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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1. 29. 금요일

독투불패 에헤이대략난감








7.


파리시민들이 1791년 6월 어느날 보았던 이상하지 않은 마차는, 사실은 매우 수상쩍은 마차였던 것이 함정이었다. 돈 많고 지체 높으신 분이 야외 나들이라도 나가는 양 마차가 파리를 빠져 나가고 이틀 뒤, 시민들은 외국으로 빠져나가려다 붙잡혀 파리로 되돌아온 국왕을 보게 된다.(ㅡㅡ;;) 국왕을 디스하는 사람들은 국왕이 국민을 버리고 외국으로 달아나려다 도로 붙잡혀온 것이라고 했고, 실드치는 사람들은 국왕이 납치될 뻔 하다가 간신히 구조되어 되돌아온 것이라고 했다. 어느 쪽이 사실이건 기막힌 사건인 건 변함이 없었다. 진실은 무엇이고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사건을 설명하려면 베르사유 행진 직후까지 되돌아가야 한다. 베르사유 행진은 2편에서 이야기했으니 넘어가고, 루이 16세는 그후 파리의 튈르리 궁에서 살게 된다. 근데 튈르리 궁전에서의 생활은 사실상 연금 상태였다. 왕은 딱히 할 수 있는 것도 없이 궁전에 갇혀 지내다시피하면서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이후 루이 16세의 정치적 역할은 권력을 잃은 채 의회가 통과시킨 법안에 옥새를 찍어주는 기계(?)가 되는 것이었다. 물론 루이 16세가 그 상황을 참기만 한 건 아니다. 왕의 권위를 다시 세우기 위해 이것저것 나름 시도해보았다.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서 왕당파들을 모으고 그들을 통해 자신의 권한 회복을 도모했다. 그런데 원래 세상일이란 자기 맘대로 되는 게 아니다. 특히 루이 16세는 더 그랬다.


루이 16세의 정치공작을 전담한 사람이자 가장 믿었던 사람인 미라보 후작이 1791년 4월 덜컥 죽어버린다. 본인도 타인도 예상치 못한 갑작스런 죽음이었다. 미라보는 당시 의회인 제헌의회의 의장으로 정치판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사람이기도 했다. 1편, 2편을 보신 분들을 알겠지만 루이 16세는 여러 번 배신당했다. 대놓고 배신당하기도 하고 본의 아니게 배신당하기도 했다. 그래서 이때쯤 되면 루이 16세는 인간불신에 걸려 있었다. 어지간히 신뢰가 있는 사람이 아니면 믿지를 못했다. 그나마 유일하게 믿었던 신하가 미라보였는데 그 미라보가 덜컥 죽었던 것이다. 물론 다른 왕당파 신하들도 많이 있었지만 인간불신에 걸려 있었던 루이 16세는 미라보만큼 그들을 믿지 못하였다. 당시 만들어지고 있던 1791년 헌법초안은 국왕에게 유리했지만 완성으로 가는 길은 지지부진했고 그것을 독촉할 국왕의 대리인은 없는 상태였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세월아~ 네월아~기다리는 수밖에. 그렇게라도 기다렸으면 또 별 문제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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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보 후작

인간불신 걸린 루이 16세를 설득시킨거 보면 역시 대단한 사람이긴 한 모양이다.

 

요즘에도 국가수반이 정치할 때 문제를 일으키는 발생원 중 하나가 그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 인사들이다. 측근들이 국가수반을 '인(人)의 장막'으로 포위하여 바보로 만들어 버리는 경우가 많다. 루이 16세도 별 다를 게 없었다. 지금 당장은 별다른 권력이 없지만 제헌헌법이 통과되면 권한을 회복할 예정인 그에겐 여전히 과거처럼 ‘인의 장막’이 쳐져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인사 개편을 통해 웬수같던 마누라 마리 앙트와네트가 측근으로 앉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여러모로 루이에게 도움이 되긴 커녕 민폐만 끼치는 인사가 된다. 어쨌든 앙트와네트를 비롯한 루이 16세의 ‘인의 장막’은 루이 16세를 분위기 파악 못하는(?) 왕으로 만들었다. 미라보가 죽었지만 헌법은 여전히 국왕에게 유리한 쪽으로 작성되고 있었다. 공화정을 주장하는 혁명가들은 반발하였지만 왕당파가 여전히 우세하였다. 그런데 국왕의 마누라가 자꾸 남편을 찌른다. "지금 이 꼴이 머냐? 왕이 신하와 백성들에게 감금되어있는 거랑 다를 게 없지 않느냐?" 자꾸 싸나이, 아니 왕의 자존심을 건드린다. 그러면서 자기 고국인 오스트리아에 망명해서 신성로마황제 레오폴트 2세 한테 지원군을 요청하자고 말한다.

