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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2. 18. 수요일

이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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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일행은 우르르 술집으로 몰려갔다. 지난 달 보안감사를 마치고 회식을 했을 때 보안과장이 마음에 들어 했던 곳이었다. 장재완이 문을 열어젖히자 보안과장이 안으로 들어갔고 사장이 뒤를 따랐다. 다른 직원들도 줄을 지어 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웨이터로 일하던 습관이 아직도 몸에 배어 있는 장재완이 정중한 태도로 유리문을 붙잡고 일행이 안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맨 마지막에 남은 철수도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장재완과 눈이 마주치자 차마 안으로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철수는 서류가방을 다시 한번 바짝 몸으로 당겨 들었다. 그리고는 화장실에 다녀오겠노라 말했다. 장재완이 고개를 끄덕하고는 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화장실은 막 청소를 마친 듯 깨끗했다. 철수는 줄지어 늘어선 소변기를 지나쳐 대변기가 있는 칸막이로 향했다. 두 칸 중 한 칸은 청소 용구를 보관하는 공간이었는데 다른 한 칸은 다행히 비어 있었다. 좁은 화장실 칸막이 안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는 좌변기 뚜껑을 덮고 그 위에 걸터앉았다.

 

꼭 끌어안고 있던 서류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나자 긴장이 풀렸다. 철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가방을 열었다. 수아의 채권 관련 서류가 담긴 파일은 철수가 서고에서 빼내 가방에 넣어 둔 그대로 담겨 있었다. 클리어파일을 펼쳐서 서류를 한 장 한 장 살펴보았다. 금전소비대차계약서, 신분증 사본, 주민등록초본, 수아가 근무했던 적이 없는 알 수 없는 회사의 재직증명서도 있었다. 철수는 서류들을 조심스럽게 파일에서 꺼냈다.


이 문서를 계속 들고 있다가는 언제 꼬리가 잡힐지 몰랐다. 술자리에서 누군가 가방을 열어 본다면, 실수로 가방을 떨어뜨려 내용물이 쏟아진다면, 만에 하나라도 가방을 분실하기라도 한다면, 지금까지 수아를 위해 했던 모든 일이 모두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회사 보유 채권을 외부로 빼돌린 사실을 들킨다면 그 결과는 철수가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 분명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철수는 양손으로 서류를 움켜쥐고 반으로 찢었다. 절반이 된 종이를 포개어 또 찢었다. 다시, 또 다시, 종이가 찢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철수는 손톱만한 조각이 되기까지 종잇장을 열심히 찢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조각을 그러모아 왼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그토록 오래도록 수아를 괴롭혔던 채무가 한 줌의 종잇조각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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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어 있는 오른손으로 서류가방과 텅 빈 파일을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방을 화장실 벽에 설치된 고리에 걸쳐 놓고 파일은 가방 안에 밀어 넣었다. 변기 뚜껑을 열고 찢어진 종이 뭉치를 쏟아 버렸다. 변기통에 고여 있던 물 위로 종잇조각이 둥둥 떠올랐다. 수아의 이름이 보였고 잘려나간 얼굴 사진이 보였다. 이렇게 보내고 싶지는 않았는데…….

 

눈을 질끈 감고 수세식 변기의 밸브를 내렸다. 우르르 소리와 함께 종잇조각이 하수구로 사라졌다. 그러나 흔적이 단번에 사라지지 않고 작은 쪼가리 몇 개가 수면 위로 둥실 떠올랐다. 철수는 수조의 물이 다시 차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물을 흘려보냈다. 변기 안을 집요하게 살피며 여러 번 물을 내렸다. 모든 일을 마치고 고개를 들었을 때 철수의 얼굴은 눈에서 흐른 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눈물을 닦을 겨를도 없이 재빨리 화장실 밖으로 나갔다. 이 자리에서 서둘러 벗어나고 싶었다.

