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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월 10일, 안국역 태극기 집회


이변이 없는 한 탄핵은 기정사실이라 믿고 있었음에도 그것이 확신으로 이어지지 못했던 것은 내 기억에 강렬히 박힌 헌재의 황당무계한 과거 판결들 때문이다. 행정수도 이전 문제 당시 나는 헌재의 선고를 생방송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이런저런 견해를 주절주절 이야기하던 헌재 소장의 입에서 경국대전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왔을 때부터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더니만 급기야 관습헌법이라는 단어가 나오면서 조선 시대부터 수도의 역할을 했던 서울의 기능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은 사실상 위헌이라는 판결을 들었을 때, 나는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지 수없이 확인해보았다. 어떻게 21세기 재판에서 조선 시대 경국대전이 판례로 이용될 수 있는지 지금도 나는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대법원 재판이 끝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이루어진 통합진보당 해산 때도 마찬가지였다. '대역행위'라는 단어가 스스럼없이 헌재 재판관 입에서 흘러나왔을 때, 나는 저 양반들이 타임슬립해서 21세기에 뛰어든 조선 시대 사대부들은 아닌가 심히 의심을 하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탄핵 심판 때에도 느닷없이 삼국사기가 튀어나오고 선덕여왕을 들먹이면서 탄핵을 기각하면 어떡하는가 하는 한 줌의 근심이 가시지 않고 있었다.

 

허리도 많이 좋아진 김에 이런 역사의 중대한 순간에는 가급적 현장에 있어야겠다 생각하고 안국역으로 향했다. 다만,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헌재를 백프로 믿는 입장은 아니라서 가급적 헌재 판결은 생방송으로 보지 않으려 했다. 갑자기 뒷골이 당기고 심장이 멎는 불상사를 막기 위함이었다. 다행히, 그리고 당연히 탄핵은 인용되었지만 판결문 전문을 읽어보니 생방송을 보지 않은 것이 참 잘한 결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월호 탄핵 사유 포함 안 됨, 뇌물수수 증거 부족으로 탄핵사유 인정 안 됨, 언론 자유 침해 증거 부족으로 탄핵사유 인정 안 됨, 아마 여기까지 듣다가 혼절을 했을 것 같다. 어떤 네티즌이 판결문 두괄식으로 씁시다라고 했다던데 그 심정 전적으로 공감한다.

 

안국역에 도착했을 때는 탄핵 인용이 이루어진 직후였다. 역 안에는 비상대책회의 집회 가는 길과 탄기국 집회 가는 길이 각각 표시된 화살표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왼쪽은 촛불, 오른쪽은 태극기, 좌빨들은 촛불집회로 우꼴은 태극기 집회로 뭐 이런 건가 생각이 들었다. 원래 왼쪽으로 나갈 생각이었는데 갑작스런 호기심이 들었다. 촛불 쪽이야 어떤 분위기일지 안 봐도 비디오지만, 태극기 어르신들은 뭐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오른쪽 방면으로 몸을 돌렸다. 그렇게 안국역 계단 쪽으로 향하는데 군복을 입고 태극기를 든 노인분들이 낙심한 표정으로 터덜터덜 걸어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맥이 풀렸겠지, 얌전히들 집에 가시는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는데 그게 착각이라는 것은 불과 일 분도 안 돼 깨달을 수 있었다. 안국역 지하상가까지 가보니 앉아서 대성통곡하는 할머니가 보였다. 뭐가 그리 슬플까 하며 보고 있는데 곧바로 흥분한 두 남자가 몸싸움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경찰이 제지하자 한 사람은 저 사람이 내 뱃지 훔쳐갔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다른 사람은 저 새끼 세월호 뱃지 달고 있는 좌파라고 소리를 질렀다. 한참을 좌파! 좌파! 떠들던 사내는 카메라를 든 취재진을 보더니만 "JTBC 기자 새끼다! 죽여버려!"라고 고함을 질렀다. 곧바로 대여섯 명의 건장한 노인네들이 젊은 기자들에게 다가가 손찌검을 하며 카메라를 빼앗으려 했고 경찰들이 황급히 제지했다.