 

루이 16세도 처음엔 마누라의 미친 소리를 그냥 웃고 넘긴다. 아무리 정치적으로 위치가 허약해져 있다고 해도 국왕이 자기나라를 버리고 외국으로 도망가란다. 그렇게 외국으로 달아나 외세의 힘을 빌어서 왕권회복을 시도하라는 헛소리를 한다. 성공해도 외국으로 도망간 왕의 명예는 바닥에 떨어지게 될 것이고, 도와준 신성로마황제의 간섭을 받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냥 흘려버렸는데... 루이 16세의 결심을 흔드는 사건이 벌어졌다.

 

부활절은 카톨릭에서 매우 중요한 날이다. 그래서 이날은 루이 16세도 궁안에서 미사를 드리는 게 아니라 시외의 교회에 행차해서 미사를 드리려고 했다. 그런데! 어떤 놈이 흘린 유언비어인지는 몰라도 왕이 교회에서 부활절 미사를 드린 뒤 베르사유로 돌아갈 거라는 헛소문이 돌았다. 놀란 파리 시민들 튈르리 궁을 나서려는 루이 16세의 마차를 못나가게 막아섰다. "폐하~베르사유는 아니 되옵니다!", "가시려거든 저희를 밟고 가시옵소서." 아예 길바닥에 드러눕고(?) 난리가 났다. 결국 루이 16세 포기하고 궁 안으로 되돌아 간다. 그리고 그날부터 마누라 말대로 도망칠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루이 16세는 나라를 버리는 왕이 될 생각이 없었다. 마리 앙트와네트는 오스트리아로 가고 싶어했지만 루이 16세는 국경 근처까지만 가서 왕당파와 오스트리아의 원군을 기다리기로 했다. 어쨌건 파리를 탈출하기로 한 루이 16세는 결심은 했지만 곧바로 실행에 옮기질 못한다. 이런 일은 거의 왕비인 마리 앙트와네트가 맡아서 추진했기 때문이다. 마리 앙트와네트는 일을 추진하는데 있어서 불필요한 일을 너무 많이 했다. 꼬리가 너무 길었던 것이다. 커다란 호화마차에 사치품들을 가득 싣고 가는데 도피하는 사람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실제로도 왕이 없어진지 반나절도 안되서 들통이 나버렸다. 루이 16세 답답할 만도 하건만 뭐라 잔소리 할 수도 없는 게 탈출 자금을 비롯해서 루트주선을 해준 것이 마리 앙트와네트의 애인들(그녀에겐 여러 명의 애인이 있었다)이었다. 처음부터 어설픈 탈출이었다.

 

하지만 어설픈 탈출을 준비한 마리 앙트와네트에게도 할 말은 있을 것이다. 돈도 내가 내, 인선도 섭외 예정도 모두 내가 했는데 정작 루이 16세는 오스트리아까지 안 가고 변두리의 어느 듣보잡 요새에서 틀어박히겠다고 한다. 이번에 기회삼아 21년 만에 고국에 한번 돌아가 보나 싶었는데 일이 틀어져 버렸다. 그러니 그 촌구석에서 편안히 라도 지내고 싶은 게 인지상정. 결국 평소 쓰던 물건 몽땅 싸들고 이사를 갈 생각했다.(에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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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앙트와네트의 애인인 페르센 백작

바렌느 사건에 가장 많은 지원을 했다. 루이 16세는 마누라의 애인이랑 친하게 지냈다고 하니 

략결혼이 불러온 막장 부부관계의 끝을 보여준다.

