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2. 26. 목요일
프랑스특파원 아까이 소라
또 사과의 말
바빴다. 너무 바빴다. 벌써 2주 전, 프랑스 대표 빨갱이 언론 <리베라시옹> 편 출산 이후, 끝인 줄 알고 산후조리를 하려 했더니, 쌍둥이였던 게다. 이란성으로다가. 결국 꼬박 2주를 산고에 시달리고서 이제야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딴지의 아까이 소라로 돌아왔다. 사랑해 마지않는 우리 독자들이 본 필자를 기다렸을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그립더라. 여튼 죄송하다.
이왕 일간지 디벼보기를 빨갱이 신문부터 시작한 김에 오늘은 그 두 번째 시간으로 상 빨갱이 <뤼마니테>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여기서 l’Humanité란 ‘인류’, 혹은 ‘인간성’이라는 뜻의 프랑스어 단어다. 빨갱이와 인간성? 만약 이 두 단어 매치가 되지 않는다면 너님은 아마도 한국 사회와 교육에 너무나 익숙할 가능성이 크다. 북한이 공산주의 국가이고 인권이 보장되지 않는 상황임에는 틀림 없으나, 빨갱이라 해서 인권에 대한 생각도 없으리란 것은 논리에 어긋나지 않나.
누가 빨갱이 아니랄까봐 아주 시뻘겋다...ㅉㅉ
위대한 사회주의자, 장 조레스
마치 이 수식어가 “위대한 아버지 수령님”과 같이 느껴지는가? 이 역시 필자의 의도와는 하등 상관 없는, 너님의 착각에서 기인함을 밝혀 둔다. 괜찮다. 그게 어디 너님뿐이겠는가. 언젠가부터 ‘위대한’이라는 이 위대한 단어에 북한이라는 색이 입혀져 있는 곳이 우리가 사는 한국 사회이니까. 또한, ‘부칸 = 나쁜놈 = 빨갱이 (= 종북 = 반박)’ 프레임이란 쉬이 벗어나 지지 않는 올가미와 같은 것이니까.
그런데 장 조레스(Jean Jaurès)는 정말 말 그대로 ‘프랑스 사회주의의 아버지’다. 그리고 오늘의 주제 <뤼마니테>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재미있는 것은 오늘날 프랑스 우파의 대표적인 인물인 사르코지 전 대통령과 극우정당 FN의 수장 마린 르펜이 공공연하게 스스로 조레스주의자임을 밝힌다는 사실. 약간 비약을 더해 한국의 정치인들이 “나는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존경한다.”라고 말한다면, 과연 한국이 어찌 뒤집어질까 상상해 보시라.
이쯤 되어 고개가 갸웃, 머리가 복잡해질 너님을 위해 살짝 설명을 덧붙이도록 한다. 사실 마린 르펜이 보는 조국과 조레스의 조국은 그 개념 자체가 다르다. 내셔널리스트 르펜이 보는 조국이란 순수 프랑스인의 것이다. 반면 조레스가 보는 조국은 범 국가 차원의 것으로 노동자들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 지난 2012년 FN은 “아무 것도 없는 이에게는 조국만이 유일한 재산(A celui qui n’a plus rien, la patrie est son seul bien)” 이란 조레스의 말을 인용하며, “조레스도 FN에 표를 던졌을 것”이라 하다가 많은 이들의 조롱과 공분을 산 적 있다.
‘돼지같이 처먹고 운동 따위는 하지도 않는 샌님’의 전형, 상 빨갱이 조레스 선생
일단 <뤼마니테>를 창간한 이 인물에 대해 잠시 알아보자. 1914년 파리에서 암살당한 상 빨갱이 장 조레스 선생은 역설적으로 재력도, 권력도 빠방한 집안에서 태어난 프랑스 고등사범학교 출신 최고 엘리트. 철학가, 제1차 세계대전에 반대한 평화주의자, 그리고 활동하는 정치인. 광산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에 동참하며 전격 빨갱이로 변신한 그는 드레퓌스 사건을 통해 본격 두각을 나타내었으며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의 통합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
파면 당하는 드레퓌스, 앙리 메이에 작(1895)
출처: <쁘띠 주르날 (Petit Journal)> 1895년 1월 13일자 커버
아아! 빨간 돼지 장 조레스 선생은 적도 많았다. 그 중 태반은 내셔널리스트. 굳이 민족주의자라 쓰지 않고 ‘내셔널리스트’라 한 것은 한국의 민족주의와 유럽의 내셔널리즘이 닮은 듯 다른 이유임을 밝힌다. 너님도 알다시피 한국의 민족주의는 식민지 시기에 형성된 저항적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바, 한국 사회 전반에서는 비교적 우호적인 개념으로 쓰이고 있다. 반면 유럽에서의 내셔널리즘은 나치와 이어져 있어 인종차별주의와 비슷한 개념으로 이해된다.
