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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직이 잔업, 특근해서 8000만원, 1억원 받는 게 왜 문제가 되냐."


- 심상정, 4월 27일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 



1. 1억이 아니라 2200만 원이 문제다


대선후보 심상정의 "1억 받는 게 뭐가 문제냐" 발언은 무엇이, 왜 문제일까? 팩트부터 제시하고 이야기를 시작하자. 다음은 기아자동차 광주 공장 평균 연봉 현황이다.

 

본사 정규직 9700만 원

본사 사내 하청 5000만 원

1차 협력사 4700만 원

1차 협력사 사내 하청 3000만 원

2차 협력사 2800만 원

2차 협력사 사내 하청 2200만 원

 

최고액과 최저액 차이가 4.5배다.

 

억대 연봉을 받는 노동자와 월 200만 원이 안 되는 돈으로 <결혼은 미친 짓이다>를 찍어야 하는 노동자가 하는 일은 기본적으로 같다. 숙련공이 실종됐기 때문이다. 기아차 공장과 같은 대규모 생산공간에서는 이제는 기계가 업무의 주력이고 인간은 보조다. 따라서 ‘노동자’는 그만큼 받는 게 이상하냐는 심상정의 반문은 틀렸다. 어떤 맥락에서 틀렸는지 가장 잘 아는 이는 심상정이다. 오류를 회피기로 사용한 걸 보면.

 

한국은 일의 종류와 질이 아니라 일을 하는 곳, 즉 직장이 계급을 결정하는 사회다. 직장의 안팎은 견고한 성벽으로 분절돼 있다. 웹툰 <미생>의 살벌한 대사가 반증한다. “회사 안은 전쟁터지만 회사 밖은 지옥이야.” 이제부터 나는 지옥 거주민의 관점에서 전쟁터를 평할 것이다.

 

비정하게 쓰겠다. 현기차 생산직의 노동은 직업을 갖기 위해 투입해야 할 재능, 비용, 노력, 그리고 노동 자체의 강도와 수준에서 비슷한 연봉을 받는 의사의 의료노동과 큰 차이가 난다. 지금 육체노동자 무시하는 거냐고? 자칭 진보인 주제에? 웃기지 마시자. 공연히 화 난 척도 하지 마시자. 난 그들의 인격과 행복추구권을 폄하할 생각이 전혀 없다.

 

“열심히 일해서 번 게 뭐가 문제”냐는 심상정의 말은 노동문제의 본질을 흐리고 있다. 프레스센터에 모인 기자들은 잘못 짚었다. 심상정은 비겁했다. 정말 노동이 그 자체로 가치 있으려면 4.5배의 임금격차는 노동권의 적이어야 한다. 문제는 1억 연봉이 아니다. 2200만 원이다.


 

2. 노동이 아니라 직장이 계급이다


이제 대한민국에서 임금은 정당한 노동의 대가가 아닌 계급의 반증이다. 계급은 직장으로 서열화된다. 아래는 더불어민주당 은수미 전 의원이 조사한 2013년 정부 부처 무기계약직 임금 실태다. 같인 일인 경비업무에 국한한 자료의 일부다.

 

미래창조과학부 5018만 원

국토교통부 4717만 원

고용노동부 3697만 원

국세청 1571만 원

 

단언컨대 지구상에 이런 나라는 없다. 이 정도의 임금 차이가 주인 나리의 은덕 탓이 아니라 합법적으로 전산화된 결과로 버젓이 존재하는 나라는 없다.

 

흔히 보수 일각에서는 귀족노조가 기업을 망친다고 한다. 진보 일각에서는 귀족노조란 없으며, 귀족이라 불리는 그들이 선봉에 서서 재벌을 타격해야 ‘낙수효과’가 발생한다고 한다. 다 거짓말이다. 재벌과 정규직 노조는 때로 적대적 협력 관계다. 단적인 예를 들겠다.

 

현대판 음서제라 불리는 노조 가족 특별채용이다. 노조원들은 정규직 지위를 대물림하고 싶어 하고, 대기업은 선량한 피해자 이미지를 획득하고 싶어 한다. 따라서 대기업의 입장에서는 현대판 음서제를 버티다 못 이기는 척 수용하면 그만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고 어차피 제공해야 할 일자리는 정해져 있기에 기업은 손해 볼 일이 없다. 그저 윈-윈 전략일 뿐이다.