 

파리는 루이 16세가 떠난지 서너 시간도 안 되서 왕이 없어진 걸 알고 발칵 뒤집혔다. 국민방위군 사령관 라파예트는 멘붕해서 허둥지둥 수색령을 내렸다. 긴급을 알리는 대포를 쏘았는데 그 소리를 루이 16세도 들었다고 한다. 아직 파리 근처였던 것이다. 대포 소리를 통해 벌써 들켰음을 안 왕의 일행도 라파예트 경처럼 멘붕했다. 너무 큰 마차라 속도가 느려서 추격대에 금방 따라잡힐게 뻔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루이 16세 이번엔 답답한 마눌님 덕에 또다시 구석에 몰렸지만, 의연한 태도로 탈출을 주선했던 왕비의 애인들에게 먼저 도망치는 것을 관대하게 허락한다. 소설이라면 왕의 배포에 감동하여 도리어 끝까지 함께하는 게 이야기의 정석이지만 현실에선 허락받자마자 재빠르게 달아난다. 몇 번이고 말하지만 루이 16세... 주변에 믿을 사람이 너무 없다. 인생 참 딱하기도 하다.

 

루이 16세의 딱한 인생이야 어떻든 달아날 놈들은 달아나고 그나마 남은 일행들은 느릿느릿한 도주를 계속하였다. 그런데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났다. 추격대가 호화로운 마차를 보고 '설마 도망가는 마차겠어?'라고 생각하고는 그냥 지나가버린 것이다.(헐....) 하지만 행운이 있으면 불행도 있는 법. 루이 16세 일행은 자꾸만 왕당파 호위대와의 만남이 엇갈린다. 추격대와 호위대의 엇갈림 끝에서 루이 16세가 만난 건 추격대였다. 동전에 찍힌 얼굴과닮았다는 신고가 들어갔던 것이다. 바렌느 마을에서 체포(?)된 국왕은 결국 파리로 말머리를 돌린다. 왕당파의 군대가 도착한 건 왕이 파리로 향한지 불과 30분 후였다고 하니 정말 모든 것이 아슬아슬했던 사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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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6세의 동전

얼마나 닮았기에...

 

사흘 간의 촌극 같은 도피행각을 끝내고 파리로 돌아왔지만 반겨주는 이가 없다.(당연하다. 파리가 싫다고 떠났던 사람이다. 당신이라면 반겨주겠는가?) 이 사건으로 왕에 대한 지지율은 폭락했다. 국왕을 실드치는 언론들은 이 사건을 '왕이 도주한 게 아니라 오히려 외국귀족들에게 납치당할 뻔한 사건'이라고 여론조작을 해보았지만 반응은 신통찮았다. 예나 지금이나 눈가리고 아웅하는 찌라시언론들은 존재하는 모양이다.

 

바렌느 사건으로 분위기가 안 좋게 돌아가자 왕당파들은 당을 급히 결성했는데 이름하여 '푀양파'다. 바렌느 사건이 6월 22일이고 당 결성이 7월 16일이니 한 달도 안 걸린 셈이다. 평소엔 그렇게 느릿느릿하던 정치가들도 자신들을 위한 목적이 있으면 정말 신속하게 행동한다. 평소에도 국민들을 위해서 그렇게 해주면 좋으련만.(안 될 거야. 그래. 안 되겠지) 푀양파는 온건주의자에 입헌군주제를 옹호하는 왕당파들이었으며 자유주의 귀족이나 부르주아 같은 있으신 분들로 구성된 모임이었는데 멤버들이 엄청나게 빵빵했다. 특히 혁명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는 시에예스 주교가 돋보이는데, 이분은 2편에 나온 탈레랑 주교와 여러 가지로 많이 비교되는 분이다. 탈레랑 주교는 귀족출신인데 반해 시에예스 주교는 우편집배원의 아들이었다. 신분이 하늘과 땅 차이다. 둘 모두 뛰어난 논객이었지만 탈레랑 주교와 달리 시에예스 주교는 말빨이 딸려서 주로 글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탈레랑 주교는 사생활이 개판이었지만 이 분은 결벽증적으로 청렴해 주변의 존경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여러 가지 면에서 정반대의 인물이었다. 또한 파리의 시장이며 국민의회에서 여론을 주도하는 인물 중 한명이었던 바이이 경 또한 푀양파였으며 국민방위대 사령관 라파예트 경까지도 푀양파의 멤버였다. 정말 ㅎㄷㄷ한 인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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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예스

프랑스 혁명의 정신적 거물이자 이후에도 계속해서 큰 역할을 하는 인물이다.

