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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1. 20. 수요일

독일특파원 타데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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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럽게 춥다. 이불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기 싫은 길고 어두운 독일의 겨울이 다가오는 이 시점에, 한량 한량하게 빈둥거리던 어느 날 죽돌 기자에게 날아온 퉬레퐈쒸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죽돌: 이봐 어이 이봐 ~ 독일의 언론에 대해서 좀 글 좀 쫌 써보지 그래~ 


나: 나 그릉거 잘 모르는뒈~ 


죽돌: 까라면 까~ 


라고 해서 독일 언론에 대해서 써 보려고 한다. 재미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지만, 필자의 입장에서는 적어도 독일의 언론 아니, 독일 자체는 재미있는 곳이 분명히 아니다.

 

'다이나믹 코리아'라는 말에 걸맞게 하루가 다르게 다이눼믹한 뉴스들이 미친듯이 흘러넘치는 한국의 언론들을 보고 있노라면, 민족 정론지 딴지일보를 읽지 않고는 그 흐름조차 알 수 없는 카오스의 세계가 눈앞에 펼쳐지는 듯 하지만, 독일은 뭐 그냥 그냥 무난 무난 열매를 먹은 나라 같은 감상이 든다. 여긴 선거에 국정원이, 군대가, 경찰이 동원 되지도 않았고, 그거 덮을라고 검찰 모가지 날리고 경찰 모가지 날리고 이런 짓이 잘 일어나지 않아서 말이다. 


하지만 '독일이라고 그런 다이나믹한 일들이 아예 없었겠는가?' 하는 것은 조금 다른 문제이다. 여기도 언론이 서로 물어 뜯고 싸우며 선동질도 하고 암투도 벌였던 적이 있었다.   


다만 21세기로 넘어오면서 세상이 탈 이데올로기화 되어가며 잠깐 안정기에 접어들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땅이 남북으로 갈려 있지도 않고, 대통령 되어 보겠다며 비밀경찰 투입하는 일은 안 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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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치? 이런거지?


옛날 옛날 한 옛날에 독일이 2차 대전에서 좀 망하고 난 이후에 독일 전역에서 상당히 많은 수의 언론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히틀러 집권 시기에 라디오의 전략적 보급과 괴벨스의 괴벨 괴벨한 연설로 많은 국민들을 아주 좋게 되게 만들었던 경험을 통해서, 독일에서 (좋은 방향이던 나쁜 방향이던)언론이 갖는 영향력은 많은 이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영역으로 보였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겠다. 


독일이 2차 대전에서 패망한 지 불과 4년이 지난 1949년 통계에 따르면, 당시 발행되고 있던 일간지만 무려 600여 개 였다고 한다.

 

당연히 이렇게 많은 언론사가 난립하면서 더 많은 독자와 광고를 끌어들이기 위한 언론사들의 생존 경쟁이 시작되었고다. 그러나 이러한 생존경쟁은 예나 지금이나 언론사 스스로에게 돌아오는 자본주의적 이점을 제외하면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별로 되지 않는다.  


<빌트>지의 탄생과 악셀 슈프링어 


그중 최선봉에 서있는 신문이 단연 <빌트>지다. 너님들 중에서도 뉴스를 보다 보면 ‘독일 <빌트>지 인용’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몰라도 봤다고 치자. 생각보단 자주 보인다. 


<빌트>는 악셀 슈프링어라는 언론 재벌 회사의 소유인데, 이들이 가지고 있는 독일 매체 영향력이 어마 어마 하다. 독일의 축구 전문지 <키커>도 얘들 꺼고 티비 방송도 가지고 있으며 각종 대형 회사들도 여기 속해있고, 휴고 보쓰도 같은 회사고 각종 출판업, 신문사, 잡지사, 방송사 손을 안 대는 분야가 없을 정도라고 보면 되겠다. 물론 삼성에 비하면 새 발의, 아니 개미 발의 피쯤 될지도 모른다. 


필자가 옛날 옛날 아르바이트로 공장에 들어가서 그지 같이 무거운 책을 나르던 시절이 있었다. 그 중 제일 싫었던 책들이 소위 말하는 전공 서적들... 백과사전 같이 생긴 주제에 표지도 두껍고 딱딱하고 무겁기도 드럽게 무겁던 그 책들이 전부 저 회사에서 나온 책이라서 오늘 이런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내 억화 심정이 터지고 터져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니라고!!! 외치고 오늘은 저들에 대해서 일단 살포시 디벼보자. 


당시 하루에 ㅆㅂㄹ을 수백 번 외치며 오늘을 기다려 온 것은 절대 아니다. 흠... 흠 비가 오려는지 어깨가 쑤신다.


