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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1. 26. 화요일

아까이 소라







 

 






사과의 말

 

벌써 3편째다. 2편서는 프랑스 우파 종합 일간지 <르 피가로>와 좌파적 성향을 지니고 있는 경제 일간지 <레제코>를 주제로, 박근혜 '대통령'을 바라보는 이 두 언론의 시선이 얼마나 다른지를 각 신문의 기사를 들어 살펴 보았다. 청와대의 선택적 부르심을 받은 <르 피가로>는 그녀를 권위주의적 통치를 한 아버지를 두긴 하였으나 '민주적'인 방식으로 선출된 '세익스피어 비극적 운명'을 지닌, '여리여리한 실루엣'의 '강렬한 눈빛'의 여성 대통령으로 묘사했다면, <레제코>는 아직도 아버지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정쟁에 특히 강한 인물로 묘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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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신문에 실린 박근혜 이미지 사진. 절묘히 닮았다.

좌: <르피가로> 2013년 11월 1일자 기사, 우: <레제코> 2013년 11월 4일자 기사

 


본 연재물의 기획 단계에서는 본래는 발행부수 순이나 아니면 그 정치적 성향 순으로 하려고 했는데... 우리의 마담 라 프레지당뜨 박께서 프랑스를 친히 방문해 주시는 바람에 약간 순서가 엉켰음을 미리 밝혀두는 바이다. 물론 그녀를 절대로, 네버, 자매(필자 주: jamais, 프랑스어로 결코), 원망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 정도의 이벤트로 인해 본 필자의 머릿속이 약간 혼란스러웠음을 독자 앞에 정중히 사과하는 바이다. 그래서 이왕 순서가 엉킨 김에 그냥 필자 마음대로 하려고 한다. 요즘 한국엔 종북 빨갱이가 대세인 바, 프랑스의 대표 좌파 일간지 <리베라시옹>에 대해 우선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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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0월 7일자 <리베라시옹>

이걸 보고 이 신문을 B급 저질 언론이라 생각하면 곤란하다.

당시 파리 시장이었던 들라노에(Bertrand Delanoe)가 미국의 예술가 래리 클락(Larry Clark)의

전시를 18금으로 진행하도록 한 데에 대한 비판의 일환으로 선택한 1면 사진이었던 것.

<리베라시옹>은 그러니까 섹시하고 도발적인 정론지...? 정말로 ?

 

 

 

 

리베라시옹 피습 사건


2013년 11월 18일 오전 10시 45분. 파리 3구에 위치한 <리베라시옹> 신문사 로비에 한 남자가 들어온다. 남자 손에 쥐어 진 총이 발사된다. 두 번. 그리곤 <리베라시옹>의 수습 사진기자 한 명이 피를 흘리며 쓰러진다. 총을 쏜 남자는 유유히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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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라시옹 사건 3일 전, BFM-TV에 들어와 총을 들고 위협하는 범인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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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격사건 이후 범인이 잡힐 때까지 <리베라시옹>을 비롯한 모든 언론사 앞의 경비가 강화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올해로 창간 40주년을 맞은 프랑스의 사회주의 종합 일간지 <리베라시옹>은 비통과 침울의 도가니다. 40주년이라며 전시회도 열고 기념판도 내고, 나름 축제 분위기였는데, 두 번의 총성 이후 <리베라시옹>은 참담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총상을 입은 사진기자는 이제 코마상태에서 벗어나 병원에서 안정을 취하고 있다. (보다 자세한 사건의 내역이 궁금하다면 나님의 300으로 고고씽)

 

만약 이런 일이 한국에서 벌어졌으면 어떤 반응이었을까? 빨갱이는 죽어도 싸니 잘 되었다고 할까? 아니면 '테러'라는 자극적이기 짝이 없는 표현을 들이대며 정치적으로 이용했을까? 아마도 애초에 이런 사회주의 성향의 신문은 존재하지도 못하겠지. 여튼 이 사태를 두고 올랑드 대통령은 언론의 자유는 어떤 일이 있어도 지켜져야 하는 것이라 했다. 프랑스의 현재 집권당이 사회당인 것을 떠나, 그 어떤 정권 하에서도 프랑스 언론의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 그 자체만으로도, 프랑스에서 ‘언론의 자유’가 일단은 존중되고 있다는 것에는 이의를 제기할 여지가 없다 하겠다.

