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홍석현 중앙일보, JTBC 회장이 사임했다. 이 양반을 대선후보 시리즈로 붙여야 할지 언론사주 시리즈로 붙여야 할지 조금 고민했지만, 그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아 언론사주 시리즈의 첫 주인공으로 선정했다. 언론계에 종사한 사람이므로 미디어에 노출된 것이 무척이나 많아서 기준을 어디에 잡아야 할까 싶었는데, 이 글은 홍석현 사장을 잘 몰랐던 사람을 대상으로 초점을 맞췄다. 또 언론사주이므로 여러 저서에서 소개되는 비사보다 여러 기사를 통해 그를 조명해 보았다. 읽으시기 전에 이 점 참고하시고, 그는 어찌하여 이 시점에 '나대나'. 그를 디벼보자.


135733_191179_0425.jpg


[프로필]


홍석현(洪錫炫)

 

1949년 출생

1968년 경기고 졸업

1972년 서울대 전자공학 학사

1980년 스탠퍼드대학교 대학원 산업공학 석사, 경제학 박사

1983년 재무장관 비서관

1985년 대통령 비서실장 보좌관

1986년 ~ 1994년 삼성코닝 상무, 전무, 부사장

1994년 중앙일보 사장, 발행인

2005년 제20대 주미국 대한민국대사관 대사

2006년 중앙일보 회장

2011년 JTBC 회장


1949년, 출생했다. 본관은 남양 홍씨 당홍계 남양군파. 조선 후기의 권세가문이면서 지금도 권세가문이다. 한 세기를 뛰어넘는 리얼 금수저 집안이라 하겠다. 부친은 일제강점기에 판사를 역임하고 이승만 정권 아래선 법무부, 내무부 장관을 역임한 홍진기, 홍석현 회장은 어려서부터 정치적인 열망이 남달랐는데, '사장 아들'보다 '장관 아들'로 불리기를 더 원했다고. 요즘의 행보를 보면 70년 묵은 진정한 대망이라 할 만하다.


그 후 엘리트 중의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성장했다. 재밌는 것은 홍진기의 네 아들 모두 경기고 출신이란 점. 부친은 자녀들에게 끊임없이 독서와 공부를 강조했는데, 홍석현 회장이 스탠퍼드대에서 박사를 받고 세계은행에서 근무하기 직전 부친이 안부 전화를 걸어 "무슨 책을 읽고 있느냐"고 물었고, 여러모로 바빠서 대답을 못 하자 부친에게 졸라 혼났단다.


홍 회장은 한국에서의 첫 발을 공직으로 내디뎠다. 1985년, 전두환 정권 시절 비서실장인 강경식의 특별 보좌관을 수행하다가 1년 3개월 만에 짤렸다. 순전히 없는 자리를 그를 위해 만들어낸 '창조 공직'인데, 특별 승진을 요구해서 전두환의 "재벌 놈들은 왜 다 이 모양이야"라는 갈굼을 먹고 강경식 비서실장까지 나가리 되었다는 썰이 있다.


94년엔 이건희 회장의 드넓은 아량으로 <중앙일보>를 냠냠한다. 지금까지 홍 회장이 펼친 개혁책들은 아직도 높은 평가를 받는데, 섹션 분리, 전문기자 제도 도입, 온라인 뉴스 서비스 개시, 중앙SUNDAY 창간, 대판에서 베를리너판으로 변경, 그리고 JTBC 개국과 손석희 영입까지. 하지만 여전히 삼성의 사보 역할은 포기하지 못했고 <중앙일보>는 점차 홍석현의 왕국이 된다.


images.jpeg


97년엔 대놓고 이회창을 밀며 '이회창 대통령 만들기' 프로젝트를 가동하는데, 이것이 유출되기도 했다. 이때 홍 회장이 남긴 명언들이 많다. "DJ 정부는 6개월을 못 넘긴다. 호남과 하층민을 기초로 들어선 정권에 대해서는 비판적 자세로 나가야 신문 판매도 유리해진다."라거나 "DJ가 당선되었어도 자기 뜻대로 인사를 할 수 있다면 내손에 장을 지지겠다." 등. 실제로 DJ는 임기 초반 국회의 비준 거부로 총리조차 임명하지 못했다.


99년엔 보광그룹 세무조사 사건에서 탈세가 확인되어 구속된다. 이 때 <중앙일보> 기자들이 출두하는 홍 회장을 위해 외친 "사장님 힘내세요!"는 한국 언론계의 레전드. 2005년, 97년 대선을 앞두고 이학수 대표와 함께 검찰과 정치인에게 떡값을 돌리는 대화를 나눈 삼성 X파일의 녹취록이 공개되어 최대 위기를 맞지만, 슬금슬금 극뽀옥. 홍 회장은 직접 떡값을 배달하기도 하고, 이 과정에서 배달 사고가 일어나 30억을 인마이포켓 한 것 아니냐는 의혹도 받은 바 있다. 결국, 어렵게 득템한 주미대사 자리를 7개월 만에 내려놔야 했다. 관운이 정말로 없는 양반이다. 반기문의 반만 닮았어도 한 자리 했을지도 모르겠다. 덕분에 그가 노리던 유엔사무총장 자리는 반기문이 어부지리로 득템.


좌우지간 그의 생애 전반에 걸친 의혹들은 너무도 많아 일일이 다 열거하기 힘들고, 그 후로 충실한 조중동 사주의 역할을 수행하다 가문의 치욕이던 동양방송을 JTBC로 되찾아온 뒤 손석희를 영입한다. 그리고 2017년, '작은 힘이라도 보태겠다'며 정치 참여를 선언했다.




1. 홍진기와 로열패밀리


필자는 이 시리즈를 연재하면서 그들의 가족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최대한 자제하려 했었다. 가족관계나 가정환경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는 잘 알고 있지만, 어떤 인물에 대한 비판이 그의 가족에게까지 옮겨가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홍 회장의 경우는 빼놓을 수가 없다. 그의 부친과 대한민국 1%인 홍씨패밀리를 빼놓으면 홍 회장을 논할 수 없다.

