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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1. 25. 월요일

편집부 홀짝





 









미국 역사상 최연소 대통령의 탄생


상편의 마지막에서 밝힌 바와 같이, F. 케네디(이하 케네디)는 두 번의 하원의원과 두 번의 상원의원 생활을 거쳐 미국의 35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1947 1월, 만 서른이 채 되지 않은 나이로 하원에 입성한 이후 14년 만에 마흔 셋의 나이로 백악관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미국 역사상 최연소 대통령. 열두 살 연하의 아내 재클린 케네디는 서른 한 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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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대 초반의 퍼스트 레이디. 재클린 케네디



목표를 향한 첫 계단, 연방 하원의원


케네디는 미국 연방의회 하원의원이 되었지만 정작 그 자리에서 하는 일에는 큰 기대도 관심도 갖지 않았다. 당시 케네디가 속한 민주당은 집권 여당이었지만 트루먼 대통령의 지지율은 불과 30%대에 지나지 않았으며 하원 의석의 과반수는 야당인 공화당의 차지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출내기 초선 의원에 불과한 케네디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아니, 거의 없었다고 봐도 무방하겠다.


그러한 당시의 정치적 상황 말고도 케네디가 하원의원직에 소홀(?)했던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케네디는 하원의원직을 더 높은 곳으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 정도로 밖에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원의원에 당선된 그 시절부터 되도록 빨리 상원으로 가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저널리스트 아서 크록의 증언이다.


이는 케네디 집안의 분위기도 마찬가지였다. 케네디가 하원의원 선거에서 승리하였을 당시, 부친 조지프 케네디를 비롯한 집안의 분위기는 비교적 차분했다. 주영 대사까지 지낸 조지프에게 있어 장차 대통령으로 키워낼 작정인 아들이 고작 하원 선거에서 승리한 것이 뭐 그리 큰 경사였겠는가.


그 와중에도 케네디는 하원 내의 영향력 있는 인물과 교류하는 데에는 소홀함이 없었다. 한편, 이 때 케네디는 미국 청년상업회의소가 발표한 ‘1946년 한 해를 빛낸 청년 10가운데 한 명으로 선정되었는데, 10인 중에서도 가장 높은 순위를 차지했다. 선정 과정에서 부친 조지프의 활약(?)이 있었던 것은 당연했다.


다음 하원 선거에서 압도적인 지지율로 재선에 성공한 케네디. 더 높은 곳을 향한 케네디의 시선은 자연스레 상원으로 옮겨졌다.


야망의 실현을 위한 본격적인 발걸음


하원의 다음 단계로 주지사 자리와 상원의원을 저울질 하던 케네디는 오래지 않아 상원 진출로 가닥을 잡는다. 메사추세츠주 상원의원 선거에서 만난 공화당 후보는 헨리 캐봇 조지라는 인물로, 20년 동안 선거에서 져본 적이 없는 거물 중진 의원이었다. 케네디는 선거에서 자신의 정치적 전략과 강점, 그리고 조지프의 자금력을 총동원하여 헨리 캐봇 조지를 꺾는 기염을 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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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캐봇 로지


1953년에 상원의원 생활을 시작한 케네디는 같은 해 9, 재클린 부비에와 성대한 결혼식을 올린다. 상원의원으로서 케네디는 하원에서와 마찬가지로 입법 활동 등에서는 뚜렷한 역할을 하지 못한다. 비록 미국 전체 인구 가운데 선택 받은 아흔 여섯 명의 사람 만이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연방 상원이었지만, 케네디가 꿈꾸는 최고 권력의 자리에 비해서는 그 권한이나 책임이 지극히 한정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하지 했다는 표현보다는 다른 곳에 더 큰 관심이 있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어울릴 것이다.


다른 쪽으로의 더 큰 관심. 케네디는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입지를 다지고 전국적 인지도를 높이는 데 있어서는 큰 성과를 보였다. 특히 TV를 비롯한 각종 매체의 인터뷰와 대담을 적극 활용하여 스스로의 이미지를 구축해 나갔다. 대학 시절부터 줄곧 외교 분야에 관심을 가져왔던 케네디는 상원의원 재직 기간에도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미국의 외교와 안보에 있어서 만큼은 목소리를 드높였다.


