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sim.jpeg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의 모든 걸 설명해 줄 수 있는 문건이 하나 있다. 바로 전진훈(戰陣訓)이다. 전세가 기울어지는 1944년부터 시작된 가미카제(神風) 자살공격과 포로가 되는 치욕 대신 자살을 선택한 수많은 일본 병사들의 모습은 미국인으로서는 상식 밖의 모습이었다.


부대 전력의 50%가 소모되면, 더 이상 무의미한 전투보다는 항복을 고민하는 것이 상식적인 지휘관의 자세이다. 그러나 일본군은 유리한 상황에서는 만세돌격을 했고, 불리한 상황에서는 옥쇄(玉碎)를 선택했다. 일본 본토로 다가갈수록 일본의 기상천외한 자살특공병기들은 붕어빵 찍어내듯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 종류도 다종다양했다.


자살공격용 유인어뢰인 카이텐(回天), 자살인간기뢰 후쿠류(伏龍), 자살 특공보트 신요(震洋), 자살특공기의 결정체이자, 인류 최초이자 아직까지는 최후인 유인 유도식 대함 미사일 오카(櫻花)까지 수많은 특공병기들이 전선에 나타났다. 일본 본토로 다가갈수록 전투는 더 격렬해졌고, 그에 비례해 미군의 사상자 숫자도 급증했다.


s181.jpg

카이텐(回天)


770010237.jpg

후쿠류(伏龍)


k182a.jpg

신요(震洋)


g4m2e72cw_26.jpg

오카(櫻花)


트루먼 대통령이 취임한 후 3개월 동안 발생한 미군의 희생자 숫자가 태평양 전쟁 3년 간 발생한 희생자의 절반에 육박한다는 통계가 이를 증명해줬다.


일본 본토로 다가갈수록 미군의 사상자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갔다. 미군은 두려움과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저들은 왜 저렇게까지 싸우는 것일까?


그리고 여기에는 전진훈(戰陣訓)이라는 ‘전투규범’이 있었다. 도조 히데키가 메이지 덴노가 만든 군인칙유(軍人勅諭)를 구체적으로 실천한다는 명분으로 만든 이 희대의 ‘괴문서’는 태평양 전쟁을 단적으로 규정한 문건이다.


전진훈은 태생부터 일본군의 한계를 드러냈는데, 그 등장은 1941년 1월 8일 이었다. 표면적인 명분은 일본 장병들이 전장에서 지켜야 할 행동규범과 전투규범을 정리한 것이라 하지만, 그 시기에 주목해 봐야 한다.


1941년 1월은 중일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일본이 국민들을 통제하고, 국가 총동원 태세를 준비하던 시기였고, 아울러 태평양 전선에서의 전운이 고조되던 시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동요하는 군심을 다잡고, 군기를 세울 필요가 있었다. 아울러 일본군이 미군보다 우월하다고 내세울 수 있는 단 하나의 특기(일본의 생각일 뿐이지만)인 ‘정신력’을 갈고 닦아야 할 시기였다.


이때 등장한 게, 일본 근대의 국가철학(이념)을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던 이노우에 데쓰지로(井上哲次郞)이다.


INOUE_Tetsujiro.jpg




무사도가 전진훈이 되기까지


우리가 생각하는 일본은 ‘무사도의 나라’이다. 벚꽃 같은 죽음을 생각하며, 여차하면 배를 가르는 ‘순사(殉死) 찬양’의 문화로 기억한다. 그러나 이건 오산이다. 에도 시대 그들의 통치이념은 조선에서 건너간 주자학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포로로 일본에 끌려갔던 강항 선생이 몇 년간 체류하면서 일본 주자학의 문을 열어줬다(이는 일본도 인정하고 있고, 강항 선생은 일본 주자학의 시조가 됐다). 에도 막부 시절 그들은 주자학을 근간으로 한 유교로 나라를 다스렸다. 우리나라의 춘향전과 비슷한 위치에 있는 추신구라(忠臣藏)를 보면, 이들은 와신상담하다 결전의 순간 모든 걸 버리고 주군의 원수를 갚는다. 그리고 47명 모두 할복을 하는 걸로 나온다. 그러나 이 비장한 사무라이들은 사무라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할 ‘할복’ 방법을 몰랐다. 어떻게 배를 가르고, 가이샤쿠(介錯 : 배를 가르면,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목을 쳐주는 사람)가 언제 목을 쳐 주는지 아무것도 몰랐다. 결국 막부에서 파견 온 막신들이 할복 방법을 일일이 가르쳐 준 다음에야 배를 가를 수 있었다.


