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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2. 26. 목요일

논설우원 파토












 


필자 주


본작은 오 헨리의 단편소설 <20 년 후>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 


원작을 모르는 분은 링크를 누지르시라.


http://www.nalmada.net/novel/OHenry_AfterTwentyYears.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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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찰 경관이 큰 길을 걸어 가고 있었다. 좀 거드름을 피우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일부러 그러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거드름을 피운다 해도 누가 봐 줄 사람도 없었다. 겨우 밤 10시가 될까 말까 한 시간이었지만 눅눅한 바람이 사납게 불고 있어서 길거리를 다니는 사람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이 근방 사람들은 모두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 같았다. 가끔 담배 가게나 밤새 문을 여는 노점 식당의 불빛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회사 사무실 등은 대개 일찌감치 문을 닫은 상태였다.


경관은 거리 어느 곳에 이르자 갑자기 걸음을 늦추었다. 캄캄한 철물점 점포 앞에 한 사나이가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물고 벽에 기대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경관이 다가가자 그 사나이가 얼른 먼저 말을 걸었다.


“별 일은 아닙니다.”


사내는 경관을 안심시키려는 듯 서둘러 말했다.


"전 지금 그저 친구를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20년 전에 한 약속이 있거든요.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거짓말인지 의심스럽다면 사정을 말씀드리죠. 20년 전 바로 여기에는 음식점이 있었어요. 별명이 '빅 조우'였던 브레디가 경영하던 음식점 말입니다."


거리에 서 있던 사나이는 성냥을 켜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성냥 불빛에 비쳐, 눈이 날카롭고, 턱이 네모진 창백한 얼굴이 드러났다. 얼굴 오른 편 눈썹 옆에는 조그만 상처 자국이 있었고, 큼지막한 다이아몬드를 이상한 모양으로 넥타이핀에 끼워놓고 있었다.


"꼭 20년 전 오늘밤, 나는 '빅 조우' 브레디의 음식점에서 지미 웰즈와 함께 저녁을 먹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친구, 나의 가장 다정한 친구였습니다. 그 친구랑 나는 이 보스턴에서 함께 자랐습니다. 형제나 마찬가지였어요. 그때 나는 열 여덟 살, 지미는 스무 살이었죠. 나는 그 다음날 서부로 떠날 예정이었습니다. 한 재산 잡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지미는 절대 떠나지 않겠다고 하더군요. 그 친구는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책을 좋아했죠. 저는 머리가 나빠 그가 하는 말들을 잘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죠. 여하튼 그 녀석 생각으론 물리학인지 뭔지를 하기엔 보스턴보다 더 좋은 곳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날 밤 우리는 약속을 했습니다. 그날 밤 그 시간부터 꼭 20년이 지난 뒤에 바로 이 자리에서 다시 만나자는 약속이었죠. 우리가 서로 어떤 신분이 돼 있더라도, 아무리 먼 곳에 가 있을지라도 반드시 여기 와서 만나자는 약속이었습니다."


"참 재미있는 얘기군요. 하지만 다시 만날 때까지 20년이나 기다린다면 좀 긴 것 아닙니까?"


"그럴지도 모르지만, 자세한 설명을 당신에게 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여하튼 녀석이 살아 있는 한 여기에 올 겁니다.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그 친구를 만나려고 천 마일이나 멀리 여행을 했어요. 하지만 나타나기만 하면 천 마일을 달려온 값어치는 충분하고도 남습니다."


옛 친구를 기다리는 사나이는 고급스러운 시계를 꺼냈다. 시계 뚜껑에도 큼지막한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었다.


"10시 3분 전이군요. 열 시 정각이었지요. 우리가 이 음식점 문 앞에서 작별을 한 게 말이에요."


"그럼 제가 3분을 같이 기다려 드리지요. 혹시 오지 않으면 실망하실지도 모르니."


사나이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말씀하신 대로 20년은 긴 세월이죠. 사람은 변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녀석은 어이없을 만치 고지식하면서도 철두철미한 성격이에요. 분명히 나타날 겁니다. 그저 오래 전에 약속을 했기 때문만은 아니에요."