1956년 대선을 앞두고 열린 민주당내 후보 지명전에서는 부통령 후보로 나서기 위해 도전하였으나 경합에서 패배를 맛보기도 한다. 케네디가 정치에 입문하여 대통령 선거에 당선되기까지의 모든 과정에서 경험했던 유일한 패배였으나 이는 오히려 그의 당내 입지를 강화하고 존재감을 부각시키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56년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 스티븐슨이 공화당 아이젠하워에게 패배했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비록 경선에서 패배했지만 이를 통하여 젊은 상원의원 존 F. 케네디를 바라 보는 시각이 근본적으로 바뀌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케네디는 1956년에 『용기있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저서를 출간하기도 하는데, 이 책으로 1957년 뜻밖에도 퓰리쳐상을 수상한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대필의혹을 제기하기도 했지만 퓰리처상 수상은 케네디의 정치 행보에 있어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자산이 된다. 케네디의 승승장구는 상원의원 재선에 성공하면서 계속되었지만 그럼에도 그가 1960년 대선에 민주당 후보로 나서게 될 것이라는 예상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1960년 대선


비록 민주당 소속 상원의원으로서 케네디가 빠르게 자신의 입지를 넓혀가고는 있었지만 사람들은 기껏해야 1960년 대선에 그가 민주당 대통령 후보의 러닝메이트 정도로 나설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케네디의 선택은 자신이 직접 대통령 후보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기에 케네디는 지나치게 젊었다. 일찍이 미국 역사상 40대 초반 나이의 최고 권력자는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정치인으로서 지금까지 걸어온 시간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이 남아있는 창창한 나이의 케네디가 굳이 그런 위험을 무릅쓸 이유는 없어 보였다.


그러나 정작 케네디에게 남은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케네디 자신은 분명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역시나 그의 발목을 잡는 건강이 문제였다. 60년 대선에 그가 나서지 않으면 공화당 후보가 당선되든 민주당 후보가 당선되든 재선까지 고려하여 8년의 시간을 더 기다려야 한다. 1968년이면 케네디의 나이는 쉰 살이다. 대통령으로서 여전히 젊은 나이일 테지만 케네디는 그때까지 자신의 몸 상태가 견뎌줄지에 대한 자신이 없었다. 1968년은 둘째치고 당장 지금 자신의 건강 상태가 외부에 알려져도 정치 인생에 심각한 타격을 입을 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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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디와 닉슨


케네디는 승부수를 던졌고, 승리한다. 민주당 후보 지명전에서 린든 존슨을 물리친 케네디는 대선에서 현직 부통령이었던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을 꺾고 미합중국 35대 대통령에 오른다. 선거인단 확보 결과는 케네디 303명 대 닉슨 219명이었으나 두 후보의 득표차는 유효 투표수 68837000표 가운데 불과 11 8574표 차이였다. 말 그대로 초박빙이었다.


정치인 케네디의 힘


상편에서 밝혔듯이 케네디가 학업에서부터 정계 입문에 이르기까지 입신의 상당부분을 아버지 조지프의 물적, 인적 조력에 힘 입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미국 역사상 최연소 대통령, 최초의 가톨릭 신자 대통령이라는 그의 타이틀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그가 뚫고 온 수많은 난관의 면면은 그저 아버지의 도움만으로 극복했다고 보기에는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정치인 케네디가 가진 가장 큰 강점은 그가 가진 인간적인 매력이었다. 상류사회의 엘리트로 자라온 케네디에게서 풍겨지는 특유의 자신감과 그러면서도 거만해 보이지는 않는 소탈한 매력. 밝고 쾌활한 분위기에서 흘러나오는 미소는 대중의 호감을 사기에 충분했다. 결코 가벼워 보이지 않으면서도 재치 있고 유머러스한 언변까지 겸비한 케네디는 젊고 건강한 이미지-실제 그의 건강 상태는 언제나 최악에 가까웠음에도 불구하고-까지 내세워 대중의 지지를 끌어 모았다.