안국역 5번 출구로 나오자 역 입구에 경찰 차벽이 설치돼있었고 그 위에는 의경들이 올라서 있었다. 갑자기 주먹만 한 돌멩이가 떨어졌다. 누군가 의경들을 향해 던진 돌이 방패에 맞고 역 계단 쪽으로 굴러떨어진 것이다. 다행히 맞지는 않았지만 내 옆에서 올라가던 아저씨가 어깨를 다쳤다. "야이 썅, 어떤 새끼가 돌 던졌어?" 하고 고함을 쳤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탄기국 사람들은 더이상 돌을 던지지는 않았고, 대신 홍구공원에 도시락 폭탄을 던진 윤봉길 의사를 추모하듯, 일회용 도시락을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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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벽 위에 서 있는 의경들 손에 노란 막대기가 들려 있는 것이 보일 것이다. 대나무 막대기인데 끝은 Y자 모양으로 갈라져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차벽을 기어오르는 사람들을 밀어내는 용도인 것 같았다. 전체를 박스 테이프로 칭칭 감은 것으로 보아 불필요한 부상을 막으려는 듯 보였다. 그러나 마이크를 잡은 할머니 한 분이 "경찰이 죽창을 들고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 어느 나라에 경찰이 죽창을 들고 사람을 찌른단 말입니까?"라고 소리쳤다. 역시 모략과 날조로 승부한다는 우꼴의 기본자세에 충실하다.

 

안국역 앞에는 제법 많은 인파가 모여 있었다.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있어서 전체 인원을 어림잡기가 힘들었다. 간간이 성조기도 눈에 띄었는데, 요즘 성조기 든다고 욕먹어서 그런지 그렇게 많지는 않았고 대형 성조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 사람들도 여론이라는 것을 신경 쓰기는 하는 모양이었다.


대체로 노인들이었지만 40대 정도로 보이는 사람들도 눈에 띄었고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태극기를 든 모습이 보였다. 보통 그런 경우에는 젊은이들이 훌륭한 정신 박혀있다고 칭찬들 해준다는데 날이 날인 만큼 그럴 마음의 여유는 없어 보였다.

 

연단에서는 연사들이 나와서 자유발언을 하고 있었다. 어떤 할아버지 한 분이 비통한 심정이기는 하지만 일단 법의 결정이니 따르고 지켜보자는 취지로 이야기하자 대뜸 사람들이 "간첩이다! 간첩이다!"라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 할아버지도 "니네가 간첩이지 왜 내가 간첩이냐?"라고 맞받아쳤다. 잠시 실갱이하다가 할아버지는 연단을 내려갔고 다음 주자들이 그 뒤를 이었다. 대체로 할머니들은 차분한 편이었다. 우리가 화난다고 함부로 폭력을 행사하면 저들에게 폭도의 오명을 뒤집어쓸 수 있으니 가급적 질서정연하게 집회를 이어가자고 말을 하면 성미 급한 영감쟁이들이 바통을 이어받는다. 전진합시다. 헌재 새끼들 때려죽입시다. 차벽을 부숩시다.

 

몇몇은 실제로 차벽을 돌파하려는 시도를 했다. 특전사 군복을 입고 검은 베레모를 쓴 날렵하고 건장한 체구의 사내 하나가 차벽을 기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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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차벽을 넘을 때까지 경찰은 미처 파악하지 못하다가 마지막 발길을 떼려는 순간 발견하고 황급히 제지했다. 이거 박진감 넘치는걸? 딱 내 스타일이잖아. 이럴 줄 알았으면 태극기 집회 자주 와보는 건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아직 노인이라 부르기엔 조금 미안해 보이는 아저씨 하나가 가로수 동사 방지를 위해 덮어놓은 짚단에서 철근을 끄집어내더니 경찰차 유리창을 박살 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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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찍고 보니 옆에 웬 김흥국 닮은 아저씨가 함께 찍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김흥국은 아니다. 이때 곱게 나이 드신 할머니 한 분이 나에게 오더니 조용조용한 말투로 부탁을 해왔다.

 

"이봐요. 젊은 양반. 사진만 찍지 마시고 저 차벽 좀 밀어주세요."

 

(마음의 소리) 아니, 저는 탄핵을 지지하는 입장인데 저보고 탄핵 반대를 위해 차벽을 밀어달라고 하시면, 이거 대략 난감인데...

 

"사진만 찍지 마시고 차벽 좀 밀어달라니까요?"

 

(마음의 소리) 정 그러시면 일당을 주시든가. 이래봬도 하루 일당이 유모차 끌고 나오는 아줌마보다 더 센 사람으로 공사현장 가면 고급인력 소리 듣는 사람인데 맨입으로 그런 부탁을 하시면 곤란하지요. 단가만 맞으면 다년간 누적된 노하우 대방출해서 돌격조장 해드릴 의향도 있는데...

