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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시간 1941년 12월 7일 오전 7시 49분. 항공모함을 박차 오른 일본의 전투기와 폭격기들이 진주만 공습을 시작한다. 이 소식은 곧 미국 정부에게 전해졌다. 그리고 1시간 뒤인 1941년 12월 7일 오전 8시 50분. 노무라 주미일본대사는 미국 국무장관 헐 앞에서 5,000자에 이르는 선전포고문(이라기보다는 최후통첩성 경고문)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헐 장관은 이 정체모를 외교문서의 낭독을 다 듣고는,


“내가 50년 동안 공직생활을 하면서 이토록 파렴치한 허위와 왜곡에 가득 찬 문서를 본 적이 없소. 난 지구상의 어떤 정부도 이처럼 거창하고 악의에 찬 수치스러운 허구를 조작해 낼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소.”


라며 격노했다. 영문을 모른 채 쫓겨난 노무라 대사와 구루스 특사는 대사관에 돌아가서야 진주만 기습 공격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됐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의문을 품게 된다.


첫째, 주미 일본 대사관에서는 ‘선전포고’라는 중차대한 외교문서를 왜 늦게 전달했나?

둘째, 선전포고문 내용에 어떤 내용이 들어가 있기에 헐 장관이 화를 냈을까?


하나씩 살펴보자. 우선 선전포고문의 지각전달에 관해 생각해 보자.


1941년 12월 2일 도고 시게노리 외상은 장차 닥칠 진주만 공격에 대비해 주미 일본대사관의 암호기계(독일의 에니그마를 카피한) 4대 중 1대만 남겨 놓고 파기하란 명령을 내린다. 암호책 역시 한권만 남겨 놓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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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BBC



1941년 12월 6일 14부로 구성된 일본의 선전포고문 중 핵심이 되는 14부를 제외한 나머지 13통이 일본 시각으로 12월 6일 오후 8시 30분부터 7일 새벽 0시 20분까지 발신됐고, 주미 일본 대사관은 미국 시간으로 12월 6일 정오경에 받아들게 된다.


이때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13통의 장문의 문서에 대한 해독을 마친 것이 밤 11시였다(이때 이미 미국 측은 일본의 암호문을 해독했다). 그러나 이 해독을 마친 글을 가지고 서기관실에 들어가 보니 서기관실이 텅 비어 있었다. 당시 2명의 참사관과 3명의 서기관들은 주말이라고 퇴근해 버린 것이다. 이 모습을 본 전신과 직원들은 자기들만 헛고생했다며, 당직 1명만 남기고 퇴근을 한다. 그리고 7일 새벽 2시 38분에 마지막 14번째 전문이 들어온다.


이 마지막 전문에는 워싱턴 시각 오후 1시까지 국무장관을 만나 전달하라는 것과 이후 모든 암호기계와 암호책을 파기하라는 명령이 적혀 있었다.


워싱턴 시간으로 7일 오후 1시는 하와이 시간으로 7시 30분이었고, 이는 진주만 기습 공격이 있기 20분 전이었다. 당시 일본 군부는 선전포고를 하는 것이 탐탁지 않았고, 하더라도 미국이 대비할 시간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20분’이라는 시간이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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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너무 급박하게 전신을 받은 일본 대사관 쪽은 제대로 해독을 하고 이를 다시 정서(精書)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도저히 시간 안에 맞출 수 없겠다고 판단한 노무라 대사는 1시 안에 헐 장관을 만날 수 없다고 판단했고, 약속을 2시로 옮겼다. 결국 노무라와 구루스가 국무성에 들어간 시각은 워싱턴 시각으로 오후 1시 50분이었고, 이때는 이미 진주만이 박살이 난 뒤였다. 이때 헐 장관은 하와이의 킴멜 장군으로부터 진주만 기습의 보고를 듣고는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그는 곧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진주만 공격이 사실인 것 같다는 자신의 의견을 말한다. 그리고는 오후 2시 20분 일본 대사들을 자신의 집무실로 불렀다.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해야 할까? 여기서 의문이 드는 것이, 주미 일본 대사관 직원들의 나사 빠진 듯 한 행보다. 본국의 외교부에서는 전쟁을 앞두고 10여 일째 철야로 대기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당시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상황에서 주미 일본 대사는 한가하게 주말을 즐기고 있었다.