케네디가 닉슨과 맞붙었던 당시 미국 대선에서는 사상 처음으로 두 후보간의 맞대결 토론이 TV로 생중계 되었는데, 그것이야말로 케네디가 자신의 강점을 가장 확실하게 드러낼 수 있는 자리였다. 케네디는 카메라 앞에서 어떤 표정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상대 후보가 가진 이미지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자신의 이미지를 뚜렷하게 대비시켜 우위를 점하는 방법까지도 꿰고 있었다. 대선 당시 네 차례에 걸쳐 벌어진 TV 토론에서 케네디는 닉슨을 확실하게 꺾어버렸다. 대선 결과가 초박빙이었음을 생각했을 때, 당시 미국 성인 인구의 3분의 2에 달하는 7000만 유권자가 시청한 것으로 추산되는 TV 토론에서의 확연한 차이는 닉슨의 입장에서는 뼈아픈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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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디와 닉슨의 대선 후보 TV토론 장면


케네디는 이러한 자신의 강점을 대통령 재임기간에도 십분 발휘한다. 외교와 내정에 있어 자신의 정치적 결단을 관철시켜야 하는 중요한 상황이 있을 때마다 케네디는 TV를 통한 대국민담화와 대중 연설을 적절히 활용한 것이다. 텔레비전 시대에 가장 적합한 정치인. 케네디는 컬러TV 화면에 등장한 최초의 미국 대통령이기도 했다.


정치인 케네디의 성공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또 있다. 바로 케네디의 정치적 감각과 치밀한 계산이다. 케네디는 어떠한 사안이나 상황에서 정치적 입장을 취할 때, 그러한 자신의 행동이 가져올 정치적 득실을 정확히 따질 줄 아는 정치인이었다. 케네디가 민주당 대선 후보로 지명되고 난 이후, 자신의 러닝메이트를 낙점하는 과정에서도 이러한 면모는 잘 드러난다. 본인의 정치적 성향과 관계를 따졌을 때는 애들레이 스티븐슨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해야 마땅했지만, 대선에서 민주당의 약세 지역인 미국 남부 주에서 더 많은 표를 얻기 위해 전략적으로 린든 존슨을 파트너로 삼았던 것이다. 케네디가 이전부터 린든 존슨과 상당히 껄끄러운 관계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당시 이러한 케네디의 선택은 지명된 당사자인 존슨에게도 상당히 의외였다.


이러한 면들을 모두 종합했을 때, 극비 사항으로 여겨졌던 건강 문제를 제외하면 케네디가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데 있어 어떠한 개인적 이유도 그의 발목을 잡을 만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케네디에게는 건강 문제 말고도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케네디의 아킬레스건 엽색행각


F. 케네디의 엽색에 가까운 여성편력은 가족사적으로나 개인사적으로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그의 여성 편력은 어찌 보면 타고 났다고도 볼 수 있는데, 그의 부친 조지프 케네디 또한 여자 좋아하기로는 상식의 선을 벗어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사업차 평소 출장이 잦았던 조지프는 그때마다 각지의 여자들을 침실로 끌어들이기 일쑤였고, 때로는 가족과 함께 지내는 집에도 다른 여자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딸의 친구를 집으로 불러들여 동침하기도 했으며 이러한 아버지의 호색을 잘 알고 있던 장남 조와 차남 잭은 아버지와 함께 외지로 떠났을 때 자신들이 직접 그곳에서 조지프와 함께 밤을 보낼 여자를 물색했을 정도였다.


문제는 차남 잭,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케네디가 아버지를 능가할 정도의 호색 행각을 평생에 걸쳐 벌였다는 사실이다. 훤칠한 키에 매력적인 미소를 가진 잘생기고 집안 좋은 케네디는 정치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남성적인 매력 또한 상당한 인물이었다. 대학시절부터 알아주는 플레이보이였던 케네디는 여자를 거의 사냥하는 수준으로 섹스에 탐닉했던 것으로 보인다. 절친한 친구와 주고 받은 편지에서는 자신이 꼬셔서 잠자리를 함께한 여성들을 마치 전리품처럼 소개하는 대목이 보이기도 한다.


케네디의 난잡한 여자 관계는 정계 입문 후에도 멈추지 않고 이어졌다. ,하원의원 시절은 물론 재클린과 결혼한 이후에도 바람기는 잦아들 줄 몰랐다. 결혼 후는 물론, 백악관에 입성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대통령 재임 당시 언론에 공개된 백악관에서의 케네디의 사진은 대중에게 각인된 이미지처럼 언제나 가족들과 함께하는 자상한 아버지이자 남편 케네디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백악관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케네디에게 백악관은 콜걸들과 함께하는 알몸 파티와 난교의 장이기도 했던 것이다. 케네디의 엽색 대상은 공과 사를 구분하지 않았다. 백악관에서 근무하는 그의 여비서들 또한 케네디의 섹스 파트너였고 훗날 곤욕을 치르는 빌 클린턴 입장에서는 조금 억울할 수도 있겠다- 이렇게 백악관 내부에서, 혹은 외부에서 벌어지는 거의 모든 일들을 아내인 재클린과 참모들이 모를 리 없었다.


