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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 주


일본 언론은 
한국 대통령의 탄핵 인용 전후를
연일 톱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개헌 논란도 소재로 등장하기에 
한일양국이 함께
헌법에 관심을 가지는 보기드문 시기입니다.

(일본은 최근, 아베 총리가 개헌 추진에 속도를 내겠다고 밝혔고
야권과 양심적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평화헌법 9조 수호 운동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에 평소 한일언론의 보도와 
양국의 헌법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일본인 필자와 함께
 
'이번 기회에 일본 헌법을 해부해보자. 
한국법과 일본법은 서로 긴밀한 관계가 있고 
그 역사와 내용을 알아보는 것도 유의미한 일이 될 거야'

라는 취지로 
일본 헌법 시리즈를 게재합니다.

딴지일보는 본인의 요청이 있을 경우,
타 언론사의 기자일지라도 익명 기고가 가능하며  
신분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른 벌금이나 재판은 
본지가 감수해왔고 앞으로도 감수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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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통령의 탄핵 인용 후, 일부에서 개헌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헌법을 바꾸자는 소리가 나오면서 헌법 자체에 대한 관심도 고조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개헌의 방향을 모색하든 순수 지적 관심으로 헌법을 살펴보든 외국 헌법의 규정이나 그 운용을 참조하는 것은 유의미한 일입니다. 고등학생들은 법과 사회 수업(한국의 어르신들은 모르겠지만 요즘은 이런 과목도 있답니다)을 들으며 구미(유럽과 미국)의 시민혁명 역사와 입헌주의, 그리고 헌법의 인권규정을 배우고, 법대에서 헌법 수업을 들으면 고등학교 때보다 좀 더 깊이 외국의 입법례와 그 운용 사례를 배우게 됩니다.


헌데 법과 사회나 헌법 수업 시간에 배우는 구미(유럽과 미국)국가들의 헌법은 핵심내용을 추상화시키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한마디로, 마치 선진국들의 헌법은 다 똑같이 전제군주제의 억압을 타파해서 민주적이며 기본적 인권이나 자유를 얻게 된 것처럼 비치는 경우가 많아 보입니다. 물론 구미(유럽과 미국)에서 이루어진 이런 저런 시민혁명의 결과로 제정된 헌법에 공통점이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고, 공통적으로 포함된 헌법의 기본적/중심적 요소가 구미 여러 나라가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요인 중 하나일 겁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나라마다 헌법 제정을 둘러싼 역사적 환경에는 나름 특색이 있고 그만큼 각국에서 만들어진 헌법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웬만한 근대국가의 헌법에서 꼭 갖출 만한 공통적인 가치나 이념이라는 시각으로 보면 공통점이 더 눈에 띄지만, 동시에 헌법은 그때그때 세상을 비춰주는 역사적 존재이기도 하다고 말할 수 있겠죠.


필자는 앞으로 일본헌법의 규정내용과 그 해석이 문제된 여러 사건을 살펴보면서 일본헌법의 전체를 정리・소개해 드릴 계획입니다. 일본헌법 역시 세계 각국의 헌법과 공통된 부분을 갖고 있고 동시에 그때그때 일본이 놓여 있는 역사적・사회적 배경이 있는 것도 -아무리 헌법 학자들이 시대적・사회적 배경을 옆에 두고 논의하더라도- 사실이죠.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 필자가 소개드리며 독자 여러분과 같이 읽어보려고 하는 일본헌법과 그 해석은 헌법학에서 이야기하는 것보다 "일본의 얼굴"이 좀 더 잘 보이는 것이 될 겁니다. 필자의 헌법 이야기가 외국 헌법에 대한 관심에 부응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물론, 다른 한편으로 일본에 대한 관심을 갖는 독자 여러분이 헌법 이야기를 통해 조금이라도 일본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한국의 개헌 논의에 대해서도 이해가 깊어지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럼 머리말은 이 정도로 하고 슬슬 본론에 들어가도록 하죠. 첫 번째 주제는 “일본헌법을 짚어보기 전에 알고 싶은 두 가지” 중 하나, 일본헌법의 제정과정입니다.