분명한 사실은 에도 시절 일본의 통치이념은 성리학이었고, 오늘날 대중매체에서 그려내는 사무라이 문화는 없었다는 것이다. 까놓고 말하자면, 에도 막부 시절의 일본은 농업을 근간으로 한 관료제 국가였다. 중앙집권제였던 조선과 다른 점이라면, 일본이 막번(幕藩)을 근간으로 한 지방분권 국가였다는 점 하나 뿐이었다.


그러던 일본이 흑선의 도래 이후 개항을 하고, 메이지 유신을 맞이하게 된다. 메이지 유신이 되면서부터 무사도는,


“전근대의 버려야 할 유산”


이 됐다. 겨우 흔적이나마 남아있던 무사도가 과거의 유물로 전락한 것도 모자라 청산해야 할 과거로 치부됐던 것이다. 그러나 이 청산해야 할 과거는 청일전쟁을 기점으로 부활하게 된다.


청일전쟁으로 동북아의 패권국가로 등장한 일본은 자신의 국가적 정체성을 규정할 ‘국가이념’이 필요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동경제국대학의 철학과 교수였던  이노우에 데쓰지로(井上哲次郞)였다. 데쓰지로는 근대 일본의 국가이념을 설계했다고도 할 수 있는 인물인데, 가족국가로서의 일본의 천황제를 설립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가 들고 나온 것이 바로 ‘무사도’였다.


1.jpg


1890년대부터 일본은 해마다 1권 이상씩의 무사도 관련 책자가 나왔고, 군국주의가 사회 전반에 퍼졌고, 러시아와 일전을 준비하고 전쟁에 나서게 된 1901~1905년 사이에는 47권이나 되는 무사도 관련 서적이 쏟아져 나왔다.


그런 와중에 이노우에 데쓰지로(井上哲次郞)는 명저(?) “일본의 영혼, 무사도”를 발표하게 된다. 이 책에서 데쓰지로는 무사도를 일본의 기사도와 비슷한 개념으로 설명했고, 청일전쟁의 승리를 무사도 덕분이라고 포장했다.


(데쓰지로는 원어민 수준의 영어를 구사할 수 있었기에 이 책은 무리없이 영어로 출판되는데, 그 덕분에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도 이 책의 애독자가 됐고, 수많은 영미권 독자들의 애독서가 됐다. 우리가 잘 아는 “국화와 칼”에서도 이 책에 대한 언급이 나와 있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염두에 둬야 할 것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전통’이란 것들은 국가나 특정 목적을 가진 정치집단이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후대에 만든 경우가 대부분이란 점이다. 에릭 홉스본의 명저 “만들어진 전통(The invention of Tradition)”을 보면 잘 나와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스코틀랜드의 킬트가 18~19세기에 만들어진 것이고, 영국 왕실의 고색창연한 마차행렬도 당사자들은 ‘천년의 전통’이라고 자랑하지만, 정작 왕실행사의 대부분은 19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전통이라는 걸 설명한다.


무사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근대로 넘어오는 국민국가 형성기의 국가들은 여지없이 전통을 ‘창조’해 내는 것이 하나의 통과의례였다. 이들은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차이들을 극복해 낼 하나의 ‘상상된 공동체’를 만들고 이를 국민 개개인의 뇌에 주입해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를 만들어 내야 했다. 그래야지만, 국민을 통제하고 이 통제된 국민을 통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사지(死地)로 내 몰 수 있기 때문이다.


