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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라사키 히데나리(寺崎秀成)란 이름을 들어봤는가? 일반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일본의 외교관이다. 그는 전쟁위기가 최고조로 달아오르던 1941년 12월 주미 일본 대사관에서 노무라 대사의 개인비서로 움직이고 있었다.


국제정세에 밝은 그는 타고난 외교관이었다. 그런 그의 눈에 비친 조국 일본은 기름을 등에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것으로 보였다. 모든 외교적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이제 전쟁으로 나아가는 조국을 보면서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최후의 외교적 시도를 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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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9일 그는 특명대사였던 구루스 사부로(来栖三郎)에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다.


“특명 대사님! 왜 국민을 위한 사기꾼이 되려 하지 않으십니까? 왜 미국인들에게 중국에서 철수하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까? 우리는 중국에서 오래 견딜 수 없습니다. 전쟁을 주도하는 사람들도 그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의 말을 가만히 듣던 ‘노련한’ 사부로는 슬쩍 공을 그에게도 돌렸다.


“당신이 그렇게 하는 것이 어때? 우리가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중재자를 이용해야 되고, 또 그 중재자에게 평화를 호소하는 전신문은 덴노에게 직접 승인을 받아야 할 것이다. 당신에게 경고하는데 나도 이미 도조의 승인을 얻으려고 전신문을 보냈지만 거부 당했다. 물론 당신이 말한 그런 전신문은 도조를 뛰어넘어 덴노에게 바로 전달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행동을 도조가 알아채게 되면 당신 뿐만 아니라 당신 가족 전부가 죽을 것이다. 이런 위험을 감당하라는 것이냐? 이제는 당신 차례다.”


국가의 존망이 걸려있는 상황에서 사부로는 지금 데라사키가 계획하는 일의 ‘후과(後果)’를 상기시켰다. 이미 일본은 정상국가의 범주에서 벗어난 지 오래였다. 도조가 데라사키의 가족 전부를 죽일 수도 있다는 건 단순한 협박이 아니라 미래에 닥칠지도 모를 ‘현실’이었다.


그러나 데라사키는 조국 일본의 위기를 못 본 척 할 수는 없었다. 데라사키와 구루스는 즉시 국민당 정부의 워싱턴 주재 대사인 후스(胡適) 박사와 접촉했다. 그리곤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보낼 중재인으로 루즈벨트의 오랜 친구인 스탠리 존스(Stanley Jones) 목사를 선택하게 된다. 데라사키의 생각은 간단했다.


“루즈벨트 대통령이 덴노에게 개인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면 전쟁은 피할 수 있다. 덴노가 괴로워하면 일본 군부와 국민들은 덴노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다. 덴노의 마음만 움직인다면, 전쟁은 피할 수 있다.”


데라사키의 발언은 ‘꽤’ 위험한 이야기다. 이 이야기의 다른 말은,


“덴노는 일본 정부를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있다.”


란 의미가 된다. 이는 덴노가 태평양 전쟁의 개전에 영향을 끼쳤고, 이후의 전쟁 수행과정에도 일정수준 이상의 영향력을 끼쳤다고 추측할 수 있는 판단준거가 된다. 그러나 1941년 12월 3일에는 이런 걱정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바로 전쟁을 막기 위한 마지막 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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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리 존스 목사는 1941년 12월 3일 백악관을 방문한다. 그리고 루즈벨트에게 데라사키의 의도를 말한다.


“여기 있는 일본 사람들이 저에게 각하한테 부탁해서 그렇게 해주기를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일본 사람들은 일본 정부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덴노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게 했다는 사실이 기록으로 남아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들의 서면 확인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어디까지나 비밀스런 접촉, 비밀스런 전달이었다. 루즈벨트는 이에 흔쾌히 동의했다. 루즈벨트 역시도 전쟁 상황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찾던 중이었다. 그리고 그 방법 중 하나로 덴노에게 친서를 보내는 걸 고려하고 있었다. 울고 싶은데 뺨 때려준 격이랄까?


문제는 친서를 어떻게 전달하느냐 하는 방법론이다. 스탠리 존스 목사는 구루스와 데라사키의 간곡한 부탁을 가감없이 전달했다.


“꼭 덴노에게 직접 보내야 합니다. 구루스와 데라사키의 간곡한 요청입니다.”


이 의미가 뭘까? 중일전쟁이 한참 격화되던 1937년 12월 일본 해군 항공대가 양쯔강을 따라 내려오던 미국 해군 함정인 USS 파나이(USS Panay)호를 공격하여 격침한 적이 있다. 당시 해군성 차관이었던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공식 사과를 할 정도의 큰 사건이었다. 이때 루즈벨트는 덴노에게 친서를 전달하려 했는데, 일본 외무성까지는 전달 됐지만 황궁까지는 전달되지 못했던(‘않았던’ 것이 맞을 것이다)것이다.


