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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 당시 치러진 수많은 전투와 그 전투의 무대가 된 전장 중 일본의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준 전장은 어디일까?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필리핀만한 전장은 없다고 본다. 일본의 흥망성쇠는 물론, 태평양 전쟁 당시의 일본의 기본적인 전략, 군정(軍政)의 실패, 대동안 공영권의 허상은 물론, 일반인들에게는 덜 알려진 일본군의 학살과 온갖 만행들, 그리고 미국의 ‘사형선고’까지 총망라해서 종합선물세트로 보여준 곳이 바로 필리핀이다.


태평양 전쟁의 축소판이라고 해야 할까? 필리핀 전역을 이해하면, 태평양 전쟁을 이해할 수 있다.




맥아더 그리고 바탄 전투


태평양 전쟁 직전 맥아더(Douglas MacArthur)는 신생 필리핀군 군사 고문이자 '최고사령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덤으로 그는 필리핀 육군 원수 계급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여러모로 필리핀과 인연이 있었던 인물이다. 아버지는 필리핀의 군사령관 경력이 있었고, 그 자신도 젊은 시절 필리핀에서 2번이나 근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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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차 세계대전의 전쟁영웅이었다. 30대의 나이로 사단장을 맡아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군 사단장 중 가장 많은 15번의 훈장수여를 받았다. 그가 대공황 시기 퇴역군인들의 평화적인 시위(1945년에 지급하기로 한 보너스를 조기 지급해 달라는)를 탱크를 동원해 밀어버린(게다가 그 지휘를 패튼 소령에게 맡겨버렸다! 2차 대전 당시 미친개처럼 날뛰던 그 패튼이다!) 사건만 보면, 그의 독선적인 성격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수석부관인 아이젠하워가 뜯어말렸지만, 그는 이 보너스 원정대 중 참전용사는 10%도 안 될 것이고, 이들 모두 공산혁명을 획책하는 ‘빨갱이’라 주장했다. 물론, 이들은 빨갱이가 아니었고 원정대의 대부분은 실제로 군복무를 했던 퇴역군인이었다. 이들은 그저 배가 고파서 보너스를 미리 지급해 달라고 요구했던 것뿐이었다.


그 사건은 맥아더가 군문(軍門)에서 ‘잠시’ 떠나는 단초가 돼 준다. 대공황의 한 가운데, 먹고 살기도 힘겨운 마당에 군대에 배정된 예산이 감축되는 건 당연지사였다. 맥아더는 반발했고, 결국 대통령과의 충돌로 최연소 육군참모총장은 자리를 떠나게 된다. 그리고 군사고문 자격으로 필리핀으로 떠나게 된다.


이 곳에서 그는 왕처럼 살았다. 필리핀 최고의 호텔인 마닐라 호텔의 최상층에서 가족과 함께 살며, 이곳저곳에 투자도 하면서(마닐라 호텔의 경영에 참여하거나, 광산 사업의 대주주로 활약하거나) 유유자적하게 살았다.


그러다 일본과의 전쟁이 점점 구체화되던 시기에 필리핀 방면 사령관으로 필리핀 방어부대를 지휘하게 된다. 이 당시 필리핀의 전력은 미군 3만, 필리핀군 12만으로 일본군의 침공부대 4만 3천명 보다 훨씬 많았다.


더 놀라운 사실은 필리핀으로 진격했던 4만 3천의 일본군 중 전투병력은 16사단과 48사단, 65여단, 4전차연대, 7전차연대 등 총 3만 5천명 정도였다(나머지는 수송과 항공부대). 그나마 3만 5천의 병력도 정예로 분류된 병력이 아니라 일본 내에서도 2선급으로 분류된 부대였다.


그런데도 맥아더는 일본군에게 판판히 깨져 오스트레일리아로 도망가야 했다. 왜 그랬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맥아더가 무능해서였다. 그가 인천상륙작전으로 대한민국과 이승만 정권을 살려낸 건 사실이지만, 필리핀에서의 방어전은 무능과 방심으로 덧칠 된 오욕의 역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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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전황과 맥아더의 대응을 간단하게 정리해 보겠다.