독재자들이 언제나 역사교육에 집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광화문에 이순신 동상이 생기고, 이순신에 장군에 대한 신격화 작업이 시작된 것이 박정희 정권 시절이란 점을 염두에 두길 바란다. 민족의 영웅 이순신 장군을 폄하할 의도는 없다. 다만, 그 이미지를 후대의 누군가가 어떤 ‘정치적 목적’을 위해 활용한다는 것. 그리고 그 이미지에 녹아나 현실을 외면하고, 조작된 이미지에 현혹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각설하겠다. 일본도 이런 ‘상상의 공동체’가 필요했기에 전근대의 버려야 할 유산을 재활용 하기로 결정한다. 무사도는 그렇게 태어난 것이다.


이 무사도의 제국주의 버전이 바로 전진훈(戰陣訓)이다. 도조 히데키와 군부가 초안을 잡은 전진훈은 곧바로 이노우에 데쓰지로와 야마다 오시오, 그리고 근대 일본을 대표하는 시인이자 소설가인 시마자키 도손(島崎 藤村)의 손을 거치게 된다.


Shimazaki_Toson2.jpg


(시마자키 도손의 소설이 국내에도 번역돼 출간됐다. 근대 일본문학을 만든 위대한 문호이지만, 그의 과거를 생각한다면 착잡하다는 느낌이다. ‘파계破戒’에서 보여준 인간관계의 냉엄함, ‘신생新生’에서 보여준 철저한 에고이스트의 면모는 한 명의 독자로서 과거의 관계를 회상하게 만드는 묵직함이 있다. 그런 그가 일본 제국주의의 근간이 되는 전진훈의 글을 다듬었다니...)


당대의 문호인 시마자키 도손의 첨삭 덕분인지 전진훈은 현란한 수사법과 유려한 문체, 전체주의적 도그마의 완성판 격인 이념의 일관성과 명징성을 확보하게 된다.


그 일단을 확인해 보면,


■ 제1장


제1조 (황국) 대일본은 황국이다. 만세일계의 천황이 위에 계시면서 조국의 황모를 이어받아 무궁하도록 군림하신다. 황은이 만민에게 미치고 성덕은 팔굉에 빛나고 있다. 신민 또한 충효용무(忠孝勇武)한 조손이 서로 받들어, 황국의 도의를 선양하고 천업을 익찬하여 받들고, 군민일체로써 국운의 융창을 다하고 있다. 전진의 장병은, 마땅히 우리 국채의 본의를 체득하여, 굳은 신념으로 맹세코 황국수호의 대임을 완수해야 할 것이다.


(중략)


제7조 (필승의 신념) 믿음은 힘이다. 스스로 믿고 의연히 싸우는 자는 항상 승자이다. 필승의 신념은 천마필사의 훈련으로 생긴다. 모름지기 촌가를 아끼고 고심 전력하여 반드시 적을 이기는 실력을 함양해야 한다. 승패는 황국의 융체에 관련된다. 빛나는 군의 역사에 비추어, 백전백승의 전통에 대한 자신의 책무를 명심하여, 승리하지 않으면 결코 그만두지 말 것이다.


(하략)


■ 제2장


(상략)


제6조 (책임) 임무는 신성한 것이다. 책임은 지극히 귀중하다. 일업일무를 소홀히 하지 말고 심혼을 경주하고, 일체의 수단을 다하여 임무의 달성에 유감이 없도록 하라. 책임을 중시하는 자는 진정으로 전장에 있어서 최대의 용자이다.


제7조 (생사관) 생사를 관통하는 것은 숭고한 헌신봉공의 정신이다. 생사를 초월하여 일의(一意) 임무와 완성에 매진해야 한다. 심신일체의 힘을 다하고, 태연하게 유구한 대의를 위해 살아가는 것을 즐거움으로 느껴야 한다.


제8조 (명예를 아낄 것) 수치를 아는 자는 강하다. 항상 향당가문(鄕黨家門)의 면목을 생각하고, 유유분려(悠悠奮勵)하여 그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 살아서 포로의 치욕을 당하지 말 것이며, 죽어서 죄화의 오명을 남기지 말라.