 

바보 같은 진영론에 갇힌 외부인만 열을 낸다. 조선일보를 위시한 보수지는 운동권 귀족노조가 기업과 청년의 일자리를 망친다며 북을 두들기고 진보진영 언론사들은 노조 편의 논조를 만들어 내느라 진땀을 흘렸다. 정작 당사자들은 외부 세계의 입장을 신경 쓰지 않는다. 각자의 이익을 챙기면 그만이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3. 응답하라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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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혁명은 대한민국의 백성을 시민의 지위로 격상시켰다. 거리로 쏟아져 나온 대학 운동권과 그들의 외침에 응답한 ‘넥타이부대’ 화이트칼라의 연대는 6.29 선언이라는 군부독재세력의 항복을 이끌어냈다.

 

이제는 노동의 차례였다. 7월부터 블루칼라 노동자 대투쟁이 일어났다. 기세가 꺾인 군부독재세력은 터져 나온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을 뜬 눈으로 바라보아야만 했다. 일반 시민들도 아낌없는 응원의 박수를 보냈다. 전태일의 처절한 분신으로부터 시작된 이 땅의 노동권 투쟁은 그렇게 햇빛 밝은 수면 위로 장렬히 올라왔다.

 

산업화세대 화이트칼라의 전면적인 운동권 지지는 87혁명을 이끌었다. 그 결과 이어진 블루칼라의 노동자 대투쟁은 화이트칼라를 포함한 노동자 전반의 권익을 향상시켰다. 386운동권 세대의 역할을 일부러 빼고 이야기하면, 이것은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의 아름다운 연대라고 할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의 문제는 이때부터 배태된다. 87년, 노동자들은 직장을 상대로 투쟁했다. 당장 눈에 보이는 현실적인 착취자가 기업주인 상황에서 당연했다. 비정규직이라는 개념이 없는 상황에서 결국 정규직의 권리 보호에만 투쟁을 집중했고 또한 성공했다. 대표적인 결과물이 평생직장과 호봉제다.

 

고등학교나 대학을 졸업하면 취업이 당연시되는 시대, 기업주들이 무한동력마냥 이윤을 뽑아내고 있던 시대에 기업주를 상대로 한 투쟁은 합리적이었다. 사람값이 비쌀 때야, 임금은 자연히 상향평준화되기 마련이다.

 

나는 대학시절 막노동판에서 학비를 벌어보았다. 그때 받았던 일당은 십년 전 비슷한 일을 했던 선배의 그것과 ‘대동소이’했다. 그리고 지금의 막노동 일당과도 ‘대동소이’하다. 그 삼십 년 동안 짜장면 가격은 5배 올랐다. 교사, 공무원, 대기업 정규직... 한 손에 꼽는 몇 개 직군 울타리 바깥은 황무지다.

 

노동운동은 노동권을 계급으로 만들었고 성 바깥을 더욱 척박하게 했다. 이제 안정적인 직장, 그 견고한 성 안에 들어가고자 하는 경쟁은 단순한 경쟁이 아니다. 존재증명의 투쟁이다. 여러 해 공부한 끝에 자신은 합격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공시생이 부모에게 사죄의 유서를 남기고 자살한다. 왜겠는가? 성 밖의 삶은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80년대에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대략적인 고용 비율은 50대 50에서 40대 60 사이였다. 이때는 대기업이 전체 인력시장의 일꾼 반을 필요로 했으며, 중소기업도 대기업에 뒤지지 않는 조건을 제시하지 않고는 노동자를 유치할 수 없었다. 지금은?