 

여러 명이 둘러앉을 수 있도록 식탁을 다닥다닥 붙여 놓은 술집으로 들어가니 동료들이 어디에 있는지 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박치훈 과장이 문간에서 두리번대는 철수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어서 어렵지 않게 일행을 찾았다. 식탁 위에는 이미 안주접시가 깔려 있었고 술잔이 몇 차례 돌아간 분위기였다. 비어 있는 의자는 콘돌리자 라이스 법무과장의 옆이었다. 철수가 의자에 앉자마자 박치훈 과장이 철수에게 소주잔을 내밀고 술을 따라 주었다. 철수는 고개를 살짝 돌리고 술을 한 모금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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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훈은 철수를 놀리듯이 말했다.

 

 

“김철수, 벌써 토하고 왔냐? 얼마나 토했길래 눈깔이 시뻘개.”

 

 

철수는 흠칫 놀라 손등으로 눈꺼풀을 비볐다. 화장실에서 정신없이 나오느라 세수도 하지 못했다. 손바닥으로 볼을 쓸어내리자 물기가 느껴졌다. 누가 볼 새라 맨손으로 빠르게 얼굴을 닦아냈다. 박치훈은 철수가 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핀잔을 주었다.

 

 

“사내새끼가 돼 가지고, 냄새만 맡아도 취하냐?”

 

 

회사 안에서는 철수가 술에 약하다는 사실이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새로울 것 없는 박치훈의 말에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다. 박치훈은 제 앞에 놓인 빈 술잔을 들어 보였다. 철수가 엉덩이를 들고 팔을 뻗어 조금 떨어져 있는 소주병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박치훈은 철수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오른편에 앉은 현지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술은 여자가 따라야 제 맛인데…”

 

 

현지는 박치훈 과장의 말을 못 들은 척 외면하고 맞은편에 앉은 철수와 법무과장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현지의 분홍빛 입술은 꼭 다물어져 있었으나 법무과장은 현지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소리를 들었다. 도와주세요, 하는 간절한 요청이었다. 콘돌리자 라이스가 철수의 손에 들린 소주병을 낚아챘다.


박치훈은 윗니로 아랫입술을 물고 한숨을 들이키더니 쯥쯥 소리를 냈다. 빈 술잔을 앞으로 내밀면서도 아쉬운 듯 말했다.



“나는 술이든 여자든 21년산이 좋던데.”

 

“뭔 소리여? 21년산 보다 30년산이 좋지.”



콘돌리자 라이스가 퉁을 놓으며 박치훈의 소주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급하게 따른 술이 넘쳐 박치훈의 손목을 타고 흘렀다. 박치훈은 투덜대면서도 능글맞게 말했다.

 

 

“우리 법무과장님 사랑이 넘치셔.”

 

“너무 넘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네.”

 

 

콘돌리자 라이스는 탁 소리가 나게 술병을 내려놓았다. 탁자에 유리병이 부딪히는 날카로운 소리를 듣고 조황진 과장이 몸을 돌렸다. 그는 이쪽 자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아무도 더 이상 말을 주고받지 않았다. 조황진은 고개를 갸웃하며 찬찬히 사람들의 얼굴을 살피다가 철수를 향해 말했다.

 

 

“아, 철수는 매운 거 못 먹잖아. 계란찜 시켜줄까?”

 

 

식탁 위에 놓인 메뉴는 매운 쭈꾸미 삼겹살 볶음이었다. 철수는 조황진이 챙겨주는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안주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작은 연체동물과 돼지의 목덜미에서 잘라낸 살코기 위로 기름기에 번들거리는 붉은 양념이 뒤덮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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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수가 젓가락을 집어 들며 조황진에게 대꾸했다.


 

“괜찮습니다. 저도 쭈꾸미 좋아합니다.”

 

 

철수는 조황진과 눈을 마주치며 맵고 짠 안주를 먹어치웠다. 참을 수 없을 만큼 강렬한 맛이 입 안으로 퍼져나가기 전에 꿀꺽 삼켜버렸다. 목구멍을 타고 위장까지 열기가 전해졌다.