① 1941년 12월 8일 맥아더는 진주만 공습 소식을 전해 듣고, 필리핀에 전개 중인 미군의 전략폭격기, 전투기 등등을 모두 한군데 모았다. 당시 맥아더는 일본을 공격하기 위한 공격작전을 위해 이들을 한자리에 모은 것인데, 일본 해군 항공대 195대가 바로 날아와 이들을 모두 파괴했다. 덤으로 필리핀 유일의 레이더 기지도 박살냈다.


② 공군이 박살났지만, 맥아더에게는 아직 15만 명의 병력이 남아 있었다. 이걸로 방어전에 나서면 어느 정도 붙어 볼 만 했는데, 맥아더의 결정적 실수가 등장한다. 맥아더는 이 병력을 모두 해안가에 배치해 혹시 모를 상륙작전에 대비했다. 한마디로 미친 짓이었다. 필리핀은 7,107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국가다. 필리핀의 해안선은 미국 전체의 해안선보다 훨씬 길다. 이 해안선을 모두 방어할 수 있을까? 상식적으로 불가능했다. 참모들은 해안방어 대신 병력을 수습해 내륙으로 이동 거점방어를 하자고 건의했지만, 맥아더는 이를 거절했다. 결국 맥아더의 15만 병력은 섬 여기저기에 흩어져서 멍하니 바다만 바라봤다. 그 사이 일본군 16사단은 손쉽게 상륙. 그대로 필리핀을 종단했다. 전투도, 저항도 없이 필리핀을 가로 질러 쾌속진격을 했다. 도시가 하나 둘 점령되는 마당에 참모들은 다시 한 번 병력을 수습해 일본군을 막자고 했지만, 맥아더는 여전히 해안선만을 바라봤다.


③ 맥아더가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일본군은 턱밑까지 치고 들어왔고, 병력을 수습해 바탄반도로 후퇴 방어전에 들어가려 했다. 이때 걸린 것이 ‘보급’이었다. 맥아더의 주장으론,


“당시 보급이 부족해 항복했다.”


과연 보급품이 부족했을까? 우선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이 바탄반도로 들어간 이후, 외부에서의 증원이나 보급은 올 기미가 없었고, 해군도 완전히 빠졌다. 이렇게만 보면 보급품 부족이 패배의 원인 같아 보이지만, 이 당시 보급품은 있었다. 문제는 그 보급품을 해안선 방어에 맞춰 해안방어지대 곳곳에 나눠 놨다는 것이다. 그 결과 보급품은 해안가에 방치됐고, 해안방어를 포기한 순간 보급품도 다 사라지게 됐다. 이 와중에 참모들은 바탄반도로 후퇴하면서 민간인에게 식량을 강제 징발하자고 말했지만, 맥아더가 이를 거절했다. 민간인에 대한 따뜻한 배려라 볼 수도 있겠지만, 군의 존망을 생각해야 하는 입장에선 최악의 선택이었다. 문제는 여기에 혹이 하나 더 붙었다는 것이다. 애초 15만의 병력이었던 맥아더의 병력은 7만으로 줄어들었는데, 바탄 반도로 이동 중에 합류한 민간인 7만이 붙으면서 다시 14만 명의 대인원이 됐다. 가뜩이나 부족한 보급품이 더 부족해지게 된다.


④ 이 상황에서 일본군은 병력을 빼기(!) 시작했다. 48사단은 동인도 전선으로 뺐다. 다시 말하지만, 일본군은 2선급 예비역 부대 아니면, 소집 돼 4주 훈련을 받고 바로 투입된 신출내기병력들이었다. 이런 부대임에도 필리핀 주둔군을 너끈히 상대했다. 바탄 반도에 갇힌 맥아더는 그렇게 3개월을 버텼지만 전황은 도통 개선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결국 루즈벨트 대통령은 맥아더에게 오스트레일리아로 피신하란 명령을 내린다.