외부의 적을 둔 곳에서는 집단의 이익이 우선시되기 마련. 1910년대 초, 프랑스 사회는 눈 앞에 둔 적들과 주변 강대국들에 대한 경계 등으로 인해 내셔널리즘이 팽배해져 가고 있었다. 내셔널리스트들에게 있어 조레스는 눈엣가시. 참전을 통해 프랑스의 위상을 높일 수 있는데 인류의 평화 어쩐답시고 설레발을 쳐대는 꼴도 가관인데 프랑스인을 완벽한 국민으로 만들 징병제에도 반대하다니! 결국 조레스는 몽마르트 가의 한 까페에서 동료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던 중, 열혈 애국주의자 내셔널리스트의 총에 맞아 숨지고 만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손에서 놓지 않았던 것이 바로 이 <뤼마니테>.
공산주의 신문 <뤼마니테>
아까부터 계속 빨갱이 빨갱이 했는데, 눈치 챘을지 모르겠지만 <뤼마니테>는 공산주의 신문이다. 우리나라 좋은나라 만만세 대한민국의 시선으로 보면 악질신문이자 당장 국정원과 어버이연합에서 처들어와 몰살시켜버릴 반동분자.
그런데 잠시만 짚고 넘어가자.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의 반대가 될지언정 민주주의의 반대는 아니다. 민주주의가 말 그대로 민(民)이 주인이 되는 사회를 일컫는다면 민주주의의 반대는 독재. 이승만의 독재, 박정희의 독재, 전두환의 독재. 그리고 또 누군가(들)의 독재. 반면 공산주의는 마르크스에서 나온 것으로 일종의 사회주의.
여기서 사회주의란 누구나 자신의 일한 대가를 정당하고 평등하게 분배 받는 사회를 지향하는 사상을 말한다. 그러니까 자본주의에서 자본의 흐름에 그 중점을 두고 있다면 사회주의에서는 분배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것. 말하자면 공산주의는 많은 사회주의 사상 중 하나. 다 아는 이야기를 구구절절 풀어 냈다면 미안하다. 필자가 너님을 너무 과소평가했다. ‘우리나라 좋은나라’에서 워낙 “공산주의 = 북한” 프레임을 쎄워 놔서 너님도 그 안에 갇혀 있는 인간군상일까 봐 언급해 봤다.
그렇다. <뤼마니테>는 공산주의 신문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창간자 조레스가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었으니. 1904년 4월 18일, <사회주의 일간지>라는 부제를 달고 <뤼마니테>가 세상에 나온다. 조레스는 신문 사설을 통해 ‘자유 이성이 스스로 세계를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도록 하는 정확하고 다양한 정보 제공’ 및 ‘경제적 독립’을 <뤼마니테>의 두 가지 원칙으로 내세운다.
1904년 4월 18일 <뤼마니테 창간호>
정말 그림 하나 없이 안 팔리게 생겨먹었다
출처 : 프랑스 프랑수아 미테랑 국립 도서관
<뤼마니테>는 프랑스 사회주의 운동의 통합과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을 기치로 하였다. 결국 1911년이 되면 노동자 인터내셔날 프랑스 지부(Section française de l'Internationale ouvrière)의 기관지로 편입된다. 이로써 안 그래도 프랑스 사회의 일부 계층만을 대변하던 이 신문은 점차 구독율이 떨어져 결국에는 재정적자에 허덕이는 지경에 이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국제노동운동협약에 따라 평화주의와 반 군국주의 입장을 대변하던 <뤼마니테>는 1914년 여름, 조레스의 사망과 그렇게나 반대하던 제1차 세계대전 발발이라는 불행을 계기로 보다 넓은 구독자 층을 확보하게 된다. 위기는 기회이며 신념은 지켜야 제 맛.
그렇게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20년, 노동자 인터내셔날 프랑스 지부는 코민테른(공산주의 인터내셔날)에 가입함으로써 코민테른 프랑스 지부로 명칭을 변경한다. 이는 나중에 프랑스 공산당으로 바뀐다. 이로써 조레스의 사회주의 신문으로 시작한 <뤼마니테>는 공산주의 신문으로 완벽히 변모하게 된다. 프랑스 공산당의 기관지로서 <뤼마니테>는 정보를 제공하는 일간지인 동시에 공산당 지지자들을 움직이는 하나의 동력으로 기능하게 된다.
마치 한국전쟁 이후의 한국 사회가 냉전체제에 갇혀 여전히 ‘북한’ 하면 치를 떨고, 단 하나만의 사상만을 허용하듯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프랑스 정부는 소련과 스탈린을 지지하는 <뤼마니테>를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나 보다. 뭐 없나 꼬투리를 잡으려 혈안이 되어 있던 달라디에(Édouard Daladier) 정부는 1939년 독일과 소련간의 상호불가침조약에 우호적인 기사를 내 보낸 <뤼마니테>의 발행을 금지시키기에 이른다.