왜 그랬던 걸까? 그들이 무능했기 때문일까? 아니었다. 당시 워싱턴에 보내진 일본 외교관들은 사안의 중대성을 고려해 최고의 인재들로 선별 돼 보냈다. 문제는 너무 우수한 인재들이었기에 서로를 출세의 경쟁자로 바라봤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들은 서로 견제했고, 출근할 때 인사도 나누지 않았다고 한다. 문제는 부하들이 이런 상황이라면, 이들의 총 책임자인 대사가 나서서 교통정리를 해야 하는데, 당시 대사였던 노무라는 외교관 출신이 아니라 해군 대장 출신이었다. 즉, 부하들을 완전히 다 장악하지 못했다는 의미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 히로히토 덴노는 당시 주미 일본 대사관 직원들의 무능력함을 질타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당시 일본 대사관은 무능력해서 실수를 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하필 그때 일본 대사관에서는 특별한 ‘이벤트’가 있었다.


“12월 6일 일본 대사관 전 직원들은 리우데자네이루로 떠나는 한 직원의 송별 점심 파티를 가졌다. 메이플라워 호텔에서 가졌던 파티는 오후 내내 계속 되었고, 암호 해독 요원을 포함해서 외교관들 모두 그날 오후 특별히 할 일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이때 대사관에는 이미 장문의 전문이 도착해 있었다.”


  - 도메이 통신의 가토 마쓰오 특파원의 증언


역사의 아이러니다.


공격이 끝난 뒤 전달받는 선전포고문은 미국 국민들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그리고 그 내용은 미국 고위관료들과 정책결정자들에게는 ‘환상의 선전포고문’으로 불리며 환멸과 멸시의 대상이 됐다. 어째서 그런 걸까?



(상략) “...제국 정부는 여기에 합중국 정부의 태도로 미루어 금후 교섭을 계속할지라도 타결에 이를 수 없다고 인정치 않을 수 없음에 관하여 합중국 정부에 통고함을 유감으로 여기는 바이다.”




이 문장은 14장에 달하는 일본의 대미 선전포고문의 마지막 대목이다. 무슨 의미인지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일본측에서 대미각서라 부르는 이 선전포고문은 모호하기 짝이 없는 ‘괴문서’였다. 이 문서에 대한 비판은 전후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재기됐던 문제였다. 결국 1998년 이 선전포고문을 작성한 가세 도시카즈가 말문을 열었다(그의 아들이 ‘추한 한국인’을 쓴 일본의 우익 언론인 가세 히데아키다).


(상략) “군부가 생각하고 있던 것은 기습이었습니다. 해군은, 전쟁은 이기기 위하여 하는 것이라며, 자기들의 본심인 진주만 공격이 가급적이면 드러나지 않는 내용을 원했습니다. 대미각서의 말미에 넣은 ‘교섭의 타결은 불가능’이라는 문구도 처음에는 반대할 정도였습니다. 개전통고를 연상시킨다는 이유였지요. 따라서 정식의 선전포고문을 내밀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당시의 분위기가 손에 잡힐 듯 보인다.


이 당시 일본 정부와 군부는 헐노트가 미국의 최후통첩이라 간주했다. 그리고 헐노트가 최후통첩이라면, 형식을 갖춘 ‘정식’ 선전포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이어지는 가세 도시카즈의 증언을 들어보자.


“당시에는 국제법학자인 요코다 기사부로(橫田喜三郞) 동경대 교수에게도 상담한 것입니다. 요코다 교수는 대미각서를 헐노트와 함께 읽어본 뒤, 법학자의 입장에서 봐도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했습니다. 게다가 기습성공을 노리는 해군 당국과 도고 외상이 격론 끝에 합의한 내용이라서, 그 이상 선전포고의 의도를 명문화한다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일본은 국제법상으로 ‘선전포고’를 했다는 명분도 얻으면서, 미국이 선전포고인지 아닌지를 고민하게 만들어 기습의 성공확률도 높이고 싶었던 것이다. ‘꼼수’였다. 게다가 20분이라는 촉박한 시간은 속이 빤히 보이는 처사였다(원래 1시간이었으나, 군부의 압력으로 20분으로 조정됐다). 훗날 전쟁이 끝나고 나서 도고 시게노리 외상은, 개전 조약에 시간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걸 핑계로 댔다.


일본 입장에서 태평양 전쟁은 시작부터가 ‘꼬인’ 전쟁이었다.