 

그런데 당이 결성되자마자 안 좋은 일부터 터졌다. 당 결성이 된 다음날 상 드 마르스 광장(1년 전 연맹제에서 국뽕을 신나게 들이켰던 그 장소다.)에서 자코뱅당 주도로 정권과 의회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열렸던 것이다. 참고로 푀양클럽의 인사들은 현재 정권을 쥐고 있는 인사들이었다. 즉, 여당이란 소리다. 여당이 결성되자마자 정권퇴진시위가 일어났다. 그런데 여당인 푀양파 인사들의 대부분은 원래 자코뱅당에서 탈퇴한 인사였다.(푀양파, 지롱드파 모두 자코뱅에서 나온 분파들이다.) 즉, 자코뱅당은 대규모 탈당 사태를 겪은 것이다. 정권퇴진시위는 위기에 빠진 자코뱅당이 완전히 훅 가기 전에 머라도 해보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처음엔 평화적인 시위였다. 시위에 가담한 시민들도 경계를 서는 국민방위대도 평화롭게 끝나는 듯 했는데 역시나 곱게 안 끝났다(인간들이 살짝 흥분한 시대라서 그런가? 조용히 넘어가는 게 없다) 


결국 분위기 험악하게 선동하는 인간들이 있었다. 열 받은 파리 시장 바이이는 계엄령 선포해버린다. 결국 라파예트 경이 무력으로 진압하고 5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만다. 상 드 마르스의 학살 사건이다.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다. '상 드 마르스의 학살!', '이게 다 노무현 아니 라파예트 때문이다!'(에휴~ 또 저 무개념 논법ㅡㅡ;;;) 라파예트 경의 지지율은 바닥을 쳤다. 바이이와 라파예트 경 결국 둘 다 하야하고 대규모 탈당사태로 인해 훅 갈 뻔했던 자코뱅당은 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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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드 마르스의 학살

사건이 모두 라파예트 잘못인 것처럼 느껴지는 그림이다. 진실여부를 떠나 언론의 힘은 무섭다.

 

한편 바렌느 사건 때 루이 16세는 도망치지 못했지만 그 동생인 프로방스 백작(훗날 복고왕정시대에 루이 18세가 된다)은 오스트리아로 도주하여 레오폴트 2세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레오폴트 2세는 여동생 부부의 어려운 처지를 안타깝게 여겨(정말?) 도움을 주기로 한다.(진짜?) 전 유럽의 왕공에게 편지를 띄워 반프랑스 연합을 제의했다.(연합이고 자시고 그냥 구조대를 보내주면 되잖아.) 근데 반응들이 시큰둥했다. 영국은 여론의 눈치를 보느라 참여를 못하고 러시아는 황제가 병으로 드러누워 있었다. 스페인이랑 샤르데냐, 나폴리 등은 자신들이 국력면에서 상대가 안 된다는 점에 겁을 먹고 가담하지 않으려 했다. 


결국 스웨덴이랑 프로이센이 가담하기로 했는데 스웨덴 왕이 얼마 되지 않아 데꺽 죽는 바람에(암살이었다) 결국엔 프로이센이랑 오스트리아만 남게 된다.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군주는 필니츠 성에서 폴란드를 어떻게 갈라먹을까 지들끼리 의논하다가(약소국의 설움. 남일 같지가 않다.ㅜㅠ) 프로방스 백작이 자꾸 귀찮게 굴어서 프랑스 왕을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돕겠다는 협박문을 하나 내놓는다.(필니츠 선언. 8월 27일) 사실은 전혀 지킬 생각이 없었지만 말이다. 역시나 여동생 부부에 대한 안타까움은 거짓말이었다. 하긴 20년 넘게 얼굴 한 번 안 보고 지냈는데 무슨 정이 있어서...