 


68혁명과 사르트르, 그리고 리베라시옹

 

프랑스어로 ‘리베라시옹(libération)’이라는 단어는 ‘자유화’, ‘해방’이라는 뜻이다. 1826년에 창간된 <르피가로>, 1880년의 <라크루아>, 1904년의 <뤼마니테>, 1908년의 <레제코>, 1944년의 <르몽드>와 <르파리지앙> 등 현존하는 전국 단위의 일간지와 비교했을 때, 1973년 세상에 나온 <리베라시옹>은 그저 걸음마를 갓 뗀 아이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현저히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리베라시옹>은 그 시작부터 프랑스 사회에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1970년대 초, 68혁명을 막 끝낸 프랑스 사회는 격변에 다름 아니었다. 68혁명은 쉽게 드골 정권의 연장에 따른 실패에도 불구, 혁명 이전에 존재하던 모든 종류의 사회적 권위의 전복을 이끌어 냈다고 이해하면 된다. 남성과 여성, 스승과 제자,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권위가 무너져 내리면서 사회는 일견 혼란과 엄청난 자유(방임?) 앞에 벌겨 벗겨진 채로 나서게 된다. (68혁명에 대한 필자의 예전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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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변혁의 최전방에는 학생들이 있었고, 이 68세대에 있어 사르트르(Jean-Paul Sartre)는 정신적 지주였다. 그리고 68혁명 이후 사회의 변화가 한창이던 1970년대 초, 사르트르와 마오주의자 베르니에(Jean-Claude Vernier), 세르쥬 쥘리(Serge July) 등 5명이 합심하여 만든 것이 바로 이 <리베라시옹>.

 

 

Peuple, prends la parole et garde-la

민중이여, 말하라! 그리고 그 말을 소유하라!

 

‘모든 정보는 민중으로부터 나와 민중에게로 돌아간다’는 의미의 이 슬로건을 신조로 창간된 <리베라시옹>은 미테랑 사회당 정부가 출범한 1981년까지 그 어떤 형태의 권력의 간섭도 받지 않기 위하여 일체의 광고 및 자본의 원조 없이 출판을 계속하였다. 대신 부족한 자금 마련을 위해 사진관을 운영하기도 했다. 자본에서 자유로울 때에야 완벽히 ‘자유로운’ 언론일 수 있음을 완벽히 인지한, 빨갱이 중에서도 상 빨갱이.

 

당시 <리베라시옹>의 주주는 이 신문을 위해 일하는 직원들이었다. 그 지위의 고하, 교육의 수준 등을 막론하고 자유로운 분위기 하에 자신들의 의견을 개진하며 신문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심지어 기자가 아니라 육체노동을 하는 이라도 <리베라시옹>의 일원이라면 모두 회사의 경영에 참여하였으며, 모든 의사결정은 회사의 총회에서 치열한 토론 끝에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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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2월 5일 발행된 <리베라시옹> 첫 호(특별판)

어쩐지 그로부터 40년 후 한국의 상황이 떠오르는 듯 하여, 잠시 기사의 일부분을 옮겨 본다.