진주만 공습은 일본에게 남는 장사였을까?


한가로운 일요일 오전. 선전포고 없이 기습적으로 쳐들어온 일본군은 ‘일방적인’ 학살을 자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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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abc news



3,581명의 미군이 전사했고, 1,247명이 부상당했다. 전함의 피해도 컸다. 기습 당시 진주만에는 전투함정 70척과 보조함 24척이 정박하고 있었는데, 전함 4척, 부설함 1척, 표적함 1척을 격침시켰고, 전함 4척과 경순양함 3척, 구축함 3척, 수상기 모함 1척, 공작함 1척을 격파하였고, 항공기 230대를 주저 앉혔다(격침된 6척 중 3척은 훗날 다시 건져 올렸다).


이런 대전과에 비례한 일본 측의 피해는 극히 미미해서 97식 함상공격기 5대와 99식 함상 폭격기폭 15대, 제로센 9대가 일본 측이 입은 손실의 전부였던 것이다.


이런 단순계산으로만 보면 일본은 엄청난 전과를 거둔 것처럼 보인다. 만약 전쟁이 이 한 번의 전투로 끝나는 게임이었다면 일본 측의 승리였겠지만, 앞으로 벌어질 “태평양레이스”의 시작을 알리는 첫 전투였던 이 진주만 기습은 일본 측에게 결코 유리한 측면만 보여준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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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abc news



미국의 태평양 함대는 거의 괴멸직전의 엄청난 피해를 입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 당시 입은 미군의 피해는 태평양 함대 전력의 10% 수준이었고, 실제로 진주만에서 격침당한 함정 중 오클라마와 아리조나를 제외하곤 다시 건져 쓸 수 있었다. 문제는 이 진주만 기습 덕분에 미국은 일본의 항모 운용기술을 고스란히 전수 받게 된다는 것이다(실상은 전함이 부족해 항모기동부대로 태평양 함대를 개편한 것이지만) 미국이 본격적으로 태평양에 ‘기동함대’를 만들어 띄우기 시작한 것이다. 진주만에서 도쿄까지 가는 그 4년 동안 미 해군은 자그마치 100척의 항공모함을 찍어내게 된다(정규항모+개조항모). 그러나 역으로 항공모함 기동부대의 신화창조를 달성했던 일본은 이후 야마토나 무사시 같은 전함에 목메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미 해군은 진주만에서의 일격 덕분에 어쩔 수 없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항모를 주축으로 한 기동함대를 건설하게 되었고, 오늘날 5대양6대주를 누리는 지금의 항공모함을 유지하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총체적으로 이 진주만 기습이 일본에겐 치명타가 되었던 것일까? 사견이지만, 당시 야마모토 연합함대 사령관이 왜 나구모를 선택했는지에 대해선 일말의 아쉬움이 생긴다(나구모와 야마모토는 서로 반대 파벌이었다).


원론적인 의문이지만, 야마모토가 진주만을 치려했던 이유가 뭘까? 그 이유 중 상당부분은  자기가 과거에 범했던 여순항 전투의 실수가 재현되는 걸 피해보겠다는 조급함이 베어 있다는 것이 군사 사학자들의 분석이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처럼 어떤 행동을 하려는 것은 자신의 잠재적인 의식 땜에 그렇다는 말을 적용해 보자, 당시 여순항 전투에서 야마모토는 선수필승이란 생각을 버리고 돌입 시점을 놓쳐서 전투를 상당히 어렵게 끌고 갔었다. 그 때문에 진주만에 대한 기습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나구모는 또 어떠한가? 당시 진주만 공격에서 1차와 2차에 걸친 성공적인 작전을 마치고 마지막 숨통을 끓기 위한 3차 폭격을 시작하려던 찰나 나구모는 주저하게 된다. 당시 모함으로 귀환한 311대의 함재기 중 111대 이상이 피탄 된 것이 나구모의 행동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1차 때의 피격대수가 46대였던 반면, 2차 때에는 65대로 증가한 것이 나구모에게 불안감을 주었던 것이다. 물론 함상 폭격기의 50.8%가 피탄 된 상황이었으니 충분히 주저할 만한 상황이라 할 수 있겠지만, 애초 진주만 공격에서 항공모함 2척 격침, 2척 대파를 각오하고 실행한 작전이 아닌가? 전함을 다 격파 하였으니, 그대로 ‘성공적인 기습’수준에서 만족하고 빠져 나가자란 유혹을 나구모는 이겨내지 못했던 것이다. 만약, 손실을 각오하고 3차 폭격대를 보내 진주만의 드라이 독과 잠수함 대피소, 저유시설등과 같은 전략시설을 폭격했더라면 태평양 전쟁은 우리가 알고 있던 전쟁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나구모의 이 순간적인 판단미스 덕분에 일본은 2년이란 시간을 더 벌수 있었던 기회를 날려 버렸던 것이다. 나구모의 소심함이 태평양 전쟁의 향배를 갈랐던 것이다. 이런 나구모의 소심함은 이후에도 계속 드러나는데, 1942년 산호해 해전에서 플레쳐 제독과의 일전에서 제해권을 확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임무만 다하면 된다는 판단 하에 눈앞에 보이는 미군의 보급선들의 하역 작업을 보고도 그냥 돌아가 버리는 모습을 다시 한 번 보여준다.