 

s314_4.jpg 


삼성과 홍씨 가문과의 인연은 홍석현 현 중앙일보 오너의 부친인 홍진기 전 법무부장관으로부터 시작된다. 홍진기 씨는 식민지 시절 경성제대 법과를 졸업하고 1942년 경성지법 사법관시보, 1944년 전주지법 판사를 지냈다. 이런 전력으로 인해 그는 지난 8월 29일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 1차 예정자 명단에 올랐다.

1960년 3·15 부정 선거 당시 홍진기는 법무부장관이었는데, 이후 4월 마산 사변으로 내무부장관이 사퇴하자 후임 내무부장관직을 맡았다. 그가 내무부장관으로 있었던 4월 19일 경찰 발포로 서울에서만 100여명이 죽었는데, 홍장관은 이승만 대통령을 강력히 설득해 계엄령을 선포하게 했다. 4·19 혁명이 끝난 뒤 그는 구속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홍씨가 구속되어 있을 때 이병철 삼성 회장이 신현확 전 총리의 소개를 받아 그를 면회했다. 이병철 회장의 옥바라지는 홍씨를 감동시킨 듯하다. 어려울 때 도와준 은혜, 이것이 두 사람이 파트너가 된 계기였다.

1963년 특사로 풀려난 홍씨는 1964년 삼성이 세운 서울중앙라디오방송 사장으로 취임해 언론 사업을 시작했다. 1966년에는 역시 삼성이 세운 중앙일보 대표이사 사장이 되었다. 이듬해인 1967년 홍라희와 이건희의 결혼으로 두 집안은 사돈이 되었다. 고 이병철 회장은 홍진기씨를 존경하며 신뢰했다. 홍진기씨의 조언은 이병철 회장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셋째 아들인 이건희 회장이 형을 물리치고 삼성그룹을 이어받는 데도 홍진기씨의 영향력이 컸던 것으로 전해진다. 홍진기씨는 1986년 사망했다.

이건희 회장의 아내이자 후계자 이재용 상무의 어머니인 홍라희 리움미술관장(60)은 홍씨 집안의 장녀다. 홍라희 여사는 삼성전자 주식 100만 주 등을 보유하고 있다. 시가총액 5천억 원이 넘어 신세계 이명희 회장에 이어 여성 부호 2위에 올라 있다.

X파일의 주인공 홍석현 전 주미대사(55)는 홍씨 집안의 장남이다. 1994년 중앙일보 대표이사 부사장에 취임해 10년간 중앙일보를 이끌었다. 홍석현 회장의 장인은 박정희 정부 시절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신직수씨다. 
      
- 시사저널, 또 하나의 '왕족' 홍씨 사람들 (링크)

 

20101019112604_ckpark_1.jpg

< 출처 : 이투데이>


진보 계열에서 '일제강점기 이후 권력이 주는 꿀만 냠냠 빨면서 암 덩어리가 되어버린 세력'들을 규탄하면 보수 쪽에서는 '그런 거 없다.' 라거나, '국가 경제 발전에 헌신한 사람들에게 무슨 망발이냐'라는 류의 논리로 대응한다. 8.15 광복 이후 격동의 세월을 보내오면서 모든 친일파의 후손이 지금까지 부를 유지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일부는 여전히 살아남고, 위기 때마다 오히려 더 큰 부를 챙겨왔으며, 지금은 국가 권력으로도 제압할 수 없는 위치에 올라섰으니, 대표적인 세력이 '홍씨 패밀리'다. 좌 JTBC 우 <중앙>의 홍석현, 전직 검사이자 CU 편의점 회장 홍석조, 이건희 회장의 부인이자 재드래곤의 모친인 홍라희 등, 한국인들은 깨어나서 잠들 때까지 단 하루라도 홍씨일가의 기업들과 마주치지 않는 날이 없다. 기업을 '그들의 것'이라고 표현해야 하는 현실이 슬프지만.

그런 가운데 홍석현은 권력의 시다일 줄 알았던 종편 JTBC에 손석희를 영입하여 탄핵의 선봉장으로 만들었고, 지금은 촛불 민심을 "집단 지성"이라 표현하며 이들의 뜻을 모아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데 일조하겠다고 한다. 홍 회장은 '촛불 혁명'을 어떻게 지켜보았을까. 자연스레 부친인 홍진기의 일화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4.19 혁명을 진압하기 위해 일선에서 활약하고 경찰 발포의 책임이 큰 그에게 내려진 사형 선고. 그리고 이병철의 노력으로 기사회생한 것까지.

지금까지의 홍석현 회장은 언뜻 보면 '촛불 민심에 올라타 그것을 수용하고 건설적으로 실현하는' 자세를 보인다고 할 수 있지만, 필자는 그가 꿈꾸는 대한민국과 촛불이 요구했던 대한민국은 극복할 수 없는 태생적인 간극이 있다고 본다. 그 첫 번째가 바로, 일제에 협력한 법관 출신이자, 조봉암의 사형을 위해 노력했으며, 4.19 혁명을 진압하려 한 아버지의 삶. 그리고 아버지로 인해 일굴 수 있었던 홍씨 가문의 가업이 그것이다. 물론 홍 회장이 가문의 부정적 유산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했다면 사정은 달랐겠지만, 알다시피 그렇지 않았다.



2. 정-경-언 유착의 주범


94년, 이건희 회장으로부터 <중앙일보>를 받아 냠냠한 홍 회장은 이런 인터뷰를 남겼다.


이건희 회장과 홍석현 사장 사이에서 <중앙일보>의 소유 분리는 어떻게 논의되어 왔습니까?


94년 8월에 제가 이 회장 댁에 불려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이건희 회장은 이미 결심을 굳힌 것 같았습니다. “너 <중앙일보> 맡을래?”라고 불쑥 말했습니다. 저는 하도 엄청난 일이라서 “집안 사람들과 상의해 보겠다”라고만 대답했습니다. 이 회장은 또 “아버지(故 홍진기 사장)의 혼이 들어간 일을 장자가 떠맡는 것도 뜻 있는 일이지. 아무래도 홍씨 가문은 부(富)보다는 귀(貴)쪽이 맞아”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제 삼성과 <중앙일보>가 서로에게 부담이 될 때가 된 것 같아. 일류 신문은 삼성과 함께 있어서는 안돼. 너 혼자 떨어져서 열심히 해봐”라고 말했습니다. 그 분의 성격으로 봐서 그때 이미 모든 판단과 결심을 끝낸 것 같았습니다. 그게 삼성·<중앙일보> 분리 정책의 발단이자 바탕이었습니다.