<리베라시옹>은 직접민주주의를 추구한다. 오늘날 정치인을 선출한다는 것은 민중으로 하여금 5년에 한 번씩만 발언하게끔 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리하여 나머지 4년 동안, 민중의 선택을 받은 이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해도 된다는 것인가? 정치인들은 민중의 영향권 밖에 있다. 민중을 대변하기 보다는 자신만을 내세운다. 이제 민중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원한다면 <리베라시옹>이 여기 있다. 토론의 장은 신문 속 한 줄 한 줄에서 열린다. 이를 위하여 <리베라시옹>은 민중의 말을 단절시키는 그 어떤 형태의 시스템도 거부하는 바이다.


 

실어내는 기사들도 당시 기존 언론들은 다루지 않던 일반 시민들의 삶, 그러니까 노동자, 동성연애자, 죄수 등의 이야기. <리베라시옹>은 줄여서 ‘리베’라고도 불리는데, 기사가 구어체로 작성되는가 하면 독자를 위한 무료광고란도 있었다. 보통 ‘쁘띠 아농스 (Petites annonces)’라 통칭되는 독자 광고란에는 직업을 구하는 실직자부터 애인을 구하는 독신자, 혹은 사랑을 고백하는 연인 등 소소하고 때로는 찌질스러운 내용들이 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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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뵈지도 않는 글자들을 본 필자가 눈을 비벼 가며 해독해 보니,

‘연애학 교수가 수제자 찾음. 20살이면 좋겠으나 50살까지 커버 가능’

 


1973년 6월, 프랑스의 시계 회사 LIP이 노동자 해고 계획에 대한 반대 시위를 하며 공장을 점거하자, 미적지근하거나 비판적 반응을 보인 다른 언론들과 달리 <리베라시옹>은 1면에 ‘노동자들이여, 그렇게 하도록 하라! (Travailleurs, vous pouvez faire de même)’며 기성 언론들과 당당히 맞짱을 뜨기도 했다.


이와 같이 <리베라시옹>은 폭력적 행위에 대해서도 화끈한 지지를 보내는 상 빨갱이였으나, 1970년대 말이 되면 살짝 주춤한다. 1977년 10월 18일, 계속되는 독일 적군파(Rote Armee Fraktion)의 테러가 점차 심각해지고, 그에 대한 서독 정부와의 대치가 정점에 오르면서, 적군파의 공동 창설자 구드룬 엔슬린(Gudrun Ensslin)과 얀 칼 라스페(Jan-Carl Raspe)가 자신들의 감옥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기에 이른다. 이에 <리베라시옹>은 ‘적군파와 서독 정부 : 괴물들의 싸움’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하여 테러 행위에 대한 지금까지의 지지를 모두 철회하였다. 이로 인해 <리베라시옹>은 상 빨갱이는 아니고 그냥 빨갱이인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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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라시옹>의 전선 수정에 대하여 <Temps Critiques>(필자 주 : 비평시대 정도로 번역 가능)

의 공동편집인 자크 바인스타인(Jacques Wajnsztejn)과 자크 기구(Jacques Guigou)는 

“이 사건으로 인하여 <리베라시옹>은 다수의 독학자 독자층을 잃었다.”고 평가한다.

 


물론 기저에 ‘아 씨발, 이러다 나도 죽는 거 아니야?’ 같은 찌질한 마음이 없었다고는 장담하지 못하겠지만.이러한 <리베라시옹>의 전선 변화(마오주의 → 사회민주주의)에는 사르트르와의 결별 및 사회의 인식 변화에 대한 고찰이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렇다고 해서 사르트르가 극좌의 테러에 지지를 보냈다는 것은 아니고. 사실 이미 사르트르는 1974년, 후임 발행인 세르쥬 쥘리와의 불화로 베르니에와 함께 <리베라시옹>을 떠났다. 다만, 사르트르라는, 마르크스주의에 경도된 대 문호 및 철학자가 떡 하고 버티고 있는데 노선을 선회하기는 힘들었으리라는 것.

