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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 주


일본 언론은 
한국 대통령의 탄핵 인용 전후를
연일 톱으로 다루었습니다.

개헌도 꾸준히 소재로 등장하기에 
한일양국이 함께
헌법에 관심을 가지는 보기드문 시기입니다.

(일본은 최근, 아베 총리가 개헌 추진에 속도를 내겠다고 밝혔고
야권과 양심적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평화헌법 9조 수호 운동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에 평소 한일언론의 보도와 
양국의 헌법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일본인 필자와 함께
 
'이번 기회에 일본 헌법을 해부해보자. 
한국법과 일본법은 서로 긴밀한 관계가 있고 
그 역사와 내용을 알아보는 것도 유의미한 일이 될 거야'

라는 취지로 
일본 헌법 시리즈를 게재합니다.

딴지일보는 본인의 요청이 있을 경우,
타 언론사의 기자일지라도 익명 기고가 가능하며  
신분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른 벌금이나 재판은 
본지가 감수해왔고 앞으로도 감수할 예정입니다.





지난번에는 현행 일본 헌법의 제정 과정을 살펴 봤습니다. 거기서는 주로 현행 일본 헌헙이 제정되는 과정에서 제2차세계대전 승전국 동맹이던 연합국(UN), 실질적으로는 미국의 의향이 크게 반영됐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현행 일본 헌법은 제정 당시 연호(年號)에 따라 메이지헌법이라고도 불리는 구 헌법(정식명칭은 '대일본제국헌법')을 '개정'하는 절차를 거쳐 만들어진 것입니다. 물론 개정이라는 절차를 밟으면서도 메이지헌법을 전문개정한 것이므로 사실상 새로 헌법을 만든 것이라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일본국헌법의 제정을 '제정'이라고 이야기하는 더 큰 이유는 그럴 만한 내용적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겠죠.


일반적으로 현행 일본국헌법은 3개 이념, 즉 국민주권, 기본적 인권의 존중 그리고 평화주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일본에서 법을 전공한 사람들은 물론 웬만한 중고생들한테 현행 일본국헌법의 기본이념이 뭐냐고 물어보면 위 3가지를 답할 것입니다(물론 아예 모르거나 터무니없는 답을 주는 사람도 꽤 많지만...).  그런데 메이지헌법에는 이와 같은 현행 헌법 상 기본 이념을 하나도 갖추지 못했습니다. 현행 일본국헌법이 형식상 메이지헌법의 개정을 통해 성립이 됐음에도 새로 '제정' 됐다고 여겨지는 까닭이 여기 있는 것이죠. 그래서 이번에는 현행 일본국헌법을 짚어보기 전에 알고 싶은 대목으로 메이지헌법이 어땠길래 현행 헌법상 기본 이념이 결여된 것이었냐는 관점에서 그 주요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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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년(메이지 22년) 헌법반포약도



메이지헌법이 규정한 나라의 주인은?


헌법에는 '전문(前文)'이라 하는 머리말이 달려 있는 경우가 많고, 거기에는 해당 헌법이 추구하는 가치나 이념, 경우에 따라 헌법을 재개정하게 된 유래 등이 적히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위에 소개한 현행 일본국헌법의 기본 이념 역시 전문에 나와 있는데, 전문 제1항의 단락을 보면 원래 일본국헌법은 일본국민이 '이 헌법을 확정하는' 것이며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것이 선언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일본국헌법은 일본국민이 만든 헌법, 소위 '민정헌법(民定憲法)'의 형식이며, 국가 정치의 방향성을 최종적으로 결정할 권리, 국정의 최종적 결정권으로서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메이지헌법은 헌법을 제정하는 주체부터가 달랐습니다. 메이지헌법은 메이지천황이 당시(1889년/메이지22년) 수상을 맡던 쿠로다 키요타카(黒田清隆)에게 '대일본제국헌법 발포의 조칙(大日本帝國憲法 發布詔勅)'을 전달하는 형식이었습니다. 그래서 메이지헌법은 군주가 제정한 헌법이라는 뜻으로 '흠정헌법(欽定憲法)'으로 분류됩니다. 그리고 메이지헌법 제1조는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萬世一系/영원히 하나의 계통이 이어짐)의 천황이 이를 통치한다”고 규정했고 제4조는 천황이 “나라의 원수이자 통치권을 총람(總覽)하는" 자로서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일본의 주권자는 천황이며 천황이 입법, 행정, 사법 등 국가의 모든 작용을 궁극적으로 장악하고 통치하는 주체임을 규정하고 있었던 거죠.