도를 지나쳐도 한참은 지나친 케네디의 난잡한 사생활이 그나마 대중에 알려지지 않은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일단 당시 언론인들에게 정치인, 특히나 최고 권력자의 사생활은 들추지 않는다는 일종의 금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케네디가 언론과 꽤 친밀한 관계를 잘 유지한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케네디 취임 이전부터 FBI 국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던 에드가 후버가 케네디의 사생활 관련 정보를 틀어쥐고 무언의 압력을 통하여 자신의 자리를 보전하는 한편 이것이 공론화 되지 않도록 관리해준 덕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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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BI 종신 국장 에드가 후버. 

FBI의 정보력을 무기 삼아 48년간 8명의 대통령 밑에서 일한다.


그럼에도 케네디의 위험천만한 일탈 행위는 모두의 골칫거리였다. 단 한 명, 케네디 자신만 크게 신경을 쓰지 않은 듯하다. 케네디의 사생활이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데 있어 직접적인 악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지만 일부 전문가들은 케네디가 댈러스에서 암살 당하지 않고 재선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문란한 사생활로 인하여 크게 한 번 곤욕을 치르거나 정치적인 위신이 추락했을 것이라 예상하기도 한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가 섹스를 탐닉하는 것에 그토록 집착했는지 정확한 이유를 찾기는 어렵다. 다만 그가 20대 때, 건강 문제로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면서도 거의 조증 환자에 가깝게 파티와 섹스에 심취해 있기도 했었다는 대학 시절 친구들의 증언으로 미루어 보아 늘상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던 그의 인생에서 성적 쾌락이 일종의 해방구 역할을 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섹스만큼 자신이 살아있다는 존재감을 만끽할 수 있게 하는 수단도 드물지 않은가. (케네디가 중증 척추질환으로 거동에 어려움을 겪을 때가 있을 정도로 고생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필자는 케네디에게 일종의 경외심 마저 들기도 한다)


반공주의자와 평화주의자의 두 얼굴


케네디가 대통령 재임기간 동안 일련의 사건을 통하여 보여준 면모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가 반공주의자였다는 사실이 의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케네디는 1952년 상원 선거에서도 반공주의를 철저하게 이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당시 미국 사회에 전반에 퍼져있는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을 선거 전략에 이용하면서 케네디 스스로를 민주당, 공화당 구분 없이 오로지 국익을 위한 것이 어떤 것인지를 고민하는 정치인의 이미지로 포장했던 것이다. 케네디의 이러한 선거 전략에는 아군과 적군이 따로 없어서 같은 민주당 소속의 해리 트루먼 내각에 비판의 날을 세우는 것에도 거리낌이 없었다. 세계 도처에서 공산주의가 물결처럼 번지고 있는 마당에 미국 행정부가 이에 대한 대처를 안일하게 했기 때문에 중국이 공산화 된 것은 물론 서방세계 또한 공산주의에 함락될 위기에 빠져있다고 맹비난한 것이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케네디의 모습이 마치 냉전의 전사와 같았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물론 정치적으로 반공주의를 표방한 것 자체를 두고 잘잘못을 따질 수는 없다. 그러나 당시 이러한 케네디의 모습은, 냉전 상황을 이용하여 필요 이상의 공포를 조장하고,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얻으려 했다는 비판에서 또한 자유로울 수 없게 한다.


이와 같은 사실을 언급함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케네디의 실책이 하나 더 있다. 공화당 상원의원 조지프 매카시와 관련된 이야기인데, 당시 매카시는 루스벨트 대통령 시절부터 트루먼 대통령 재임기에 이르기까지 정부 기관 내에 체제 전복을 꾀하는 공산주의자들이 넓게 분포되어 있다고 문제를 제기하면서 사회를 충격과 혼란스럽게 빠뜨렸다. 그러나 매카시의 폭로는 실상 구체적 증거를 제대로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의 주장에 불과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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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카시즘'의 주인공. 조지프 매카시


무고한 많은 사람들에게 공산주의자 낙인을 찍어 이들을 곤경에 빠뜨렸던 매카시의 무차별적이고 맹목적인 폭로 행각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매카시즘이라 불리며 악의적인 반공산주의 선풍의 대명사가 되고 있다. 여담이지만 냉전 시대의 일그러진 유산인 매카시즘은 지금도 동아시아의 어떤 분단 국가에서는 여전히 위력을 떨치고 있다.


