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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2. 18. 수요일

춘심애비








1. 고뇌의 시작



출처 : 오마이뉴스



어제던가, 그제던가, 자유대학생연합이라는 단체 소속으로 보이는 3명이 피켓을 들고 서있는 사진을 트위터에서 발견했다. 시기상, 고려대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 이슈와 맞물려있었던 상황.


대부분의 딴지스덜은 ‘안녕들하십니까' 움직임을 잘 알고 있을 테니 이에 대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리고 자유대학생연합에 대한 설명도 굳이 길게 하진 않겠다. 압축하자면,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에 반박하는 대자보를, 실명 써서 올려줄 용자를 모집하는 공지를 올렸다가 대차게 욕을 처받아 먹은 단체라고 할 수 있겠다. 대필서비스 제공 단체라는 말도 있지만, 뭐 청년창업과 창조경제가 거의 유일한 돌파구인 현정권 내에서 저정도의 창조성을 지닌 청년들의 움직임은 귀엽게 봐주는 게 옳지 않겠나 싶다.


암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저 가운데 있는, 제일 사이즈가 큰 피켓에 써 있는 문구다. 혹시나 만에 하나 이미지가 안뜨는 분덜을 위해 그 내용을 텍스트로 옮겨적으면, 이렇다.



엄마!

나 국정원에 취직했어!

근데 왜! 월급이 안들어오지?


우리들은 알바가 아니라

모래알 같던

일개 대학생이다!


누가 우리를 거리로 나오게 만들었는가



필자는 이 피켓을 보고 잠시 눈앞이 아뜩해졌다. 이거 뭐지? 무슨 소리지? 국정원에 취직을 했는데, 월급이 안들어와? 근데 이유를 몰라? 얘네 국정원 까는 진보 단체인가? 가운데 애는 진보고 양쪽 두 명은 보수인데, 가운데에 진보 성향 학생이 1인 시위를 하니까, 보수 성향의 학생 2명이 다구리 치려고 모인 건가? 그런데 피켓 3개 다 같은 단체명이 쓰여 있는데??


솔직한 얘기로, 필자는 그닥 독서량이 많지 않고, 2000년도 수능에서 언어영역에서 가장 많은 문제를 틀렸으며, 요즘에도 기사나 트위터를 쓰면 헛소리한다고 욕을 많이 먹기도 하는, 독해력이 그닥 좋지 않은 그런 사람이긴 하다만, 그래도 한국사람인데 이렇게 아예 이해가 안되는 게 가능한가?


트위터에도 도저히 해석이 안된다는 궁금증을 올려봤으나, 그 해석을 알려주는 사람은 하나 없이 모두들 공감멘션을 보내주시는 이 상황. 나는 그냥 너무 궁금할 뿐인데 정말 아무도 나에게 알려줄 이 없단 말인가 싶은 좌절, 그리고 번뇌. 대부분의 경우 진보가 보수보다 좀 더 똑똑하지 않을까 생각했던 나를 무력화시키는 이 충격과 공포. 일개 대학생이 누가 봐도 존나 대충 만든 피켓마저 독해하지 못하는, 진보 성향 30대 남자의 처절한 자괴감.


나는 왜 그리 헛된 시간을 ….


젠장




2. 해독 도전


하지만 이렇게 포기할 순 없지 않은가, 라는 다짐을 한 채 도전해 보기로 한다. 자대련 가운데 피켓 해독을 말이다.


아무래도 글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능력이 나에게는 결여돼 있다고 판단하고, 쪼개서 다시 읽어봤다.


엄마!


이거슨 2가지 의미로 해석된다. 모친을 부르는 호격. 또는 ‘애그머니나!’와 같은 의미로 쓰이는 감탄사. 일단 이 둘 중 어느 쪽인지는 나중에 판단해 보자.


나 국정원에 취직했어!


참 좋은 일이다. 실질 실업률이 13%에 육박하는 현 상황에서 국정원이라는 안정적인 직장을 얻다니. 게다가 국정원이라면 각종 커뮤니티에 댓글만 잘 달아도 꼬박꼬박 월급도 주고, 친구들까지 알바로 고용해 주는 꿀바른 직장 아니던가. 저 학생이 이 기사를 볼지는 모르겠지만, 축하하고 싶다.


근데 왜! 월급이 안 들어오지?


이런이런. 축하할 일이 아니네. ‘왜’ 뒤에 느낌표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문장은 도저히 월급이 안 들어오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표현이거나, 혹은 월급이 안 들어오고 있는 현 상황을 비관하는 것이 분명하다.


1문단을 정리해 보면 2가지 해석의 옵션이 발생된다. 뉘앙스를 전달하기 위해, 동의어로 치환하여 의역해 보겠다.



옵션 1 (독백, 혹은 방백체)

애그머니나! 내가 국정원에 취직을 했는데, 월급이 안 들어오네??? 왜지????