 

지들이 협박을 하건 말건 그로부터 일주일 뒤 프랑스에선 드디어 1791년 헌법이 제정된다.(9월 3일) 프로방스 백작은 헌법을 비난하며 외국의 군대가 파리를 초토화시킬 것(서울 불바다?)이라며 강하게 엄포를 놓았다. 이쯤 되자 처음엔 필니츠의 협박문 따위 무시하던 분위기도 슬슬 바뀌기 시작한다. 국왕에 대한 불만이 또다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바렌느 사건의 기억도 새록새록 나기 시작하고... 반왕당파측 언론에선 다시 여론 몰이를 시작하는데 '이게 다 왕 때문이다.'(또 다시 등장하는 개념 없는 논법ㅡㅡ;;;) 루이 16세 정말 되는 일이 없다. 이제야 바렌느 사건이 조금씩 잊혀져 가나 싶었는데...

 

여론은 여론이고 일단 만들어진 헌법에 루이 16세가 선서를 하고 다시 왕으로서 재등장한다. 9월 말에 제헌의회가 해산하고 10월에 입법의회가 발족된다. 새로 들어선 의회와 내각은 필니츠 선언과 망명귀족들의 위협발언 등으로 인한 국내의 애국주의 분위기를 타고 막무가내로 전쟁을 밀어 붙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만 할 이유가 있었다. 2편에 등장한 빌어먹을 아씨냐 화폐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는가? 그렇다 프랑스의 경제상황은 엉망이었다. 프랑스의 정줄 놓은 통화정책은 나폴레옹이 집권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나폴레옹이 그렇게 독재를 해대었음에도 국민들이 대규모로 들고 일어나지 않았던 것은 너무 깽판치던 인간들만 보다가 좀 덜한 인간을 보니 '어머 얘 괜찮다~'라며 감동의 눈물(?)을 흘렸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폴레옹이 집권하자마자 한 정치적 쇼 중에 하나가 아씨냐를 모아놓고 국민들 앞에서 불태우면서 자신이 살아있는 한 다시는 아씨냐를 발행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었다.(실제로도 발행하지 않았다.) 


 

8.

 

어쨌든 엉망인 경제상황 속에서 국민들의 불만을 달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당연히 분배를 해야 한다. 혁명이 뭣 때문에 일어났는가? 불공정한 분배 때문에 일어났다. 하지만 윗분들은 그러고 싶진 않았다. 일단 혁명을 해서 자기들이 새로운 윗사람이 됐으니 지금의 상황을 유지하는 게 젤 좋은 거다. 그럼 분배 없이 불만을 달래는 방법은 무엇인가? 역시 애국주의,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게 최고다. 애국주의,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인가? 다른 나라, 다른 민족을 증오하게 만드는 것이 가장 편리하다. 증오심을 일으키는 방법으론 무엇이 있는가?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은 전쟁을 하는 것이다. 죽고 죽인 상대만큼 증오하기 좋은 상대는 없으니까. 혁명과 민주주의의 정신은 후퇴하고 기득권층의 이익만이 남았다. 2편에서도 말했듯이 ‘애국주의’라는 이름의 괴물은 프랑스 혁명이 낳은 사생아다. 어쨌든 프랑스 혁명 전쟁은 피할 수 없었던 셈이고 피할 생각도 없었던 것이다.

 