그리고 천황의 지위와 관련해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메이지헌법 상 천황의 지위가 천황의 조상인 '신()의 의지'에 기초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는 점입니다. 일본의 건국신화를 전해주는 '일본서기(日本書記)'에 따르면 이 '신의 의지'라 함은 황조(皇祖)인 天照大神(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가 황손(皇孫)인 瓊瓊杵尊(니니기노 미코토)를 일본으로 강림(降臨)시켰을 때에 준 칙어(勅語/임금의 말씀)에서 밝혀진 의지를 뜻한다고 합니다. 일본서기(日本書記)에 나와 있는 그 칙어는 일본국-葦原千五百秋之瑞穂國(아시하라노 치이호아키노 미즈호노 쿠니)- 황조의 자손이 임금으로서 통치할 땅이며 황위(皇位)는 천양(天壌/하늘과 땅)과 함께 무궁하게 번영할 것이라는 취지를 밝히기도 했답니다. 어쨌든 오늘날에 '천조의 칙(天祖)'이나 '천양무궁의 신칙(天壌無窮神勅)', 아니면 단지 '신칙'이라고도 불리는 신의 의지를 근거로 해서 메이지헌법은 일본을 '만세일계'의 군주국으로 규정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이렇듯이 메이지헌법 체제 하에서는 천황이 주권자이자 모든 국가권력의 원천으로 규정 됐고 그 근거가 천황의 조상인 신의 의지에 있었습니다. 여담이지만 제2차세계대전 중 천황의 신격화가 진행되면서 사람들은 천황을 '現人神(아라히토 가미/사람 모습으로 이 세상에 나타난 신)'로 우러르기도 했고 천황의 초상화나 초상사진을 '御眞影(고싱에이)'라고 부르며 집이나 학교에서 소중히 벽에 걸었다고 하죠. 또한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이듬해에는 쇼와천황(昭和天皇/메이지천황의 손자)이 국민들에게 새 일본 건설을 위해 밝힌 조서(詔書/천황이 내리는 문서)에서 자신이 신()임을 부정하기도 했습니다(이른바 쇼와천황의 '인간선언'으로 알려지고 있죠. 다만 해당 조서에는 인간이나 선언이라는 어휘는 하나도 안 나왔습니다. 조서의 정식명칭이 너무 길기 때문에 쇼와천황이 스스로 신격을 부정한 부분에 착안해서 언론사 등이 그런 통칭을 사용한 것이죠).


어쨌든 메이지헌법은 나라의 주인이 국민이 아니라 천황이라는 점을 특색으로 했었습니다. 이러한 체제인 만큼 얼핏 생각해도 국민들의 인권이 제대로 보장 됐을 리가 없었겠죠. 그럼, 그 인권 보장이 미비했던 부분을 살펴 보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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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초대덴노 - 진무덴노(神武天皇)



메이지헌법에도 인권조항은 있었지만...


메이지헌법도 국민의 인권에 관한 조항도 미흡하나마 갖추고 있었습니다. 메이지헌법 '제2장 신민의 권리의무'(메이지헌법은 국민을 신민(臣民)이라 불렀어요)에서 아래와 같은 규정을 두고 있었습니다.


제22조  일본 신민은 법률의 범위 내에서 거주 및 이전의 자유를 가진다. 

제23조  일본 신민은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면 체포, 감금, 심문, 처벌을 받지 아니한다. 

제24조  일본 신민은 법률에서 규정한 법관의 재판을 받을 권리를 빼앗기지 아니한다. 

제25조  일본 신민은 법률에서 정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본인의 승락 없이 주거가 침입당하거나 수색되지 아니한다. 

제26조  일본 신민은 법률에서 규정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신서(信書/편지)의 비밀을 침해당하지 아니한다.

제27조   ①일본 신민은 그 소유권을 침해당하지 아니한다. 

②공익을 위하여 필요한 처분은 법률에 규정한 바에 의한다. 

제28조  일본 신민은 안녕질서를 방해하지 아니하고 신민으로서의 의무를 위배하지 아니하는 한 신교(信敎)의 자유를 가진다. 

제29조  일본 신민은 법률의 범위 내에서 언론, 저작, 간행, 집회 및 결사의 자유를 가진다. 

제30조  일본 신민은 상당한 경의와 예절을 지키며 따로 정하는 규정에 따라 청원을 할 수 있다. 

제31조  이 장에 든 규정은 전시(戰時) 또는 국가사변(國家事變)의 경우에 있어서 천황대권(天皇大權)의 시행을 막지 아니한다.