경관은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자네 말이 맞아."


사내는 놀란 듯 고개를 들어 경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반항할 겨를도 없이 그의 굵은 손목에 어느새 단단하고 차가운 수갑이 채워지고 있었다.


"자네, 지미... 인가?"


"그래. 날세."


경관은 차갑지만 연민이 담긴 표정으로 말했다.


"순순히 따라오는 게 좋을 거야. 자네를 잡기 위해 먼 길을 왔다네. 천 마일 보다 훨씬 먼 길을."


"자네, 경찰이 된 건가?"


"필요해서 경찰 복장을 하고 있지만 그런 건 아니네. 하지만 20년이라는 세월은 착한 사람을 악당으로 만들기에 충분한 긴 세월이더군. 확실한 건 지금의 자네는 어린 시절의 쾌활한 리틀 바비가 아닌 흉악범 밥 '더 블러디' 포터라는 사실이지. 혼란스러울 테니 옛 우정을 생각해서 자초지종을 말해 주겠네."


지미가 잠시 뜸을 들이고는 말을 이었다.


"자네가 말했다시피 나는 원래 독서에 취미가 있었지. 자네가 떠난 후 열심히 일하고 공부한 덕에 2년쯤 후에는 대학에 입학하고 학자의 길을 걷게 됐다네. 서부에는 아직 알려져 있지 않겠지만 동부의 대도시에는 이제 전기라는 것이 널리 퍼졌네. 일반 가정에서 쓰기에는 아직 시간이 걸리겠지만 공장과 연구소에서는 필수적이야. 자세한 설명을 해도 자넨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이 전기에 강력한 자석을 연결해서 에너지를 증폭시키는 게 내가 하던 연구라는 정도만 말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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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몇 년 이 지난 어느날, 여느 때 처럼 실험을 하던 중 갑자기 '그것'이 나타났어. 적합한 이름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담배구멍이라고 부른다네. 마치 카펫에 담뱃불을 지진 자국 같은 시커먼 모습이기 때문이지. 큰 거울만한 그런 것이 눈 앞에 둥둥 떠 있다고 생각해 보게."


밥은 수갑을 찬 채 조용히, 하지만 긴장 속에서 그의 말을 들었다.


"나는 한 동안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담배구멍을 연구했지. 그리고는 그 비밀을 결국 알아냈다네. 이것이 일종의 시간여행을 가능케 하는 터널이라는 사실을 말일세. 마차나 기차가 우리를 원하는 곳에 데려다 주는 것처럼, 이 구멍은 원하는 시간으로 데려다 준단 말이지."


"그런 말도 안 되는..."


"그렇게 느껴질 테지. 하지만 날 자세히 보게."


지미는 모자를 벗고 성냥을 그어 자기 얼굴 앞으로 들었다.


"내가 마흔 살 중년으로 보이는가? 난 이제 서른이네. 그래. 난 10년 전의 과거에서 왔다네."


밥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지미를 자세히 뜯어보았다. 자신과는 달리 그의 얼굴에는 확실히 30대 초반의 앳된 모습이 남아 있었다.


"계속하지. 그러다가 보스턴 글로브에서 자네 이야기를 읽게 됐네. 그게 자네 시간으로는 10년 전쯤이야. 서부에서도 악명 높은 범죄자가 돼 있더군. 강도, 방화, 살인... 그 흉악한 악당은 더 이상 내 친구 바비가 아니었어. 마음이 아프더군. 우리가 20년이라는 세월을 두고 약속한 게 이런 것이었나?


그래서 고민 끝에, 유일한 가족이나 다름없는 내가 나서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지. 담배구멍을 써서 말일세."


"그래서 그 구멍을 타고 여기에 나를 잡으러 온 건가?"


지미는 엷게 웃었다.