아무튼, 매카시의 터무니없는 주장은 오래지 않아 실체가 없는 허위임이 밝혀졌고, 매카시의 정치적 위신은 땅바닥에 떨어진다. 민주당 상원의원들은 의회 차원에서 조지프 매카시에게 공식 비난 처분을 내리기 위한 표결을 상정한다. 공화당조차 이미 신망을 잃은 매카시를 선뜻 감싸줄 수만은 없었던 터라 표결은 찬성 67대 반대 22로 비교적 쉽게 통과된다. 그런데. 이 표결에 케네디는 표를 행사하지 않았다. 케네디는 당시 표결에 기권한 유일한 민주당 상원의원이었다.


케네디는 이 때문에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입는다. 케네디는 언제, 어디에서든 당시 표결에서 기권한 이유를 해명해보라는 요구를 진저리가 날만큼 들어야 했고, 이 사건은 케네디가 대통령이 될 때까지 꼬리표처럼 그를 쫓아다녔다.


사실 케네디의 반공주의가 매카시즘에 동조할 정도였던 것은 아니었다. 굳이 이유를 추론해보자면, 아마도 매카시 상원의원이 자신의 선거구 유권자들에게 꽤나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었다는 점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앞서 말했듯이 케네디는 자신이 행하는 모든 행위와 발언에 정치적 이해득실을 따지면서 행동하는 정치인이었다.


케네디는 고민했을 것이다. 매카시의 행동은 비난 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거리낌없이 표결에 찬성표를 던지기에는 적지 않은 위험부담이 따를 지도 모른다. 표결을 놓고 돌아가는 양상을 보아하니 자신이 굳이 찬성표를 던지지 않아도 안건은 무난하게 통과될 것으로 예상된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면 이러한 결론이 도출될 수 있다. ‘기권표를 행사함으로써 개인적 손실을 최소화 한다. 어차피 안건은 통과될 테니까.’


이러한 추론이 사실이었는지 아니었는지를 떠나 어떤 이유에서든 케네디의 기권 선택이 뼈아픈 실책이었음이 드러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만약 앞의 추론이 맞았다고 한들 케네디에게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추론이 사실이라면 케네디는 지나치게 계산적이었다. 이로써 케네디는 다시 한 번 원치 않게 냉전주의에 편승하는 정치인이라는 오해를 산 것이다.


반공주의 군비경쟁이 야기한 쿠바 미사일 위기를 평화 의지로 극복하다.


케네디가 대통령직을 수행했던 3년 동안 닥쳤던 수많은 위기 가운데 가장 절체절명의 순간을 꼽으라 한다면 사람들은 누구나 1962년 미국과 소련이 전쟁 직전까지 갔던 쿠바 미사일 위기를 첫째로 떠올릴 것이다.


당시 소련은 미국 몰래 쿠바에 중거리 탄도 미사일 발사대 및 기지를 건설하는 한편 필요한 인력을 쿠바에 공수하고 있었다. 미국의 턱 밑에 있는 쿠바에서 소련제 핵탄두가 탑재된 미사일로 미국 본토를 겨냥할 수 있다면 소련은 분단된 베를린 등 세게 곳곳에서 미국보다 유리한 위치를 점하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미사일 발사대 건설이 거의 끝나갈 무렵 징후를 포착한 미국은 쿠바 본토에 U-2 정찰기를 띄워 사태를 파악하게 된다. 케네디 행정부는 일대 혼란에 빠진다. 케네디와 그의 핵심 참모들은 신중한 대응을 고려하고 있었으나 군부와 CIA는 그렇지 않았다. 핵전쟁을 불사한 강경대응을 케네디에게 적극적으로 요구한 것이다. 훗날 역사가들은 미,소 냉전의 시기를 통틀어 이 때 가장 인류가 핵전쟁의 참화에 근접했던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미국 정부는 일단 쿠바 인근 해안을 봉쇄하고 쿠바에 접근하는 모든 소련 선박을 수색하겠다고 소련에 통보한다. 한편으로는 쿠바에 건설 중인 미사일 발사대와 기지를 선제 타격하는 방안을 면밀히 검토한다. 건설 완료까지 시일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결단을 내리기까지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았다. 미사일 철수에 대한 조건으로 소련이 내건 조건은 간명했다. 미국이 항구적으로 쿠바를 침공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당시만해도 쿠바로 인한 중남미 국가의 공산화에 대해 크게 우려하고 있던 미국의 입장에서는 코앞에 버티고 있는 쿠바라는 눈엣가시를 마냥 내버려둘 수 만은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에 소련의 조건은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미국 내 강경파들에게 있어서 소련이 내세운 조건에 합의하는 것은 굴욕이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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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에서 발사된 미사일이 닿을 수 있는 미국 영토 내 범위를 나타낸 지도