오늘날 인권 의식의 잣대로 보면 너무나 미흡한 인권 리스트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은 물론입니다. 그러나 사유재산 제도(제27조)나 거주이전의 자유(제22조) 등 경제적 자유권, 신서의 비밀(제26조)이나 신교의 자유(제28조), 언론의 자유(제29조) 등 정신적 자유권, 적법절차원칙에 관한 일련의 규정(제23조~제25조), 청원권(제29조) 등, 나름 최소한의 인권 규정은 갖춰져 있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물론 이러한 인권의 분류는 상대적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딘가에 거주할 권리가 정신적 자유에 속하거나 출판 행위가 경제적 자유권의 행사로 평가될 수 있는 경우도 있겠습니다).


여기서 문제삼을 것은 우선 “법률의 유보”입니다. 법률의 유보라는 용어는 원래 ①국가 행정은 함부로 행해지면 안 되고 반드시 법률에 기초해야 된다는 뜻으로 사용되다가 ②헌법이 보장하는 인권이라 할지라도 법률에 기초하는 한 제한될 수 있다(즉 법률이 정하는 범위 내에서만 보장된다)는 뜻으로 사용 됐습니다. 메이지헌법의 인권 보장이 미흡했다고 할 때, 문제 되는 것은 ②의 의미의 법률의 유보입니다. 물론 법률이 정하는 인권 보장의 범위가 합리적이면 별로 문제가 안 되지만 법률에 의해 부당하게 인권이 제한될 수 있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겁니다. 위에 인용한 메이지헌법 각 규정에 있는 '법률의 범위 내에서'라든가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면 …지 아니한다', 아니면 '법률에서 정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등은 ②의 뜻으로 기능한 법률의 유보를 전형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러한 법률의 유보가 인권을 쉽게 제한할 수 있다는 점을 선명하게 알려주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바로 <천황기관설 사건>이라 불리는 학술서 분포 금지 사건이죠. 이 사건에서 도쿄제국대 교수이던 미노베 타츠키치(美濃部達吉)는 “법적으로 국가는 하나의 법인이며, 따라서 의사를 가지고 권리의 주체이다”라는 독일의 학설을 일본에 적용해서 천황은 단지 일본국이라는 법인의 의사결정 기관에 불과하다(따라서 천황이 주권자임은 그가 우연히 그 의사결정 기관 역할을 맡고 있는 것에 기인할 뿐이다)는 학설을 펼쳤습니다. 이러한 학설은 일본의 군국주의화가 심화되는 과정에서 '국체(國體/천황을 중심으로 한 국가 체제)'에 반한다는 이유로 미노베 교수의 저작물들이 출간 금지를 당했습니다. 미노베 교수가 갖는 표현의 자유가 침해당한 셈인데 그 자유는 어디까지나 '법률의 범위 내에서' 보장받을 수 있었고 실제로 미노베 교수의 3개 저작물이 분포 금지당한 이유는 출판법 위반이었습니다.


메이지헌법 하의 인권 보장과 관련해서 또 하나 언급할 것은 통치기구, 즉 입법, 행정, 사법의 3권을 맡은 기관 서로의 관계에 관한 구조입니다. 원래 삼권분립이란 국가 권력을 입법, 행정, 사법으로 나누고 각각 다른 기관에 행사시키며 서로 견제억제하도록 함으로써 국가 권력의 횡포에서 국민의 인권을 지키기 위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삼권분립의 취지가 무시되는 제도는 제대로 인권을 보장한다고 보기 어렵겠죠. 그런데 메이지헌법은 국무대신, 제국의회(국회), 재판소, 추밀원(樞密院), 육군, 해군 등에 각 기관이 관여할 권한을 분배하기는 했었으나 각 기관이 독립적으로 천황에 대해 보필(輔弼/도와 줌) 내지 협찬하는 형식을 취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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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제국의회는 천황의 입법권에 '협찬'하는 기관이었고(제5조), 각 국무대신은 소관 행정권에 대해 천황을 '보필(輔弼/도와 줌)'하는 것이었고(제55조), 재판소는 사법권을 '천황의 이름 하에서' 행사하기로 규정되었습니다(제57조). 쉽게 말해서 각 국가기관은 단지 천황을 도와주는 기관에 불과했지, 서로 견제억제하면서 국민의 인권을 지킨다는 구조가 아니었던 것이죠. 또한 제국의회의 권한은 입법에 있어서도(제6조~제9조), 예산에 있어서도(제66조~제71조), 긴급사태에 대한 조치에 대해서도(제13조~제14조, 제31조) 큰 제한을 받았고 그 결과 정부나 군부에 대한 억제력이 극히 미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울러 제국의회는 상원과 하원으로 이루어지는 2원제를 취하기는 했는데 상원에 상응하는 귀족원의 의원은 공선으로 뽑힌 국민 대표가 아닌 데다가 귀족원 자체가 중의원과 동등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예를 들어 제38조~제40조, 단 예산을 먼저 논의할 권한은 중의원에 있었음) 비교적 민의를 잘 반영하는 중의원을 귀족원이 억제할 역할을 했죠. 한편으로 각 국무대신은 “천황을 보필하며 그 책임에 임한다”(제55조)고 규정돼서 헌법상 의회(나아가서는 일반 국민)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발상은 없었습니다.