- 시사저널, 홍석현 <중앙일보> 사장 인터뷰 (링크)


이건희 회장의 한마디로 인해 삼성과 <중앙일보>가 분리 정책을 시작했다며 당당하게 말하는 95년의 인터뷰. 미국에서 돌아온 후 <중앙일보>에 여러 실험적인 분위기와 리버럴한 논조를 도입하며 조선, 동아와는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던 그가 당당하게 삼성과의 '분리'를 논했다. 그리고, 97년.


홍 사장은 "아,정 팀장이 쭉 얘기를 들어봤는데, 고흥길(중앙일보 편집국장 출신으로 한나라당 이회창 대표 캠프에 합류)이 이회창 험담을 하는데, 그 착한 사람이 "(이 대표가) 귀가 너무 여리고 신경질적이다. 예를 들면, 중앙일보에 토씨 하나 잘못 나간 거 있으면..." 하더래요. 그래서 자기는 더이상 못하겠다고. 그래서 부랴부랴 내가 이 대표한테 말씀을 드리고 중앙일보에서 다 얘기하고 서상목(전 한나라당 의원) 통해서 얘기해서 해피엔딩으로 됐어요"라고 이 실장에게 "브리핑"했다.

검찰 간부들에게 추석 떡값을 주는 문제에 대해서도 두 사람은 대상과 액수를 일일이 거론하며 상의했다. 홍 사장이 "김○○은 아마 둘 정도는 줘야 될 거에요"라고 의견을 말하자,이 실장은 "2000(만원) 정도..."라고 호응했다. 홍 사장은 또 "김△△는 500 정도 주면..."이라며 "이제 홍○○에게 2000 정도 줘서 아주 정리해야 돼. 회장께서 전에 지시하신 거..., 작년에 3000 했는데 올해는 2000만 하지 뭐. 의정부(지청?)에 좀 나눠주라고 그러고, 그 다음에 내가 생각할 때 최○○..." 하고 나열했다. 이에 이 실장은 "그러면 4500하고 5000을 보내 드릴게요"라고 답했다.

- 국민일보, [안기부 X파일 녹취록] (링크)

 

han_258294_1[384709].jpg


안기부가 도청했던 X파일이 드러나고, 삼성의 이학수 대표와 함께 오손도손 미주알고주알 권력의 핵심과 검사들에게 뇌물을 바치는, 그것도 홍 회장이 직접 배달하는 꿀잼스토리가 전국민에게 까발려졌다. 삼성과 홍 회장은 분리는커녕 아예 퓨-전을 했고, 그들은 한국을 움직이는, 누구의 손인지 뻔히 아는 '보이지 않는 손'이 되길 희망했었다.


1269_1844_1546.jpg

< 출처 : 고발뉴스>


여전히 <중앙일보>나 JTBC가 삼성에 비판적인 기사를 실으면, 그 자체로도 기삿거리가 된다. 언론이 재벌을 까는 것이 뭐가 대단한 일이라고. 한편 이재용은 JTBC 관리 좀 하라는 박근혜의 쿠사리를 먹자, '분리된 지 오래 되어서 잘 통제가 안 된다'는 답을 한 적도 있다. 이러한 간접증거들은 홍 회장과 홍 씨 일가, 나아가 <중앙일보>가 삼성과의 커넥션을 끊지 않았고, 또 끊을 수도 없는 관계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재용이 구속되자 누님인 홍라희 씨에게서 '가슴이 찢어진다'는 카톡을 받았다던데, 홍 회장이 졸라게 공명정대한 사람이라 이번 대선에서 킹메이커가 된다 하더라도, 누님의 호소 또는 압박에 굴하지 않고 이재용에 대한 개입을 하지 않을 것인가. 그가 그런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기업을 가업으로 여기는 풍토부터 개선했을 것이다.


“피가 통한 조카인데 당연히 가슴이 아프지. 진행 중인 사건에 대해 얘기하는 건 조심스럽지만 그 상황에서 (청와대의) 강요가 됐든 아니든 거절하기는 한국 문화와, 정부와 기업 간의 관계 등 여태까지의 풍토에서 힘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 가지 첨언하자면, 이게 기업 총수나 한 기업인의 문제로 끝이 나야지 우리 사회에 상당히 위험한 수준으로 팽배해 있는 반기업 정서(로 확대 돼선 안 된다), 더 팽배해지면 누구에게도 이롭지 않다. 우리 기업이 어려워지면 제일 좋아할 사람들이 경쟁자인 외국 기업이고, 제일 손해 볼 사람은 우리 국민이다.”


- 중앙일보, 홍석현 중앙일보, JTBC 회장 인터뷰 (링크)


여기서 촛불민심과의 두 번째 괴리가 발생한다. "재벌도 공범이다!" 라고 외친 촛불과 재벌 그 자체인 홍 회장. '기업 총수나 한 기업인의 문제'로 끝내자는 그의 말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손석희를 영입했다고 해서 그 모든 것과는 선을 그었다고 생각한다면 곤란하다. 아니, 애초에 97년 대선에서 그는 <중앙일보>를 통째로 사용해 이회창을 밀지 않았던가. 정-경-언 유착의 실세가 '촛불 민심'을 오롯이 대변하고 자신조차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을 수 있다고 생각할 사람, 과연 얼마나 있을까. '킹 메이커'를 자처하는 것 자체가 합법적이고 새로운 형태의 정-경-언 유착 시도로 보이는 것이 필자의 과대망상일까. 그렇다면 지적해주시라. 달게 받겠다.


art_14851480286936_19e12e.jpg




3. "사장님 힘내세요"