<빌트>는 2차 대전 이후 1952년부터 악셀 슈프링어 출판사에서 나오는 일간지이다. 악셀 슈프링어는 아버지의 출판사를 물려받아, 자신의 이름으로 바꾸고 본격적으로 출판업에 뛰어들게 되면서 핵심적 사업으로 이 종이 신문을 발행하게 된다.

 

그가 아버지의 출판사를 물려 받은 것이 부러울 독자들이 있을 것 같아 노파심에 한 마디 곁들자면, 그는 일생동안 5번의 결혼을 했고, 독일 최대의 언론 재벌이며, 출판 업계의 왕이고, 아무튼 이래저래  잘 먹고 잘 살다 간 그런 인물이다. 부러워 마라! 그는 애국 보수다. 그는 2차 대전 당시 군대도 안 갔다. 이쯤되면 그가 얼마나 보수(?) 적인 인물인지 대충 감이 올 것이다. 역시 보수라면 군대 정도는 안 갔다 와야 어디 가서 명함이라도 ... 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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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길거리의 신문팔이 아저씨 


이 <빌트>지는 처음에 길거리에서 파는 길거리 신문(?)으로 시작 하였다. 영어로는 '타블로이드'라 불리고 독일에서는 프랑스어를 빌려 길거리 신문이라고 불리는 이 방식은 말 그대로 흰 옷을 입은 배불뚝한 아저씨가 길에서 파는 형태이다. 현대에는 황색저널, 타블로이드, 길거리 신문의 구분이 무의미 하기도 하지만 아무튼 출발은 저랬다. 


<빌트>의 저렴한 가격과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빌트는 독일어로 그림이라는 뜻이다.) 신문 1면에 사진이나 그림을 큼지막하게 박아 넣음으로써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 시키고, 그로 인해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빌트>는 1면에 누드 사진을 아무렇지도 않게 실었다. 작년에야 비로소 앞으로 누드 사진은 1면이 아닌 속지에 넣겠다는 발표를 한다. ㅜ.ㅜ (나 우는 거 아니다. 눈에 뭐가 들어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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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까만 거 지우고 싶음.. 구글에 말이야 ..이미지 검색을...



아무튼 각설하고 자 그런데 저 신문이 뭐가 문제냐? 


<빌트>가 저런 황색 저널로서 연예인 가십 기사나 스포츠 이야기, 섹스 이야기 같은 것들을 신문에 매일 실었다면 별 문제가 없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신문이 잘 팔리게 되면서, 이들이 자신들의 정치색을 내세우기 시작했다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빌트에 대항한 싸움 


60년대에 독일이 경제 성장기로 접어들면서 수많은 노동자의 출근길은 한 쪽 옆구리에 낀 점심 도시락과 <빌트>가 함께했다. 읽기 쉽고 큼지막한 그림에(므흣한 사진은 덤이다.) 짧은 기사들은 바쁘고 할 일 많은 노동자들에게 '딱'이었다. 그렇게 신문이 잘 팔려나가기 시작하자 악셀 슈프링어는 신문의 타겟을 '지식인이 아닌 나머지 대다수'로 설정하면서 신문의 양과 종류도 늘리고, 얼추 언론 재벌의 면모를 갖추어 나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당시 빌트의 편집장이며 보수 정당을 신봉하던 칼 하인츠 하겐의 주도 하에 <빌트>의 정치면은 점점 더 늘어나고 그들의 발언도 점점 더 수위를 높여가게 된다.

 

그들은 보수 정당인 기민당(CDU)을 미는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으며, 그저 자신들이 생각하는 우파적인 가치에 몰입했다. 


그렇다고 민족주의적 성격을 띄는 것은 아니며(독일에서 민족주의 혹은 애국주의는 히틀러를 연상시키는 만큼 가장 큰 거부감을 일으키는 요소 중에 하나 이다), 친미적 성향과 그 외의 보수적 가치(돈)에 집중하는 성향을 보인다. 


이들이 주로 취하는 방식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사진을 크게 넣고, 의도적으로 편집된 짧은 제목을 붙임으로써 사람들에게 강력한 정치적 메세지를 전달하는 방식이었다. 게다가 각각의 기사 당 할애하는 지면도 굉장히 작다. 오로지 그림만 크게 들어간다.

 

그 다음 취한 방식이 메세지의 명확한 전달을 위해 편집에 편집을 거쳐 대상을 정해 놓고, 그것을 적대화 시키는 방식을 취하는 것이었다. 이 방식이 꽤 효과를 발휘해서 '적대화 이론'이라는 말까지 생기게 된 것이 이 무렵이었다고 한다. 