위와 같이 메이지헌법에 의한 인권 보장은 너무나 미흡했는데 메이지헌법 체제 하에서 가장 큰 인권 침해는 무엇보다 군부 독재를 허용한 점에 가장 선명하게 나타났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이어서 평화주의의 결여는 메이지헌법이 군부의 독재를 허용해 버린 까닭이라는 시각으로 살펴 봅시다.




메이지헌법이 군부 독재를 허용한 까닭은?


현행 일본국헌법의 세 번째 기본 원리는 평화주의입니다. 그 구체적 내용은 현행 헌법 제9조가 규정하는 전쟁의 포기와 전력 및 교전권 부인에 나타나고 있죠. 물론 제9조의 규정 내용이 현실 여건과 너무 괴리되어 있다는 문제가 있는데 그 문제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이야기하도록 하고, 여기서는 제9조가 나타내는 평화주의가 제2차세계대전 시 군부 독재를 허용한 메이지헌법의 체계에 대한 반동으로 규정됐다는 점만 확인해 두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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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인용한 메이지헌법 조문 중 제31조에 천황대권(天皇大權)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천황대권이란 한 마디로 메이지헌법 하에서 천황에 속한 권능을 가리키는 것인데 넓게는 입법권행정권사법권 등을 비롯한 통치권 일반을 뜻하고, 좁게는 제국의회의 협찬 없이 천황이 행사할 수 있는 국무대권, 황실대권, 통수대권의 총칭이라고 합니다(메이지헌법 제31조에 나오는 천황대권은 일명 '비상대권'이라고 불리며 국무대권의 하나로 분류됩니다). 군부 독재와 관련해서 중요한 것은 통수대권(統帥大權)입니다. 메이지헌법 제11조가 “천황은 육해군을 통수한다”고 규정했는데 이 조문이 바로 통수대권의 근거가 됐습니다.


원래 '통수'라 함은 작전용병 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육해군을 총괄해서 움직이는 국가 작용을 말하는데 군사에 관한 만큼 전문적 지식을 가지고 비밀리에 신속하게 행해질 필요가 있죠. 그러므로 통수에 관한 권한은 국무대신의 보필, 즉 대신조언제에서 벗어나 천황이 단독으로 누려야 된다는 것이 원칙이었죠. 그러나 실제로는 정부에서 완전히 독립한 지위에 있던 육군참모총장 및 해군참모총장(양자를 뭉쳐서 “군령기관”이라고 함)이 천황을 보필하게 됐었습니다.


아울러 메이지헌법 제12조가 “천황은 육해군의 편성 및 상비 병액(兵額/병사의 인원수)을 정한다”고 규정했었는데 이것은 원래 국무대신의 보필에 속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군국주의가 대두하자 제12조의 해석과 관련해서 군의 편제장비 등에 관한 사항도 통수 사항이 아니냐는 주장이 군부에서 제기됐습니다.


특히 1930년 당시 하마구치 오사치(浜口雄幸) 내각이 해군 군령부의 승인 없이 런던해군군축조약을 체결한 것에 대해 가토 히로하루(加藤寛治) 해군 군령부장을 비롯한 강경파는 하마구치 내각의 조약 체결이 천황의 통수권을 침해하는 것이라며 공격을 가하기에 이르러 소위 말하는 “통수권 간범(干犯/간섭해서 침범함) 문제”가 표면화됐습니다.


