 봉직하는 부친 조지프의 도움을 얻어 주영 미국 대사관 직원으로부터 당시 구하기 힘든 영국 정당의 정치 관련 팸플릿은 물론 영국 현지의 고급 정보를 모조리 습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런던 주재 미국 대사관에서 공보 비서관으로 재직 중이었던 제임스 시모어는 잭의 연구 조수나 마찬가지였는데, 시모어가 영국 곳곳을 뒤지며 정당 관계자들을 설득해가면서 모은 자료는 미 국무부 외교 행낭으로 대서양을 건너 잭의 손에 들어갔다. 그런 방대한 자료를 모아 논문을 작성하면서도 완성까지는 불과 3개월까지 밖에 걸리지 않았는데, 집안의 엄청난 재력을 바탕으로 개인 타이피스트와 속기사까지 고용했기 때문이다.


잭은 이렇게 평범한 대학생이라면 감히 상상하지도 못할 스케일과 자료 수집 방법으로 학부 학위 논문을 완성한다. 그럼에도 몇몇 교수들에게는 혹평에 가까운 평가를 받게 되지만 그 가운데에는 꽤 좋은 평가를 내린 교수도 더러 있었다.


잭의 학부 학위 논문은 책으로 출간되기까지 한다. 『영국은 왜 잠자고 있었는가』라는 제목의 이 책은, 두 군데 출판사에서 퇴짜를 맞은 끝에 한 영세 출판사와 계약을 맺어 세상의 빛을 보게 되고, 상당한 호평을 받으며 미국과 영국에서 꽤 많은 부수가 팔려 나갔다. 이 때 잭의 나이 불과 만 스물 셋이었다.


4.JPG

청년 케네디, 절친했던 친구 빌링스와 함께


이후 우여곡절 끝에 정계 진출을 결심한 잭은, 늘 그래왔던 것처럼 조지프의 전폭적인 지원을 등에 엎고 승승장구 한다. 하원의원 선거에 당선되면서 정계에 발을 들여놓은 잭이 선거에 쏟아 부은 돈의 규모는 -정확하게 말하자면 조지프가 쏟아 부은 돈이라 해야 할 것이다-  6년 후 같은 선거구에서 잭의 후임으로 당선된 오닐이 들인 돈의 여섯 배에 달하는 액수였다. 오죽하면 조지프가 “내가 들인 돈이라면 내 운전수도 당선시킬 수 있을거야!”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였다. 비단 선거 비용뿐만이 아니었다. 하원의원으로서 의정활동을 하면서도 잭은 돈 걱정일랑 하나 없이 각 분야의 전문가로 이루어진, 하원의원의 그것 치고는 규모가 큰 비서진을 갖출 수 있었다.


상원에 진출할 때에도, 민주당 대선 후보로 지명될 때에도 조지프의 ‘돈 폭격’은 어김없이 이어졌다. 신문, TV, 라디오 등의 매체에 전방위적으로 투하된 광고비와 유세 비용, 대규모 선거운동원들의 인건비에 이르기까지 예나 지금이나 선거판은 돈싸움이었고 이 부분에 있어서 만큼 잭은 언제나 상대 후보에 비해 압도적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학창시절부터 정치적 성공에 이르기까지, 존 F. 케네디의 성공이 100% 부친의 재력 덕분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반대로 부친의 재력이 뒷받침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잭의 성공 또한 장담하기 어렵다. 냉정하게 말하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조지프는 잭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돈은 물론이거니와 자신의 정,재계 인맥을 총동원해서 아들을 도왔고, 정치인 존 F. 케네디의 뒤에서 온갖 지저분한 일도 마다하지 않고 음지의 일처리를 총괄했다. 당대의 호사가 중 케네디 가문에 호의적이지 않았던 사람들이 이런 잭을 두고 ‘아버지가 잭에게 백악관을 사줬다’고 비아냥거렸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존 F. 케네디는 아버지로부터 모든 기회와 지원을 제공 받았으며, 언제나 그것을 가장 효과적으로 이용했던 것이다.