이 신문은 "홍 회장이 수사기관에 출석할 때마다 어김없이 되풀이 됐던 중앙일보 쪽의 '과잉수행'은 이날도 재현됐다"며 "홍 회장이 특검 사무실 건물로 들어서자 포토라인 뒤쪽에서 있던 해고노동자 전순선 씨가 '시급 3400원, 한 달 500시간, 초일류 삼성의 현실'이라고 쓴 손팻말을 들어올렸다. 순간 중앙일보 조인스 영상 취재 기자가 촬영장비를 이용해 전 씨를 건물 구석으로 몰아붙였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전 씨는 '홍 회장이 들어서자 <중앙일보> 기자가 나를 등으로 밀더니 카메라로 찍는 척 하면서 나를 막았다'고 말했다"고 전하면서 "몸싸움이 벌어지자 취재기자들과 다른 해고노동자들이 해당 기자에게 신분을 밝힐 것을 요구했지만 그는 <중앙일보>의 다른 직원이 이를 만류하는 틈을 이용해 쏜살같이 도망쳤다"고 했다. 또 한 취재 기자의 말을 인용해 "홍 회장 출석 전에 <중앙일보> 관계자가 문제의 기자에게 해고 노동자 쪽을 가리키며 '저쪽을 맡으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는 목격담을 내보냈다.

홍 회장이 조사를 마치고 나갈 때에도 <중앙일보> 기자들의 과잉 충성은 또다시 재연됐다. <중앙일보> 기자 4~5명이 홍 회장을 취재하는 기자들을 가로막아 심한 몸싸움이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방송카메라 한 대가 파손돼 해당 방송사들이 <중앙일보>에 항의하는 소동을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중앙일보>의 '회장님 모시기'는 이미 유명하다. 홍 회장이 지난 1999년 보광그룹 탈세 사건으로 검찰에 출석하자 당시 중앙일보 기자 40여 명이 검찰 청사 앞에 일렬로 서서 "사장님 힘내세요"라고 외쳤다. 또 2005년 X파일 사건 때는 출석하는 홍 회장 앞으로 다가서는 민주노동당원을 당시 중앙일보 사진부 차장이 잡아채는 사건이 있기도 했다.

- 프레시안, <중앙일보>, 이번에도 '회장님 힘내세요!' (링크)

1869_2132_1645.jpg


한국 언론 역사의 레전설 "싸장님 힘내세요!"를 비롯, <중앙일보> 기자들의 '홍석현 호위 무사행'은 언론사 사주로서 그가 어떻게 회사를 관리해 왔는지 단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이었다. 평소 홍 회장은 "편집권을 침해하지 않는 것이 <중앙일보>의 전통"이라고 했는데, 기자들의 '과잉 충성'이 자발적이었든 아니었든 간에 이런 행위가 벌어진다는 것 자체가 <중앙일보>의 시스템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잘 보여주었다.

그 뒤로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중앙일보>는 달라지지 않았다.
 

중앙일보.jpg

출처 : 링크


자회사의 사주를 "관심이 높다"는 이유를 들어 인터뷰 하면서, 쓸데없이 그의 개인적 취향까지 읽어야 하며, 그 내용은 마치 '언론의 신'이 사제들에게 교리를 알려주는 듯한 엄숙한 분위기. 그가 비록 회장직을 내려 놓았지만, 정계에 참여하려는 행보가 위험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언론을 자신의 수단으로 삼고, 그것을 '진실을 전하는 일'이라 포장하며, 사람들까지도 수족으로 부린다.

<중앙>은 24일 이용우 전 기자가 책에서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과 중앙일보 관계자들에 대해 기술한 부분이 사실과 다르다며 심각하게 명예를 훼손한 데 대해 법적 책임을 묻기로 했다고 밝혔다.


<중앙>은 그 예로 이 전 기자가 책에서 “1974년 8월 15일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이 발생한 일주일 뒤 홍석현 현 중앙일보 회장이 결혼식을 치렀으며, 홍진기 당시 회장의 지시로 내가 경주의 숙소를 구해준 뒤 25세의 홍 회장을 밀착 수행하면서 비애감을 느꼈다”란 요지로 쓴 부분을 지적했다.


이에 대해 이 전 기자는 국민TV라디오에서 “결혼 날짜는 본인이 가장 잘 알겠지만 경주에 온 사실이 없다고 잡아 떼는 것은 귀신이 왔다는 것이냐”며, “내가 수행했고 심지어 당시 출장 갈 때 아내한테도 얘기했고 당시 운전기사가 대구에서 살고 있다”고 반박했다.


이 전 기자는 “또 생각나는 에피소드가 관광가이드를 하면서 신부에게 ‘사모님’이라고 했다”며, “그러니까 신부가 홍 회장 옆구리를 치면서 ‘이 아저씨가 나보고 사모님이래’라고 말했다”고 소개했다. 그는 “그래서 내가 ‘실언했습니다’ 하면서 아가씨라고 불렀다”며, “내가 귀신한테 그런 소리를 했다는 거냐”고 억울함을 주장했다.


- 국민TV뉴스, <중앙> “법적대응”에 이용우 “귀신이 왔다갔단 얘기냐” (링크)


그는 태생부터 지금까지 귀족으로 태어나, 귀족으로 자랐으며, 귀족의 지위를 한 번도 벗어나 보지 못한 채, 귀족의 위치에서 '국가를 걱정'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 계급을 완전히 타파할 수 없다. 손에 쥐고 있는 수저를 수긍하며 사는 법도 필요하다. 그러나 법의 심판을 앞두고 소환되는 자리에서 홍 회장을 둘러싼 일련의 사건들은, 그리고 이후의 판결들은, '귀족은 죽을 때까지 무슨 짓을 해도 귀족으로 남을 수 있는 건가'라는 심각한 박탈감을 불러일으켰다. 반복되는 이야기지만, 민주주의적인 시스템이 완전히 무너진 작금의 상황을 다시 바로잡으려는 촛불 민심을 대변하려는 그의 행위가 우습기만 한 것은, 그의 '제왕적'인 삶과 행동에서 엿볼 수 있는 세 번째 이유 때문이다.

다운로드 (1).jpg

 

DN19990349-00_01135718.jpg 

극뽀옥




4. 손석희 영입

나름 언론계의 '혁신인사'로 불리는 만큼 공도 봐야 한다. 홍 회장은 '최순실 게이트'가 커지자 "내가 손석희 영입했어"라며 자랑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손석희 영입 비화를 밝혔다.

