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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가스


어릴 내가 살던 시골 동네에서 가장 부잣집은 단연 술도가 김사장네였다. 농사꾼들 살림이야 거기가 거기고 장터 가겟집들도 고만고만. 농번기엔 어린 나까지 막걸리 주전자 사들고 논으로 심부름을 갔으니 술도가집은 현금이 따박따박 쌓였다. 그러나 술도가집의 호시절은 1970년대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쇠락하였다. 뒤를 이어 동네의 제일 부자로 떠오른 것은 주유소 박사장네였다. 박사장은 이발소를 하면서 한켠에 석유통을 두고 되로 등유를 팔았다. 부엌에 석유곤로가 하나둘 늘어나고 신작로에 트럭과 자가용의 왕래가 빈번해지면서 박사장은 아예 이발소 문을 닫고 주유소를 지었다. 그렇게 1980년대 마을 최고 부자 자리는 주유소 차지였다. 그러나 주유소 박사장도 1990년대가 되자 오토바이로 가스 배달을 하던 후배 김사장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2000년대 후반 가스 배달 김사장은 업소를 다른 이에게 넘기고 국립공원 안에 대형 펜션을 지었다.


우리 세대는 아궁이에 나무를 밥을 짓고 짚으로 군불을 때던 바이오매스 에너지 시대에서 석탄과 석유를 거쳐 가스에 이르는 급격한 에너지 체제 전환의 시대를 살아왔다. 가운데 가스의 보급은 실로 놀라운 속도로 진행되었다. 덕선이가 쌍문동에서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동치미 국물 마셨던 쌍팔년도만 해도 도시가스는 고급 아파트에나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천연가스와 LPG 대부분의 가정에서 취사 연료원으로 사용한다. 이제 전체 에너지 소비량에서 20% 차지할 정도가 되었으니 천연가스가 처음 도입된 1986년부터 불과 30 만에 가스는 가정연료의 주축이 되었다.


가스는 석탄을 고온으로 건류하여 만드는 석탄가스와 석유의 채취 또는 정제 과정에서 나오는 프로판, 부탄 등의 석유가스, 석탄광이나 유전·가스전에서 기체 상태로 채취하는 천연가스가 있다. 최근에는 쓰레기 매립지나 하수처리장에서 메탄가스를 회수하여 사용하기도 하지만 이는 폐기물 발생을 전제로 하므로 1차에너지원이 아니라 에너지의 효율적인 이용이라고 봐야 한다.


3000 중국에서 죽제관으로 모은 천연가스를 소금을 만들 사용한 것이 가스에 대한 인류의 기록이다. 본격적으로 사용한 19세기 석탄가스등이 안개 런던의 가로등으로 채택되면서 부터다. 그러나 영역을 넓히던 석탄가스등의 시대는 불과 100. 19세기 말에 백열등이 발명되면서 조명은 전기의 영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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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러브레터 촬영지로 알려진 일본 삿포로의 오타루 운하 주변에는 아직 가스등으로 정취를 자아낸다.


초기에 가스는 배관을 통해 수송해야 하기 때문에 제한된 장소에서만 사용할 있었다. 유전에서는 채취 과정에서 나오는 가스를 안전을 위해 그냥 태워버려야 했다. 그러나 배관 기술과 액화 기술이 발전하면서 석유가스는 LPG(Lovely Pretty Girls 아니라 Liquefied Petroleum Gas), 천연가스는 LNG(Liquefied Natural Gas) 압축하여 수송할 있게 되었다. LNG 기술이 특허 등록된 1914, 상업적 생산을 시작한 1917년의 일이지만 본격화한 2 세계대전 이후의 일이다. 일단 수송이 용이해지자 가스는 연소 연료 중에서는 가장 고급스런 에너지가 되어 가정 연료의 총아가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스가 처음 사용된 것은 서양문물이 들어오던 구한말, 전기보다 조금 늦게 들어왔다. 1907 일본 자본으로 시작한 일한와사(瓦斯, 일본발음은 가스)주식회사는 1909 용산에 석탄가스제조공장을 준공하고 진고개 일본인 상가 밀집 지역과 주거지에 가스를 공급했다. 당시 가스의 용도는 가스등을 켜는 일이었다. 취사나 난방은 유류와 석탄이 주종이었다. 그나마 전기 공급이 늘어나면서 가스등은 뒤켠으로 밀렸다. 일한와사도 1915 경성전기주식회사로 개명하여 운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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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 일한와사주식회사가 개업하던


부산에선 1912년에 한국와사전기주식회사가 설립되어 가스를 공급하였는데 대부분 발전용으로 사용하고 나머지를 시중에 공급하였다. 회사는 1938 경남지방의 배전 사업을 맡은 남선합동전기주식회에 인계되었다. 1936년에는 평양에 서선합동전기주식회사가 설립되었고 1938년에는 신의주부가 직영으로 가스 사업 경영 인가를 받아 만주와사주식회사의 안동지점에서 가스를 구입해 공급하였다. 가스 수용자는 1943 기준으로 일본인이 25,799, 조선인이 1,855명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전체 사용자의 6% 불과했다. 일제에 협력하여 부를 쌓은 소수의 상류층이었다.