 

 

돈 맛에 빠지다

 

1981년, 프랑스를 빨갱이들이 접수하기에 이른다. 바로 프랑수아 미테랑의 사회당이 집권한 것. 금오산이 피눈물을 흘리고 전국의 어버이연합이 등에는 가스통, 한 손에는 횃불을 들고 천인공노하여 일어날 일이 우리의 마담 라 프레지당트 박께서 젊은 시절을 보낸 선진국이라며 경탄해 마지 않는 곳,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이 무렵 <리베라시옹>은 극심한 경제적 위기에 처해 있었다. 1981년 2월 21부터는 신문 발간마저도 힘들어 졌다. 미테랑 당선 3일 후인 같은 해 5월 13일부터 재발간되기 시작하는데, 여기서부터 우리의 ‘리베’, 약간 맛이 가기 시작한다. 사회주의자 은행가와 보험업자 등의 투자를 받으며 회생은 하였으나 다시 태어난 <리베라시옹>은 더 이상 이전의 ‘리베’가 아니었다. 

 

교묘히 사르트르를 내쫓고 그 자리를 꿰찬 (것으로 강한 의심을 받는) 제2 대 발행인 세르쥬 쥘리는 미테랑의 연설에 기립박수를 치는 한편, 1986년에는 ‘미테랑의 위대함 (Grandeur de Mitterand)’에 찬사를 보내기에 이른다. 그가 보낸 찬사란 프랑스식 민주주의를 영미식 민주주의와 같은 선상에 올려 놓은 업적국가 경제를 국제시장 질서에 맞게 재배치시킨 것에 대한 것이었다. 마오주의를 비롯한 극좌를 표방하던 <리베라시옹>은 이제, 표면적으로는 사회민주주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으나 미테랑 정부의 우경화에도 이전과 같은 날카롭고 해학적인 지적을 쏟아내지 못하는, 무늬만 빨갱이가 되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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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는 예술이라능. 예술을 위해 <리베라시옹>의 지면을 할애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능…….

 


자본으로부터 독립적인, 완벽히 ‘자유로운’ 언론이어야 한다는 초기의 신념도 무너졌다. 1982년 2월 16일, <리베라시옹>에는 첫 유료광고가 실린다.(어떤 광고인지 보고 싶으나 15유로가 든다. 딴지에선 활동비를 대 달라!) ‘리베’의 변절에 대해 독자들은 항의를 쏟아내기에 이른다. 이에 세르쥬 쥘리는 “<리베라시옹>은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광고가 달라진 것이다. 광고는 예술이다. 이제 예술과 광고 사이의 경계는 허물어졌다. 광고 없는 <리베라시옹>은 불완전했었다.”고 이야기했다고.

 

이제 <리베라시옹>은 ‘우리의 리베’라기보다는 기존 기성 언론의 한 대열에 포함되어 버렸다. 실제로 1990년까지 <리베라시옹>은 성장을 거듭한다. 극단적 성향을 포기하고 자본을 받아들임으로써 일반 대중이 받아들이기에는 훨씬 편안해졌을지도 모르겠으나 분명 <리베라시옹>은 점차 정치적, 경제적 독립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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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의 가루 다시다. 요리를 못 하는 사람도 다시다만 있으면 익숙한 그 맛을 낼 수 있다. 허름하지만 소문난 맛집이었던 ‘리베’는 외부 자본을 들여 리모델링을 하고 손님을 끌여 들였지만, 개나 소나 산에서나 들에서나 들이붓는 다시다를 사용하면서 예전의 그 맛을 잃어버렸다. 단골들은 이제 굳이 <리베라시옹>을 사랑할 이유를 잃어버렸다. 매출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게다가 인터넷이라는 밥집이 비슷한 질의 음식을 공짜로 제공하면서 <리베라시옹>의 구독률은 2001년에서 2005년 사이 20%나 감소한다.