홍석현 중앙미디어그룹 회장은 손석희 JTBC 보도담당 사장을 어떻게 영입했을까. 무엇보다, 왜 영입했을까. 홍 회장이 지난해 12월 출간한 자신의 책 <우리가 있기에 내가 있습니다>(쌤앤파커스)에서 손 사장 영입까지의 과정을 털어놨다. 그는 손석희 사장 영입과정을 전하며 “좀 거창하지만, 손사장의 영입을 <삼국지>의 삼고초려 고사에 비유하고 싶다”고 적었다.


책의 한 대목이다.


“JTBC를 개국할 때 방송의 색깔을 고민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열린 보수를 지향하며 진보적 성향의 글들이 많이 실리기도 하지만 중앙일보의 색깔은 보수에 더 가까운 게 사실입니다. 같은 그룹에 있으니 방송도 같은 노선을 취해야 할까요? 저는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진보냐 보수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최고의 인재와 함께 가는 방송이 되자’를 먼저 생각했습니다.”(179P)


홍 회장은 “거기서 그만두었으면 JTBC 메인뉴스는 다른 사람이 다른 색깔로 진행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적었다.


“하지만 왠지 포기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바람이 제법 차갑던 어느 날 자연스레 그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먼발치에서 보던 대로 깨끗하고 순수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술잔을 앞에 놓고 이런저런 얘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 분위기가 무르익다 보니 방송 얘기가 자연스럽게 나오더군요. 저는 한 번 더 간청해보았습니다. 한참 생각하던 손 사장이 그럽디다. 모든 걸 믿고 맡겨달라고.” (180P)


- 미디어오늘, 홍석현 회장이 밝힌 손석희 JTBC 사장 영입 전말 (링크)


1612051552182880.jpg


실제로 홍석현 회장은 보수 우파들이 홍 회장을 찾아가고 정부에서 압박해도 손석희 사장의 권한을 보장해 준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바깥에서 보기엔 그렇다. 자세한 내막까진 알 수 없지만.

그런데 홍 회장이 사임하자, 손석희 사장은 돌연 '존재 이유'를 꺼내 들었다.

"적어도 저희들이 생각하기에 언론의 위치는 국가와 시민사회의 중간에 있으며 그 매개체로서의 역할은 국가를 향해서는 합리적 시민사회를 대변하고 시민사회에는 진실을 전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교과서적인, 뻔한 얘기 같지만 그것이 결국에는 좌절로부터 살아남는 목적이고 명분이었습니다. 이 시간을 통해서 몇 번인가에 걸쳐 언론의 현주소에 대해 고백해 드렸던 것은, 고백인 동시에 저희 JTBC 자신에 대한 채찍질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비록 능력은 충분치 않을지라도, 그 실천의 최종 책임자 중의 하나이며, 책임을 질 수 없게 된다면 저로서는 책임자로서의 존재 이유를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슬펐다. 손석희 정도의 언론인, 국가의 흐름을 바꾸는 데 일조한 언론사가 한 인물의 사임으로 존재 이유를 논해야 하는 한국의 언론 현실이 보였다. 물론 현재 JTBC의 사장이자 홍석현 회장의 아들인 홍정도 씨가 여전히 회사를 이끌어갈 것이므로 손석희의 멘트는 당장의 위협보다 스스로 의지를 다지는 것이었다고 본다. 앞으로 홍정도 씨가 어떤 색깔로 회사를 이끌어갈지도 주목이 된다.


다만 확실한 것은, 앞으로 어떻게 흘러가더라도 손석희는 손석희일 것이다. 손석희는 JTBC가 아니었어도 여전히 손석희였을 것이다. 지금보다는 영향력이 작았을 수도 있지만. 손석희는 그렇겠지만 필요하면 언제든지 언론을 도구로 사용했던 홍석현의 지난 나날을 믿을 수는 없다. 행여나 그가 중앙과 JTBC를 이끌었던 것을 내세워 자신을 촛불 이후 통합의 적임자라고 생각한다거나, 자신의 뜻을 관철하는 과정에서 손석희의 존재가치를 희석하는 일을 벌일 수도 있다는 것이 우려될 뿐이다.


돌이켜보면, 손석희 사장이 JTBC로 간다는 보도를 처음 접하였을 때 필자가 든 의문은 '홍석현이 왜...?'가 아닌, '손석희가 왜...?'였다. 그만은 절대 변치 않을 것으로 생각했고, 결국 더 빛이 났다. 그에게 전권을 주고 간섭하지 않은 홍 회장의 선택에는 박수를 보낸다. 아마 홍 회장 인생을 통틀어 가장 중요했던 결정 중 하나로 뽑힐 것 같다. 그 시절의 본인을 유비에 비했으니, 앞으로도 유비이기를 바란다. 갑자기 유방이 된다면 그것만큼 우스운 일은 없을 것 같다.




5. 대북정책에 대한 생각

현실 정치(Realpolitik)보다는 '신뢰의 정치(Trustpolitik)'가 박 대통령의 좌우명이다. 신뢰야말로 남북한에 최우선적으로 필요한 가치다. 그러나 신뢰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남북 모두 과거의 관행을 반드시 재고해야 하며 관계 진전의 계기를 마련할 토대를 상대편에 제시해야 한다.


대체적으로 보면, 개성은 한반도의 얽히고 설킨 많은 문제들로부터 격리된 성역이었다. 지난해 북한이 노동자들을 성급히 철수시킬 때까지는 그랬다. 개성공단의 그런 특별한 지위가 복원돼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 기업들은 정치와 무관하게 비즈니스는 그저 비즈니스이기 때문에, 다시는 사보타주의 대상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북측의 확고한 보장을 받을 필요가 있다.