 

내가 대답은 안 하고 실실 웃기만 하자 이 교양있어 보이는 곱게 늙은 할머니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너 촛불이야? 왜 사진만 찍고 차벽은 안 밀어? 너 촛불이지?"

 

(마음의 소리) 어머나 씨발, 들켰다. 빨리 안 튀면 생명의 안위를 보장 못 받는다.

 

슬금슬금 꽁무니를 빼고 있는데 갑자기 한 사내가 다급하게 외친다.

 

"사람이 죽었다. 사람이 죽었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압사당했다."

 

황급히 달려가 보니 경찰 셋이 누워 있는 남자에게 심폐소생술을 하고 있었다. 차마 사진을 찍기가 뭐해서 그냥 기억 속에만 인화해 두기로 했다. 이때부터 연설자들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애국 시민이 죽었습니다. 여러분, 이 숭고한 뜻을 이어받아 차벽을 부숴버리고 헌재로 몰려갑시다. 제 1조 전진! 차벽을 부숴! 제 2조 대기! 돌격! 돌격!"

 

군출신인지 아니면 RPG게임 중독자인지 알 길은 없으나 나름대로 지휘해본 솜씨이다. 정말 사전에 조를 짜뒀는지 그냥 입에서 나오는 대로 씨부리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때부터 사람들이 우루루 차벽으로 몰려가 밧줄을 걸고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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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어르신들은 장갑도 안 낀 손으로 줄로 달려가 당기기 시작했다. 목장갑이라도 하나 사서 돌릴까 하다가 말았다.

 

"장정들 다 달라붙어! 뭐하는 거야?"

 

아마도 이들이 말하는 '장정들'에는 나도 포함되는 거겠지? 아무래도 앞에서 사진 찍을 분위기가 아닌 것 같아서 뒤로 빠지려는 찰나 누군가가 황급히 달려가 사람들을 제지한다.

 

"줄 당기지마! 우리가 줄 당기다가 사람 떨어져 죽었어!"

 

울상이 된 얼굴로 그가 사람이 죽었다고 말하자 사람들은 줄을 손에서 놓았다. 나는 아마도 누군가가 그 특전사 군복처럼 차벽을 기어올라가다가 줄을 당기는 통에 떨어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집에 돌아와 뉴스를 보니 그게 아니고 누가 전경 버스를 탈취해서 밀어부치는 바람에 차벽 위에 있던 스피커가 떨어져 그 밑에 있는 사람이 죽은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런 세세한 정황은 알지 못했고 그냥 사람이 죽었다는 말만 돌았다. 그 와중에 버스 위로 올라간 사람들은 전경을 밀어내고 차벽을 점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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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벽이 뚫렸다. 돌격! 돌격!"

 

마이크를 쥔 사내가 고함을 지내자 다들 우루루 그곳으로 몰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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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에 뒤따라보았다. 아까 누군가가 떨어져 죽었다고 했던 곳이 저 차와 문 사이로 알고 있었다. 그쪽으로 가다 보니 어떤 할머니라 부르기엔 약간 미안한 느낌의 오십 대 정도의 아주머니 한 분이 대성통곡을 하고 있길래 왜 우세요? 라고 물어보았다. 나는 아마도 떨어져 죽은 사람 때문에 우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대답을 듣는 순간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왜 우는지 몰라서 물어봐요?"

 

"아, 그게 아니라, 전 이 근방에서 누가 떨어져 죽었다길래..."

 

그러나 그 아주머니는 내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오늘 내가 우는 게 왜 우는지 모르는 거야?"

 

왠지 신분이 발각될 것 같다는 불안감이 엄습해 온 순간 스피커를 통해 '최후의 5분'이 울려 퍼졌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무의식 중에 좌우반동을 하며 따라 부르고 있는 나의 모습을 자각하게 되었다. 차라리 잘 됐다. 군가 열심히 부르면 아무도 나를 탄핵 지지자로 생각 안 하겠지. 뭐 어쨌든 이리 재미있는 구경 시켜주신 분들께 노래 한 곡 못 불러드리랴 싶어 우렁차게 한 곡 뽑았다. 그리고 갈수록 시위가 격화되는 것 같아 조용히 현장을 빠져나왔다.