"타고라기 보다는 통해서라는 말이 맞겠지... 하지만 아닐세. 아, 여기로 오긴 했지. 다만 지금이 아닌 20년 전의 이곳, 바로 그 빅조우 브레디 식당 앞이었네. 자네와 20년 후에 만나기로 하고 헤어진 바로 그날 밤 10시에 말이야. 정확하게는 10시 1분쯤이지만. 담배 피겠나."


밥은 고개를 저었다. 지미는 천천히 파이프에 불을 붙였다.


"나는 젊은 과거의 내가 골목을 돌아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 자네에게 뛰어갔네. 스무 살의 나와 똑같은 옷을 입고 있었지. 어둠이 내 나이든 얼굴과 약간의 주름을 감춰 줬을 거네. 그리고는 먼 곳으로 떠나는 자네에게 깜빡 잊은 선물이라며 큼지막한 루비가 박힌 금목걸이를 건넸지. 돌아가신 어머니에게서 유산으로 받은 건데 나는 필요 없으니 팔아서 여비와 사업 경비로 보태 쓰라고 했네.


자네는 눈물까지 흘리며 그걸 받았어. 아, 물론 ‘지금의 자네’에게는 그런 일 따위는 전혀 기억에 없을 걸세."


지미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었어. 나는 그 금목걸이를 그 직전에 다운타운의 웹스터 금은방에서 훔쳤거든. 자네가 팔려고 들 때 체포되게 하려는 심산이었지. 물론 자네가 다음날 그걸 그대로 웹스터 금은방에 들고 간 것은 순전히 우연이네만.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말게. 다행히 나는 지난 10년간 돈을 꽤 벌었고, 그래서 자네가 몇 년 후 출소하면 찾을 수 있도록 과거로 돌아갔을 때 자세한 내막이 담긴 편지와 많은 돈을 자네 앞으로 남겨뒀으니까. 나는 그저 내 형제 지미 포터가 흉악범이 되는 걸 보고만 있을 수 없었고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네."


밥이 쉰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말 대로라면 우린 지금 이렇게 돼 있지 않아야 하잖아?”


"그 부분이 기묘한 거라네."


지미가 대답했다.


"자네가 웹스터 금은방에서 체포되는 것을 나는 길 건너에서 지켜보고 있었어. 그리고는 바로 10년 후로 돌아왔지. 내 시대로 돌아오고 나면 과거가 변해 자네는 이미 출감해 있고 다시 세월이 지나 우리 사이의 오해도 모두 해소된 상태에서 다시 형제처럼 지내고 있을 줄 알았지.


하지만 아니었어! 내가 던져놓고 간 보스턴 글로브 지면에 캘리포니아의 악당 밥 포터의 얼굴과 죄상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게 아닌가. 뭔가 잘못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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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생각했다네. 어쩌면 과거를 바꾸는 건 불가능한 것 아닐까. 내가 과거로 돌아가서 무슨 짓을 한다 해도 그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던 내 현재에는 반영되지 않는 것 아닐까. 그래, 어쩌면 그때부터 우주는 둘로 쪼개져 버리는 건지도 몰라. 어딘가에는 그날 내가 새로 만들어낸 우주, 밥 포터가 단순 절도죄로 벌을 받은 후 지미 웰즈와 친구로 행복하게 살고 있는 우주가 있을 지도 모르네. 그런데 정작 ‘이 나’는 그 속에서 살 수 없는 거지."


밥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미친 소리는 평생 처음 듣는군."


"당연히 그렇게 느끼겠지. 하지만 내가 사실을 말한다는 건 알 걸세. 아무튼 그렇게 내 ‘현재 개조 계획’은 실패했고 내가 바꾼 것과는 다른 세상에 있던 자네는 금목걸이를 받지도, 체포되지도 않은 채 계획대로 서부로 떠난 것 같더군. 하지만 난 거기서 멈출 수 없었어. 담배구멍은 빠르게 작아지고 있었고, 이제 하루 이틀이면 사라져 버릴 것 같았네. 그래서 결심했지. 더 이상 내 친구 리틀 바비가 아닌 20년 후의 흉악범 밥 포터를 내 손으로 잡아 법의 심판을 받게 하기로. 하지만 10년 전의 나는 서부에서 암약하던 자네를 찾아낼 방법이 없었네. 그런데 어차피 우리는 오늘 어차피 여기서 만나기로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담배구멍이 사라지기 전에 부리나케 10년의 시간을 뛰어 넘어 온 걸세.”