말로 쓰니 어렵다. 내 국어 좀 열심히 공부해 둘 걸 그랬다. 쉽게 설명하자면... 좆선일보 보자 그럼 다 안다. 쉽게 설명 못 하겠다. 


이렇게 <빌트>지의 정치적 메세지가 강해질 수록 그에 반대하는 지식인들의 비판도 쏟아졌다. 이미 60년대 초반부터 많은 지식인들이 온갖 비판을 퍼부었지만 이미 시장을 장악한 <빌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당시 <빌트>의 주 공격대상은 좌파와 공산주의자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공격은 분명 효과를 나타내었다. 그에 따라 많은 수의 나이 든 독일인들은 점점 더 보수적인 시선을 가지게 되었으며 <빌트> 역시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다만 슈프링어가 미처 예상하지 못 했던 것은, 나라가 조금씩 더 잘살게 됨에 따라 대학생들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는 점이었다. 


당시 세계적으로 불고 있던 냉전 시대의 차디찬 칼바람과 독일 내의 동, 서독 분단 등의 상황을 대학생들이 좋게 받아 들였을 리 만무하다. 대학생들은 마치 히틀러가 전체주의를 강조하며 자신들의 부모 세대를 망친 것 처럼 미국이 명분도 실익도 없는 전쟁을 자꾸 수행 하는 것이, 히틀러의 야욕과 닮아 있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사회적 민주주의를 표방한 서독에서 공산주의자들은(특히 대학생들에겐) 언론의 소개처럼 악마의 화신으로만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막시즘적 사회주의는 대학생들에게 찬양의 대상이 되곤 하였다. 물론 현재도 독일에는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있다. 


대학생들이 이렇게 빨간 빨간 빨갱이 물이 들고 있는 사이에, <빌트>는 저런 대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사회의 지식인들과 교수들을 보며 학생들을 선동하지 말라는 기사를 쏟아냈고, 반대로 그들은 <빌트>를 향해 국민들을 선동하지 말라고 하며 싸웠다. 


<빌트>는 당시 틈만 나면 공산주의자들을 욕하는 데에 지면을 할애했고 그것은 대부분 '동독이 저러고 있는데 서독은 왜 이리 안일하냐'는 투의 기사였다. 


„Macht das Tor auf“ 

(동독아) 문을 열어라. 


„Der Osten handelt – was tut der Westen? Der Westen tut NICHTS!“

동독이 장벽을 쌓았다.- 서독은 무얼하지? 서독은 당췌 아무 것도 안하는구나!


이런 게 당시의 일면 머릿 기사였다.


그러면서 동독을 탈출해서 서독으로 오는 독일인들에 대한 자세한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를 본 서독 사람들은 냉전의 책임을 동독과 공산주의자들에게 온전히 돌리고 친미적인 성향을 띄며 통일에 대한 모든 희망과 책임을 남의 탓으로 돌려버리는 의식을 굳혀갔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본 그림이라고? 다 착각이다. 불순한 마음을 갖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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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년 6월 6일자 빌트지 

USA: 우리는 중립임

Kreml: 우리는 아랍인을 도움

(Kreml: 러시아 모스크바의 크레믈린 궁전)


나름 대학에 들어가서 먹물 좀 먹었다고, 이 시대의 지성인이라고 생각하던 대학생들은 저러한 제목의 신문을 펼쳐들자 곧 분노에 휩싸이게 된다. 완전 선동 일색인 언론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대학생들은 데모를 준비한다. 그래, 원래 데모는 대학생이 해야 제맛 아니겠는가. 


대학생: 우리 빨갱이 아닌데! 아닌데! 늬들 이상하게 글쓰는데! 


빌트지: 늬들 빨갱이 맞는데! 맞는데! 늬들 데모만 생각하는데! 


데모가 연일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1967년 6월 2일 이란의 왕과 왕비가 베를린을 방문한다. 이에 뭐만 있음 반대하던 대학생들은 그날도 어김없이 그들의 방문을 비난하는 데모를 하게 된다. 물론 이 데모는 페르시아 지방의 대학생 연합에 의해 이란 왕의 폭압적인 정치에 대한 반대로 이루어진 것이었고, 많은 독일 대학생들이 같이 참여 하였다. 오전부터 이미 베를린 쉐네베르크에서 여당 정치인들과 독일 대학생과 페르시아 대학생들이 참여한 데모가 있었다.