 


안국역 후기


1. 현장을 나오면서 몇 명이나 모였나 어림짐작해보았다. 아무리 후하게 쳐주어도 오천 명 이상은 아니다.

 

2. 한 시간 남짓 있어본 경험으로 속단하기는 그렇지만, 적어도 이날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돈 받고 동원된 사람들로는 보이지 않았다. 나름의 진심이 느껴지는 분들이었다. 물론 박근혜가 갓 떨어진 끈 신세가 되었으니 알바 동원은 힘들었을 것이고 순수 참여자들만 모인 것 같다.

 

3. 어제 시위에서 세 명이 죽었다고 한다. 그중 두 사람의 죽음이 내 부근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안 된 일이긴 하나 명복을 빌어주고 싶은 마음은 없다. 하나뿐인 귀한 목숨을 고작해야 여염집 아낙네만도 못한 수준의 대통령을 위해 바친다는 것은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 얍삽하긴 하나 정미홍이나 이광필이처럼 누구 좋으라고 죽냐, 생명 운동가로서 내 생명은 소중하다라고 빠지는 것이 올바른 선택이다. 빠삐용에 나오는 대사처럼, 그들은 '인생을 허비한 죄'를 지었고 그 죄과를 온 몸으로 치렀다.





2. 3월 12일, 삼성동 박근혜 사저


시골 오일장터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낸 신경림의 '파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못난 놈들은 얼굴만 봐도 즐겁다'. 나는 이 명작을 좀 패러디하고자 한다. '친박집회는 서 있기만 해도 재미있다.'


그러니까 엇저녁, 여섯시 반에 청와대에서 퇴거하기로 한 박근혜는 미적미적 뜸을 들이고 좀처럼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평소 성정으로 보아 눈길 한 번 던져주었을 리가 만무할 청와대 일반 직원 하나하나와 악수도 하고 눈물을 글썽였다는 신파조 기사만 들릴 뿐이었다. 급기야 일곱 시가 넘어가는 시점임에도 좀처럼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 박근혜 때문에 짜증이 난 나는 지지자들이 몰려 있다는 삼성동 저택으로 달려가기로 결심했다. 깽판을 놓을 계획은 없었고, 그냥 '민주주의 만세! 탄핵 만세!'만 한 번 외쳐줄 생각이었다. 니들만 군출신이냐 나도 육군 병장 출신이다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군복바지를 걸치고 네이버 지도를 참조하며 삼성역으로 가는 도중에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박근혜 벌써 삼성동 도착해서 집에 들어갔다니까 너도 그냥 돌아와라. 어이가 없었다. 분명히 내가 나온 시간에 박근혜는 아직 청와대를 출발하지 않았는데 어느 틈에 도착해서 성명 발표하고 들어가기까지 했다는 말인가. 아무리 일요일이라지만 교통 통제가 있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파면당한 대통령을 위해 교통 통제를 하는 것이 적법한 일인지 좀 따져봐야겠다.


아무튼 김은 좀 빠졌지만 그렇다고 다시 집에 돌아가기도 좀 모양새 안 나고, 이리된 거 한 번 삼성동 저택 앞 구경이나 해보자는 생각으로, 그리고 지난번 글로도 남긴 일이지만 태극기 집회도 은근히 재미있어서 나름 기대감도 가진 채로 삼릉 초등학교를 찾아 나섰다. 역시 사저 근처에 접근도 하기 전에 나의 기대는 현실로 이루어졌다. 내 또래 정도로 보이는 아줌... 아니아니 내가 뭔 소리를... 아가씨! 두 명과 아저... 아니아니 왜 내 입으로 내 무덤 파는 소리를....--; 청년 두 사람이 태극기를 들고 터덜터덜 길을 걷고 있었다. 옷차림새는 나름 한껏 패셔너블한 편으로 일반 기업 과장이나 차장 내지는 커피숍 주인 정도의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들이었다. 친박집회에 노인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직접 가서 확인한 바로는 노인들만 있는 것은 아니고 사오십대도 꽤 있고, 상대적으로 적긴 하지만 이삼십대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틀딱 좀비들만 설치는 집회라는 이미지는 편견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무튼 그중 한 아줌... 아니 아가씨.... 왜 자꾸 오타가 --;... 아무튼 아가씨가 울면서 크라잉 랩을 시전하는데 그 내용이 엄청 재미있었다.