중간에서 편지는 행방불명 됐고, 사건은 유야무야 넘어갔다. 만약 지금 편지를 보낸다 하더라도 덴노에게 전달될 것이란 보장은 없었다. 루즈벨트는 이 문제를 ‘무겁게’ 받아들였고, 다른 방법을 생각해 낸다.


“통신실에 갈 것도 없이 미국 대통령의 이름으로 일본국 덴노에게 전신문을 보내겠소. 그러나 그루 대사에게 보낼 것이오. 대사는 덴노를 알현할 수 있을 테니 직접 전달할 수 있을 것이오. 그런 다음 24시간 안에 아무런 소식이 없으면 나도 나름대로의 조치를 취할 생각이오. 언론에 공개해서 회답을 재촉하겠소.”


주일 미 대사인 그루를 통해 직접 덴노에게 편지를 전달하고, 그 답장도 언론을 통해 받아내겠다는 계산이었다.


루즈벨트는 1941년 12월 6일 편지를 완성해 주일 대사인 그루에게 보냈다. 이때가 저녁 6시였다. 그러나 대통령의 초긴급 메시지는 12시간이나 지체됐다(일본 쪽의 방해공작이라는 설이 거론되고 있다). 결국 그루 대사가 전문을 받아본 것은 일본 시각으로 12월 8일 0시 30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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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장난일까? 진주만 공격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던 그루 대사는 도고 시게노리 외무대신을 만나 가급적 빨리 덴노와의 면담을 요청했다. 그러나 몇 시간 뒤 진주만을 공격할 것이란 걸 알고 있었던 도고 시게노리는 덴노와 그루 대사의 만남, 아니 정확히 말해 루즈벨트의 편지를 덴노에게 전달하게 할 수는 없었다. 도고는 덴노가 취침 중이기에 지금 만날 수 없다고 에둘러 거절했다. 그러자 그루 대사는 루즈벨트의 편지를 직접 도고에게 읽어준다. 도고는 되도록 빨리 루즈벨트의 편지를 덴노에게 전달해 주겠다고 그루대사를 달랜 후 도조 히데키 총리에게 달려갔다.


이들은 루즈벨트의 편지가 이제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지만(몇 시간 뒤에 진주만을 공격할 것이므로), 그래도 마지막까지 외교적인 모양새를 갖추기 위해 나름의 답장을 준비했다. 그럼 이 답장은 어떻게 됐을까?


히로히토는 일본의 운명이 걸려있는 진주만 기습의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전쟁 상황실로 향했는데, 이때 도고를 통해 루즈벨트의 친서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히로히토의 반응은 간단했다.


“준비했던 답장대로 답신을 보내라.”


그러나 이 답장은 전달되지 않았다. 훗날 히로히토는 루즈벨트의 친서를 받았다면, 전쟁까지 가지 않았을 것이라 말했었다. 이는 악어의 눈물과 다름없는 가식이며 위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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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전포고


진주만 공격의 가장 큰 미스테리 중 하나가 일본은 어째서 공격 후에 선전포고를 했는가 하는 부분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선전포고가 늦게 전달된 것이다.


일단 선전포고의 개념과 당시 국제사회에서 선전포고가 갖는 의미에 대해 이해를 해야 일본의 ‘지각 선전포고’의 정치적 함의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부분을 먼저 설명하겠다.


첫째, 선전포고(宣戰布告).

선전포고는 말 그대로 ‘전쟁을 널리 선언한다.’란 의미다. 즉, 전쟁 전에 전쟁을 할 것이라 외부에 알리는 것이다. 이 부분은 전략상 꽤 중요한데, 선전포고 없는 전쟁. 즉, ‘기습’에 의한 공격효과를 일정부분 포기하는 행위다. 현대전에서 기습은 공격자가 방어자보다 최소 1.3배, 최대 3배의 승수효과를 가져다준다. 이런 기습을 포기한다는 건 공격자로서는 꽤 어려운 선택이 될 것이다. 이런 수치적인 계산을 고려치 않더라도 기습이 가지는 이미지는 전쟁 전반에 걸쳐 많은 영향을 끼친다.


둘째, 언제부터 선전포고는 시작된 것일까?