(1) 포츠담(Potsdam)선언 수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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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4일, 일본은 소련의 참전을 계기로 한 번 무시했던 포츠담선언을 받아들였습니다. 포츠담선언에 일본의 무조건항복이라는 항목이 포함돼 있었기에 포츠담선언의 수락은 바로 일본의 패전을 뜻했고 그만큼 포츠담선언은 일본 현대사의 아주 중요한 분수령이 됐죠. 그리고 당연히 헌법 제정과 관련해서도 큰 의미가 있어요. 특히 포츠담선언 중 다음과 같은 2개 조항이 아주 중요합니다.


“…일본정부는 일본국민들의 민주주의적 경향의 부활・강화에 대한 일체의 장애(걸림돌)를 제거하여야 한다. 언론, 종교 및 사상의 자유와 기본적 인권의 존중이 확립되어야 한다.”(포츠담선언 제10조)


“위 제 목적이 달성되고 또한 일본국민이 자유롭게 표명한 의사를 따라 평화적 경향을 가지고 또 책임이 있는 정부가 수립되고 나면 연합국의 점령군은 즉시 일본국에서 철수되어야 한다.”(포츠담선언 제12조)


이와 같은 내용이 담긴 포츠담선언을 받아들인 일본이 직면한 가장 큰 고민거리는 일본의 “국체”가 유지될지 여부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국체”가 무엇 일까요? 일본어를 배우다 보면 일본어도 축약어를 잘 만드는 경향이 있다고 금방 알게 될 텐데 보통 “국체”라고 하면 “국민체육대회”, 한국의 전국체육대회에 유사한 체육대회의 약칭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패전 후 일본이 필사적으로 지키려고 한 “국체”는 다른 의미였죠.


“국”은 나라 “國”, “체”는 몸 “體”인데 이것은 체육대회를 일컫는 국체와 똑같아요. 그러나 몸 “體”자는 또 다른 의미, 즉 “바탕”이라는 뜻도 갖고 있어요. 그렇게 생각하면 “국체”란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유지해 온 나라의 바탕을 의미하게 되죠. 다시 말해서 일본이라는 나라를 뒷받침 해주는 기본, 혹은 기초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국체”는 “국가원수가 주권을 가지며 통치권을 총람(總覽)하는 국가체제” 정도의 뜻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감이 좋은 분은 이미 알았겠지만 그 “국가원수”가 바로 “천황(天皇)”입니다. 지금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것인데 당시 일본에 있어서 천황이 주권을 가지고 천황이 모든 국가권력을 행사하는 국가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지상명령이었던 셈이죠. 더불어 놀라운 것은 당시 일본정부의 포츠담선언에 대한 해석입니다. 당시 일본정부는 포츠담선언이 반드시 국민주권 원리를 채용하라고 하는 것은 아니며 천황을 주권자이자 통치권의 총람자로 규정한 메이지헌법을 개정하지 않아도 어떻게 잘 운용한다면 선언의 취지에 맞는 새 정부를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고 하네요.


결과는 명백하죠. 위에 봤던 포츠담선언의 내용은 일본에서 민주주의가 실현되기를 요구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GHQ(연합국군최고사령관 총사령부) 역시 그렇게 해석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메이지헌법을 개정하지 않은 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겠죠.



(2) 마츠모토(松本)위원회에 의한 조사


1945년10월9일, 황실 출신이자 육군대신을 역임한 히가시쿠니노미야(東久邇宮稔彦)내각에 갈음해서 시데하라 키쥬우로오(幣原喜重郎)를 수상으로 한 내각이 탄생했습니다. 시데하라는 외교관 출신의 정치인이었고 특히 영미에 큰 연줄이 있었던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어요. 단 시데하라 본인은 이미 정치계를 은퇴했었고 수상으로 지명된 당시 수상을 하기 싫어서 이사 갈 준비를 했었답니다. 결국 쇼와(昭和)천황이 직접 설득에 나서고 나서야 수상 취임을 받아들였답니다. 마지못해 수상이 된 시데하라는 같은 해 10월11일 GHQ를 방문해서 맥아더 최고사령관한테 이른바 5대개혁방침*과 함께 메이지헌법을 자유주의 헌법으로 개정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의 시사를 받았고 같은 달 25일에 마츠모토 죠오지(松本烝治) 국무대신을 회장으로 한 헌법문제조사위원회(마츠모토위원회)를 발족했습니다.