(하략)


i11327695248.jpg


주요 부분을 발췌해 옮겨봤다. 제2장의 6, 7, 8조를 보면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의 광신적인 만세돌격과 옥쇄의 이유를 확인할 수 있다. 책임을 강조하며, ‘임무 달성에 유감이 없도록 하라.’ 죽음을 말하면서 ‘태연하게 유구한 대의를 위해 살아가는 것을 즐거움으로 느껴야 한다.’, 명예를 말하며 ‘향당가문의 면목을 생각하라’라며 압박하는 모습.


개인은 없다. 오로지 전체주의 국가 일본에 부속으로 살아가는 ‘인적자원’만이 있는 것이다. 특히나 ‘유구한 대의를 위해 살아가는 것의 즐거움’을 태연하게 말하는 모습에서는 모골이 송연해진다.


일본은 이런 식으로 병사를 교육했고, 이를 확대해 일본 사회 전체로 퍼뜨렸다. 문득 폴 발레리의 잠언 한 구절이 떠오른다.


“용기를 내어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일본 국민은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됐고, 그 결과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 불과 20여년 전 다이쇼 데모크라시의(大正 デモクラシー)의 훈풍을 이끌어 냈던 일본 국민은 이제 부품이 돼 전장의 총알받이로 나서게 된 것이다.


안타까운 사실은 일본인의 고통은 전진훈에서 끝난 것이 아니란 점이다.


1945년 4월. 일본의 패망이 눈앞으로 다가온 그때. 일본 육군대신 아나미 고레치카(阿南 惟幾)는 다섯 개 조항으로 만든 결전훈(決戰訓)이란 걸 들고 나와 전군에 공포한다. 그 내용은 한 마디로 ‘자살돌격’의 강조였다.


결전훈(決戰訓)

 

1. 황군장병은 신칙(神勅)을 받들어 마친내 성유(聖諭)의 준순에 매진해야 한다.

2. 황군장병은 황토를 사수해야 한다.

3. 황군장병은 믿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4. 황군장병은 육탄 정신에 철저해야 한다.

5. 황군장병은 일억 전우의 선구가 되어야 한다.


어떤 전략적 방침이나 전술적 지침도 없다. 그저 형이상학적 수사의 남발과 육탄 정신을 강조할 뿐이다. 즉, 나가서 죽으란 소리다.


닭의 먼저인가, 알이 먼저인가?


일본군의 전진훈, 결전훈을 보면 알겠지만, 이들은 정신력의 강조를 말한다. 왜 그런 걸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두 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과거의 성과에 대한 무비판적인 답습.

둘째, 공업생산력의 한계


이 두 가지를 하나로 합칠 수 있다. 간단하다.


“일본이 (상대적으로) 가난하기 때문이다.”


일본이 아무리 신흥 강국이라 해도 근본적으로는 후발주자이고, 그 공업 생산력도 당시 세계열강에 비하면 뒤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다보니 자원은 한정적이고, 이를 효율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안고 전쟁에 임해야 했다. 즉, 물자는 귀하고, 사람은 중하지 않게 여기게 된 것이다.


8.jpg


아니, 그 이전에 일본군의 군대 양성과 전쟁 전략 자체가 남달랐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일본은 가난하기에 소수정예의 강군을 지향했다. 아울러 전쟁도 단기결전을 선호하게 된다. 오늘날의 이스라엘을 보는 느낌이랄까? 다만, 차이가 있다면 이스라엘은 소수병력을 최대한 보존하기 위해 병사들의 방호에 애쓰지만, 구 일본군은 그런 게 없다는 것이 다른 점이다(말하고 나니 엄청나게 다르다. 단기결전을 선호한다는 것 빼고는 닮은 게 없다).


그러던 것이 세월이 흐르고, 전쟁이 길어지고 병사를 많이 동원하게 되면서 이야기가 묘하게 뒤틀어졌다. 일본의 두 군대. 해군과 육군은 각자 병사 양성의 목표가 달랐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 이유는 똑같다. 일본이 가난하기 때문이다.


우선 해군을 보자면, 이들은 ‘장인(匠人)’이나 ‘명인(名人)’을 만드는 데 목숨을 걸었다.