우리의 머릿속에 있는 선전포고의 시작은 유럽에서 발원됐다고 보는 게 맞다. 중세시절부터 관습화 된 ‘결투’의 전통 덕분에 싸움의 상대방에게 도전장을 보내는 것이 일상화 됐고, 이게 국가단위로 확대 된 것이 선전포고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문화적 토대가 갖춰졌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유럽의 모든 국가들이 신사적으로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을 일으켰던 건 아니다. 근대에 들어서기 전까지는 일종의 불문율, 관습법 같은 존재였기에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다고 어떤 제재를 받은 기록도 없다. 겉으로 보면 기사도 정신에 입각해 정정당당한 승부를 볼 거 같은 유럽도 선전포고를 ‘일상’이라고 말할 수준은 아니었다. 전쟁은 무슨 수를 써서든 이겨야 하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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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만 공습 당시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전달된 전문

'진주만 공습, 이건 훈련이 아님'


그런데 근대에 들어오면서 이 ‘선전포고’가 법의 테두리 안에 들어오게 됐다. 원인은 아이러니 하게도 ‘일본’이었다. 러일전쟁 당시 일본의 기습 공격으로 홍역을 치른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가 1907년 제2차 헤이그평화회의에서 의제를 던졌고, 채택된다. 그리고 1910년 1월 정식으로 발효된다. 일본은 자기 때문에 법제화 된 이 개전조약이 못마땅하긴 했지만, 1911년 12월에 이를 비준하고 이듬해인 1912년 1월에 이를 공표한다. 이 개전조약 1조를 보면 조약의 성격을 확인할 수 있는데,


“체약국은 이유를 명시한 개전선언의 형식 또는 조건부 개전선언을 포함하는 형식을 갖는 명료한 사전통고 없이 체약국 상호간에 전쟁을 개시하지 않음을 승인한다.”


즉, 전쟁의 의사표시를 ‘확실하게’ 전달하고, 그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러시아의 트집 잡기라 말할 수도 있겠지만, 당시 일본의 행태가 좀 심했다. 일본의 전쟁을 지켜본 서방세계 국가들은 일본이란 나라는,


“방심하고 있는 적국을 향해 기습 공격을 퍼부어 승리를 갈취하는 나라.”


로 인식하고 있었다(청일전쟁, 러일전쟁을 생각해 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이는 진주만 기습 공격이 있기 전 루즈벨트의 발언을 봐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은 언제나 비겁하고, 치사하게 기습공격을 하는 나라였다.


일본으로서는 억울한 측면이 있지만, 로마에 가서는 로마법을 따라야 하지 않는가? 메이지 유신 이래로 근대화에 성공했고, 구미 열강들에게 인정을 받아 당당히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들어가는 걸 국가의 최대 목표로 삼았던 일본은 국제법을 잘 지켜야 한다는 자기검열에 빠져든다. 그 결과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은 말 잘 듣는 모범생이었다. 당시 일본은 다이쇼 덴노(大正天皇) 시절이었는데, 그는 조칙(詔勅)에 몇 번이나 국제법 준수에 관한 내용을 담았다.


“혹시라도 국제법에 어긋나지 않는 한.”

“무릇 국제법의 범위 내에서”


등등의 내용을 말하면서 일본의 국제법 준수에 열을 올렸다. 이 때문인지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 참전 당시 국제법 절차에 맞춰 선전포고를 했고, 이후의 포로 대우에 있어서도 제2차 세계대전의 그것과는 달리 ‘관대한’ 모습을 보여줬다.


포로에 관한 부분은 잠깐 설명을 해야겠는데,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세계 각국의 포로 대우는 제2차 세계대전의 그것과 비교하면 상당히 ‘여유’가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자유 프랑스(La France Libre)정부를 이끈 드골 대통령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포로로 잡힌 경험이 있는데, 당시 장교들은 장교의 명예를 걸고 ‘원대복귀 하겠다.’란 내용이 담겨 있는 서류에 사인만 하면 주말 외출도 가능할 정도로 포로 대우가 느슨했다. 이는 장교들뿐만 아니라 사병들도 마찬가지였다. 왜 그랬을까? 제1차 세계대전까지만 하더라도 인간의 순수성과 인류애가 넘쳐났기 때문일까? 아니다. 이유는 간단했는데, 이런 경험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이 정도 규모의 병력들이 서로 맞붙은 적이 없었다. 근대화에 성공한 구미 열강들은 넘쳐나는 에너지와 재화를 토대로 대단위 병력들을 구성해 전선으로 투입했었는데, 이는 맞서 싸우는 적들도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이전 세대에서는 경험해 볼 수 없었던 대단위 살육과 엄청난 포로들을 목도하게 됐다. 포로로 잡힌 이들도, 포로를 잡은 이들도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난감했던 것이다.