 *맥아더 최고사령관이 시데하라 수상한테 명한 5대개혁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비밀경찰 폐지

  2. 노동조합 결성 장려

  3. 여성해방

  4. 교육자유화

  5. 경제민주화

위와 같은 내용에 더불어 GHQ에 의한 개혁은 전쟁협력자들의 공직추방, 재벌해체, 농지개혁 등도 포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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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츠모토위원회는 헌법 개정작업에 착수하면서 4개의 원칙을 세웠습니다.


① 천황이 통치권을 총람한다는 대원칙은 바꾸지 않는다.

② 의회의 의결을 필요로 하는 사항을 확대하고 천황의 “대권(大權)사항”을 삭감한다.

③ 국무대신의 책임을 국정 전체에 이르게 하며 국무대신은 의회에 대해 책임을 질 것으로 한다.

④ 국민의 권리・자유의 보장을 강화함과 함께 그 침해에 대한 완전한 구제방법을 마련한다.


여기서 사항 ②에 있는 “대권”이라 함은 메이지헌법 하에서 천황에 속하던 권능을 가리키는 말인데 널리는 행정권・입법권・사법권 등 국가의 통치권 전체를, 좁게는 제국의회(당시 국회)의 협찬 없이 천황이 단독으로 행사할 수 있었던 각종 권한을 뜻합니다(더 구체적으로는 다음 회 "메이지헌법의 특색이 무엇인가요?"에서 설명할게요).


또 사항 ③도 곧바로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일 겁니다. 메이지헌법 하에서는 국무대신은 “보필(輔弼)”이라는 형식으로 천황에게 조언을 하고 천황에게 책임을 지는 것으로 규정돼 있었어요. 무슨 뜻이냐면 새로운 헌법체제에서는 대신들은 천황이 아니라 국회(나아가서는 일반국민)에 대해 책임을 지게끔 한다는 취지인 거예요. 이렇게 보면 일단 위 ②와 ③의 원칙은 의회로 부터의 천황이나 정부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려는 것이고 군주(君主)의 권력이 센 독일형 입헌군주제에서 의회 권력이 강한 영국형 의회군주제로 이행하는 자세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이죠.


또한 ④의 원칙 역시 인권보장을 더 충실히 시키려고 꾀하는 것이죠. 그러나 ①의 원칙은 통치권의 총람자로서의 천황의 지위를 보전하려고 하는 것이며, “국체”를 지키려고 하는 기본적 입장이 나타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와 같은 4개의 원칙에 기초해 이른바 “마츠모토안(案)”이 2월8일에 총사령부에 제출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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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맥아더 3원칙


1946년2월1일, 마츠모토안이 공식 발표되기도 전에 마이니치신문이 그 내용을 특종 기사로 폭로해 버렸는데 그 내용을 알게 된 총사령부는 너무나 보수적인 내용에 깜짝 놀랐습니다. 이 사건이 계기가 돼서 총사령부 측이 자체적으로 헌법초안을 작성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맥아더는 초안에 다음 3개 원칙을 담도록 부하에게 명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맥아더 3원칙 혹은 맥아더・노트라고 불리는 것이며, 이후 성립된 일본국헌법의 기본적 방향을 정한 지침이죠.


천황은 국가원수의 지위에 있다. 황위(皇位, 천황의 지위)는 세습이다. 천황의 직무 및 권능은 헌법에 의거하여 행사되며, 헌법이 규정한 바에 의하여 국민의 기본적 의사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


국가의 주권적 권리로서의 전쟁을 포기한다. 일본은 분쟁해결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전쟁과 자신의 안전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전쟁 역시 포기한다. 일본은 그 방위와 보호를 이제 세계를 움직이고 있는 숭고한 이상에 맡긴다. 어떠한 일본의 육・해군도 결코 허용이 되지 아니하며, 어떠한 교전권도 일본군에는 결코 주어지면 아니된다.


일본의 봉건제도는 폐지된다. 황족을 제외한 화족(華族 - 작위를 가진 사람과 그 가족, 메이지 시대에 생김)의 권리는 현재 생존하는 자 1세대 이상 잇지 아니한다. 화족의 수여는 이후 어떠한 국민적 또는 공민적 정치권력을 포함하지 아니한다. 예산의 틀은 영국의 제도를 따라한다.