(일본군 입장에서 변명을 해보자면, 그들의 목표는 오로지 전투함이었기에 그 나머지 목표들은 부차적인 존재였다. 게다가 피탄 당한 기체들이 늘어나고 있었고, 미국 항공모함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도 부담이 됐을 것이다)





1. 전쟁국가 일본/ 살림출판사/ 이성환

2. 호호당 선생의 ‘프리스타일’

3. 세계전쟁사/ 육군사관학교 전사학과/ 황금알

4. 러일전쟁과 을사보호조약/ 이북스펍/ 이윤섭

5. 조선역사 바로잡기/ 가람기획/ 이상태

6. 다시 쓰는 한국근대사/ 평단문화사/ 이윤섭

7. 대본영의 참모들/ 나남/ 위텐런 지음, 박윤식 옮김  

8. 나모위키

9. 쇼와 16년 여름의 패전/ 추수밭/ 이노세 나오키 지음

10. 『중일 전쟁』 용, 사무라이를 꺾다/ 미지북스/ 권성욱 지음

11. 나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이었다 / 서해문집/ 김효순 지음

12. 석유전쟁/ 매일경제신문사/ 정기종 지음

13. 우리의 눈으로 본 일본제국 흥망사/ 궁리/ 이창위 지음

14. 연합함대 그 출범에서 침몰까지/ 가람기획/ 박재석, 남창훈 지음

15. 프레시안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24246

16. 일본의 이중권력, 쇼군과 천황/ 살림출판사/ 다카시로 고이치

17. 히로히토 신화의 뒤편/ 을유문화사/ 에드워드 베르 지음

18. 일본의 가장 긴 하루/ 가람기획/ 한도 가즈토시 지음





1부 

[러일전쟁]


2부

드레드노트의 탄생

1차 세계대전, 뒤바뀐 국제정치의 주도권

일본의 데모크라시(デモクラシー)

최악의 대통령, 최고의 조약을 성사시키다

각자의 계산1

8년 의 회, 던 축 

일본은 어떻게 실패했나2

만주국, 어떻게 탄생했나



외전

군사 역사상 가장 멍청한 짓

2차대전의 불씨

그리고, 히틀러

실패한 외교, 히틀러를 완성시키다

국제정치의 본질



3부

태평양 전쟁의 씨앗1

태평양 전쟁의 씨앗2

도조 히데키, 그리고 또 하나의 괴물

일본을 늪에 빠트린 4명의 '미친놈'

대륙의 각성완료, 다급해진 일본

대동아(大東亞)의 환상에 눈 먼 일본

일본, 건드리지 말아야 할 걸 건드렸다 1

일본, 건드리지 말아야 할 걸 건드렸다 2

일본의 패배

일소중립조약이 파기되던 순간 1

일소중립조약이 파기되던 순간 2

천조국, 움직이다



4부

왜 일본은 미국과 전쟁을 하려고 했을까

신성불가침으로 만들어진 권력, 덴노(天皇)

일본의 반인반신, 덴노(天皇)의 오판과 태평양 전쟁

미국과 일본의 외교와 태평양 전쟁

정신력으로 전쟁을 결정한 일본

미국의 최후통첩, 헐노트(Hull Note)

진주만 공습, 두고두고 욕먹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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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더가 디비주는 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


괴물로 변해가는 일본

조약, 테이블 위의 전쟁

러시아 vs 일본 한반도에서 만나다






펜더


편집 : 딴지일보 인지니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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