"나쁜 놈들. 훌쩍. 지들이 안보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 훌쩍. 베트남 패망한 거 벌써 잊었어? 훌쩍. 나쁜 놈들. 박근혜 대통령이 뭐 말만 하면 앞뒤 다 잘라내고 한 문장만 내세워서 말실수한 것처럼 왜곡하고. 정말 나쁜 놈들. 징징. 그리고 그 수첩공주라는 것도 그래. 엉엉.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에도 나오잖아. 수첩을 잘 활용하라고. 뭐가 잘못이야? 흑흑."


본인은 진지하게 울며 이야기하지만 옆에서 들으려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혹시 이거 몰라카메라는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들었다. 특히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에 이르러서는 그들과 거리를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커다란 웃음소리가 새어 나오고 말았다. 아무튼 그 크라잉 랩에 빠져들다 보니 어느새 아무리 봐도 박근혜 사저 근처로는 보이지 않는 한적한 길에 접어들었다. 편의점에 들어가 길을 물어보니 내려온 길을 다시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사저 앞에 도착했다. 좁은 골목에 대략 삼백 명 정도의 인파가 모여 태극기를 흔들며 "박근혜 대통령! 탄핵 반대! 대통령 지키자!" 등의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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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오늘의 최강 코메디! 박근혜 대통령 사저 앞에, 거리로 따져서 담장에서 불과 10미터도 안 떨어진 지점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계동치킨'의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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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최고다! 이런 생각에 '아이폰 7 플러스! (무하하)'를 들어 사진을 찍었지만 밤이라 그런지 간판의 글씨는 찍히지 않고 하나의 빛덩어리로만 찍힐 뿐이었다. 이곳저곳에서 열 장 넘게 찍어서 겨우 건진 게 아래의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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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집 앞에 치킨집이라니, 이 무슨 천지간의 조화란 말인가! ㅋㅋㅋ 게다가 이름도 특정인을 떠올리게 하는 '계동치킨'. 자칫 '제동치킨'으로 잘못 읽을 가능성도 농후하다. 행여 산책이라도 나갔다가 무심결에 저 간판을 '제동치킨'으로 잘못 읽기라도 하면 어떨까 상상하니 포복절도를 금치 못했다. 파란집에서 위세 부릴 때야 아랫것들한테 '참 나쁜 가게집'이라고 퇴출이라도 지시했겠지만...


나중에 집에 돌아와 보니 안 그래도 계동치킨이 네티즌들의 뜨거운 관심사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쨌든 본의 아니게 헌법 수호의 투사가 되어 빅재미를 선사하신 계동치킨 사장님의 앞길에 무궁한 영광이 있길 바라며, 요즘 개업하는 집 앞에 화환에 쓰여진 글귀처럼 돈 세다 잠 못 드는 밤이 되길 바란다.


사저 담장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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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 높이는 대략 6미터 정도, 그리고 담장 위에는 외부인의 침입을 막으려는 철조망이 배치되어 있었다. 어쩐지 박근혜의 심리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담장을 낮추고 철조망을 거둬냈다면 박근혜는 좋은 대통령이 될 수 있었을까. 잘 모르겠다.


사람들이 사저 반대편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느껴질 것이다. 사저 맞은편 건물 옥상에는 취재진들의 카메라가 빼곡히 솟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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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옥상 위의 카메라를 'JTBC'라고 단정 지으며, "꺼져라. 사생활 침해 마라!"라고 소리를 질러댔다. 어떤 아주머니는 "아니, 이제 대통령 아니니까 일반인이잖아. 근데 왜 일반인 사생활을 침해해? 나쁜 놈들 같으니라고."라며 분개하고 있었다. 약간 멍해진 느낌이었다. 아니, 탄핵 불복하신다면서요. --; 여전히 박근혜는 대통령인데 기자들이 사진 찍을 때는 일반인 사생활 침해가 되는 거예요? 나름 사고의 유연성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준이라고 자뻑하며 살았지만 이 분들 사고의 유연성은 당해낼 길이 없다. 이분들은 내가 마지막까지 쥐고 있는 '일관성'이라는 원칙에서마저 자유로운 사고의 유연성을 지닌 분들이다. 분하지만, 졌다.


JTBC를 욕하던 사람들은 심지어 KBS까지 욕하기 시작했다. "KBS 새끼들도 다 똑같은 새끼들이야. 죽여버려야 돼. 믿을 건 MBC뿐이야." 좋겠다, MBC. 열성 팬들 둬서. 어떡하냐 KBS. 그 지랄발광을 하고도 촛불 쪽에도 욕먹어, 태극기 쪽에도 욕먹어.