(4) 맥아더 초안의 제시


완성된 맥아더 초안(총사령부안)은 2월13일에 일본정부에 전달됐습니다. 회담 자리에서 일본 측 대표인 요시다 시게루 외무대신, 마츠모토 죠오지 국무대신은 총사령부 측으로부터 “마츠모토위원회의 제안은 도저히 승인 못할 것이며, 대신 최고사령관은 기본적인 제 원칙을 헌법초안으로서 책정했으니 이 초안을 최대한 감안해서 헌법 개정에 애써달라”는 설명을 받았죠. 일본 측은 갑작스레 완전히 새로운 초안을 전달받아 이에 따라 헌법을 개정하도록 압박을 받았죠. 얼마나 놀랐는지 상상치 못할 정도이죠. 일본 정부는 맥아더초안의 내용을 검토한 결과, 역시 마츠모토안이 일본의 실정에 더 맞는다고 해서 총사령부에 재고를 요청했으나 일축당하자 총사령부안을 기초로 일본안을 새로 작성하기로 결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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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마츠모토안이 폭로된 것이 2월 1일, 맥아더초안이 일본 측에 전달된 것이 같은 달 13일, 즉 일본 측 초안을 미국이 알게 된 지 2주일도 채 안돼서 미국은 새로운 초안을 만들었단 셈이죠. 총사령부는 왜 그렇게 초안 작성을 서둘렀던 것일까요? 일반적으로 알려지고 있는 바에 의하면 2월26일에 활동을 시작할 예정이던 극동위원회(연합국 측 11개국의 대표자로 구성되는, 일본 점령통치를 위한 최고기관)에 일부 천황제 폐지를 주장하는 세력이 있었기에 그에 비판적인 총사령부의 의향을 담은 개정안을 기성사실화시켜 놓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랍니다.


미국이 천황제를 존치하는 방침을 취한 것은 좀 의외이기도 하죠. 그 배경에는 이른바 미국내 지일파 학자나 맥아더 사령관이 “점령군이 일본을 직접 통치하는 것보다 천황제를 통해서 일본국민을 통합시켜 놓고 천황을 통해 간접적으로 통치하는 것이 더 미국의 국익에 맞다”고 미국정부에 조언한 것이 결정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만 초안의 기초 작업은 아무 준비 없이 1주일이라는 짧은 기간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어요. 총사령부는 1945년에는 이미 헌법 개정에 관한 연구와 준비가 어느 정도 진행 중에 있었고 일본정부와 미국정부 사이에서 의견을 주고받고 있었죠. 또한 1946년 1월 11일에 총사령부에 송부된 “일본통치제도의 개혁”이라는 SWNCC-228(국무・육군・해군 3성 조정위원회문서 제228호)은 총사령부안 작성의 지침이 됐고, 적어도 이 단계에서 미국 측은 새로운 일본헌법에 대해 구상하고 있었다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2월 13일의 회의에서는 이런 초안을 지침으로 할 것, 일본정부가 아무 것도 안 할 경우에는 최고사령관이 직접 일본국민에 호소할 것 등의 내용이 전달된 데다가 추후에도 헌법의 기본원리 수정이 인정되지 않았어요. 때문에 일본국헌법은 “강요당한” 비주체적 헌법이며 꼭 전면 개정해야 된다는 의견이 강력히 주장되기도 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강요당한 요소가 있더라도 새로운 헌법의 이념은 존중할 만한 것이고 강요당했다는 이유만으로 개정을 운운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입장이 있는가 하면, 나라의 기본적 틀을 규정하는 헌법이 강요당했다는 것 자체가 주권국가로서의 결정적 하자이자, 헌법에 담긴 이념이나 가치 자체와 다른 차원에서 일본국민들의 손으로 직접 새로운 헌법을 만들 필요가 있다 등등, 근본적이면서 의견이 분분한 이슈가 됐고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문제로 남아 있죠.