그러던 와중에 미국의 U-2 정찰기가 쿠바 상공에서 격추되어 조종사가 사망하자 사태는 일촉즉발로 치닫는다. 이미 준전시상태인 데프콘-2가 발령된 상태에서 케네디의 승인만 떨어지면 곧장 전면전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군부 강경파는 이미 미국 전투기를 소련 영공 근접지점까지 발진 시켰다가 되돌아오게 하는 등 끊임없이 소련을 도발하고 있기도 했다. 소련은 요구 조건에 한 가지를 더 추가시키기까지 한다. 쿠바의 미사일을 철수할 테니 미국도 터키에 배치한 미사일을 철수시키라는 것이었다.


고심 끝에 케네디는 소련의 요구 조건에 응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어떤 상황이 닥쳐도 핵전쟁이라는 미친짓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그의 단호한 결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터키 미사일 철수 조건은 미국 내 여론을 감안하여 적당한 시기에 재논의 하는 것으로 소련을 진정시켰다.


케네디가 쿠바 미사일 위기를 평화적으로 해결한 것은 대통령으로서 케네디가 이루어낸 가장 위대한 업적으로 지금까지 칭송 받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쿠바 미사일 위기의 원인 자체가 케네디의 반공 정책에 입각한 무리한 군비증강과 집권 초 쿠바 망명인들 1,000여 명으로 감행한 쿠바의 피그스만 침공으로 인하여 위기감을 조성한 탓이라는 시각도 있다. 한 마디로 스스로 자초한 위기였다는 것이다.


필자 또한 이러한 시각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이 케네디의 업적을 완전히 공(空)으로 만들 수는 없다. 케네디가 아니었다면 쿠바 미사일 위기가 없었을 수도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 유효하다면, ‘위기 당시 대통령이 케네디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하는 가정 또한 유효한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의 냉전 질서 속에서 미국 대통령이 처한 위치를 생각해보자. 같은 편 내에서도 저마다의 명분과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각자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대통령을 들볶고, 때로는 주장 관철을 위해 음모를 꾸미기도 했던 시절이었다. 미국 대통령이라는, 넓게 보면 그 또한 장구한 인류 역사의 한낱 인간일 뿐인 한 남자에게 지구의 존망이 걸린 선택이 달려있었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케네디가 평화적 해결 방안을 선택했다는 것 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업적을 인정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핵전쟁의 위기를 빠져나 온 케네디는 본격적으로 냉전 해소를 위한 준비에 착수한다. 그리고 이듬해, 소련의 서기장 흐루시초프와 물밑 협상을 진행한 끝에 지하 핵실험을 제외한 부분적 핵실험 금지 조약의 합의를 이끌어낸다. 비록 모든 차원의 핵실험 금지를 합의한 것도 아니고, 이후 프랑스, 이스라엘, 중국, 파키스탄 등이 핵 보유국이 되는 것을 막지는 못했으나 인류 평화를 위협하는 냉전의 종식을 향한 의미 있는 행동이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었다.


케네디는 같은 해 워싱턴 소재 아메리카대학의 졸업식에서 역사에 길이 남을 명연설을 낭독한다. 사실상 냉전의 종식을 제안하는 내용이었다. “전 세계에 미국의 무기로 전쟁하도록 종용하는 팍스 아메리카의 지배에 의한 평화의 목적을 거부한다는 내용의 이 연설은 그간의 냉전 질서에서 보였던 미국의 모습과, 미국 대통령으로서 자신에 대한 통렬한 반성이 없이는 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한편 케네디는 군사 고문단 격으로 베트남에 파견한 16,000명의 미군 중 1,000명을 연중 철수시킬 것과 1965년까지 베트남에 파견한 모든 미군을 철수 시키는 방안을 공식화한다. 동남아시아의 공산화를 저지하기 위해 본인이 확대 진입을 결정한 베트남의 장래가 불투명해지자 자국민의 보호를 우선시하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또한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와의 근본적인 관계 진전을 모색하며 특사를 비밀리에 쿠바에 보내면서 카스트로 정권과의 화해를 도모하기 시작한다. 이 때 케네디는 카스트로의 쿠바 혁명을 지지하는 발언을 프랑스 저널리스트를 통해 카스트로에게 전달하는데, 가히 파격적이라 할 수 있는 대담한 제스처였다.