일본 해군이 진주만 공습을 대비해 1941년 10월부터 가고시마에서(진주만과 지형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선정됐다) 어뢰와 폭탄 투하훈련을 했던 걸 생각하면 이해가 빠른데, 일본 해군은 포술의 장인, 어뢰투하의 명인, 사격의 달인을 양성하는데 모든 걸 걸었다. 즉, 시스템 적으로 명중률을 높이는 기술의 발달을 추구하거나, 명중률을 높이지 못한다면 압도적인 물량으로 목표를 제압하는 방식이 아니라 개개인의 능력을 한계치까지 끌어올려 일발필중(一發必中)의 능력을 배양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인간을 부속으로 생각한 것이다. 생활의 달인을 찍는다고 해야 할까?


만약 어뢰 투하의 명인이나, 포술의 장인이 일상생활에서 자연스럽게 태어나 나이 먹을 때까지 그 일만 한다면 수긍하고 넘어갈 수 있겠지만, 이들의 활동무대는 전쟁터이다. 전쟁은 아무리 적더라도 병사의 소모를 가져온다. 즉, 달인이나 명인을 키워내는 것은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이들도 결국은 죽는다는 것이다. 그 다음은 뭘까? 초기의 압도적인 성공을 계속 이어나갈 인적자원의 고갈이다.


진주만 공습 당시 예술과도 같은 어뢰투하와 폭탄 공격, 진주만 공습과 이어지는 남방작전에서 보여준 전투기 조종사들의 기량은 시간이 지날수록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왜? 아무리 베테랑이라도 전쟁터에서는 내일을 장담할 수 없다. 베테랑의 빈자리를 신병들이 채우면서 일본 해군의 신화는 급격하게 무너지기 시작한다.


해군이 달인을 키우기 위한 교육에 열을 올릴 때 육군은 백병전 훈련에 모든 걸 걸었다. 러일전쟁을 설명하면서 말했지만, 203고지 전투 때 일본군은 기관총과 철조망, 중포와 벙커로 둘러쳐진 203 고지로 무모한 총검돌격을 반복했다. 이 생각 없는 총검돌격의 원인은 그 이전에 있었던 청일전쟁 당시 ‘당나라 군대’인 청나라 군대와의 전투에서 효과를 봤다는 이유 하나 때문이었다(덤으로 일본은 가난했다). 보통 이런 경우 전쟁의 교훈을 연구해 무모한 백병전이나 만세돌격을 지양하는 쪽으로 교리를 손봐야 했지만, 일본 군 지도부는 이를 무시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이유를 유추해 본다면 어쨌든 승리했고, 일본은 가난했기 때문이다. 잘 구성된 화력거점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압도적인 화력으로 이를 박살내야 하는데, 그런 식의 공격을 하기에는 일본의 공업생산력이 여의치 않았다.


cdc2e1fba753efcc5fc96f2f26a811d0.jpg


당시 이런 일본 육군의 상황을 잘 보여준 무기가 바로 11년식 경기관총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2차 대전의 경기관총이라면, 미국의 BAR이나 영국의 브렌(Bren)을 떠올릴 것이다. 이 기관총을 보면, 기본적으로 상자형 탄창을 달고 있다. 신나게 연사를 한 다음 탄창을 바꿔 끼고 다시 연사를 한다.


그렇다면, 일본의 11년 식은 어떨까? 11년식은 특이하게도 상자형 탄창이 아니라 소총탄 클립 6개를 포개어 넣어 발사를 한다. 5발짜리 스트리퍼 클립을 상자에다 차곡차곡 넣고 뚜껑(?)을 닫고, 장전하고 쏘면 된다. 소총탄을 그대로 활용하고, 탄창이나 탄띠가 필요 없으니 부피도 줄고, 휴대도 용이하다. 그러나 이 소총은 잔고장이 많기로 유명했다. 소총탄을 그대로 활용한다고 하지만, 탄피가 너무 얇은 반면에 기관총의 가스압이 너무 높아 연발 사격시 탄피가 찢어지게 됐다. 이 때문에 결국 일본군은 장약량을 줄인 전용탄을 개발해야 했다.