지미가 담배를 한 모금 빨고는 말했다.


“…이해하겠나? 18세의 자네에게 금목걸이를 건네 준 건 내게는 몇 시간 전인 오늘 오후의 일일 뿐이야. 자네 반나절 동안 많이 늙었군."


그 말을 들은 밥의 얼굴에 묘한 냉소가 퍼졌다.


"그래서 자네는 그 쪼개진 다른 세상, 뭐라고 해야 하나, ‘평행 우주’라면 지나친 이름인가, 그런 이론에 근거해서 내가 자네 계획과는 달리 미리 교도소에 가서 교화되지 못했기 때문에 악의 길로 들어섰다고 생각하는 건가?”


"정확하게 말하면 '이 자네'와 '이 내'가 사는 세상에서는 변한 게 없다는 거지. 어딘가 다른 자네가 교화된 채 정직하게 사는 세상도 있겠지만 우린 갈 수 없을 거네. 엉뚱하게 들리겠지만 언젠가는 이런 이야기가 과학 이론이 될 날도 올 거야"


"과학 같은 소리하는군... 잠깐 내 주머니에서 담배 좀 꺼내 주게."


지미는 밥의 수갑 찬 손 아래 바지 주머니에서 담배와 성냥을 꺼내 불을 붙여 주었다.


"그럼 이제 내 이야기를 들려 주지. 지금 자네는 큰 착각을 하고 있어. 자네가 말한 대롤세. 20년 전 오늘 우리는 이곳에서 악수를 하고 헤어졌지, 그런데 그러자 마자 자네가 도로 뛰어 왔네. 그리고는 그 염병할 목걸이를 내게 줬지. 다음날 웹스터에 가서 목걸이를 팔려고 내 놓은 나는 그 자리에서 체포됐다네. 취조를 받으면서도 자네 이름은 끝까지 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


밥은 담배 연기를 가득 들이 마시고는 천천히 내 뿜었다.


"나는 절도죄로 재판에 회부됐고 5년 형을 받았네. 하지만 그 지옥에서 만난 동료들과 1년 만에 탈출에 성공했지. 우리는 마차를 훔쳐 서부로 향했네. 나는 어렸고 동료들은 모두 범죄자들이었어. 금고털이, 은행강도, 열차강도... 나는 막내로 함께 일을 하며 기술을 배웠네. 내 어릴 때 꿈은 정원사가 되는 거였지만, 지명수배된 탈주범을 고용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


"그럴 수가."


"그렇게 경력을 쌓으면서 나는 점점 진짜 ‘사업가’가 되어 갔지. 술과 도박, 여자를 알게 됐고 목숨을 잃을 뻔한 적도 부지기수요, 살기 위해 남을 죽이기도 했다네. 자네 표현대로라면 유명한 악당이 된 거지. 하지만 지난 20년 동안 하루도 궁금하지 않은 적이 없었네. 도대체 자네는 왜 내게 훔친 목걸이를 준 걸까. 자네가 나를 주러 직접 훔친 걸까, 아니면 나를 모함하고 함정에 빠뜨리려 한 걸까? 교도소 담장을 넘고 마이크와 조가 마차를 훔치러 간 동안 나는 숨어서 혼자 고민했네. 자네에게 찾아가 볼까. 하지만 그러기에는 당장의 상황이 너무 위험했고 내 원망도 무척 컸다네.”


지미의 얼굴은 낭패감에 젖었다.


"...적어도 이제 왜 그랬는지는 알게 됐군.”