이 모든 중대한 결정과 행동이 모두 1963년에 일어났다. 그리고 1963년은 케네디가 암살당한 해이기도 하다. 


쓰러진 케네디


재임기간 동안 외교와 안보, 내정에서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나름의 치적을 쌓아갔던 케네디는 다음해에 있을 대선을 위한 적극적인 보를 펼쳐나간다. 당시 여론조사 결과 등은 케네디가 무리 없이 재선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을 나타냈고, 케네디는 아직 의회에서 통과되지 못한 자신의 경제, 민권 분야 개혁 법안의 입법과 외교, 안보 분야의 평화 정착을 위한 추진 동력을 얻기 위해 대중의 지지를 끌어 모으려고 힘쓰던 시점이었다.


1963 11 22, 댈러스 시내를 통과할 예정이었던 케네디는 여느 때처럼 방탄 지붕이 덧씌워진 차가 아닌 오픈카를 타고 시내를 이동한다. 젊고 우아한 미국 대통령 내외, 대중이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을 만큼 친근한 이미지를 구축하고자 했던 이유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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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울려 퍼진 총성에서 나온 탄환이 케네디의 목을 관통했다. 척추질환 때문에 십 수년 이상을 고생한 케네디의 등을 감싸고 있던 척추 지지대가 아니었다면, 케네디는 두 번째 탄환 이후 앞으로 고꾸라져 세 번째 탄환이 자신의 머리를 강타하는 것만큼은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허나, 이 모든 것은 가정일 뿐. 사태은 이미 벌어졌고, 이번만큼은 케네디도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컬러TV 시대 최초의 대통령


컬러TV 시대 최초의 미국 대통령 케네디는 충격적이다 못해 잔혹한 암살 장면이 선명한 컬러 화면을 통해 그대로 찍히는 비운을 맞는다. 세 번째 탄환이 머리를 관통하면서 차량 뒤편으로 두개골 파편과 뇌조직이 튀어져 나가고, 서른 세 살의 젊은 영부인 재클린 케네디는 화사하고 세련된 핑크색 정장을 입은 채로 차량 뒤로 기어 올라가 남편의 뼛조각을 줍기 위해 매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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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디의 재임 기간 중에 TV가 흑백에서 컬러로 전환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여러모로 상징하는 정치, 사회적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겠다. 케네디가 미국 대통령 선거에 당선될 때까지만 해도, 국제정세와 미국의 상황은 흑백TV와 다를 것이 없었다. 세계는 공산주의와 민주주의가 양분되어 첨예하게 갈등하고 있었고, 미국 내에서도 반공주의를 부르짖지 않는 사람은 모두 공산주의자 취급을 받았다. 흑백논리로 점철된 이러한 질서 안에서는 양 쪽의 색이 섞일 수도, 3의 색이 인정 받을 수도 없었다.


미국 내 흑인 민권 문제 또한 마찬가지였다. 지면 관계상 이 글에서 자세하게 다루지는 못했지만 당시 미국 사회는 백인과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는 흑인들과 이를 거부하는 남부 지역의 인종차별주의자 간의 대립과 갈등이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여전히 미국의 남부 주를 중심으로 공공장소의 이용과 취업, 교육 등에 있어서 흑인에 대한 차별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지고 있던 시절이었다


케네디의 의중은 궁극적으로 흑인의 민권이 백인과 동등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에 저항하는 일부 백인들의 저항이 너무나 거셌다. 이 때문에 케네디가 절충적인 안을 제시하려들면, 이번에는 흑인 민권 진영에서 케네디를 배신자 취급했다. 물론 도덕적, 윤리적으로는 인종차별주의 진영보다는 흑인 민권 진영의 명분이 훨씬 합당한 것이었다. 21세기인 지금, 피부색의 차이가 인권의 차이로 귀결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는 사람이 있다면 필시 좀 모자란 사람 취급을 받았을 게다. 허나, 세상의 모든 일이 옳고 그름의 잣대를 기준 삼아 해결되지는 않는다. 