옵션 2 (어머니께 드리는 말씀)

어머님! 제가 국정원에 취직을 했는데, 이놈들이 월급을 안줘요!!! ㅜㅠ



이쯤 해도 도저히 모르겠다만,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보자.


우리들은 알바가 아니라 모래알 같던 일개 대학생이다!


아 알바는 아니었단다. 그러니까 이들은 정직원이었나보다... 라고 생각할 즈음 다음 표현을 보니, 모래알 같던 일개 대학생이란다. 여기서 시제가 조금 꼬인다. ‘알바가 아니라 대학생이다'는 현재 상태를 의미하는 시제가 되지만, ‘모래알 같던'은 모래알과 같아왔던, 즉, 과거부터 유지되어 왔고, 과거 시점에 끝난 상태를 의미한다.


시제 뿐만 아니라 주어가 누구인지도 꼬인다. ‘우리들'은 복수인데 ‘일개 대학생'이라는 보어는 분명 단수. 참으로 난이도가 높은 문장이다. 이쯤에서 해독을 포기할까 해 봤으나, 상상의 나래를 펼쳐 고난을 극복한다.


일단 문단 1 자체의 주어가 ‘우리들'이라고 치자. 그러니까 옵션 1이라면 여러명의 학생들이 국정원에 함께 취업했는데 월급을 못 받은 게고, 옵션 2라면 어떤 형제(또는 남매 또는 자매)가 국정원에 함께 취업을 했는데 월급을 못 받았음을 어머니께 고하는 내용이 된다.


그들이 모래알 같았단다. 보통 모래알은 ‘콩가루'와 같이 산산히 부서져 있어 친하지 않은 관계를 일컫거나, 모래알 속의 진주처럼 가치가 크지 않은 존재를 일컫곤 한다. 즉, 이 피켓의 주어는 형제 관계이거나 동료 관계인데, 정말 친하지 않았었거나, 딱히 두각을 나타내진 못했나 보다. 이 두 의미 중 어떤 의미인지는 그 뒤에서 밝혀진다.


일개 대학생. ‘우리들은 일개 대학생이다라는 문장 자체가 복수/단수가 안 맞아 해석이 힘들었지만, 문득 이런 문장을 떠올렸다. ‘우리 모두는 고독한 개인이다.’ 이 문장은, 모든 인간들이 각각 쪼개놓고 보면 고독한 개인이며, 그 고독한 개인들이 모여 집단과 사회를 이룬다는 의미다. 즉, 문법적으로 안 맞는 듯 하지만 사실 의미는 통하는 문장이다. 이와 같은 식으로 해석하자면, 저 친구들은 각각이 특별할 것 없는 일개 대학생이라는, 다소 겸손에 찬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겸양과 어울리려면, 앞서 쓰인 모래알은 역시 ‘모래알 속 진주'에 해당하는, 가치가 크지 않은 존재라는 의미.


정리하자. ‘모래알 같던’이라는 표현으로부터, 저 친구들이 일단 스스로 그닥 가치가 크지 않은 시기를 지나 보내왔다고 평가함을 알 수 있으며, ‘같던'이라는 시제를 통해 지금 현재는 그 가치가 크지 않은 시기가 끝났다고 자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저들은, 그간 그닥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는 시기를 지나왔으나, 이제는 대학생임과 동시에 국정원 직원이 됐다는 의미가 된다. 대단하다. 졸업하기 전에 취업을 하다니. 월급을 안 준 걸로 보아 아직 대학 졸업장을 못 받아서 수습기간인 것 같기도 하다는 추측을 남긴 채 마지막 문장을 보자.


누가 우리를 거리로 나오게 만들었는가


그러게 말이다. 누가 니덜을 거리로 나오게 만들었을까. 보통 이런 문장은 진짜 몰라서 묻는 것이거나, 누군가의 소행임이 분명할 때 이를 비난하는 목적으로 쓰인다. 아버지가 컴퓨터에 체육 동영상을 고이 간직했는데 그게 삭제됐을 때, 다급한 목소리로 ‘아빠 컴퓨터 누가만졌어!!’라고 하면 그건 ‘저요!’라는 대답을 듣고 싶은 게 아니라 ‘이런 시방새들아!!’라는 말의 순화된 표현인 것을 참고하면 되겠다.


일단 순수한 질문일 수 있다는 옵션은 킵해두고, 비난을 하려는 목적이라는 옵션을 디벼보자. 분명 비난의 대상은 앞 문장에 숨어 있을 게다. 생각할 수 있는 옵션은 총 2가지다.


1번 용의자는 엄마. 이렇게 되면 문단 1의 해석은 옵션 2, 그러니까 이 피켓 맨 앞의 엄마!가 감탄사가 아니라 호격이라는 결론을 지을 수 있다.


2번 용의자는 국정원의 급여담당자. 월급을 안 준 이유를 모르거나 혹은 이에 대해 분개하고 있으니, 누군가를 비난한다면 국정원 급여담당자일 가능성이 높다.