놀라운 사실은 이 총의 처음 설계는 탄창을 사용하는 평범한 ‘경기관총’이었다. 그러나 당시 일본 군부는,


“탄창은 너무 비싸니, 저렴한 쪽으로 개발해 보라.”


라고 당시 총기 설계자인 난부 키치로를 압박했고, 결국 이 희대의 경기관총이 나왔다. 재미난 사실은 11식 경기관총의 후계 기종이라 할 수 있는 96식 경기관총은 평범하게 탄창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보면 알겠지만, 일본군은 비용에 민감했고, 그 만큼 인명경시 풍토가 만연해 있었다. 자동소총이나 경기관총과 같이 탄환 소모가 많은 무기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대신 병사들 손에 쥐어준 건 수류탄과 대검이었다.


“총탄이 없어지면 총검으로 돌격하라. 총검이 부러지면 맨주먹으로 대결하라. 주먹이 찢어지면 이빨로 적을 물어 죽이자. 한 명이라도 더 처치하라. 한 명의 적병이라도 더 처치하여 미국을 격쇄하자. 신체가 부서지고 심장이 멎으면 혼백이 되어 적진에 돌격하라.”


태평양 전쟁을 설명할 때 자주 언급되는 야마사키 야스요 대령이 남긴 훈시다. 그 유명한 알류산 열도의 아투섬 혈전 직전에 2,370명의 병사들에게 했던 말이다.


http-%2F%2Fimage.fmkorea.com%2Ffiles%2Fattach%2Fnew%2F20151024%2F486263%2F227017187%2F244248224%2F5c841a011043a3951f7dbc5f08796606.jpg


아투섬은 미국 알래스카와 일본 홋카이도 사이의 알류산 열도. 그 서쪽 끝에 있던 섬이다. 1942년 일본군은 이 섬을 점령했는데, 1943년 5월 12일 미군이 이 섬에 대한 탈환작전에 들어가게 된다. 당시 일본군은 보병 2개 대대, 공병 1개 대대, 선박공병 1개 소대, 산악포 6문, 고사포 17문, 기관포 10문이 고작이었다. 그 머리 위로 미군의 폭격기, 전폭기의 폭격이 이어졌다. 누가 봐도 명백히 지는 전투였고, 인도적 관점에서 봐도 항복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야스오카 대령은 18일 동안 결사적으로 항전했다. 그리고 전투가 끝나기 하루 전인 5월 29일 방어선에 남은 부상자들에게 청산가리를 탄 물을 마시게 하고, 잔존병력 140명을 추슬러 연합군 진지에 대한 최후의 돌격을 감행한다.


태평양 전선 최초의 옥쇄(玉碎)이고, 이후 옥쇄란 말의 시작을 알린 전투였다.


이 상황을 그린 것이 동경 미술학교 출신의 종군화가 후지다 츠구하루(藤田 嗣治)의 <아투섬의 옥쇄>이다.


159fdf12e80343214.jpg


비장미? 무사도? 기왓장처럼 너절하게 부서지느니 구슬이 깨지듯 산산이 흩어지는 게 고결한 죽음의 미학일까?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이 아무리 정신교육을 강화한다 하더라도 인간이기에 가질 수밖에 없는 공포와 두려움의 극복에 관한 방법이다. 일본은 옥쇄와 특공을 말하고, 물리적인 화력의 격차를 정신력의 강화로 극복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그 정신력 강화를 위해서는 단순히 말로만 주입할 수는 없었다. 결국 동원된 것은 야만적이고 무자비한 폭력이다.


일본은 정신력 강화를 위해서 엄청난 군대 내 폭력을 허용했다.


“...이어서 고참들이 온힘을 다하여 신병의 둔부를 ‘군인정신주입봉’으로 구타하는 음참한 소리가 밤하늘에 울려 퍼진다. 다음날 목욕을 하려고 보면 각 부대원의 둔부가 보라색으로 부어 올라 있었다. 꽁무니뼈가 부서져 사망한 동료도 있었다.”