 

사실 철수는 매운맛을 전혀 즐기지 않았다. 즐기지 않을 뿐 아니라 견디지도 못했다. 붉은색 음식물을 입에 넣으면 그것이 내장을 아주 빠른 속도로 통과해 액상에 가까운 형태로 배출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철수는 기꺼이 매운 양념으로 범벅된 쭈꾸미와 삼겹살을 연신 집어 먹었다.

 

원하는 것을 하나 얻었으면 희생이 따라야 하는 법이라고 철수는 생각했다. 가장 중요한 일을 해결했으니 어떤 일이든 감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혓바닥과 입천장이 화끈 달아올랐다. 매운 입을 헹구려고 술을 마셨다. 그렇게 먹고 마시다 보니 금세 취기가 올랐다.

 

술이 들어가자 모두들 목소리가 커졌다. 사장은 추심업계의 선배인 본사 보안과장을 향해 뻐기듯이 말했다.

 

 

“토토머니라고 재호 선배 들어간 회사 있잖습니까. 요즘 엄청 잘나가는 모양입니다. 거기도 추심원 많이 필요하다고 저보고 오라는 겁니다. 지지난 주에 얼굴 보자고 그래서 만났는데 거기 사장도 같이 나왔지 뭡니까. 아니, 토토 사장이 저한테 뭐라 그랬는지 아십니까? 내 밑에서 일해 볼 생각 없냐, 기본으로 오백은 깔아 줄게 그러는 겁니다. 참 나, 어떻게 늑대 새끼가 개 밑으로 들어간답니까?”

 

 

사장이 어깨를 으쓱하며 잘난 체를 했다. 지금보다 나은 조건으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는 사실을 밝히며 자신은 늑대이지만 경쟁사의 사장은 고작 개에 불과하다는 근사한 비유를 들었다. 철수는 사장의 말을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았다. 영화 타짜에 나온 대사가 아니었던가? 철수는 잠시 영화에서 주인공 곤이가 고작 한 끝을 들고 오억을 배팅했던 아슬아슬한 장면을 떠올렸다.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는 사장의 말에 기분이 상한 본사 보안과장은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화제를 사장의 결혼생활과 2세 문제로 돌려버렸다.

 

 

“제수씨는 뭐 좋은 소식 없어?”

 

“저희 맞벌이라 바쁘잖습니까.”

 

“임마, 미룰 걸 미뤄야지. 오늘 당장 애를 만들어도 열 달 지나야 태어나. 애가 스무 살 되면, 니가 나이가 몇 개냐? 애 대학 가기도 전에 퇴직이야. 요즘 같은 세상에 니가 정년까지 뻐팅길 거 같아? 암만 둘이 벌어 모아 놓는다 해도 애 낳아 봐라. 그야말로 밑 빠진 독이야. 어차피 낳을 거면 제수씨 설득해서 얼른얼른 해치워. 더 늙으면 애도 잘 안 생겨. 우리도 얼마나 고생했는데…”

 

 

보안과장은 사장보다 고작 두 살이 많았으나 어른스럽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회사에서 승진할 길이 보이지 않고 다른 회사에서 일자리를 얻을 길도 없는 중년의 남자에게 유일하게 남은 자랑거리는 마흔이 되어 얻은 딸자식 뿐이었다. 보안과장이 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서 아기 사진을 보여주었다. 사장은 관심 없는 체 곁눈으로 흘끔거렸지만 표정에서 부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철수는 건너 테이블에 앉은 사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매각채권 목록에서 수아의 기록을 삭제할 방법을 구상했다. 단 한 사람의 데이터가 지워진다면 의심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여러 사람의 데이터를 무작위로 삭제한다면 어떨까?

 

아침 일찍 출근해서 사장의 데스크탑으로 메인서버에 접속해 그 일을 처리해야겠다. 작업을 마치기 전에 누군가 사무실에 들이닥친대도 늘 그랬듯이 철수가 사무실의 모든 컴퓨터 전원을 켜 놓는 중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만에 하나 나중에 데이터 삭제가 드러나 문제가 된다고 해도 사장의 컴퓨터가 진원지로 밝혀진다면 그 자신이 나서서 사건을 무마시키려 할 것이다.