조약은 체결 당사국이 비준이라는 국내적 절차를 거쳐 서로 비준서를 교환/기탁해야 체결 당사국을 구속할 수 있는데 당시 일본의 비준권자는 천황이었습니다. 하마구치 수상은 어렵게나마 쇼와천황에게 런던해군군축조약을 비준시키기에 성공했으나 조약이 비준된 지 약 한 달 후 국가주의 단체에 속하는 청년한테 암살당해 버렸습니다. 이 사건이 계기가 돼서 시데하라(幣原) 외무대신이 추진하던 이른바 협조외교의 맥이 끊겼고 국내적으로도 정당 정치가 후퇴되며 군부가 정부 결정이나 방침을 외면해서 폭주하기 시작했죠.


통수권 간범 문제 이후에도 군부는 계속 독재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 가장 큰 고비가 된 것이 1936년 육군 청년 장교를 주체로 한 군사 쿠데타 미수 사건(소위 2.26사건)과 그 후에 부활한 '군부대신 현역무관제(軍部大臣現役武官制)'입니다. 이 제도는 육해군대신의 취임 자격을 현역의 무관(군인)으로 한정하는 것인데 1900년의 창설됐다가 호헌운동(護憲運動)이 고조되면서 한때 완화 됐었는데 2.26사건 후 다시 강화됐습니다.


이 제도의 문제는 수상이 내각을 꾸밀 때에 사실상 군부의 동의가 필요하므로 군부가 그 의향에 안 맞는 내각의 성립을 맞을 수 있었고 내각이 조직된 후에도 내각과 군부가 대립하게 되면 군부가 육해군대신을 사직시키면서 후임 대신을 추천하지 않음으로써 합법적으로 내각을 총사직으로 몰아넣을 수 있었다는 점이죠. 1940년 요나이 미츠마사 (米内光政) 내각의 총사직은 일본 군국주의가 한층 더 심각화된 것을 상징하는 사건인데 그 때 총사직의 이유가 바로 하타 슌로쿠(畑俊六) 육군대신의 자진 사직이었습니다.


일본에서도 오해하는 사람이 종종 있는데 일본 군국주의가 폭주한 제도상 바탕은 메이지헌법이 천황에 부여한 통수권 그 자체가 아니고 천황의 통수권과 더불어 군부대신 현역 무관제가 취해진 것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쇼와천황이 스스로 나서서 적극적으로 일본을 제2차세계대전으로 이끌어갔다기보다는 군부가 천황의 통수권을 대의명분으로 내세우면서 군부대신 현역 무관제를 이용해서 정당 정치의 맥을 끊고 군사적 욕망을 충족시키려던 결과, 나라 전체를 깊은 수렁에 빠뜨렸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물론 이렇게 보는 시각과 쇼와천황의 전쟁책임 인정 여부는 무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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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봤듯이 메이지헌법은 주권의 소재, 인권 보장, 그리고 군부에 대한 억제 모든 점에 있어서 현행 일본국헌법이 선언하는 기본 이념과는 너무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독자 여러분 중에서는 이러한 의문을 가지시는 분도 계실 겁니다. “형식상이나마 현행 헌법은 메이지헌법을 개정한 것이라고 했는데, 천황이 만들고 국문에게 주어진 헌법이 어떻게 민주 헌법으로 되살아 날수 있냐” 이거죠. 당연한 의문입니다. 실제로 헌법학에서는 가령 어떤 헌법전이 개정 규정을 두고 있다 하더라도 해당 헌법의 기본 원리를 파괴하는 개정은 “헌법의 자살 행위”로서 허락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단 통설로 인정된 것 같습니다.


메이지헌법에 관해서도 학설상 천황주권이나 천황이 통치권을 총람하는 “국체”의 변혁은 법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었답니다. 그렇다면 메이지헌법과 현행 일본국헌법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면 될까요. 많은 논의가 벌어지는 대목이지만 일단 현시점에서 가장 설득력 있게 주장되는 설은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 단계에서 메이지헌법의 천황주권이 부정되면서 국민주권이 성립되고 일본 정치체제의 기본 원리가 됐다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 1945년 8월에 일종의 법적 혁명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죠(이른바 8월혁명설). 어떻게 보면 터무니없는 기회주의이기도 한데 양 헌법의 내용적 단절성은 받아들이면서 메이지헌법 제73조에 의한 개정 절차를 밟은 것으로 일단 형식상 연속성을 갖추게 하는 것은 사실상 편의라는 관점에서 볼 때에는 반드시 나쁜 아이디어가 아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상으로 일단 일본국헌법을 짚어보기 전에 알고 싶은 사정은 마무리하도록 하고 다음부터는 현행 일본국헌법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직 어떤 차례로 이야기 드릴지 고민 중에 있는데 일단 현행 헌법 중 가장 눈에 띄는 주제로서 다음과 다다음 이야기에서는 천황과 평화주의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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