중일전쟁 이후 조선의 모든 산업은 군수 중심으로 움직였다. 가스도 마찬가지로 1940년을 정점으로 시중 판매량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1942년에는 무기와 군수품을 생산하는 인천조병창(부평에 있던 미군부대 캠프 마켓 자리) 가스를 공급하기 위해 인천에 가스공장을 완공했다. 석탄가스공장의 27 가마 절반은 경성전기㈜가 보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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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평에 있는 인천조병창은 해방 미군이 인계하여 사용하였다.


해방 석탄가스 공장의 설비는 절반 정도만 가동되었다. 1951 7월에는 대폭격으로 경성전기㈜의 가스 생산이 중단되었다. 부산의 경우 전쟁의 피해는 적었지만 연료탄 구입의 어려움, 시설의 노후, 소비자였던 일본인들의 철수로 수요가 격감하여 1954 문을 닫았다. 이렇게 석탄가스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1951 석유가스인 LPG 수입판매 회사가 생겨났다.


석유가스는 1964 울산정유공장이 가동되어 자체 생산이 가능해졌다. 1970년대 정유회사가 잇따라 완공되어 LPG 대량생산이 가능해지면서 정부는 도시연료의 현대화 사업을 추진하였다. 서울시는 1971 서울시영도시가스사업소를 설립하여 5월에 이촌동 3000가구에 LPG/AIR 방식으로 가스를 공급하기 시작하였다. 이듬해에는 강서구 염창동에 나프타 분해 방식으로 제조한 LPG 도시가스를 영등포지역의 6622가구에 공급하였다. 서울시는 팽창하는 강남지역에 도시가스를 공급하기 위해 민자를 유치하여 1978년에 대한도시가스주식회사( 코원에너지서비스) 설립케 하고 서울 강동·강남·송파구와 서초구 일부, 경기도 남동권 일부를 공급권역으로 떼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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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도시가스는 나프타 분해 방식으로 LPG 공급하였다.

삼천리가 인수한 경인도시가스 인천공장 기공식 장면.

(출처: 디지털가스신문)


1·2 석유파동을 거친 1978 정부의 부처로 승격한 동력자원부는 가스사업법을 제정하고 에너지의 안정적 확보 차원에서 천연가스의 도입을 검토했다. 그리고 1980 경제장관회의에서 천연가스 도입에 관한 기본 방침을 확정하였는데, 도입 시설과 저장소, 공급관로 대규모 자금이 들어가는 도매 부문은 공기업이 맡고 소매는 지역을 나눠 민간기업에 준다는 것이 기본틀이었다.


이듬해 동자부는 LNG사업 기본계획안을 의결하고 이를 추진할 한국가스공사를 1983 8월에 설립하였다. 지역을 분할하는 소매업체들도 속속 설립되었는데 사양길에 들어선 연탄공장들이 대거 뛰어들었다. 문경에서 봉명광업소로 일어선 이동녕은 박정희와 인연으로 1978 대한도시가스에 참여할 있었다. 이를 시작으로 1980년엔 삼천리, 83 대성, 85 강원산업이 독자적으로 도시가스에 뛰어들었고, 1982년에는 부산지역, 86년에는 대전지역 연탄업자들이 손을 잡고 가스산업에 진출하였다. 1986년까지 허가된 18 도시가스업체 석탄 관련 회사들이 10개를 차지했다.


LNG 전용 선박으로 들여온 이를 하역·저장하고 다시 기화하여 배관망을 통해 지역 도시가스사나 발전소에 공급한다. 1983 설립된 한국가스공사는 우선 평택에 인수기지를 착공하고 인도네시아 국영 페르타미나와 1986년부터 2006년까지 매년 200만톤의 LNG 도입하기로 계약을 체결하였다. 드디어 1986 10월 31 인도네시아로부터 LNG 57,300톤이 평택인수기지로 도착하여 11월부터 발전용 천연가스 공급을 개시함으로써 천연가스의 시대가 막을 올렸다. 이전의 LPG 도시가스는 양이 많지 않아 취사용 중심이었지만 LNG 도시가스는 난방용으로도 사용이 가능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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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NG선에 실려온 액화천연가스를 인천 인수기지에서 하역하는 모습 (출처: 가스신문)


수도권에서 공급 가구를 늘려가던 도시가스는 1993 대전 중부권으로 공급권역을 확대했다. 1995년에는 영남과 호남 지역, 1999년에는 서해권과 남부권에도 천연가스 공급을 개시했으며 2002 11 강원권을 마지막으로 전국의 주요 도시들이 천연가스 공급 가능 지역이 되었다. 이에 따라 도시가스 수용가구는 2003 1천만 가구를 넘어섰다. 1990년대 초까지도 5 아파트에서 난방에 사용한 연탄재를 쓰레기통으로 낙하시키는 시절을 살았다는 지금 세대는 상상이나 있을까?