즉, 이들은 경험이 없었기에 이 정도 규모의 포로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고, 그 결과 느슨한 형태로 포로들을 대우했던 것이다.


각설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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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일본은 어째서 변한 것일까? 제1차 세계대전 때까지만 하더라도 국제법에 나와 있는 것이라면 두말 않고 따르던 순진한 모범생 일본이, 만주사변과 뒤이은 만주국 수립, 국제연맹 탈퇴 이후에는 국제법을 경시하는 모습으로 일변했다.


이는 덴노가 말하는 조칙에서도 가감 없이 드러난다.


“국가의 총력을 다해!”

“일체의 장애물을 파쇄하여”


아버지와 아들은 다른 것일까? 아버지 다이쇼 덴노가 국제법 준수를 위해 노력했다면, 아들 히로히토는 국제법이라는 족쇄 대신 대동아 공영권 건설을 위해 국가 총력전을 설파했다. 이유가 뭘까? 당시 일본이 군부 파시즘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는 것도 이유의 하나이겠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당시 일본의 입장 때문일 것이다.


다이쇼 덴노 시절까지만 하더라도 구미열강을 쫓아가,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겠다는 열망이 강했다면, 쇼와 시절의 일본은 구미열강이 만들어 놓은 세계질서를 걷어차고, 일본이 만든 새 질서 ‘대동아 공영권’을 앉히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일본은 만주사변 이후로 국제법을 경시하고, 일본식의 세계관을 외교와 전쟁에 투영했던 것이다.




1. 전쟁국가 일본/ 살림출판사/ 이성환

2. 호호당 선생의 ‘프리스타일’

3. 세계전쟁사/ 육군사관학교 전사학과/ 황금알

4. 러일전쟁과 을사보호조약/ 이북스펍/ 이윤섭

5. 조선역사 바로잡기/ 가람기획/ 이상태

6. 다시 쓰는 한국근대사/ 평단문화사/ 이윤섭

7. 대본영의 참모들/ 나남/ 위텐런 지음, 박윤식 옮김  

8. 나모위키

9. 쇼와 16년 여름의 패전/ 추수밭/ 이노세 나오키 지음

10. 『중일 전쟁』 용, 사무라이를 꺾다/ 미지북스/ 권성욱 지음

11. 나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이었다 / 서해문집/ 김효순 지음

12. 석유전쟁/ 매일경제신문사/ 정기종 지음

13. 우리의 눈으로 본 일본제국 흥망사/ 궁리/ 이창위 지음

14. 연합함대 그 출범에서 침몰까지/ 가람기획/ 박재석, 남창훈 지음

15. 프레시안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24246

16. 일본의 이중권력, 쇼군과 천황/ 살림출판사/ 다카시로 고이치

17. 히로히토 신화의 뒤편/ 을유문화사/ 에드워드 베르 지음

18. 일본의 가장 긴 하루/ 가람기획/ 한도 가즈토시 지음






1부 

[러일전쟁]


2부

드레드노트의 탄생

1차 세계대전, 뒤바뀐 국제정치의 주도권

일본의 데모크라시(デモクラシー)

최악의 대통령, 최고의 조약을 성사시키다

각자의 계산1

8년 의 회, 던 축 

일본은 어떻게 실패했나2

만주국, 어떻게 탄생했나



외전

군사 역사상 가장 멍청한 짓

2차대전의 불씨

그리고, 히틀러

실패한 외교, 히틀러를 완성시키다

국제정치의 본질



3부

태평양 전쟁의 씨앗1

태평양 전쟁의 씨앗2

도조 히데키, 그리고 또 하나의 괴물

일본을 늪에 빠트린 4명의 '미친놈'

대륙의 각성완료, 다급해진 일본

대동아(大東亞)의 환상에 눈 먼 일본

일본, 건드리지 말아야 할 걸 건드렸다 1

일본, 건드리지 말아야 할 걸 건드렸다 2

일본의 패배

일소중립조약이 파기되던 순간 1

일소중립조약이 파기되던 순간 2

천조국, 움직이다



4부

왜 일본은 미국과 전쟁을 하려고 했을까

신성불가침으로 만들어진 권력, 덴노(天皇)

일본의 반인반신, 덴노(天皇)의 오판과 태평양 전쟁

미국과 일본의 외교와 태평양 전쟁

정신력으로 전쟁을 결정한 일본

미국의 최후통첩, 헐노트(Hull N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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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더가 디비주는 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


괴물로 변해가는 일본

조약, 테이블 위의 전쟁

러시아 vs 일본 한반도에서 만나다





펜더


편집 : 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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