옵션에 옵션이 이어져 참으로 고된 해석의 과정이 돼버렸다.


하지만 차근차근 수습하면 답은 나올 것이니, 조금만 참아보자.


옵션들을 조합해 본 해석 사례들은 다음과 같이 정리되겠다.




3. 피켓의 해석




해석 1.


첫번째 해석은, 문단 1을 옵션 2로 해석하고, 마지막 문장의 비난 대상을 1번 용의자, 엄마로 하는 가정이다. 엄마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린다는 건, 역시 엄마가 어릴 적 세뱃돈을 지켜주겠다던 감언이설을 앞세워 월급을 슬쩍하셨다는 치기어린 생때일 가능성이 높다. 이 가정대로 다시금 맥락에 맞춰 풀어 써 보자.


어머님! 저희 형제가 국정원에 취직을 했는데 월급이 안 들어오네요?! 저희는 알바가 아니에요! 부질없는 시간을 보내왔지만 이젠 대학생이고, 졸업전에 취업까지 했다구요! 빨리 우리 월급 내놓으시지 않으면 계속 시위할 거에염!!!


글타. 저들은 형제고, 단체로 중고딩시절 껌 좀 씹다가 그대로 결국 대학에 가서, 졸업 전에 국정원 취업까지 했으며, 그것도 알바가 아닌 정직원인데도 불구하고, 어머니가 아직 우리새끼들 돈맛 들면 안된다며 월급을 지켜주려 하시다가, 머리 굵어진 아들들에게 호되게 당하신 상황인 거시다.


즉, 자유 대학생 연합은, 더이상 마마보이라는 오명을 쓰고 싶지 않은, 성인으로서의 자기결정권과 경제적 독립권을 득하고픈 학생들인 거시다.


하지만 아직 확정할 수 엄따. 두 번째 해석을 보자.




해석 2.


이 해석은 반대로, 문단 1을 옵션 1로, 그리고 비난의 대상을 국정원 급여담당자로 하는 가정이다.


애그머니나! 우리가 국정원에 취직을 했는데 월급이 안 들어와 시발!! 우린 부질 없는 시간을 보내왔지만 알바가 아니라 졸업예정 신입사원이야!! 일을 시켰으면 월급을 내놔!!! 안 내놓으면 계속 시위할 거얌!!!


이렇게 해석할 경우 저 친구들은 졸업 전에 단체로 국정원 취업이 됐으나, 아마도 임금을 받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자유 대학생 연합은, 2012년부터 이어져 온 국정원 정치여론 개입에 참가하여 활동해 왔으나, 작년 이맘때 즈음 문제가 터진 이후로 임금을 받지 못한 미졸업 국정원 취업자들의 모임일지도 모른다.




4. 결론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도저히 알 수 없었던 피켓 내용이 이제는 2가지 중 하나로 압축된다.


자대련은 모친의 치마폭에 휩싸여 거친 10대를 보내고, 이제는 어엿한 대학생이 되어 공무원 일자리 까지 얻은 당당한 성인인 게다. 자유 대학생 연합. 즉, 대학생쯤 됐으니 치마폭을 벗어나 자신의 땀으로 일군 임금을 스스로 사용할 자유를 얻은 대학생들의 연합이라는 뜻일 게다.


또는, 그들은 국정원에 취업했으나 정치 개입이 문제시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임금을 받지 못하고 있는 공무원 노동자들일 가능성도 있다. 이러한 경우 아마도 자유 대학생 연합이라는 이름은, 공무원의 정치 개입 자유를 만방에 널리 떨친 국정원에서 근무하고 있는 현재 미졸업 상태인 대학생들의 연합이라는 의미일 게다. 만약 그렇다면, 쌍용차 문제와 철도 노조 문제, 공무원 노조 문제, 전교조 문제 등과 더불어, 이들의 임금을 받을 권리 또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하는 사항이 된다.


둘 중 어느 쪽이라도, 이들은 우리의 적이나 훼방꾼이 아닌,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기성세대에게 저당 잡힌, 핍박당하는 동지들이다. 어쩌면 그들은 저 가운데 피켓을 통해 이와 같은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해주려 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러한 의도가 있었다 해도, 이따위로 알아먹기 어렵게 써 재껴버린 책임은 저들에게 있으므로, 이에 대해서는 사회적인 모진 지적과 가르침이 필요하겠다. 다만, 임금을 과잉보호에 익숙해진 어머니에게 뜯겼든, 시국 수습에 급급한 국정원에 뜯겼든, 정당한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그들에게, 우리 모두의 애정어린 관심이 필요한 것은 사실.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제안한다.


앞으로 자유대학생연합을 보게 되면


무 말 말고


일단 한번 꼭 안아주자.












끝.







춘심애비

트위터 : @miiruu


편집 : 보리삼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