여기에 이란의 왕과 왕비를 추종하는 어버이 연합 이란인들이 모였는데, 반대하는 독일 대학생들을 무지막지하게 몽둥이로 패기 시작했다. 경찰은 어느 정도 멀리서 구경만 하고 있었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은 저 안에 당시 이란의 비밀경찰인 SAVAK요원들이 포진해 있었다고 한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사람들은 정말로 '열'받았다. 더 많은 사람들이 저녁에 왕과 왕비가 독일 대통령과 <마술피리>를 보기로 예정되어있던 베를린 오페라 극장 앞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대학생들은 멀리서 썩은 토마토를 던지며 조롱의 문구를 뱉어내기 시작했다.('이란도 민주 공화국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ㅋㅋ~' 뭐 대략 이런 식이었겠지...)

 

물론 그때 던진 토마토가 그들에게 닿았을 리는 만무하다. 이미 안전을 위해 굉장히 먼 거리에서부터 일반시민들의 출입은 통제 되어있었고, 왕과 왕비는 데모하는 인원들의 목소리조차 듣지 못하고 입장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왕과 왕비가 오페라 하우스에 입장하자마자 갑자기 경찰들이 나서서 대학생들과 일반 시민들을 강경 진압하기 시작한다.

  

대학생들은 경찰들이 곤봉으로 잡아 패고 잡아가고 난리를 피우자 혼비백산하여 도망쳤다. 그리고 울린 총성 한발... 26살의 대학생인 베노 오네조르그는 그렇게 경찰의 총에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경찰들의 강경 진압이 결국 한 대학생의 목숨을 앗아가는 비극적인 사고를 불러 일으키고 말았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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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노 오네조르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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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 검은 옷의 이란인들이 경찰의 바리케이트 안쪽에서 밖에 있는 독인인들을 구타하는 장면 

(下) 저녁에 나타난 가면을 쓴 시위대 


다음 날 아침, <빌트>에는 이러한 기사가 실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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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의 왕과 왕비 베를린 방문 ->

피 튀기는 폭동: 1명 사망 

(<빌트>의 제목 뽑는 스킬 되시겠다. 주어 없는 말투~) 


„Studenten drohen: Wir schießen zurück“ 

대학생들의 위협에 우리는 총을 쏘았다. 


„Hier hören der Spaß und der Kompromiss und die demokratische Toleranz auf. Wir haben etwas gegen SA-Methoden.“ 

이제 모든 재미와, 화해, 민주주의적 관용을 멈춘다. 우리는 대학생들의 폭력을 동원한 방식에 대응할 채비 를 다 갖추었다. 


대학생들의 분노는 임계점을 넘었고 <빌트>의 비판도 도를 넘어섰다. 대학생들과 <빌트>는 그렇게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이후 대학생들과 <빌트>는 서로에 대한 맹공을 퍼부으며 시간은 본격적인 사건의 시작인 1968년으로 접어든다. 


68운동이 일어난 1968년, 루디 두치케라는 대학생이 있었다. 그는 40년 생으로 이미 60년대 전반에 걸쳐 대학 내에서는 유명한 연설가였다.


그는 대표적인 막시즘적 사회주의자였으며, 보수 우파에서는 무정부주의자라고 비판했지만 대학생들에게 상당한 인기가 있었다. 그가 사회주의자라고 해서 러시아 쪽을 추종하는 독일인은 아니었다. 러시아와 동독을 비판하고 미국과 서독을 비판하는 그야말로 다까긔스트라고 할만한 인물이었다. 대학생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독일 68운동의 원동력인 루디 두치케를 당연히 <빌트>가 좋아할 리 없었다. 


두치케는 당시의 세계적 상황과 미래에 대해서 학생들만의 운동을 장려하지는 않았다. 혁명은 국민 대다수가 의식하고 참여해야만 한다고 설파 했다. 대다수가 의식하지 못하는 소수가 이끌어나가는 운동은 현재의 엘리트주의와 전혀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혁명은 단지 어디에서 무엇이 발생하고 모든 것이 바뀌는 순간의 행위가 아니다. 혁명이란 인간이 바뀌어야 하는 길고 복잡한 과정이다.

-루디 두치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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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루디 두치케가 그 영향력을 넓혀 갈수록 빌트지는 그에 대한 악플 같은 기사를 연달아 쏟아 내었고 그렇게 사회적인 갈등이 점점 심해지던 어느 날 드디어 사건이 터지고 만다. 


투 비 컨티뉴~







 


편집부 주 


<물건너 언론 분석 특집 관련기사>


[프랑스 언론의 스펙트럼 <1>]

[프랑스 언론의 스펙트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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