죽음의 그림자


존 F. 케네디가 암살 당하는 순간까지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던 중대한 사실이 있다. 그가 어린 시절부터 평생에 걸쳐 줄기차게 질병의 괴롭힘을 당했다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원인을 알 수 없는 경련성 대장염을 앓았던 잭은 이 때문에 체중 감소는 물론 결장의 궤양과 출혈 증세까지 동반하면서 수시로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이러한 잭의 질환에 치료는 고사하고 그 원인을 밝히는 것조차 번번히 실패했던 담당 의료진은 가까스로 치료를 위한 방편을 찾아내게 되지만 고통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 치료법이 증상을 호전시키는 것만큼은 틀림 없었으나 당시의 의학 수준으로는 그것이 또다른 형태의 질병을 유발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잭은 평생 소화성 궤양과 척추 질환 등 당시로서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십 수가지 질환과 싸워야 했다.


척추 통증이 극심할 때에는 목발에 의지하지 않고는 걸을 수조차 없었다. 하루에 셀 수도 없이 많은 종류의 약을 복용해야만 했고, 이를 전담으로 체크하는 역할을 맡은 보좌진이 수시로 따라다녔다. 스테로이드 약물 복용, 진통을 위한 프로카인 주사 등이 없이는 정상적인 업무 수행이 불가능했다. 병세가 악화될 경우 머지않아 평생 휠체어 생활을 해야 할 지도 모른다는 진단을 받기도 했다. 심지어 잭은 생전에 두어 차례 종부성사(카톨릭 신자가 죽기 직전에 받는 성사)를 위해 카톨릭 신부가 병상을 찾을 정도로 심각한 죽을 고비를 맞기도 했다. 이 모든 고통이 그가 암살로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계속됐다.


잭의 삶 한 켠에는 이렇듯 언제나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는 스스로 자기 목숨이 마흔 다섯을 넘기지 못할 것 같다고 털어놓기도 했다.(실제로 그는 만 46세에 죽음을 맞게 되지만 죽음의 내용이 암살일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잭이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었던 경험은 질병으로 인한 것 말고도 한 번이 더 있었다. 2차세계대전 당시 미 해군에 입대하여 전선에 배치되었을 때였다. 미 해군의 초계 어뢰정 PT 109호의 정장으로 솔로몬 제도 인근 해역에 전진 배치된 잭이 임무를 수행하던 도중 일본 구축함과 정면으로 충돌하면서 PT 함정이 난파 당하게 된 것이다. 완전히 박살난 함정의 아직 가라앉지 않은 잔해를 붙들고 9시간 이상을 버틴 잭은 생존한 나머지 다섯 명의 부대원을 이끌고 장시간을 헤엄친 끝에 인근 무인도에 무려 7일 간이나 표류한 끝에 구조된다. PT 109호 대원의 기적 같은 생환 소식은 미국 본토에서도 탑 뉴스로 보도되었고, 케네디 가문의 차남 잭은 일약 전쟁 영웅이 되어 귀환한다. 


5.jpg

군 복무 시절의 케네디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다. 척추 질환을 비롯하여 온몸 구석구석에 병을 안고 살았던 잭이 어떻게 군에 입대할 수 있었는지, 게다가 어떻게 전선에 배치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이다. 여기에는 다시 한 번 부친 조지프의 영향력이 동원되었다. 정상적인 신체 검사로는 입영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 뻔했던 잭이 조지프에게 부탁하여 신체 검사 결과를 속이고 입대한 것이다. 아버지 빽을 이용하여 군 입대를 면제 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온전치 않은 신체를 속이고 자원 입대한 잭의 행동은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모습이다. 