(5) 헌법개정초안요강과 헌법개정초안


총사령부안에 기초한 일본헌법안의 기초 작업은 총사령부안을 일본어로 번역하는 형식으로 일단 3월 2일 안으로 정리가 됐습니다. 그 후 총사령부 측과의 논의를 통해서 3월 6일에 “헌법개정초안요강(憲法改正草案要綱)”이 결정되고 국민에게 공개했죠. 그 후 4월 17일에는 이 개정초안요강을 구어체로 갈아쓴 “헌법개정초안(憲法改正草案)”(내각초안)이 작성돼서 정식적인 대일본제국헌법개정안이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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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제국의회의 심의


내각초안의 공표에 앞서서 4월 10일 사상 처음으로 여성의 선거권을 인정한 보통선거 원칙에 의거한 총선거가 치러져 5월 22일에 요시다(吉田)내각(제1차)이 성립됐습니다. 내각초안은 메이지헌법 제73조에 규정한 절차에 따라 6월 20일 새로 구성된 제90회 제국의회의 중의원에 제국헌법개정안으로서 제출됐죠. 중의원은 약간의 수정을 가해서 8월 24일에 압도적 다수로 가결, 귀족원에 송부했어요.


귀족원의 심의는 8월 26일에 시작되고 이때 역시 약간의 수정이 가해지기는 했으나 10월 6일에 압도적 다수로 가결이 됐습니다. 중의원이 귀족원에 의한 수정을 동의함으로써 제국의회의 심의가 종료, 개정안은 추밀원(樞密院)(추밀원은 메이지헌법이 폐지될 때가지 있던 천황을 위한 자문기관. 헌법과 관련된 문제도 다루었기 때문에 “헌법의 파수꾼”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의 심의를 겨쳐 11월 3일에 일본국헌법으로서 공포되고 6개월 후인 이듬해 5월 3일부터 시행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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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으로 간략하게 나마 일본국헌법의 제정 과정을 살펴봤습니다. 제정의 계기가 패전이라는 점, 제정 과정에 GHQ(실질적으로는 미국)가 개입했다는 점을 큰 특색으로 거론할 수 있을 겁니다. 특히 나라의 근간을 이루는 헌법이 미국의 의향을 크게 반영하고 있다는 부분이 지금 일본에서 진행중인 개헌논의의 원동력이 돼 있다는 것은 사실이죠. 그렇다고 해서, 개헌에 찬성하든 반대하든 간에 지금 있는 헌법을 무시할 수도 없고, 있는 그대로의 헌법을 잘 운용해 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죠.


이번에 살짝 짚어본 제정 과정을 항상 의식할 필요는 없고 경우에 따라 헌법이 겪어온 역사와 분리시켜 당장 직면하고 있는 현실을 전제로, 새로운 사회적 맥락으로 헌법 규정을 해석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추상적이고 초시대적인 것처럼 보이는 헌법 규정들이라 하더라도 원래는 역사적이고 그 시대적 한계를 내포하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면 안 될 겁니다. 그래야 일견 깔끔하게 완성된 것처럼 보이는 헌법 규정의 “틈”이 발견됐을 때 애써 해석하면서 낡은 헌법 규정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거나 더 세련되게 만드는 작업 -수 많은 판례나 학자들의 해석- 이 저희한테 주는 재미도 더 커질 것으로 생각하는 바입니다.





추신: 다음은 “메이지헌법의 특색이 무엇인가요?”로 이어갑니다. 일본 헌법의 제정 과정과 역사를 알아보는 것은 헌법에 관심이 많아진 한국 국민들에게도 유의미한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저만의 생각일까요). 한일양국은 정치, 사회, 경제 뿐만 아니라 "법"이라는 측면에서도 역사와 내용이 긴밀히 연관되어 있지요.  


언제나 말미에 적고 있습니다만 어느 나라의 정치인이든, 본인의 욕망을 관철시키시 위해 다른 나라의 법 조항이나 제도를 발췌인용하는 건, 그리고 그에 따른 논의나 과정을 입맞에 맞게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건, 만국 공통입니다. 해서 한국의 딴지일보 독자분들과 함께 공부해가면서 경계심의 유지는 물론, 순수한 지적 호기심도 함께 채워갔으면 합니다. 


궁금하시거나 보충할 사항이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저도 죽지않는돌고래 편집장과 상의하며 계속 내용을 이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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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레 히요코


편집 : 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