 

이미 십년 전에 망조가 들었으니, 대기업 24 : 중소기업 76의 비율을 찍은 게 2006년이다. 이제 중소기업과 하청 집단은 인력을 짜내 보다 싼 값에 갑에게 결과물을 바치는 상납 사업체가 되었다. 서비스 직종까지 포함하면 수치는 더 끔찍해진다. 대기업 12 : 중소기업 88이다. 여기에 인턴과 사내 하청 등을 빼면 공기업, 공무원, 교사를 합쳐 안락한 성벽 안 주민은 10% 이하라는 극악한 통계가 나온다. 이 차원에서 ‘헬조선’은 과장이나 비유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건조한 표현이다.

 


4. 인간의 조건


당신은 어디에 있는가? 성 안인가, 밖인가? 위치가 당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그러기에 대기업, 공기업, 교사, 공무원의 관문을 통과하는 일은 조선시대 과거시험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성 안 주민은 성 밖을 신경 쓰지 않는다.

 

인정하자. 위장취업으로 작업장에서 노동자 투쟁을 이끌었던 심상정도, 1987년부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노동자들도 지금은 이익집단으로 전락했음을. 한때의 진정성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오류를 수정하지 않는 투쟁이 투쟁이던가? 기간제 교사들이 당하는 부당한 처사에 대해 전교조는 무엇을 해 왔는가?

 

침몰하는 세월호에서 아이들을 구하다가 하늘로 떠난 계약직 교사분은 현재 법리적으로 ‘순직’이 아니라 ‘사망’ 상태다. 조선시대 노비도 충의를 위해 죽으면 왕조실록에 의인으로 기록되었다. 이게 나라인가? 우리는 결국 하나의 원칙을 필요로 한다.

 

동일노동 동일임금, 동일의무 동일권리이다.

 

노동이 아닌, 노동을 하는 ‘직장’을 얻기 위한 스펙 쌓기 노력을 폄하하느냐고? 그것을 인정하면 거꾸로 노동을 폄하해야만 한다. 노동은 그 자체로 위대함이요, 자아실현의 창구다. 다름 아닌 심상정의 레토릭이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실현하기 위한 마중물은 무엇일까?

 

어디에 있느냐로 투쟁 단위가 결정되는 지금의 사(회사)별 노조가 아닌, 무엇을 하느냐로 집단성이 형성되는 산(생산 직종)별 노조의 발전이다. 그 과정의 복잡한 이야기는 여기서 생략하겠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산별노조를 지향하거나 적어도 그에 준하는 대안을 설계해야 한다.

 

성 안 주민들이 성 밖의 개돼지를 신경 써 줄 이유는 없다.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다. 그들의 이기심도 존중할 수 있다. 붉은 머리띠를 머리에 두르는 것도, 처음 그런 차림으로 피를 토했던 도시빈민의 처절함을 기만한다기보다는 문화적 습관으로 이해해줄 수는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노동권 전체를 위해 십자가를 지고 있다는 거짓말은 하지 말자. 그리고 하나 더.

 

대한민국 노동권을 위해 그 한 몸 불살라 가장 커다란 밑거름 된 이 누구인가.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이 아무도 없으리라 믿는다. 전태일은 그 참혹한 환경에서 살아남아, 이제 미싱사가 되어 ‘시다’를 착취하며 살아도 될 그때 여공들을 위해 노동운동을 시작했다. 여공들에게 국화빵을 사준 대가로 자신은 주린 배를 움켜쥐고 코피를 쏟아가며 찌글찌글한 한글로 한 자 한 자 노동의 권리를 눌러 썼다.

 

성 안 주민들은 자신의 이익을 수호할 수는 있으되, 염치가 있으면 감히 전태일의 이름을 가져다 쓰지는 말자. 왜 이런 이야기를 하겠는가. 노동절을 앞둔 지난 4월 29일, 전국금속노동조합 기아자동차지부(기아차 노조)가 총회(총투표)를 강행해 비정규직 조합원을 노조에서 내보내기로 했다. 이것이 대한민국 ‘노동’의 민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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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서울경제>


 


5. 99대 1? 90대 10은요?