태평양 전쟁 당시 구레(呉軍 : 2차 세계대전 당시 동아시아 최대의 군항)의 방공지휘소에서 근무했던 미야우치 간야의 증언이다(전후 아사히 신문을 통해 알려졌다).


정신력을 강조하기 위해, 그리고 그 정신력으로 승산없는 전쟁을 끌고 가기 위해 일본군은 육해군을 가리지 않고 폭력을 행사했다. 가난하기 때문에 정신력을 내세웠고, 그 정신력을 가다듬기 위해 폭력을 행사하는 이 악순환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그 폐습은 일본 해상자위대와 한국군에도 고스란히 이어져 정신교육과 군대 내 악습으로 이어지고 있다.




1. 전쟁국가 일본/ 살림출판사/ 이성환

2. 호호당 선생의 ‘프리스타일’

3. 세계전쟁사/ 육군사관학교 전사학과/ 황금알

4. 러일전쟁과 을사보호조약/ 이북스펍/ 이윤섭

5. 조선역사 바로잡기/ 가람기획/ 이상태

6. 다시 쓰는 한국근대사/ 평단문화사/ 이윤섭

7. 대본영의 참모들/ 나남/ 위텐런 지음, 박윤식 옮김  

8. 나무위키

9. 쇼와 16년 여름의 패전/ 추수밭/ 이노세 나오키 지음

10. 『중일 전쟁』 용, 사무라이를 꺾다/ 미지북스/ 권성욱 지음

11. 나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이었다 / 서해문집/ 김효순 지음

12. 석유전쟁/ 매일경제신문사/ 정기종 지음

13. 우리의 눈으로 본 일본제국 흥망사/ 궁리/ 이창위 지음

14. 연합함대 그 출범에서 침몰까지/ 가람기획/ 박재석, 남창훈 지음

15. 프레시안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24246

16. 일본의 이중권력, 쇼군과 천황/ 살림출판사/ 다카시로 고이치

17. 히로히토 신화의 뒤편/ 을유문화사/ 에드워드 베르 지음

18. 일본의 가장 긴 하루/ 가람기획/ 한도 가즈토시 지음







1부 

[러일전쟁]


2부

드레드노트의 탄생

1차 세계대전, 뒤바뀐 국제정치의 주도권

일본의 데모크라시(デモクラシー)

최악의 대통령, 최고의 조약을 성사시키다

각자의 계산1

8년 의 회, 던 축 

일본은 어떻게 실패했나2

만주국, 어떻게 탄생했나



외전

군사 역사상 가장 멍청한 짓

2차대전의 불씨

그리고, 히틀러

실패한 외교, 히틀러를 완성시키다

국제정치의 본질



3부

태평양 전쟁의 씨앗1

태평양 전쟁의 씨앗2

도조 히데키, 그리고 또 하나의 괴물

일본을 늪에 빠트린 4명의 '미친놈'

대륙의 각성완료, 다급해진 일본

대동아(大東亞)의 환상에 눈 먼 일본

일본, 건드리지 말아야 할 걸 건드렸다 1

일본, 건드리지 말아야 할 걸 건드렸다 2

일본의 패배

일소중립조약이 파기되던 순간 1

일소중립조약이 파기되던 순간 2

천조국, 움직이다



4부

왜 일본은 미국과 전쟁을 하려고 했을까

신성불가침으로 만들어진 권력, 덴노(天皇)

일본의 반인반신, 덴노(天皇)의 오판과 태평양 전쟁

미국과 일본의 외교와 태평양 전쟁

정신력으로 전쟁을 결정한 일본

미국의 최후통첩, 헐노트(Hull Note)

진주만 공습, 두고두고 욕먹는 이유

인류 역사상 가장 병신같은 선전포고

미국, 2차대전에 뛰어들다







책1.jpg


책2.jpg


책3.jpg 



펜더가 디비주는 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


괴물로 변해가는 일본

조약, 테이블 위의 전쟁

러시아 vs 일본 한반도에서 만나다






펜더


편집 : 꾸물

Profile
딴지일보 공식 계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