세상은 그렇게 손쉽게 이원화 된 상태로 그려지지 않는다. 흑백 TV 시절에도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총천연색이었을 것이다. 다만 그것을 렌즈에 담아 화면으로 송출하는 방식이 흑백이었을 뿐이다. 마치 케네디 당시의 실제 세계가 공산주의자와 민주주의자의 그것으로 이분되지 않음에도 이념과 사상에 매몰된 자들이 저마다의 관점을 통해 흑백논리를 내뱉어냈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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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흑백TV가 컬러TV로 대체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수순이었다. 선명하지도 않을 뿐더러 실제 세계의 상당부분을 왜곡하는 당시의 냉전 질서와 사고 방식을 오랜시간 답습했던 사람들이 다른 곳에 눈을 돌리게 되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따라서 미국의 35대 대통령이 케네디가 아니었어도 세상은 변했을 것이다. 미국의 흑인은 인간으로서 자신의 권리를 당당하게 쟁취했을 것이고, 인류가 핵전쟁의 발발로 스스로 종지부를 찍지 않는 이상 냉전은 종식을 향해 달려나갔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격변의 시기에 1000일 남짓동안 미국을 통치한 케네디의 짧은 재임기간은 나름의 의미가 있다. 변화의 시기에 불가피하게 겪을 수 밖에 없는 반발과 그로인한 충격을 사회적 합의라는 대명제 아래 최소화한 공로가 그에게 있는 것이다.


케네디가 암살 당하지 않았다면 세상이 어떻게 변했을까 하는 가정은 무의미하다. '케네디가 있었다면 미국과 쿠바가 극적으로 화해하지 않았을까?', '케네디가 그날 죽지 않았다면 미국이 베트남이라는 개미지옥에 빠져 수많은 목숨을 희생시키지 않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하는 류의 모든 가정이, 암살이라는 비극적 결말로 끝난 케네디의 인생에 덧입혀진 신화에 근거한 것임을 직시해야 한다. 케네디가 암살당하지 않았다 한들, 만약 다음해 대선 직전 케네디의 섹스 스캔들이라도 터졌다면 그의 재선조차 장담할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케네디가 생전에 한 말이 있다.


"진실의 가장 큰 적은 거짓이 아니라 신화입니다."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하기는 했지만, 케네디 또한 자신이 신화가 되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국의 대통령으로서 자신의 행적을 가급적이면 소상하게 남겨 자신에 대한 평가를 후대에 맡기기 위해 본인 스스로 백악관 집무실에 녹음 장치를 설치했던 그였다. 때문에 케네디를 신화로 남기는 것은, 그에 대한 정당한 평가마저 가리는 '진실의 적'이 될 수도 있다.


케네디의 업적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면서 실상 그의 재임기간 중 입법된 굵직한 법안이 없었다는 점과, 외교와 내정에 있어 크고 작은 실책을 저질렀다는 사실이 더해지면서 미국 역대 대통령 중에서도 중하위권에 해당하는 순위를 매기는 역사학자들이 적지 않다. 짦은 그의 재임기간까지 고려해보면 당연한 평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한 평가 또한 존중 받아야 할 것이다. 케네디는 신화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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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가 있었다. 언제 자신에게 닥칠지 모르는 죽음의 그림자를 늘 곁에 두고 살았던 그는, 격변의 시기에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고, 순간의 판단에 의해 지구의 운명을 끝장낼 수도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권한을 사용할 것을 종용하는 세력이 곁에서 끊임없이 그를 부추기고 있었다.


억제할 수 없는 성욕 때문에 일순간 자신의 정치 생명이 끝장날 수도 있음에도 무모한 일탈을 감행했던 '찌질한' 이 남자는, 자신의 건강 문제가 그의 정치 행보를 가로 막을까봐 전전긍긍했던 이 남자는, 그럼에도 가장 중요한 판단이 요구되었던 순간에 그릇되지 않은 선택을 함으로써 인류를 파멸의 위기에서 구해냈다. 


신화의 갑옷을 벗은 케네디에 대한 평가와 판단은 역시나 독자들의 몫이다.







편집부 홀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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