 

위기의 연속. 재정적자는 자본의 투입을 가속화시키고, 자본에 귀속된 언론은 더욱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가 어려워 진다. 2005년, <리베라시옹>은 에두아르 드 로칠드(Édouard de Rothschild) 자본에 귀속된다. 로칠드 가문은 유대계의 프랑스 대표적 부르주아 집안. 은행가. 이에 따른 불만의 상승. 잇따른 대규모 구조조정 계획. <리베라시옹>의 일원들은 파업으로 자신들의 불만을 표출하였고 로칠드는 자신이 적극적으로 회사의 의사 결정에 개입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결정을 내리고 발행인 세르쥬 쥘리와 루이 드레퓌스(Louis Dreyfus)를 압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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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두아르 드 로칠드, ‘니네 안 나가면 돈 안 대 줌’



비록 세르쥬 쥘리가 <리베라시옹>에 광고를 가져오는 등 초기의 ‘리베’를 ‘변질’시키는 데에 앞장선 인물이기는 하지만 <리베라시옹>의 독립성과 경제적 안정이라는 두 개의 토끼를 잡기 위하여 무한한 노력을 하였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에 기자들은 2006년 6월 14일, ‘세르쥬 쥘리는 33년동안 우리의 편집권 독립을 보장한 우리의 역사’라며 성명을 내고 이를 기사에 실었으나 결국 세르쥬 쥘리와 루이 드레퓌스는 <리베라시옹> 발행인 자리를 내놓고 쫓겨난다.

 

현재 <리베라시옹>은 로랑 조프랑(Laurent Joffrin) 체제에 있으며 여전히 로칠드 및 2011년 합류한 브뤼노 르두(Bruno Ledoux) 등 부르주아 자본에 기대어 있는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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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라시옹> 건물이 있는 거리 일대를 소유한 땅부자로 유명한 브뤼노 르두.

여행을 즐기고 프랑스 혁명기의 유물 수집을 취미로 하는 대표적 한량 보보(Bourgeois Bohème)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다.

 

자본에 ‘잠식’ 당한 <리베라시옹>이라지만 이들은 여전히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구어체로 기사를 쓰고, 그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았던 노동자와 하층민, 정신병자로 취급 받던 동성애자들의 목소리를 당당히 대변하던 전통은 아직도 남아 <리베라시옹>은 아직도 프랑스의 주요 일간지 중 가장 섹시하고도 도발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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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차 대선에서 


프랑스 극우정당(더러운 이민자를 이 땅에서 몰아내자!) 르펜이


17%란 엄청난 득표율로 2차 대선까지 진출하자


<리베라시옹>은 2002년 4월 22일, 기존의 1면 구성을 과감히 버리고


위와 같은 편집으로 신문을 내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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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져, 이 부자 머저리 새끼야!


2012년 9월 10일, 부자증세를 피하기 위해 루이뷔통 사장이 벨기에로 국적을 옮긴 것에 대해 <리베라시옹>은 꺼져, 이 부자 머저리 새끼야!라며 1면을 내어 놓았다. 이는 베르나르 아르노(Bernard Arnault) 루이뷔통 사장과 전 대통령 사르코지에 대한 이중 디스인데, 지난 2008년 사르코지가 자신에게 악수를 청한 한 남자에게 “꺼져 이 가난한 머저리 새끼야!”라고 했다가 이 장면이 카메라에 잡혀 전국을 뒤집어 놓은 사건을 다시 떠올리도록 했던 것. 최근의 사건이고 워낙 자극적이기도 하여 한국 언론에서도 다루었던 이 사건은 결국, 대기업들의 광고 철회 압박에 따른 <리베라시옹>의 꼬리 내리기로 막을 내린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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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들의 잉여력도 여전하다.

2011년 12월 20일 <리베라시옹>의 독자광고란.


‘급! 72세의 여전히 활기찬 젊은 남자 / 매년 6월 21일이면 밤 축제를 즐김 / 다정하고 이해심 많은 지역을 열렬히 찾고 있음’ 이라는 광고가 눈길을 끌었다. 아래의 이메일 주소를 통해 이 남자가 전 문화부 장관 작크 랑(Jack Lang)임을 알 수 있다. SFIO는 프랑스 사회당(PS)의 예전 이름이다. 또한 매년 6월 21일이면 프랑스 전역에서 벌어지는 음악 축제를 만든 이가 바로 작크 랑.