그런 보장을 바탕으로 한국은 합작 사업의 재개를 허용해야 할 것이다. 북한의 남동쪽 해안에 있는 금강산국제관광특별구는 2000년 초부터 2008년까지 190만명의 한국 관광객들을 유치했다. 2008년 7월 길을 잃은 관광객이 피격돼 사망한 사건으로 한국은 금강상 관광을 중단했다. 비극적인 사건이었지만 그로 인한 8년간의 교착상태는 남북한 양쪽에 손해만 끼쳤다. 개성과 마찬가지로 금강산도 큰 그림으로 보면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윈윈(win-win) 프로젝트다. 그 프로젝트를 다시 살릴 때가 됐다.


- 허핑턴포스트, 통일 한국의 출발점은 개성공단의 성공이다 (링크)



홍 회장은 연설 모두에서 “나는 한반도 문제 전문가라기 보다는 차라리 언론인”이라며 최근 김대통령의 방미시 한미정상회담에서 빚어졌던 갈등을 지적하고 “미국이 김대통령의 한반도 평화를 위한 노력에 계속적인 지지를 보여주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또, “독일 통일과정에서 서독이 보여준 동독경제 지원과 동방정책이 한반도에 훌륭한 교훈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 홍 회장은 “남북간 경제지원이나 협력이 평화를 위한 외교적 서곡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홍 회장은 결론으로 “김대통령의 최종적 정책목표는 한반도내 경제협력과 평화추진과정을 통해 북한과의 평화적 공존의 길을 모색하는데 있다”며, “이 정책은 반드시 평양에 대한 워싱턴의 정책과 조화를 이뤄야 한다”고 지적했다.


- 미디어오늘, 중앙 홍석현회장 미국서 ´햇볕정책지지´ 연설 (링크)


NISI20150608_0011031537_web.jpg


홍 회장은 다른 보수 매체와는 달리, 일찍부터 DJ의 햇볕정책을 지지하며 북한과의 대화를 강조했다. 이회창에 몰빵했던 전력이 있어서 이것도 액면 그대로 보기엔 좀 그렇지만, 그 이후로도 꾸준히 강조했던 바이니 그 생각만큼은 일관성 있고 뚜렷하다고 하겠다. 심지어 박근혜 정부에게 개성공단 재가동을 강조하는 글을 쓴 것은 보수와 진보 양쪽에 나름 신선한 반응을 이끌어내었다. 이럴 때만 <중앙일보>가 아닌 타 언론사를 이용한 것은 좀 비겁하지만.


어쨌든 홍 회장의 북한 관련 생각만큼은 긍정적이라 평가하고 싶다. 유력한 명망을 가진 언론인이자 보수 계열 사람이 개성공단 재가동을 주장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언론인으로서의 역할만 다 해주면 좋겠는데. 2012년 대선 당시 본인의 '한반도포럼'에서 짠 통일 정책을 박근혜 후보가 70%, 문재인 후보가 90%를 가져갔다며 자랑했는데, 통일에 대한 구체적인 플랜이 준비되어 있고 그것을 대선 후보들이 가져갔다고 뿌듯해하는 것을 넘어 직접 실현해 보겠다고 하는 의지가 곳곳에서 읽힌다. 통일 정책뿐 아니라 홍 회장이 참여하는 단체들은 '한반도 포럼', '여시재', '리셋코리아' 등 다양한 분야의 정책과 대안을 논하는 단체들이고, 직접 정치 현장에서 뛰는 사람들도 수두룩 빽빽하다. 이쯤 되면 정치를 향한, 아니, 국가를 걱정하는 홍 회장의 신념이 무서울 지경이다.


그렇다면 그가 정치에 참여했던 주미대사 시절은 어땠을까.




6. 주미대사 홍석현

홍석현 주미대사를 둘러싼 논란은 김우식 청와대 비서실장이 지난해 12월 16일 밤 청와대 출입기자들과 송년 모임에서 "주미대사로 깜짝 놀랄만한 빅 카드를 준비하고 있다"고 밝히면서부터 시작됐다. 김 실장의 이날 발언으로 출입기자들이 저녁 식사를 하다 말고 모두 기자실로 달려 가고 정작 폭탄 발언을 한 김 실장은 어리둥절해 하는 웃지 못할 일이 발생했다. 다음날 새벽 문제의 '빅 카드'가 홍석현 당시 중앙일보 회장임이 밝혀지면서 정말 모두가 다 깜짝 놀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홍 대사의 임명이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음은 당시 한나라당의 전여옥 대변인과 임태희 대변인이 서로 다른 논조의 논평을 냈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전 대변인은 "깜짝 놀랄 빅 카드가 '권언유착인가? '정경유착'인가?"라며 비판적 논평을 낸 반면, 임 대변인은 "코드인사 대신할 실용인사를 환영한다"며 환영 입장을 밝혔다.

홍 대사 임명에 어리둥절한 것은 보수 세력만이 아니었다. 그가 '조중동'이라는 표현이 관용어로 정착될 만큼 보수적 색깔이 뚜렷한 신문들 중 하나인 중앙일보의 사주라는 점에서 진보 성향의 노 대통령 지지자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당시 시민단체들은 반대 논평을 통해 "도대체 노무현 정권의 정체성이 무엇이냐고 묻지 않을 수 없는 사안"이라고 지적했었다. '홍석현 카드'는 '조.중.동'에서 중앙일보를 떼어내는 보수언론 분리정책으로 여겨졌다. 또 홍 대사의 임명은 그 뒤 이기준 전 교육부총리 등 '실용주의' 인사 정책의 신호탄이기도 했다.

아그레망(새로운 대사나 공사 등 외교사절을 파견할 때 상대국에게 얻는 사전 동의)을 받는 데에 상당한 시일이 걸려 구구한 억측이 일기도 했던 걸려 홍석현 대사는 2월 15일 공식 임명된 직후 가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번엔 "적당한 시점에 정부가 도와준다면 꿈을 갖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라며 취임 일성으로 "차기 유엔 사무총장 출마" 의사를 밝혀 논란이 일었다.

취임 두달 만에 홍 대사는 730억 재산 증식 과정에서 위장전입을 하는 등 불법을 자행한 사실이 알려져 또 한번 큰 파문이 일었다.

그러나 청와대는 "인사 검증 과정에서 관련 내용을 파악했으나 투기 목적이 아닌 것으로 판단했다"면서 "주미대사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 결격사유나 부적격 요인으로 보지 않았다"며 홍 대사를 적극 감쌌다. 