빨갱이의 생명력은 강하다. 한국만 해도 그러하지 않는가? 1947년 제주에서, 1980년 광주에서, 1981년 부산에서 등등 1953년 이후 60년 동안을 그렇게 그렇게 짓밟아도 다시 어떻게든 고개를 들고 일어난다. <뤼마니테> 역시 그랬다. 재발행을 위해 정부와 끊임없이 합의하려 노력하는 한편,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내내 비밀리에 발행, 배포하곤 했다.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당한 1940년에서 1944년까지 <뤼마니테>는 독일에 협조함으로써 권력 유지와 제 살 길 찾기에 여념이 없었던 비시 정부를 비판하고 지하에 숨어 활동하는 레지스탕스의 언론으로 자리매김하였다.
모르긴 몰라도 어려운 생활과 정부의 감시 및 압박에도 사람들의 지지와 살 떨리는 스릴은 아마도 <뤼마니테>로 하여금 일종의 희열과 흥분을 안겨 주었으리라. 그리고 그 에너지는 보다 적극적인 활동의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 급기야 프랑스 공산당은 1941년, “프랑스 독립과 자유를 위한 국민전선 (Front national de lutte pour la libération et l'indépendance de la France)”을 만들어, 비시정부와 나치에 반대하는 프랑스인들의 결사를 이끌어 내고자 하였다. 인류의 평화와 전 세계 노동자의 단결을 외치던 <뤼마니테>는 이제 프랑스의 위기 앞에서 저항적 민족주의 성향까지 함께 지니게 된다. 한 번 빨갱이는 영원한 빨갱이인 법. 해방 이후 이들은 민족을 버리고 다시 자기들의 소굴로 들어간다.
프랑스 독립과 자유를 위한 국민전선
(Front national de lutte pour la libération et l'indépendance de la France)의 로고
언론은 깡이다
비시정부의 깽판과 독일에의 굴복 및 적극적 협력에도 불구 제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으로서의 위치를 차지한 프랑스는 이제 재건에 올인한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무엇? 바로 동원과 그를 위한 프로파간다, 그리고 민족주의 및 애국주의. 따라서 빨갱이들의 뜻을 따라 민족을 버린 <뤼마니테>는 슬슬 대중들의 애정과 관심을 잃기 시작한다. 1944년 해방과 함께 정식 재발행되기 시작, 1945년 40만에 달했던 발행부수는 점차 줄어들어 1972년에는 12만, 1986년에는 10만 7천에 이르게 된다. 참고로 2012년 하반기부터 2013년 상반기까지 <뤼마니테>의 발행부수는 4만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뤼마니테>는 꿋꿋하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해 나간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에도 친 소비에트 연방의 입장을 유지해 갔다. 1956년 10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공산당 체제에 반대하던 시민들의 움직임이 점차 혁명으로 번져나가자 소련은 11월 4일 헝가리에 군대를 보내어 이를 좌절시킨다. 대부분의 프랑스 언론이 소련의 행동을 비난하는 가운데, <뤼마니테>는 참으로 당당하게도 “부다페스트가 웃음을 되찾다 ”는 제목의 머릿기사를 내 보낸다.
“스탈린,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그 사람”
냉전시기, 그 반대편에 선 프랑스에서도 <뤼마니테>에겐 스탈린이 짱짱맨
또한 아직까지도 식민 지배에 대한 사과를 하지 않은 이 나라에서 <뤼마니테>는 프랑스 언론으로는 유일하게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식민지배에서의 해방을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인도차이나와 알제리에서 해방전쟁이 일어나자 <뤼마니테>는 평화주의를 말하며 프랑스 정부에 날선 비판의 목소리를 아끼지 않는다. 그리고 프랑스 정부는 다시 한번, <뤼마니테>의 발행을 금지시킨다.
그렇다. 깡이다. 창간인 조레스가 총에 맞아 죽고, 신문사가 불에 타고, 정부는 발행을 금지시켜도 이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데에 주저함이 없었다. 그들의 생각이 대중의 일반적 합의와 일치하지 않을지라도 자신들의 신념과 이유를 가지고 깡으로 여기까지 왔다. 프랑스에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가 있다면 그 중의 일부분은 분명 <뤼마니테>의 공이라 할 수 있겠다. <뤼마니테>와 같이 몸으로 직접 부딪쳐 가며 자신의 생각을 자신의 방식으로 표현하고 전달해 온 이들이 있었기에 프랑스는 소수의 다른 생각까지도 포용할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의 <뤼마니테>
치열했던 냉전도 끝나고 <뤼마니테> 역시 공산당의 품을 떠난다. 공산당 기관지였던 <뤼마니테>는 1999년부터 독자적인 극좌 일간지로 변모한다. 가끔 아직도 <뤼마니테>를 언급하며 ‘공산당 기관지’라는 수식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꽤 자주 발견되는데, 어떤 경로로든 이어져 있을망정 이제 <뤼마니테>는 공식적으로는 독립 언론이다.