이 광고는 작크 랑이 2012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신의 지역구를 버리고 다른 곳에서 출마하려는 시도와 관련한 프랑스 사회당의 꼼수를 비웃기 위해 녹색당 국회의원 측에서 벌인 하나의 해프닝이었다.



 

<리베라시옹>은 여전히 ‘활동가’들이 직접 만드는 언론을 추구하고자 하는 자신들의 이상과, 자본주의라는 현실 사이에서 이와 같은 줄타기를 계속하고 있다. 이미 정론지로 편입, <르몽드>, <르피가로>와 함께 프랑스의 대표 3대 일간지가 된 상황은 분명 자본의 유입과 사회민주주의로의 노선 선회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 속에서 펼쳐 보이는 재기발랄함은 가끔 자본의 카운터 펀치를 맞곤 하지만 금새 다시 나타나 로칠드 사장을 즐겁게 해 주고 있다. 또한 이것이야말로 여전히 <리베라시옹>이 젊은 학생들과 좌파 지식인, 보보들을 주 독자층으로 삼는 동력이라 하겠다.

 

프랑스 사회의 ‘표현의 자유’에 대한 존중이야말로 <리베라시옹>의 이러한 줄타기를 가능케 하는 본질이다. 그런데 ‘표현의 자유’란 자연의 선물이 아니다. 언론이 ‘감히’ 자신의 자유를 위하여 투쟁하여 ‘쟁취’해야 하는 것이며, 일반 시민들의 이해와 동조가 뒷받침해 주어야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잠시 한국을 생각하고는 한숨을 내뱉어 본다.

 

 

1973년, <리베라시옹>은 잠들어 버린 기존 언론들을 비판하며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였다.

 

2013년, 한국의 불면증에 시달리는 언론들은 제발 좀 주무시라! 그대들이 잠들 때, 그제서야 아침이 올 것만 같다.

 

 

 



참  고

 

http://fr.wikipedia.org/wiki/Lib%C3%A9ration_(journal)#Lib.C3.A9ration_n.C2.BA_2

http://www.jolpress.com/article/liberation-de-sartre-rothschild-22520.html

http://www.lefigaro.fr/lefigaromagazine/2012/08/03/01006-20120803ARTFIG00313-bruno-ledoux-collectionneur-de-l-impossible.php

http://www.liberation.fr/evenement/2006/06/14/presidentielle-2007-jose-bove-pourquoi-j-y-vais-sans-souffle-serge-july_41215

http://www.liberation.fr/evenements-libe/2013/03/24/libe-ca-a-pris-doucement_890941

http://www.liberation.fr/politiques/2011/01/06/la-nostalgie-mitterrand_705138

http://www.liberation.fr/tribune/2008/03/21/liberation-enfant-de-mai-68-ou-de-mai-81_67853

http://www.liberation.fr/tribune/2008/03/21/liberation-enfant-de-mai-68-ou-de-mai-81_67853

http://www.ozap.com/actu/jack-lang-moque-dans-les-petites-annonces-de-liberation/438372

http://www.ozap.com/compagnie/liberation_e457177

http://www.universalis.fr/encyclopedie/liberation/

http://www.web-libre.org/dossiers/liberation,791.html

http://www.liberation.fr/livres/2013/10/02/liberation-a-40-ans-toute-une-histoire_936346

http://www.lexpress.fr/actualite/politique/un-elu-eelv-moque-djack-lang-via-les-petites-annonces-de-libe_1063444.html







편집부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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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나 까자 - 언론과의 싸움(독일) <1>]

[알고나 까자 - 언론과의 싸움(독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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