1792년 3월 지롱드파 내각이 들어선 후 전쟁 논의는 더욱 박차를 가했다. 몇몇 제정신이 여전히 이성을 가지고 어떻게 막아보려 했으나 어림도 없었다. 이때 참 묘한 것이 훗날 공포정치의 대명사가 되는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가 이때 적극적인 반전의사를 표명했다는 것이다. 열렬한 이성(理性)주의자였던 그가 보기에 이 전쟁은 비이성적이고 터무니없는 것으로 탐욕스럽기만한 짐승들의 전쟁과 다를 바 없었다.(그렇게 이성을 중시하던 인간이 나중에 사형 집행서에 미친 듯이 싸인을 해댔으니 세상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프랑스에서는 전쟁을 하기 전 확실히 해두어야 할 것이 생겼다. 누가 남이고 누가 우리 인지를 확정해 두어야했다. 그 중 하나로 인종차별을 철폐하고 같은 국적을 가진 사람은 모두가 프랑스인이라고 선포했다. 최소한 형식상으로는 말이다. 프랑스 국적을 가진 사람이라면 인종, 연령, 사는 곳을 넘어 모두가 같은 프랑스인인 것이다. 그들 사이의 벽은 재산뿐 이었다.(심각하게 높은 벽이었지만...) 전쟁직전에 인종차별을 철폐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식민지에서 노예반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손쉽게 진압이 가능했다면 걍 무시했으련만 상황이 그렇지 못했다. 특히나 아이티(몇 년전 지진 난 그 섬나라가 맞다.)에서 일어나 반란은 상당했다. 아이티 혁명과 투생 투베르튀르 장군 이야기도 하고 싶지만 이 글에선 일단 넘어가자. 어쨌든 진압이 안 되니 그냥 같이 가는 걸로 노선을 바꿨다. 왜? 자유, 평등, 우애라는 구호도 있지 않는가? 같은 프랑스인으로써 같이 전쟁터로 가세!(ㅡㅡ;;;) 인종차별이 철폐된 날은 4월 4일.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혁명전쟁이 시작된 날은 그로부터 정확히 2주 후인 4월 20일이다. 말 그대로 전쟁직전에 누가 누군지 확실하게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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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생 투베르튀르

프랑스에서 한창 혁명이 벌어질 무렵, 그는 아이티의 혁명과 독립을 위해 싸우던 투사였다.

 

어쨌든 전쟁이 시작되었다. 프랑스 대 오스트리아. 강대국끼리 맞붙었으니 흥미진진 일진일퇴는 개뿔 시작부터 연전연패. 개박살났다. 별다른 준비도 없이 전쟁을 위한 전쟁을 벌였으니 당연한 결과다. 게다가 군기도 엉망이었다. 장교는 대부분이 귀족출신이었는데 혁명으로 인해 많은 수가 도망가 버렸다. 지휘공백이 생겨버린 것이다. 허둥지둥 장교들을 뽑아 넣었지만 정말 자격미달의 인간들이 넘쳐났다. 뺑기칠장이에, 의사에... 제대로 된 지휘를 기대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병사들도 갑자기 모집한 신병들이니 제대로 싸울 수 있을 리 없다. 오합지졸의 프랑스군과 잘 훈련되고 갖추어진 오스트리아군과의 싸움은 보나마나였다.

 

이렇게 자꾸만 패전소식이 들려오자 난처해진 것은 정부와 여당이었다. 지롱드 내각은 결국 책임론에 밀려 루이 16세에게 파면되었다. 지롱드 내각이 무너지고 대신 왕당파인 푀양파가 다시 들어섰다. 이제 루이 16세에게 다시 기회가 오려는가 싶었지만 지롱드파 역시 그냥 가기는 싫었는지 파리 빈민들의 시위를 선동하였다. '전쟁이 불리한 건 왕의 근성이 부족해서다!'(스포츠야 그렇다 치고 전쟁이 근성과 뭔 상관이야ㅡㅡ;;;) 그런데 그걸 믿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당시의 파리 시민들이었다. 닥치는 대로 무기가 될만한 것들을 집어 들고 튈르리 궁으로 우르르 몰려가선 근위병이고 머고 밀어내고는 왕의 면전까지 들이 닥친다. 그런 다음 두 개의 머리띠를 내놓고 하나를 선택해 달라고 하는데 하나는 왕실의 상징인 흰색이고, 다른 하나는 혁명의 상징인 삼색이었다. 수천 명이 몰려와서 쳐다보는데 당연히 삼색머리띠를 들어 머리에 묶는다. 이제 삽질하러 가면 되나? 다행히 왕더러 삽질하란 소리는 안하고 여기서 만족한 채 군중은 조용히 물러간다.

 

군중이 물러간 후 루이 16세는 탄식이 나왔을 것이다. 명색이 왕인데 저렇게까지 망가지다니.(..쩝) 이 시기 파리에 있었던 23살의 나폴레옹은 기존의 질서와 도덕의 붕괴 그리고 그것을 선동한 지롱드파의 정치협잡을 보며 충격을 받는다.(훗! 저 친구 쇼크를 받았나보군.) 지금껏 자신이 꿈꾸었던 이상적인 혁명과 실제의 모습이 너무나 달랐던 것이다. 순수했던 어린 영혼이 커가는 과정이랄까?