"담배구멍 운운 하는 말들은 이해하기 어렵지만, 내 눈앞에 10년은 젊어 보이는 자네가 이렇게 서 있으니 믿을 수 밖에 없군. 고지식한 자네라면 그런 일을 벌일 수도 있다는 건 이해하겠네. 하지만 자네는 벌어지지도 않은 범죄를 막고 선량했던 나를 미리 교화한다면서 교도소에 쳐 넣었네. 누구에게도 그럴 권리는 없어. 그리고는 그것도 모자라 여기에 이렇게 나를 잡으로 왔네. 이제는 경찰에 넘겨지면 사형을 당할 걸 알면서도 내 손에 이렇듯 수갑을 채웠지. 알고 보니 나는 애당초 자네 때문에 범죄자가 되었고, 이제는 자네 덕분에 교수대에 매달리게 된 거군.


자, 이제 모든 것을 알았으니 자네가 한 일에 책임을 지게. 어서 이 수갑을 풀고 나를 보내 줘."


"...그럴 수는 없네."


지미가 죄책감을 누르며 단호히 말했다.


"내가 지나쳤는지도 모르지만 지금 이 순간 자네는 분명한 흉악범이야. 경위가 어찌 되었던 그 동안의 살인과 범죄의 값을 치러야 하네. 내 죄값은 내가 따로 치르도록 하지. 자, 어서 경찰서로 가세."


밥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자네라는 친구는 정말 어처구니가 없군. 이 와중에도 나는 자네에게 기회를 주려 했건만. 어이, 세실, 스탠, 믹, 이리 나와!"


그러자 골목 안 그림자 속에 숨어 있던 험상궂은 사내 세 명이 어슬렁거리며 걸어 나왔다.


"지미. 나를 한 번 속인 자네를 만나러 오는 내가 아무런 준비도 없었겠나? 하긴 그 쪼개지는 세상을 생각하고 있었으니 '이 내'가 '그 나'라는 걸 몰랐겠군. 나는 20년 전의 약속 때문에 온 게 아닐세. 자네가 왜 그런 일을 벌였는지 듣고 싶었고, 그 대답 여하에 따라 용서건 복수건 할 때가 됐기 때문에 온 거야. 자네가 오늘 한 이야기를 다 믿을 수는 없지만 그 한 번을 빼면 내게 거짓을 말한 적이 없는 옛 친구 지미 웰즈는 믿기로 하겠네. 그 동안 원망도 많이 했지만 결과적으로 자네 덕에 서부의 거물이 되었으니 나쁜 인생도 아니지. 어떡하겠나. 순순히 수갑 열쇠를 내 주겠나? 아니면 내 친구들과 한바탕 소란부터 벌일 텐가."


사내들이 어깨를 씰룩대며 멍청하게 키득거렸다. 지미는 주먹을 들어 복싱 자세를 취했지만 세 명의 건달을 상대로 승산이 있을 리 만무했다. 아마 죽지 않을 정도 두들겨 맞으리라. 어쩌면 그런 정도는 감수해야 할 지도 모른다. 좋은 의도였지만 결과적으로 지미는 신의 영역을 침범하고 가장 친한 친구의 인생을 뒤틀어 놓은 것이다. 두들겨 맞아 반신불수가 되는 정도는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찰라, 세실의 무지막지한 주먹이 지미의 복부를 강타했다. 극심한 통증에 그는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바라본 밥의 얼굴에는 야릇한 수심이 어려 있었지만, 그렇다고 수하들에게 멈추라는 명령을 내리지도 않았다. 이어 누군가가 거대한 구둣발로 지미의 턱을 걷어찼다. 그는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죽는 걸까.'


바로 그때였다. 호루라기 소리가 들려온 것은.


갑자기 주변이 밝아지며 수십 명의 남자들이 골목으로 들이닥쳤다. 곤봉으로 무장한 그들은 순식간에 네 명의 악당을 포위했다. 세 건달은 물론 밥까지도 주먹을 날리며 저항했지만 곧 제압되었고, 바닥에 꿇어앉혀진 채 수갑이 채워졌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지미는 어안이 벙벙하여 아픈 것도 잊은 채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들은 정복을 입은 보스턴 경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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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상황이 일차 정리되자, 높은 털모자를 쓴 경감이 쓰러져 있는 지미에게 가만히 다가와 속삭이는 것이다.