 

그러다가 이번 'X파일' 사건이 터졌고, 지난 4월 위장전입 의혹 등 자신과 관련된 각종 의혹에 적극적인 자세로 해명하던 홍 대사는 이번엔 언론과 접촉을 꺼렸다.


결국 '홍석현 카드'는 '실용주의'를 표방한 인사였지만 실제로 득보단 실이 더 컸다고 잠정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다.


- 프레시안, 노 대통령에게 홍석현 대사는 무엇을 남겼나 (링크)

 

patrick21_152408_1[182389].jpg

< 출처 : 오마이뉴스 >


참여정부 회심의 카드 '홍석현 주미대사'는 지금까지도 논란이 많다. 애초에 노 대통령 취임 1주년 특별대담으로 홍석현 사장이 청와대로 가 4시간 가량 대담을 했던 것부터 논란이 됐다. 노 대통령은 홍 회장과의 대담에서 재벌가와 언론사주라는 꼬리표 속에 감춰진 긍정적인 신념을 읽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필경 그런 것을 느꼈기에 홍 회장의 주미대사 임명을 강행한 것이 아닐까 싶다. 능력 없는 사람은 쓰지 않던 분이니.

그러나 고작 7개월간의 주미대사 재직 기간 동안 홍 회장은 여러모로 역효과만 냈다. 특유의 허세가 잔뜩 들어간 '유엔사무총장' 드립을 틈만 나면 하고, 또 그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재산 문제도 걸림돌이 됐으며, 결정적으로 X파일이 터지면서 나가리 되었다. 참여정부의 인사시스템은 대체로 공정하다고 생각하나, 홍 회장 건 만큼은 긍정적인 평가를 할 수가 없다. 홍 회장이 어떤 사람일지, 어떤 행동을 할지는 쉬이 예상할 수 있는 바였다. 그가 품고 있던 국가를 위한 신념은, 홍 회장이란 사람을 둘러싼 여러 논란거리를 극복하기에 무척이나 부족했다. 참여정부는 이런 시도 끝에 조중동에서 중앙을 분리해내고 매스미디어와 조금은 나은 관계를 만들었던가. 필자가 기억하기로 전혀 그렇지 않았다. 조중동 1면톱, 사설란에서 노 대통령을 향해 쏟아내던, 저주에 가까운 글들을 아직 기억한다.

그래서인지 지금의 홍 회장은 그라운드에서 뛰는 선수가 아닌, 코치 격으로 참여하고 싶은 듯 보인다. 하지만, 시간이 흘렀어도, 그의 내면에 담긴 '선의'가 더 커지고 단단해졌어도, 여전히 홍 회장의 살아온 길들을 덮을 수 없다. 예측이란 걸 감히 해서는 안 되지만, 홍 회장 세력과 손을 잡는 대선 후보가 있다면 참여정부에서 있었던 논란들과 비슷한, 아니, 어쩌면 더 비판을 받는 일이 벌어질 것이라 본다. 그의 선의가 주는 울림에 비해 그가 저지른 과오가 너무나 무겁기 때문에.



7. '제3개국' 썰


마지막으로 그가 어떤 미래 구상을 가졌는지, 경희대에서 20대들에게 강연한 것을 필자 나름대로 축약해 보았다. 그가 꿈꾸는 나라가 어떤 것인지 잘 보여주는 강연이라고 본다.


제가 인생의 선배로서 여러분들에게 상당히 미안한 감정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위로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더불어 잘사는 행복한 나라를 만드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그게 저 나름대로 하나의 꿈같은 소리로 들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여러분이 지금 텍스트를 받아보신 ’매력국가 건설‘이라는 꿈을 피력해 볼까 합니다.

'청년실업, 노인빈곤, 양극화, 벼랑끝 인구, 3만불의 벽.' 이게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거든요. 당면하고 있는 위기를 돌파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를 살릴 수 있는 국가 전략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보면 유일한 국가 전략이 될 수 밖에 없기도 합니다. 이런 엄중한 시기에 시대를 여는 하나의 수단, 하나의 꿈이 될 수 있습니다. 또 여러분과 관련돼 있는 청년 취업과도 연관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긴 이야깁니다만, 아주 쉽게 얘기하면 아시아 최고 수준의 자유와 개방으로 세계의 인재와 자본 기술을 끌어들여야 합니다. 저는 그걸 제3의 개국이라고 얘기하고 싶어요. 개화기 개방 이후 남쪽은 북쪽과 달리 개방을 통해서 이만큼 성장했는데 이 정도 가지고는 안돼요. 이 정도의 규제와 외국인에 대한 문화, 또 기업하기 어려운 환경을 혁파할 수 있는 제3의 개국을 해야합니다.

마찬가지로 나라도 '향기가 나는 나라'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런 나라들이 있느냐? 이 질문에 저는 '아직은 우리가 배울 나라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17세기 네덜란드가 성공 사례입니다. 네덜란드는 스페인의 식민지였어요. 식민지를 벗어나서 100년도 안돼서 세계의 해양 강국으로 부상을 합니다. 이걸 일으켰던 동인이 종교와 사상의 자유에요. 망명자의 천국이에요. 여러분들이 잘 아는 데카르트가 여기서 20~30년 망명 생활 했어요. 딱 하나를 풀었는데 최고의 인재가 오는 거에요. 어떤 사람들이 오느냐? 구교 국가에서 박해를 받던 신교의 자본과 위그노들이 다 온 거에요. 그 다음에 유대인들도 왔죠.

또 하나의 예가 있어요. 런던이에요. 작년에 이코노미스트에 런던의 특징이 나왔습니다. 요즘은 브랜드 시대지 않습니까? 그런데 런던의 브랜드가 뉴욕을 넘어섰다는 겁니다. 물론 부작용도 있어요. 런던 중심부는 영국 사람은 못살아요. 세계 부자들이 다 와서 진을 치고 있어요. 러시아 부자, 중국 부자, 또 중동 왕족. 하지만 그건 부동산 값이 올라서 못 사는 게 아니라 도시가 매력이 있어서 오르는 거에요. 여러분들 놀러 가면 홍대 앞이나 청담동 카페를 가잖아요. 자연스럽게 매력있는 데로 가게 되는 거거든요.