⑤ 맥아더는 그 유명한 『I shall return : 다시 반드시 돌아오겠다』 라는 말을 남기고 가족들을 데리고 오스트레일리아로 도망친다. 그리고 남은 부하 7만 6천명은 고스란히 포로가 됐고, 그 유명한 ‘바탄 죽음의 행진(Bataan Death March)’으로 1만 여명이 죽어 나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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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 당시 맥아더가 외친 『I shall return』은 맥아더 사령부의 캐치프레이즈가 됐다. 그는 본국에 가서도, 대통령을 만나서도 꼭 이 말을 되새겼다. 나중에는 필리핀 게릴라들을 위한 팜플랫, 담배, 초콜릿 등등에도 다 새겨 넣었다.


1944년 7월 사이판이 함락됐다. 그 얼마 뒤에 하와이에 루즈벨트 대통령과 육해군의 수뇌들이 하와이에 모였다. 회합의 주제는,


“최종적인 일본 침공루트의 결정”


이었다. 이때 해군은 필리핀을 내버려두고 타이완으로 바로 진격할 것을 주장했다. 필리핀에서 굳이 피 흘리지 않더라도 타이완을 공략하면, 일본의 턱밑까지 치고 올라갈 수 있다고 역설했다. 정론이었다. 이때 맥아더가 들고 나온 논리가 ‘도의적 의무’였다.


“필리핀 탈환은 미국의 도의적 의무이다.”


전략적 차원이 아니라, 필리핀인들에 대한 미국의 도의적인 책무를 들고 나온 것이다. 그리고 그의 전매특허인 『I shall return』을 외쳤다. 당시 맥아더는 대통령 출마를 고려한 참모진을 구성했는데, 이들 참모진은 대외 홍보를 위해 전략을 홍보했고 맥아더를 포장했다. 맥아더 사령부가 만들어 낸 수많은 홍보 영화와 엄청난 수의 기념품들을 보면, 누가 봐도 그 수가 보일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I shall return』은 너무도 훌륭한 캐치프레이즈였다. 루즈벨트는 맥아더의 손을 들어줬다.


이 대목에서 잠깐 맥아더의 대선 출마에 대한 당시 분위기를 설명해야겠다. 그의 대선출마에 대한 분위기를 가장 우려했던 이는 당시 대통령이었던 트루먼이었다. 그는 자신의 일기에서,


“나와 아이크(아이젠하워)는 맥아더가 공화당 전당대회가 열리기 직전 로마의 개선식을 연출하며 돌아올 것으로 예상했다 (중략) 나는 아이크에게 만약 그가 그렇게 한다면, 그(아이젠하워)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지명 도전을 발표해야 하며, 나는 기꺼이 2인자 즉, 부통령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까놓고 말해 맥아더의 상관이었던 루즈벨트와 트루먼은 둘 다 맥아더를 싫어했다. 그는 오만했다.


웨스트포인트 최우수 졸업생이자, 제1차 세계대전의 영웅, 30대에 육군참모총장을 지냈고, 극동지역에서의 오랜 경험 등등 맥아더는 오만을 넘어서 독선에 가까운 행동을 보였다. 그의 사생활을 보면, 친구가 거의 없다. 그의 첫 번째 결혼식에 그의 하객은 단 한명이었다는 것만 봐도 그의 인간관계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빈자리를 채워준 것이 부하들이다. 그는 늘 아첨하는 부하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런 그를 루즈벨트는 어느 정도 컨트롤이 가능했지만, 트루먼은 그를 어려워했다. 변변한 학교 교육도 못 받았고, 국제정세는 물론, 극동에서의 군사 문제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던 트루먼은 루즈벨트와 달리 맥아더를 어떻게 컨트롤해야 할지 난감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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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오만하고 독선적인 장군을 루즈벨트나 트루먼이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은 그가 가진 대중적인 인기와 더불어 그의 군사적인 ‘촉’ 때문이었다. 그는 누구도 예상치 못하는 허를 찌르는 작전을 구상했고, 이를 실천에 옮겼다. 오만했고, 독선적이기에 자기가 생각한 게 옳다라고 믿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반면에 이런 오만 덕분에 그의 생각과 배치되는 정보를 거부했고, 자기만의 생각을 우선시 했기에 상황인식도 늦었다.