 

6월 20일 파리 시민들은 국왕의 근성(?)을 확인하고 갔지만 그런다고 전황이 나아질 리 없다. 오합지졸들이 갑자기 정예병으로 바뀌는 것도 아니고 어중이떠중이 지휘관들이 백전노장으로 돌변하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더군다나 오스트리아도 버거운데 7월 8일에는 프로이센도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했고 19일엔 결국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이끄는 연합군이 프랑스 국경 안까지 쳐들어왔다. 지금까지는 그나마 공격이었으나 이젠 수비가 되었다(이런 넘들을 데리고 선빵을 날릴 생각을 하다니... 제정신으론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지만, 정치논리론 가능한 삽질이다). 첫 전투에서부터 대패하자 프랑스 정부는 정말 구석에 몰렸다. 이렇게 핀치에 몰리자 동안 프랑스 정부는 무엇을 했는가? 내각 총사퇴 했다.(그걸로 끝? 나 참...) 그리고 불과 한 달 만에 재집권한 지롱드 내각은 국민들의 애국심에 호소하고 있었다. '조국이 위기에 빠졌습니다!'라며 의용병이란 이름으로 국민들을 징병하였다. 질로 안 되면 물량으로 승부한다. 지롱드 내각은 전국민을 징병해서라도 전쟁을 치를 작정이었다. 무식한 방법이었지만 국민개병제의 도입은 효과가 확실했다. 결국엔 승리를 얻어내기에 충분한 병력을 뽑아낼 수 있었으니까.

 

아참 '라 마르셰예즈'노래도 이때 징병한 군대의 군가였다. 아무리 국뽕을 맞혔다고 해도 인간을 죽으러 가라고 하기는 쉽지 않다. 수천 년의 역사를 통해 만들어지고 다듬어진 인간을 죽으러 가게 하는 기술 중 하나가 군가다. 우렁찬 노래를 반복해서 들려줌으로써 도취상태에 빠지게 만들어 죽으러 가게 만드는 것이다. 라 마르셰예즈 역시 그런 용도의 노래였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노래 있지 않은가? 사나이로~ 태어나서~ 어쩌자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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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당통

나폴레옹을 멘붕시킨 정치를 보여주셨다. 

그리고 마지막엔 자신도 멘붕하며 목이 뎅겅 떨어지셨으니 자업자득이라 하겠다.

 

 

9.

 

다시 위기의 프랑스로 돌아가자. 국민개병제를 실시하기로 했지만 지금 당장이 문제였다. 적은 계속해서 밀려오고 전국 각지에서 징병한 병사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25일에는 적장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파리를 괴멸시킬 수 도 있다고 위협을 해왔다. 파리는 공황 상태였다. 자주 판단력을 상실해왔던 파리 시민들은 이번에도 판단력을 상실했다. 판단력 없어진 파리 시민들이 이번에 벌인 일은 왕의 근성을 재확인 하는 것이었다.(쟤네들 왜 저래?)

 

8월 10일 밤에 시민들은 또다시 튈르리 궁으로 몰려간다. 이번엔 정말 험악했다. 근위대가 막아서자 도륙 내버렸다. 근성을 확인하러 갔던 시민들 왕의 근위대가 막아선 것을 보자 왕의 근성이 없다고 생각하고는 분노했다.(아, 글쎄 그 근성이란게 도대체 전쟁이랑 뭔 상관이야!) 그들은 그대로 궁전에 침입해서 궁전을 탈탈 털어가기 시작했다. '누구는 잘 먹고 잘사는데 우린 이게 머야!' 더 이상 왕에 대한 존경심 따윈 없다. '궁전의 값진 물건은 결국 우리들의 고혈이잖아. 다 뜯어 가고야 말겠어.' 어쨌든 튈르리 궁을 약탈해서 돌아오는데 국민방위대랑 마주친다. 이들이나 국민방위대나 다 같은 파리의 가난뱅이들이다. 반갑게 인사하려는데 이게 왠일? 총알이 날아온다. 정부에선 이들을 폭도로 규정하고 전원사살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 자리에서 죽지 않은 사람들도 모두 처형되었으며 그들이 약탈했던 물건들은 전부 반환되었다. 당시 지롱드 내각은 왕당파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가난한 민중의 편은 더더욱 아니었던 것이다. 부유한 부르주아지를 대표하는 사람들이었던 지롱드 내각의 관점에서는 사유재산의 약탈이야 말로 참을 수 없는 범죄였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민중이 아닌 특권계급의 상징인 왕의 편을 들었다. 자기들이 필요할 땐 '조국이 위기에 처했습니다.'를 외치며 민중들에게 목숨까지 공짜로 내놓을 것을 요구하던 자들이 말이다.