이익집단으로 전락한 노조, 그러한 노조가 대변하는 정규직 과거시험 문화는 필연적으로 내적 모순에 봉착한다. 전교조도 민노총도, 현기차 강성노조로 대변되는 사별 노조도 치열한 운동의 결과물이다. 그들에게는 자신들이 재고되어야 하는, 심지어 때로는 타도되어야 하는 기득권이라는 사실을 은폐하거나 최소한 유예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럴 때 부패한 권력과 재벌은 좋은 핑계가 된다. 인정한다. 대한민국의 권력은 부패했다. 재벌은 천박하다. 그렇다고 민주화 투쟁/운동의 성과로 만들어지고 지금은 이익집단으로 전락한 조직들이 사회악에 대항하는 선봉장이 되진 않는다.

 

한국의 상위 1% 소득 점유율은 12.23%다. OECD 3위에 달하는 순위지만 최저를 기록 중인 네덜란드의 6.33%와 6% 차이도 나지 않는다.

 

반면 상위 10% 소득 점유율에서 2위인 한국은 44.87%로 1위인 미국의 48.16%을 바짝 추격하고 있다. 여기서 상위 1%를 뺀 9%는 현재의 직업시장에서 ‘성 안 주민’의 비율과 놀랍도록 일치한다. 놀랄 필요도 없는 당연한 결과겠지만 말이다.

 

심상정과 같은 운동권 출신 정치인들은 아직도 이 모든 문제에 재벌을 지목한다. 위에 언급한 기아차 노조의 끔찍한 이기주의에 심상정은 ‘강력한 규탄’을 했다. 그런데 그 ‘규탄’의 결론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이간질하는 재벌의 부도덕성이었다.

 

1%의 자본독점과 10%의 소득독점은 범주가 전혀 다르다. 즉 따로 해결할 문제지, 1%를 먼저 타격하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다! 1%가 누리는 부는 대체로 부동산과 주식 등 재산의 비율이 높다. 이것은 세금정책이나 기업 혹은 부동산 오너에 대한 패널티로 충분히 균형을 맞출 수 있다. 즉 제도의 문제이며, ‘회수’의 문제다. 속된 말로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고, 80~ 90년대의 재벌 관리 방법이 불러다 놓고 감옥 갈지 사회적 책무를 다할지 선택을 강요하는 식이었다. 다시 말해 상위 1%의 부는 짜면 물이 나오는 젖은 수건 같은 것이다.

 

반대로 상위 10%의 소득은 연봉과 연금의 형태로 반영구적인 구조를 띤다. 전혀 다르다. 따로따로 접근할 문제다. 1%의 비율을 빼도 전체 소득에서 ‘성 안 주민’ 9%가 30% 이상을 점유한다. 이 모든 것은 그저 계급 획득 자격시험이나 우연의 결과일 뿐이다. 그렇다면 심상정이 부르짖는 ‘노동이 당당한 나라’의 청사진은 무엇인가?


 

6. 심상정 표 정의


이쯤 되면 심상정의, 연봉 1억이 무슨 문제냐는 반문이 얼마나 기만적인지 알 수 있다. 자신에게 표를 달라고 손을 내미는 비정규직 혹은 무직 청년들에 대한 사기이자 폭력이다. 물론, 말로는 아니다.

 

말로는 무엇이든 주장할 수 있다. 심상정도 바보가 아닌 한 지금의 고용 구조가 무엇인지 모르지 않는다. 정의당은 사실상 귀족 노조를 위시한 10% 주민에게 고용된 상태가 아니라고 스스로 말할 수 있는가? 기성 노조의 지지 없이 정의당이 존속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가? 물론 특정 정당이 특정 집단의 이익을 대변함으로써 먹고 사는 것은 민주주의의 당연한 현상이다. 그러나 약자의 편에 선 양 정의를 독점하지는 말자.

 

말로는 어떤 것도 주장할 수 있다. 민노총도 공식적으로는 산별노조와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지향한다. 그래서 이번 대통령선거 후보들의 공약이 얼마나 ‘노동 친화적’인지 감수하며 칭찬도 하고 실망도 하는 준엄한 성명을 내보냈다. 이러면 자신들이 진보의 가치를 담지했다는 증거를 남기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얄팍한지 남들은, 비정규직 청년들은 모를 거라 생각하는가.