양날의 검과 같았다고 해야 할까? 바탄 전투는 맥아더의 독선과 아집이 한 없이 안 좋은 쪽으로 진행된 결과였다.


 

 

1. 전쟁국가 일본/ 살림출판사/ 이성환

2. 호호당 선생의 ‘프리스타일’

3. 세계전쟁사/ 육군사관학교 전사학과/ 황금알

4. 러일전쟁과 을사보호조약/ 이북스펍/ 이윤섭

5. 조선역사 바로잡기/ 가람기획/ 이상태

6. 다시 쓰는 한국근대사/ 평단문화사/ 이윤섭

7. 대본영의 참모들/ 나남/ 위텐런 지음, 박윤식 옮김  

8. 나모위키

9. 쇼와 16년 여름의 패전/ 추수밭/ 이노세 나오키 지음

10. 『중일 전쟁』 용, 사무라이를 꺾다/ 미지북스/ 권성욱 지음

11. 나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이었다 / 서해문집/ 김효순 지음

12. 석유전쟁/ 매일경제신문사/ 정기종 지음

13. 우리의 눈으로 본 일본제국 흥망사/ 궁리/ 이창위 지음

14. 연합함대 그 출범에서 침몰까지/ 가람기획/ 박재석, 남창훈 지음

15. 프레시안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24246

16. 일본의 이중권력, 쇼군과 천황/ 살림출판사/ 다카시로 고이치

17. 히로히토 신화의 뒤편/ 을유문화사/ 에드워드 베르 지음

18. 일본의 가장 긴 하루/ 가람기획/ 한도 가즈토시 지음






1부 

[러일전쟁]


2부

드레드노트의 탄생

1차 세계대전, 뒤바뀐 국제정치의 주도권

일본의 데모크라시(デモクラシー)

최악의 대통령, 최고의 조약을 성사시키다

각자의 계산1

8년 의 회, 던 축 

일본은 어떻게 실패했나2

만주국, 어떻게 탄생했나



외전

군사 역사상 가장 멍청한 짓

2차대전의 불씨

그리고, 히틀러

실패한 외교, 히틀러를 완성시키다

국제정치의 본질



3부

태평양 전쟁의 씨앗1

태평양 전쟁의 씨앗2

도조 히데키, 그리고 또 하나의 괴물

일본을 늪에 빠트린 4명의 '미친놈'

대륙의 각성완료, 다급해진 일본

대동아(大東亞)의 환상에 눈 먼 일본

일본, 건드리지 말아야 할 걸 건드렸다 1

일본, 건드리지 말아야 할 걸 건드렸다 2

일본의 패배

일소중립조약이 파기되던 순간 1

일소중립조약이 파기되던 순간 2

천조국, 움직이다



4부

왜 일본은 미국과 전쟁을 하려고 했을까

신성불가침으로 만들어진 권력, 덴노(天皇)

일본의 반인반신, 덴노(天皇)의 오판과 태평양 전쟁

미국과 일본의 외교와 태평양 전쟁

정신력으로 전쟁을 결정한 일본

미국의 최후통첩, 헐노트(Hull Note)

진주만 공습, 두고두고 욕먹는 이유

인류 역사상 가장 병신같은 선전포고

미국, 2차대전에 뛰어들다

전통이란 이름의 살인, '무사도(武士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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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더가 디비주는 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


괴물로 변해가는 일본

조약, 테이블 위의 전쟁

러시아 vs 일본 한반도에서 만나다






펜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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