이후 스탈린주의는 배제되고 평화주의 지지 및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 보다 부각되었으며, 특히 노조 활동에 대한 적극적이고도 지속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다. 특히 점차 초기의 진지모드에서 벗어나 쌈마이를 자청하며 대중과의 거리 좁히기 역시 시도하고 있다. <뤼마니테>는 1996년,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홈페이지를 개설하여 인터넷 상에서 기사를 제공한 언론사이기도 하다.
이라크전에 대한 부시 조롱하기 <뤼마니테> 버전
“위험 : 나라의 열쇠를 니콜라 사르코지에게 넘기지 맙시다 !”
2007년 프랑스 대선 직전에 있었던 기사.
한국에서라면 선거법 위반으로 신문사 자체가 넘어갔을 것이 자명
“부자들에게 경제위기란 없다”
“사람들이 긴축재정에 들어가는 동안, 명품회사들은 오만하게도 제 배를 채우고만 있다.”
오늘날의 <뤼마니테>는 여자보다는 남자(68.5%)에 의해, 다른 지역보다는 파리에서(47.1%) 많이 읽힌다. 또한 사회에 대한 보다 다양한 시각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 정치인들이나 CEO, 사회활동가 등의 오피니언 리더들이 많이 찾는 신문이기도 하다. 애초에 그 시각의 편향성 때문에 태생부터 일반 대중을 겨냥하기에는 한계점을 지니고 있는 <뤼마니테>는 어찌 보면 냉전 종전 이후, 아직도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그게 <뤼마니테>만의 매력일 테지만.
신문 발행만으로는 먹고 살 수 없었던 <뤼마니테>가 일찍이 수익상품으로 개발한 것은 바로 ‘축제’. Fête de l’Humanité. 줄여서 ‘뤼마 축제’ 정도로 불리는 이 행사는 1930년부터 매년 9월 두 번째 주말에 열린다. <뤼마니테>가 빨갱이라는 정치적 색깔을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이 행사는 전반적으로는 비정치적이다. 10km 마라톤이 있는가 하면 매년 테마를 달리한 양질의 전시도 이루어 지며, 그 해 가장 핫한 인물들의 공연도 이어진다. 따라서 굳이 좌파적 색채를 지니고 있지 않은 이들도 한데 모여 축제를 즐긴다. 올해는 프랑스인의 재간둥이 자멜 드부즈(Jamel Debbouze)의 콘서트도 있었고, 가장 주가를 올리고 있는 가수 M의 무대도 많은 이들을 환호케 하였다.
2013년 9월 13-15일 사흘간 열린 뤼마 축제 풍경
위 - 개막식 풍경 / 아래 좌 - 가수 M, 우 - 영화 <아멜리에>에도 나왔던 자멜 드부즈
이런 저런 발버둥에도 불구, <뤼마니테>의 열악한 재정 상태는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얼마 전, 그러니까 2013년 12월 3일, 프랑스 하원들은 <뤼마니테>가 진 4백만 유로(58억 원) 가량의 빚을 화끈하게 청산하는 데에 찬성표를 던졌다. 이는 <뤼마니테>가 더 이상 어떠한 방식으로도 빚을 갚을 방법이 없음이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신문 창간 110주년 및 조레스 사망 100주년이 되는 2014년의 <뤼마니테>가 어떻게 발돋움할 수 있을지는 이제 상원들의 결정에 달려 있다.
참 고
www.liberation.fr/politiques/2011/01/21/marine-le-pen-et-la-fausse-citation-de-jaures_708831
www.europe1.fr/Politique/Marine-Le-Pen-se-lance-vers-2012-374431
www.lefigaro.fr/medias/2013/12/07/20004-20131207ARTFIG00003-l-etat-vole-au-secours-de-l-humanite.php
weblettres.net/blogs/article.php?w=Revuedepresse&e_id=40945
humanite.fr/monde/fete-de-lhumanite-2013-cest-parti-543814
편집부 주 <물건너 언론 분석 특집 관련기사> 본지는 야매 외신 적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물건너 언론을 분석, 해부할 해외특파원을 모집 중입니다. 국내 언론이 외신 짜집기 구라질을 해대면 때치하고 국외 언론이 썼다하면 무차별적으루 정론인양 인용 취급하는 세태에 빡치는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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