 

민노총이 달성했다는 산별노조 조직은 단적인 예를 들면 금속노조인데, 실상은 자동차 대기업 사별 노조 몇이 모인 카르텔이다. 이 금속노조에 포함된 마피아 간부, 기아차 노조가 비정규직들에게 무슨 짓을 했는가? 그리고 민노총은 은혜롭게도 비정규직 천민들을 위해 무려 총파업이란 걸 해 주신다. 총파업이라 하니 가슴 벅차지만, 실은 ‘한정투쟁’이라고 해서 몇 시간 파업하고 다시 작업장에 복귀한다. 즉 ‘비정규직을 위해 투쟁했으니 됐다’는 근거만 공식적으로 남기는 행위다.

 

먼저 1%를 타격한다?

그들을 담당하는 건 공권력과 정권의 몫이다. 10%인 당신들은, 심상정은 뭘 해줄 건데.

 

사실 이 기사는 민주 진영의 보편적인 모순에 관한 이야기다. 그런데 왜 심상정이냐고? 그의 슬로건이 <노동이 당당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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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살인의 추억, 생존의 현실


"심상정의 DNA는 이 금속노조 조끼다" 지난달 심상정 대선후보가 울산을 방문해 성 안 주민들에게 건넨 말이다. 저 장렬한 금속노조에는 물론 기아차 노조도 포함되어 있으되, 그 처절했던 쌍용차 노조 역시 마찬가지다. 물론 직장을 지키기 위해 금속노조를 한 번 탈퇴한 적도 있었더랬지만.

 

수년 전, 88만 원 세대 알바생인 후배가 내게 쌍용차가 왜 난리인지 물었다. 모두 이야기해주었다. 해고당한 노동자의 아내가 가족의 생계를 위해 차린 ‘상도포차’까지도.

 

“와 부럽다. 가게 할 돈이 있었네.”

 

녀석의 반응이었다. 조롱도 비난도 아니다. 그저 선선한 진심이었다. 성 밖 주민들에게 실내포차를 차릴 여건은 평행우주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해고는 살인이다? 그렇다. 그런데 88만 원 세대에게는 아니다. 성 안에서 들판에 내몰리는 격차는 극단적이다. 그 옛날 그리스 시민들은 도시에서 추방당하면 야만인 부락에 망명을 하느니 차라리 자살을 택했다.

 

비정규직에게는 낙차가 없다. 7편의점에서 해고당하면 25편의점에 출근하면 된다. 쌍용차 노동자들을 조롱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다만. 지옥은 9층으로 되어 있다고 했던가. 바닥 밑에는 더 깊은 바닥이 있다. 누군가는 삶을 포기해야 할 비극의 자리가 이 땅의 대부분의 노동자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라는 무서운 사실을 여기 쓰지 않을 수 없다.

 

심상정을 위시한 ‘진보’ 정치인들은 바로 이곳이 약자와 서민을 위한 포토라인이라고 선언하며 쌍용차 해고노동자들과 함께 한 사진을 양산했다. 그 모습에 얼마나 많은 이들의 마음이 소름 끼치도록 차갑게 식었는지, 그들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해고는 살인이다. 그런가?

생존은 현실이다. 심상정은 얼마나 현실정치인인가?  

 

심상정은 자신이 노동이라는 두 음절의 단어에 독점권을 가진 양 말하고 행동한다. 본인 맘이다. 노(盧)무현의 무덤가에서 친노(勞)정권 수립하겠다는 방명록을 쓴 것, 인정한다. 대통령은 전직이고 고인일지라도 공공재라고 생각한다. 그의 성씨를 비틀어 당사자의 정치를 비판하고 스스로를 돋보이는 것이 나름의 위트라 믿는다면 존중하겠다.

 

소수정당의 대선후보가 서거한 전직 대통령의 성으로 장난을 칠 수 있다면, 마찬가지로 일개 국민인 나도 감히 그의 슬로건을 비틀어도 된다고 믿는다. 말로 약자, 서민, 비정규직, 알바를 위해 분골쇄신한다고 침을 튀기기는 쉽다. 남을 비판하며 자신은 다르다고 주장하기도 쉽다. 


그러나 인간은, 주장이 아닌 행동으로 스스로를 증명한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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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딴지일보 coco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