 

그렇게 시나리오를 만들어 보자 철수는 문제가 모두 해결된 것 같이 안도감이 들었다. 평소와 달리 연거푸 술잔을 비우다 보니 이성이 마비된 탓도 있었다.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사장과 보안과장이 결혼생활의 희로애락을 토로하는 이야기가 철수에게까지 들렸다. 보안과장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딸의 영특함을 입증하기 위한 사례로 모빌에 대한 집요한 관찰력과 탐구심을 거론했고, 딸의 귀여움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남다른 도리도리 잼잼의 율동성에 관해 시시콜콜하게 설명했다. 딸에게 그토록 지극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아버지가 일찍 귀가하는 대신 술집에서 자신을 존중하지도 않는 후배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철수는 그 점이 궁금했다.

 

철수는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으나 계속해서 술잔을 들었다. 위장이 울렁이는 느낌을 억누르며 목구멍으로 술을 밀어 넣었다. 어느 순간 참을 수 없는 한계에 도달했다. 위장이 아니라 대장이 문제였다. 철수의 몸속을 가득 채운 캡사이신과 알코올이 혼합되어 대장의 민감한 내벽을 자극한 지 오래였다. 꾸르르 꾸르르 분명한 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철수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자 의자가 뒤로 쓰러졌다. 좌중의 시선이 모두 철수를 향했다. 철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황급하게 자리를 떠나 밖으로 나갔다. 박치훈 과장이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저 새끼 오늘따라 존나 달리더니만.”

 

 

철수는 달렸다. 화장실을 향해 달렸다. 그러나 화장실 입구에 다다르자 발걸음이 저절로 멈추었다. 방금 전의 일이 떠오르고 말았다. 화장실의 좌변기는 하나 뿐, 수아의 이름과 얼굴이 인쇄된 종잇조각을 흘려보낸 변기에 엉덩이를 대고 배설을 할 수는 없었다. 공중화장실에서 수많은 남자들이 그 좌변기를 이용하게 되겠지만 철수는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엘레베이터는 8층에 머물러 있었다. 철수는 비상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바짝 힘을 주고 천천히 조심해서 계단을 올라갔다. 한 층 위로 올라가 보니 아래층과는 구조가 완전히 달랐다. 분위기도 딴판이었다. 바닥에는 카펫이 깔려 있고 벽은 색색의 대리석으로 요란하게 치장되어 있었다. 반들반들 윤이 나는 사자 모양 대리석 조각과 한 눈에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가죽소파가 보였다. 이곳이 말로만 들었던 룸살롱인가?

 

반짝거리는 은색 조끼를 차려입은 웨이터가 철수에게 다가와 물었다.

 

 

“안녕하십니까. 손님 혼자 오셨습니까?”

 

 

철수는 다시 한 번 괄약근을 조이며 입술을 달싹였다. 난생 처음 와 본 유흥주점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좋을지 몰라 당황스러웠다. 철수가 머뭇거리고 있자 어디선가 중년의 사내가 나타났다. 박박 깎은 민둥머리에 자잘한 흉터자국이 남아 있는 얼굴이었다. 아무렇게나 걸쳐 입은 듯한 런닝셔츠 사이로 딱 벌어진 어깨와 가슴팍에 울긋불긋한 문신이 그려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영화에서 툭 튀어나온 것 같은 ‘주먹’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주먹은 정중하게 말했다. 철수의 신경줄이 팽팽해졌다. 설사가 급한 와중에도 공포가 엄습했다. 긴장감 때문에 금방이라도 실수를 해버릴 것만 같았다. 철수는 주먹을 향해 간절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화장실 좀…”

 

 

주먹은 피식 웃더니 다시 물었다.

 

 

“작은 일은 아닌 모양입니다?”