"당신은 보내라는 명령을 받았소. 어서 가시오."


지미는 욱신거리는 턱을 붙잡고 힘겹게 일어섰다. 영문은 모르겠지만 그가 하려던 일은 결국 달성된 셈이고, 빨리 이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경찰을 상대로 아무도 믿지 않을 말들을 늘어놓아야 할 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쯤이면 담배구멍도 어지간히 작아져 있으리라.


지미는 밥을 잠시 바라보았다.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며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그도 언뜻 얼굴을 들어 지미를 보는 듯 했다. 하지만 작별 인사를 할 수도, 그곳에서 마냥 밥을 쳐다보며 서 있을 수도 없던 지미는 이내 고개를 돌려 담배구멍이 숨겨져 있는 옆 골목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잠시 후 경감이 굵은 목소리로 선언했다.


"살인범 밥 포터와 그 일당. 보스턴 경시청의 이름으로 너희를 체포한다."


"내가 이곳에 온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미행을 한 건가?"


경감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에게 그런 것을 말해줄 의무 따윈 없어. 하지만 이건 전해 주지."


"이게 뭐지?"


"편지다. 명령을 받아서 전해 주는 것이니 읽던 말던 알아서 해."


그리고는 경감은 빛이 조금 바랜 고급 편지 봉투를 건넸다. 밥은 수갑 찬 손으로 어렵사리 봉투를 찢고 떨리는 손으로 편지지를 꺼냈다.


나의 친구 밥에게.


나는 자네가 이 편지를 보는 날로부터 10년 전인 내 원래의 시간으로 돌아왔네. 자네를 통해 알게 된 내 참담한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오래 전 그날로 다시 가서 금목걸이를 건네 주지 못하게 하고 싶었지만, 담배구멍이 그만 사라져 버렸다네. 그래서 그 저주받은 것을 다시 만들기 위해 그날부터 8년간이나 노력했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했어. 그러는 동안 연구에의 집착과 자네에 대한 죄책감 때문인지 몸을 망치고 말았다네. 이제 나는 얼마 살지 못하네.


하지만 여전히 고지식한 나는 타락한 옛 친구이자 흉악범인 밥 포터가 그 모습으로 활개치게 놔 둘 수는 없군. 아니, 내가 이 편지를 쓰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는 거겠지. 나는 내일 막역한 사이인 보스턴 경찰청장을 만나러 갈 생각이네. 2년 후 정각 10시 15분, 자네가 서 있는 그 곳에 무장 경찰병력을 파견해 살인범 밥 포터를 체포하라고 요청하기 위해서지. 그곳에 쓰러져 있는 젊은이는 조용히 보내달라는 부탁도. 그래야 내가 돌아와서 이 편지를 쓸 테니까.


자네에게는 조금 전이겠지만 내게는 이미 8년전의 일이군. 정확한 표현은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아마 이렇게 말하지 않았었나? 자네는 스스로 지은 죄의 대가를 치러야 하고, 나 또한 신의 영역을 넘보고 자네 인생을 망친 벌을 받아야 할 거라고. 하지만 역시 그건 자네에게 너무 억울한 일이더군. 그래서 시장과 경찰청장, 판사에게 자네가 사형만은 받지 않도록 신신당부 해 놨네. 8년간 쓴 돈도 적지 않으니 효과가 있을 걸세. 이것만이 18년 전 그날로 돌아갈 수 없는 내가 자네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이군 그래.


미안하네. 하지만 자네가 편지를 읽는 이 순간 나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고 자네는 살아 있네. 이것으로 사과를 대신 할 수는 없겠나...?


지미 웰즈



-다음 편에 이 소설에서의 타임라인 해설과 평행우주 관련 내용이 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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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 : @patoworld


편집 : 홀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