아까도 말했듯이 역시 저는 창업에 희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1997~1998년 환란을 겪고 김대중 정부가 창업 붐을 일으켰어요. 엄청난 부작용도 있었지만 그 씨앗과 비료가 오늘날 살아남아서 다시 창업 붐이 일어나는 바탕이 된 겁니다. 지금은 우리 박 대통령도 창조경제를 강조하고 계시니까 다시 이걸 정말 잘 해야합니다. 여러분들 중에서도 10년 뒤에 1억불 기부할 사람이 두 세명 나와주세요. 적어도 1000억씩 턱턱 내놓는 사람들이 나와야 해요. 창업하세요.

그러기 위해서 제 꿈은 전국이 싱가포르처럼 됐으면 합니다. 그래서 우선은 실험적으로 세계 최고 수준의 개방 도시나 구역을 하나 만들어 봤으면 좋겠어요. 지금 인천 송도, 또 아무도 살지 않는 새만금, 또는 제주도 가지고 해볼 수도 있겠죠. 옛날에 돌아가신 박 대통령은 한번 해봤을 거 같아요. 돌아가신 정주영 회장이나 이병철 회장은 한번 해봤을 거 같아요.

이야기를 하나 해드릴게요. 중국의 등소평 선생이 모택동하고 앉아서 이야기를 했답니다. 모택동이 능구렁이니까, 이렇게 말했답니다. "내가 생각해 보니까 참 일을 하려고 들판에서 상하로 뛰어다녔는데 못한 게 많아. 한, 반은 잘하고 반은 잘 못한 거 같아." 등소평이 여기서 대답 잘못했다가는 아오지 탄광 가는 국면이거든요. 그래서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제가 볼 때는 어려운 환경에서 7개는 잘하시고 3개는 조금 아쉬움이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했답니다. 그랬더니 모택동이 조금 얼굴이 펴졌어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아니야, 아무리 생각해봐도 6개는 잘하고 4개는 못한 거 같아."

이것이 등소평의 '공칠과삼론'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우리가 일제시대를 겪고 한국전쟁, 상업화, 민주화 해오면서 우리 선배들이 다 잘했겠습니까? 7개 잘한 사람은 좀 봐줬으면 좋겠어요.

-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 "한국, '제3의 개국'이 필요하다" (링크)

htm_20150528190806036.jpg

< 출처 : 중앙일보 >


인정한다. 홍 회장의 지식은 필자가 발톱의 때만큼도 못 따라갈 정도로 깊고, 홍 회장의 견문은 해외 한 번 못 나가본 필자에 비해 우주처럼 넓다. 하지만 이 강연을 보면서 지극한 공허함을 느꼈다. 엘리트 의식으로 똘똘 뭉쳐 사회에 이바지하고, 나아가 옳은 방향으로 사회를 이끌어가겠다는 그의 뜻에 언뜻 따르고 싶은 마음보다, "님이 뭔데?"라는 투기어린 반문이 먼저 튀어나온다. 완벽한 엘리트주의자의 계몽의식, 홍 회장의 '나라 걱정'은 그곳에서 출발한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기에, 자연스레 그의 말 역시 고깝게 들린다. 그가 제시하는 모델들이 너무나 휘황찬란해서 당장의 우리네 삶과 비교할 때 희망이 아닌 자괴감만 들기 때문이다. 차라리 킹무성의 명언, "인생의 좋은 경험이다 생각하고 하여튼 열심히 해야지 방법이 없어요."가 차라리 고마울 지경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시대는 그를 요구하지 않는 것 같다.


3476126b4eef1a9718d4506e13feca16.jpg


정권교체를 눈앞에 둔 이 때에 가장 걱정스러운 부분 중 하나는, 언론과의 관계다. 조선은 과거에 그랬듯 악질적인 기사들을 써낼 것이고, 동아는 그것을 베껴 쓸 것이다. 중앙과 JTBC는 어떤 모습을 보일까, 궁금해진다. 문재인 후보가 MBC에서 MBC를 까며 언론개혁을 논하는 지금, 또 진보세력 대다수가 조중동을 '적폐'라 규정하는 작금의 상황에 홍 회장의 정치 참여 발표는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는 타이밍이었다. 차라리 조선처럼 기를 쓰고 반대한다면 편할 텐데, 홍 회장에게는 그들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기에 쉬이 판단하기도 어렵다.


다만 누누이 써왔듯, 그는 절대로 '촛불 민심'을 대변하지 못한다. 그 역시 적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두 손 놓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일은 기대하지도 않지만, 촛불 이후의 미래를 그려나가는 상황을 자신이 주도하려는 시도는 절대 사양이다. 또한 <중앙일보>와 JTBC를 운영했다는 이유로 자신을 마치 중도 통합의 적임자로 여기는 것도 곤란하다. 건국 이래 한 번도 해소되지 못한 재벌 중심의 국가가 한계점에 봉착해 있는 상황에서 그가 포기하지 않는 기업 친화적 사고는 현시대를 사는 수많은 사람들과는 간격이 많이 벌어져 있다.


그러니까, 사장님, 이제는 그만 좀 힘내시라.





지난 기사


일화로 보는 대선후보 시리즈 : 문재인 편

일화로 보는 대선후보 시리즈 : 반기문 편

일화로 보는 대선후보 시리즈 : 이재명 편

일화로 보는 대선후보 시리즈 : 안희정 편

일화로 보는 대선후보 시리즈 : 황교안 편

일화로 보는 대선후보 시리즈 : 안철수 편

일화로 보는 대선후보 시리즈 : 자유한국당 F4






빵꾼


편집 : 꾸물

Profile
조선사 교양서를 쓰고 있는, 딴지가 배출한 또 하나의 잉여 작가
딴지의 조선사, 문화재, 불교, 축구 파트를 맡고 있슴다.
이 네 개 파트의 미래가 어둡다는 거지요.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
『시시콜콜 조선부동산실록』 신간(*´∪`)

https://www.instagram.com/ddirori0_0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