 

“큰 일이에요. 큰 일, 급해요.”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 챈 주먹이 성큼 앞장을 섰다. 실내는 미로같이 복잡했다. 방 안에서 음악 소리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간간이 문이 열리고 야한 옷을 입은 아가씨들과 쟁반을 든 웨이터들이 복도로 나왔다. 그들은 복도에서 주먹과 마주치면 목례를 하고 벽에 붙어 섰다. 철수는 이 낯선 장소에서 일어나는 일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자기 내부에서 언제 일어날지 모를 폭발을 저지하느라 안간힘을 썼다.

 

복도를 돌고 돌아 마침내 화장실에 도착했다. 반쯤 열린 문틈으로 하얀 좌변기가 보였다. 철수는 후다닥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바지와 팬티를 동시에 끌어 내리고 변기에 주저앉았다. 엉덩이에 힘이 풀리고 배설물이 변기를 때리는 소리가 시원하게 울려 퍼졌다. 촤르르. 그리고 철컥, 화장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철수는 주먹에게 감사의 말도 하지 못하고, 심지어 화장실 문을 제대로 닫지도 않고, 변기를 향해 달려온 자신이 부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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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륵주륵 설사는 멈출 듯 하다 다시 흘러나오기를 반복했다. 철수는 양손으로 번갈아가며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이 화장실은 룸살롱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이 사용하는 곳이었다. 변기 옆에는 세면대와 샤워기 꼭지가 있었다. 샴푸며 비누 따위가 놓인 선반도 있었으며 구석에는 세탁기까지 있었다. 환풍기가 돌아가고 있었지만 지독한 담배 냄새 사이로 화장품과 향수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타일바닥에는 머리카락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빳빳한 검은 생머리, 곱슬곱슬한 노란 머리, 불그스레한 빛깔의 짧은 머리…….

 

바닥을 살피다 고개를 들어 보니 화장실 문에 붙어 있는 명단이 눈에 띄었다. 제목은 ‘아가씨 일요일 출근표’ 그 아래로 ‘날짜, 본인 조 이름 꼭 확인하세요!’라고 적혀 있었다. 표는 근무 날짜에 따라 네 개의 조로 나누어진 아가씨들의 명단이었다. 제니, 가영, 다빈, 유리, 이슬, 사랑, 나나, 세나, 태희, 유미… 백 명이 넘는 여자 이름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명단을 살펴보다 철수는 익숙한 이름을 발견했다. C조의 수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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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아. 흔한 이름은 아니었다. 그러나 철수는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아가씨들이 본명을 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애칭으로 이런 이름을 선택하는 아가씨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었다. 설령 민수아가 유흥업소에서 일을 한다고 할지라도 제 이름 대신에 수애나 정아, 또는 전혀 다른 민희 같은 가명을 쓸 것이다. 이 업소의 아가씨 명단 속에서 발견한 수아가 김철수가 알고 있는 민수아가 아닐 것이다. 철수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아의 이름을 보는 순간 철수의 몸은 그녀를 선명하게 기억해 냈다. 함께 보낸 시간 동안 느꼈던 감각이 순식간에 되살아났다. 부드러운 젖가슴과 벌어진 입술과 축축하게 뒤엉키던 혀와 깊은 곳에 들어갔을 때 느꼈던 믿을 수 없을 만큼 뜨거운 열기… 어디선가 흐느끼는 듯한 신음 소리와 철수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던 새된 목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지저분한 화장실의 악취가 사라지고 따듯한 살내음이 아련하게 밀려왔다.

 

아랫배를 어루만지던 오른손이 어느새 가랑이 사이로 향했다. 이미 딱딱하게 발기해 있었다. 철수의 손은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대장을 쏟아낼 기세로 설사를 분출해 낸 변기통에 정액을 받아 낸 두루마리 화장지 뭉치까지 집어넣고 나서 물을 내렸다.


수세식 좌변기는 모든 흔적을 깔끔하게 씻어 내렸다. 더럽고 냄새나는 것들이 모두 사라진 뒤에도 철수는 한참동안 변기에 앉아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가랑이 사이로 변기통에 맑은 물이 차오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영혼을 어딘가에 보관할 수 있다면 이 변기 속에 집어넣어 흘려보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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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작가


편집 : 보리삼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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