그러고 보니 이들은 거리에 비치되어 있는 지미집 카메라를 애정어린 시선으로 쓰다듬으며 이건 MBC카메라라고 흐뭇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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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봐도 이해가 안 되는 게 옥상 위의 카메라에도 회사 로고가 없고, 이 지미집 카메라에도 회사 로고가 없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이들은 무슨 신통력으로 JTBC와 MBC 카메라를 구별해낸단 말인가.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낮에 이미 MBC 카메라를 제외한 나머지 방송사들의 카메라를 이들이 쫓아냈다고 한다. 어떻게든 취재는 해야겠고 그래서 옥상으로 올라간 것이라고 한다.


빽빽하게 밀집된 군중들 사이에 무려 성조기도 아니고 트럼프 깃발을 들고 구호를 외치는 사내를 보았다. 똥은 똥끼리 뭉친다는 진리를 보여주고자 했던 것일까? 도대체 거기서 왜 트럼프 깃발을 흔드는 것이냐? 그 자리에서 사진을 찍고자 했으나 워낙 사람들이 많이 부대끼는 탓에 미처 '아이폰 7 플러스 제트블랙'을 주머니에서 꺼내지도 못했다. 좀 빠져나와서 사진을 찍으려 했으나 다른 깃발에 가려 식별이 불가능할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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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우루루 몰려가 누군가를 밀어내고 깃대로 때리기 시작했다. 촬영하던 SBS기자라고 한다. "SBS 니들이 다 보도해서 탄핵됐잖아!" 이렇게 악을 쓰면서. 요즘에 태극기 깃대로 사람 때리는 것이 문제가 되어서 그런지 태극기를 든 사람들은 가만히 있고 성조기를 드신 분이 성조기 깃대로 때리고 있었다. 정말이지 이분들의 적응력은 범인의 이해 수준을 초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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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화질이 좋지 못하다. '아이폰 7 플러스 제트블랙'으로도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다. 별 생각 없이 아이폰 신제품이라고 해서 샀는데 이게 워너비 아이템이라고들 하니 갑자기 뿌듯해진다.


어느새 시간이 열 시가 넘었다. 요즘 다른 현장 잡을 때까지 일이 없어서 더 있을 수도 있지만, 일 다닐 때는 이 시간 넘겨서 잠을 안 자본 적이 없어서 피곤해졌다. 사저 앞의 인파도 많이 줄어 백 명 남짓만 남았지만 구호 소리는 여전하다. 나도 소시적에 데모 나가서 구호 좀 외쳐본 사람이지만, 단 한 번이라도 저렇게까지 열성적으로 외쳐본 적이 있는가 돌이켜보니 부끄러울 따름이다. 앞으로 두 번 다시 없기를 바라지만, 행여라도 다시 거리에서 구호를 외칠 일이 있다면 최소한 박사모보다는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집으로 돌아가려고 마음먹었는데 갑자기 웬 아저씨가 뛰어오더니 사람들에게 은밀하게 수근거린다. "촛불이 이쪽으로 온대요." 이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다시 비분강개의 투사 모드로 돌변했다.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촛불이 이쪽으로 와?" "오기만 해봐. 다 죽여버릴 거야." 그래서 한 삼십 분 더 기다려보았는데 아무도 오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잘못된 정보였는지, 아니면 지쳐가는 사람들을 자극해 힘내게 하려는 거짓말이었는지 판단은 못 하겠다. 그래서 열 시 반 경에 집으로 돌아왔다.



삼성동 후기


1. 친박집회 참가자들은 생각보다 멀쩡해 보였다. 노숙자 알바같은 분위기를 지닌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한참 사람들 많이 동원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그런 사람들도 동원해서 머릿수 채웠는지 모르나 지금은 그냥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만 남았다. 싸잡아 알바처럼 취급하는 것은 또다른 우를 범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2. 대한민국 노인들이 신명을 풀 공간이 너무 부족하다는 것을 이 집회를 통해 느낄 수 있었다. 어르신들의 열정은 어느 젊은이들 못지않아 보였다. 부디 이들이 건전한 취미활동에 몰두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다.


3. 오늘 저녁에는 계동치킨 한 번 시켜볼 생각이다.




도비공 


편집: 딴지일보 coc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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