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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교 입학식 날 그 아이를 만났다. 코찔찔이들은 왼쪽 가슴에 하얀 손수건을 걸고 담임선생님의 호명으로 한 무더기씩 모여들었다. 1학년 3반에 배정되었다. 운동장 한 켠에 남자아이 두 줄 여자아이 두 줄이 세워졌다.


곧바로 교실로 들어가지 않았다. 담임선생님은 줄을 맞춰놓은 아이들의 무리에서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를 하나씩 불러냈다. 어색하게 둘씩 줄 세워지는 모습을 보면서 입학식은 첫 경험이었지만 본능이 주는 깨달음이 있었다. 짝을 지어주는구나.


순간적으로 상황파악을 위한 집중력이 높아졌다. 선생님은 첫째 열 남자아이와 셋째 열 여자아이를 줄 세워 놓은 순서대로 불러내고 있었다. 고도로 집중된 인식능력으로 내가 선 줄과 매치되는 여자아이들의 줄을 스캔했다.


주위를 둘러보느라 목을 덮은 단발머리가 찰랑거리고 ,눈이 구슬처럼 반짝이는 여자아이를 보았다. 둘둘 불려 나가다 보면 두 자리가 어긋난다. 태어나서 가장 지혜롭던 일곱 살 남자아이는 세워진 줄에서 호명을 기다리라는 명령을 자의적으로 판단했다.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사내아이를 앞으로 보내고 자리를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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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박히던 여자아이와 나란히 섰다. 다시 줄 세우기가 끝나고 교실로 이동해서 책상을 배정받았다. 초록색 페인트로 칠해진 2인용 나무책상에 짝지어진 아이들이 앉혀졌다. 성공적인 시작이었다.


태어나서 가장 지혜로워진 일곱 살이지만 인내력은 여섯 살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여자아이의 이름을 알게 되고 느닷없는 고백을 했다. 입학식 날 선생님이 짝을 지어주는 걸 눈치채고 너와 짝이 되기 위해 자리를 바꿨다. 내 눈에 네가 제일 예뻤다.


지체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도 네가 좋았다. 그날부터 둘이 늘 붙어 다니며 공인된 커플이 되었다. 무성에 가까운 일곱 살들의 애정행각이 조금 유별났던 것 같다. 선생님들과 전교생이 인정했다.


2학년에도 같은 반이 되어 손 잡고 다녔다. 데이트라야 별 볼일 없는 시골이었다. 봄날엔 햇볕 따듯한 화단에, 더운 여름엔 백엽상 그늘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막내 동생을 업고 서로의 집을 찾아가 놀기도 했다. 그 아이의 엄마는 안 그랬는데 아버지는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다. 어린 마음엔 그저 서운했다.


어느 날 굳은 결심을 한 여자아이가 말을 했다. 우리 스무 살 어른이 되면 결혼하자. 만약에 그때 집에서 반대한다면 난 집을 나올꺼야. 그럼 너는 나를 받아 줄 거지. 조숙한 여자아이의 말에 결혼의 의미는 전혀 모르고, 스무 살의 어른이 되는 날은 더더욱 먼 나는 기꺼운 동의를 했다.


그래 우리 스무 살이 되면 결혼하자. 새끼손가락을 걸고 엄지로 도장을 찍고도 미심쩍은 여자아이는 몇 번을 확인하고 둘만의 비밀로 하기로 하고서야 겨우 안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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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학년이 되면서 반이 갈렸다. 자연스럽게 동성친구와의 우정을 학습하는 시기에 접어들었다. 여자아이는 여자아이들의 그룹을 들어가 우정을 돈독하게 하는 뒷 담화를 나누고, 말 싸움 같은 살면서 필요한 기술들을 습득하는 데 열중했다. 뛰어난 학습능력으로 작은 한패거리를 이끄는 우두머리가 되었다.


나는 새로 사귄 친구들과의 친교를 위해 이웃마을들을 방문하러 다녔다. 남자아이들의 우정에 시끄럽고 난폭한 여자아이들은 이해 할 수 없는 존재였다. 여자아이들의 눈에 남자아이들은 단순하고 폭력적이고 미숙해보였을 것이다. 여자아이와는 마주쳐도 서로 피하고 조금씩 멀어졌다.


학교에서는 전두환 대통령 각하, 이순자 영부인 여사라는 호칭을 날을 잡아 가르쳤다. 군인은 가장 강하고 강력한 존재였다. 세 친구가 걸어가며 각각 육군대장 해군대장 공군대장이 되자고 소란스러운 날이 있었다. 사실은 육군 대장을 꿈꾸던 만호가 나와 다른 친구에게 대장자리를 한 자리씩 안겨준 것이다.


그 해 여름 강물에서 물놀이를 하던 만호가 죽었다. 며칠을 찾던 시체는 하류에서 기도하듯 웅크린 자세로 발견되었다는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만호가 죽었다. 이제 학교에 나오지 않는다. 볼 수 없다. 놀지 못 한다. 빈 책상을 보고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면서도 죽음을 슬퍼해야 한다는 걸 이해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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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새로운 걸 경험하는 아이들의 시간은 천천히 흐른다. 손을 잡고 다녔던 기간보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열 두 살 여자아이가 굳은 표정으로 다가왔다. 예전 그 약속을 기억하냐고 물었다.


그 시절 업혀다니던 막내 동생의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이렇게도 작았던 시절이었구나. 이렇게 작아도 한 사람분의 씨앗은 품고 있다. 조금씩 자라고 변해서 이제 어른이다. 어른은 아이에게 책임이 있다.


박근혜가 탄핵되고 세월호가 물 위로 올랐다. 오히려 짙은 무력감에 눌렸다. 조금 억울한 면도 없지는 않지만 아이에게는 마땅히 어른 노릇을 해야 한다. 사회 기득권들의 부조리에 대한 불만, 불평등에 대한 분노, 대를 잇는 계급구조에 대한 환멸 같은 것들로 책임을 돌리고 당당하기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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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우


편집 : 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