잭이 이러한 결정을 내린 이유를 크게 두 가지 정도로 추론해 볼 수 있다. 첫째는 미국의 명문가로 성장한 케네디 가문의 일원으로서 잭의 군면제가 집안의 위신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우려에 대한 것이다. 이 당시 잭은 아직 정계 진출의 확실한 뜻을 품기 전이었지만 어쨌든 조지프의 아들 중 한 명 이상은 미국 정계에 진출하여 최고의 자리에 올라야 했기 때문에 비난의 여지를 남기는 어떤 행동도 피해야 했을 것이다. 비록 잭이 정당한 사유로 군을 면제 받을 수 있었다 할지라도 스스로 그러한 오점을 남길 수 없었기에 내린 결정이었을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한 가지 의문이 가시지 않는데, 잭은 불편한 몸을 이끌고 굳이 후방이 아닌 전선에 배치해달라고 부친을 설득했다는 점이다. 여기서 추론할 수 있는 두 번째 근거는 자신의 몸이 성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평범한 사람을 훨씬 뛰어넘는 실행력과 의지를 가진 잭의 성격에 있다. 어쩌면 아직까지 자신의 진로를 확실히 정하지는 않았지만 혹시나 모를 정계 진출에 대비한 포석이라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유야 어찌됐든 오늘날 우리나라의 현실을 비추어 볼 때 케네디 가문과 잭의 이러한 선택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케네디 가문을 비롯한 당시 미국의 명문가들이 보여준 노블리스 오블리제와 더불어 국가적, 사회적 책무를 다하지 않고서는 지도자가 될 수 없었던 당시 미국 사회의 분위기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잠시 이야기의 흐름을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꼭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잭은 전쟁 중에도 용케 자신에게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를 간발의 차이로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형인 조 케네디는 그렇지 못했다. 폭격기 조종사로 복무 중이던 조는 폭약을 가득 싣고 비행하던 도중 항공기가 공중 폭파하면서 그대로 산화하고 만다. 동반자이자 경쟁자였던 조의 죽음은 잭이 견뎌내기 힘들 정도로 큰 충격이었다. 게다가 형제 중에서도 절친했던 누이 동생 캐슬린마저 비행기 사고로 숨지면서 다시 한 번 비탄에 잠긴다.


질병으로 인한 죽음의 고비를 수차례 넘기고 전쟁 중에도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었던 존 F. 케네디.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자신의 건강 상태 때문에 늘상 죽음의 그림자를 지근거리에 두고 살아야만 했으며 형과 누이 동생을 사고로 먼저 떠나보내면서 삶과 죽음의 경계에 대한 공포는 더욱 가중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생에 대한 잭의 열정을 더욱 불타오르게 만들었다.


마음 먹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환경과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의 사이에서


"하지만 그 생각은 해봐야 부질없습니다. ...... 그저 내게 주어진 시간에 되도록 마음껏 즐기며 최선을 다할 작정입니다."

"문제는, 하루하루를 이승에서의 마지막 날로 생각하고 살아야 한다는 거야. 나는 그렇게 살고 있거든." 

-존 F. 케네디가 지인에게 했던 말


"잭은 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있었습니다. ...... 죽음이 저기 와 있구나. 조와 캐슬린을 데려갔다. 그리고 나를 기다리고 있구나. 그래서 잭은 어떤 상황에 처할 때마다 자신을 환하게 불사르려고 애썼습니다. 매사에 최대치를 끌어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면서부터는 굳이 애를 쓸 필요도 없었습니다. 다른 어느 누구도 갖지 못한 무언가를 잭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살아 있다는 느낌에 한층 충만해 있었다고나 할까. 달리 뭐라고 표현할 수가 없네요."

-스팰딩의 회고 中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잭은 조지프라는 배경 덕분에 하고자 하는 일이 무엇이든 언제나 최상의 지원 속에서 일을 진행시킬 수 있는 조건을 타고 났다. 그리고 한편으론 항상 얼마 남지 않았다고 여겨지는 시간 앞에서 삶에 대한 열정의 동기 부여가 최고조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 두 가지가 결합하여 나타내는 시너지가 곧 존 F. 케네디의 행보가 되었다. 장남 조 케네디가 사망한 후 오래지 않아 정계에 진출할 것을 결심한 잭에게 있어 앞서 언급한 시너지는 잭을 흡사 폭주기관차로 만들었다. 오로지 최단 거리로 백악관에 도달하고자 했던 그의 의지가 두 번의 하원의원과 두 번의 상원의원을 거쳐 기어이 그를 역대 최연소 미합중국 대통령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下)편에 계속


6.jpg

존 F. 케네디의 대통령 취임 연설






편집부 홀짝

트위터 : @holjjak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