 

여러가지로 황당했던 이 사건은 많은 것을 보여준다. 비천한 신분의 사람조차 왕을 존경하지 않게 되었다. 오랜 세월 인간을 지배해왔던 왕권이 완전히 끝장난 것이다. 다음날인 11일 왕권이 정지되고 루이 16세는 탕플 탑에 유폐된다. 또한 아무리 공분의 대상이라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사유재산임을 확인시켜준 사건이기도 했다. 왕이나 혁명 따윈 중요치 않다. 사유재산이 가장 중요하다. 사유재산이 어떻게 이루어 졌는가에 대한 질문은 이루어지지 않은 채 말이다. 최초의 공산주의자로 꼽히는 바뵈프는 사건이 있은 다음날 의회에 가서 분노를 쏟아냈다. 그들을 전원 사형에 처한 행위는 부유한 자들을 위해 평등과 우애의 정신을 사형에 처한 것과 같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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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노엘 바뵈프

별명은 “그라쿠스” 바뵈프. 

이 호민관이 비명횡사를 피할 수 없었던 것은 수천 년의 역사를 통해 검증된 것이었다.(ㅠㅠ)

 

그러면 왕과 천민, 니 것과 내 것이 없어졌던 1792년의 어떤 하룻밤은 뒤로 하고 다음 이야기를 계속하자. 왕은 유폐되었지만 많은 사람이 처형된 일은 불만을 샀다. '아씨 빵집 좀 털었다고 이렇게 사람을 마구 죽이기야?'(어느샌가 국왕이 빵집주인이 되어버렸다.) 거기에다 전쟁 상황도 연전연패를 거듭, 전쟁을 통한 국뽕효과도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러자 권력자들은 또다시 추악한 행동을 하는데 당통이 이때 연설하길 '적을 물리치는데는 하나도 용기, 둘에도 용기다'라며 끝까지 근성타령으로 국민들을 격려했다. 그 격려를 받는 국민들은 그 격려를 들으며 용기를 내어 외적과 싸웠던... 것이 아니라 반혁명용의자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그 당시 프랑스는 반혁명재판이 한창이었기 때문에 반혁명용의자 후보로 올라 조사 받기 위해 감옥에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중에는 2편에서 말한 국가에 대한 충성맹세거부 성직자들도 제법 있었다. 그 밖에 아직 재판결과가 나오지 않은 채 기다리고 있는 이들도 많았다. 하지만 외국과 전쟁에서의 패배라는 자신들의 실정의 책임을 피하기 위해 통치자들은 희생양을 택했다. 당통과 그 무리들 역시 반혁명용의자들을 내부의 적으로 몰아가는 연설을 했고 수천 명이 감옥 속에서 저항도 하지 못하고 학살되었다. 전쟁, 정치가의 선동, 학살. 어쩐지 어딘가에서 보는 거 같다. 보도연맹이라든지, 보도연맹이라든지...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악한 정치행태가 자꾸만 재발되는 것은 고민해봐야할 문제이긴 하지만 독자 스스로 고민토록 하고 다음 이야기를 하자. 우리의 주인공 ‘정신줄 상실한’ 프랑스, 연패를 거듭하고 있었지만 9월 20일 드디어 쥐꼬리만하지만 첫 승리를 발미에서 거둔다. 처음으로 거둔 승리 소식에 프랑스 인들은 열광했다.(얼씨구 지화자 좋구나~) 또한 그날로 입법의회가 끝나고 다음날 ‘국민공회’가 들어선다. 입법의회의 끝과 국민공회의 시작은 분위기가 좋았지만 국민공회는 ‘공포정치’로 후대에 알려진다.

 

이야기는 4편에 계속...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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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홀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