2015 기준으로 도시가스는 모두 1659 가구에 공급하여 보급률은 80% 수준에 이른다. 그런데 여기서 제외된 농어촌 지역과 지방 소도시는 상대적으로 많은 난방비용을 지출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정부에서는 우선 LPG 가스망을 설치하는 사업을 지원하고 있으나 LPG 역시 LNG 비해 30~40% 이상의 난방비를 지출하게 한다. 현실적으로 LNG도시가스망을 전력망처럼 농어촌 지역까지 까는 것은 어렵다. 게다가 결국 천연가스도 수입 에너지라서 가격 변동의 위험은 상존한다. 따라서 바이오매스 연료나 축산폐수로 만드는 바이오가스 등으로 지역난방을 하는 방안 재생가능에너지의 활용도를 높여나가야 한다.


현재 천연가스 소비량(2014) 도시가스 제조가 1818만톤으로 가장 많고 가스발전소에서 1588만톤, 지역난방에서 216만톤을 사용한다. 천연가스는 동해가스전에서 생산하는 소량을 제외하고는 카타르와 인도네시아, 오만, 말레이시아 등에서 LNG 형태로 수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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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가스공사는 1986 운전을 개시한 평택생산기지를 시작으로 1996 인천생산기지, 2002 통영생산기지, 2014 삼척생산기지의 시설을 증설하여 현재 69기의 저장탱크에 1066kl 수용할 있다. 생산기지에서 인수한 LNG 기화설비를 통해 우리가 사용하는 가스가 되어 4520km 주배관망을 통해 지역의 도시가스 회사와 발전소로 수송된다. 한편 제주도에 천연가스를 공급하기 위한 제주애월기지는 2017년으로 완공이 늦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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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가스 공급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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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NG 평택생산기지


지역별 도시가스 회사는 모두 33 업체로 지역을 분할하여 독점 운영한다. 서울의 경우 대한도시가스가 이름을 바꾼 코원에너지서비스와 예스코, 서울, 귀뚜라미에너지, 대륜E&S 5개사가 나눠 맡고 있는데 이들은 경기도 동부와 북부에도 가스를 공급한다. 경기도의 남부와 서부는 공급량 순위 1 업체인 삼천리가 맡았다. 이들 지역 도시가스 회사들은 도매업자인 한국도시가스로부터 천연가스를 공급받아 41,187km 이르는 지역배관망을 통해 일반 소비자와 산업시설에 판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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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가스의 소매 판매는 33 업체의 지역 분할 운영 체제이다. 민영화되었지만 독점 체제!


천연가스의 요금은 적정원가와 적정투자보수의 합계인 총괄원가 산정 방식으로 결정한다. 한국가스공사는 수입한 LNG 원료비에 가스공사의 공급비용을 더해 도매요금을 정한 산업통사자원부 장관의 승인을 얻어 시행한다. 지역도시가스회사는 도매 요금에 소매 공급 비용을 더해 소매 요금을 산정해 해당 시도지사의 승인을 받아 수용가에 적용한다. 요금 구성을 보면 대략 원료비가 88.5%, 도매공급비용이 6.2%, 소매공급비용이 5.3% 차지한다.


1996년부터 원료비 연동제가 도입되어 한국가스공사는 2개월마다 도입하는 LNG 가격이 ±3% 넘어 변화하면 도매요금을 변경할 있다. 하지만 수입이 대개 유가 연동 방식에 장기 계약으로 이루어져 국제 가스가격 변동이 즉각 소비자의 요금에 반영되지는 않는다. 2016 12 현재 가장 서울시 도시가스의 경우 계량기 단위인 1입방미터() 621원이다.


가스 공급은 처음부터 수입과 도매를 공기업이 맡고 소매는 민간회사가 지역별로 나누어 독점 운영하는 체제로 출발했다. 따라서 가스 산업의 민영화는 바로 수입과 도매부문, 한국가스공사의 민영화를 뜻한다. 시도는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으로 한국경제가 무장해제되던 199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의 알짜 기업들이 헐값으로 외국 자본에 넘어가던 시기였다.


당시 정부는 국제통화기금과 미국의 개방 공기업 매각 요구를 받아들여 가스공사의 도입·도매 부문은 3개의 자회사로 분할하여 매각하고, 설비 부문의 정부 지분을 일부만 남기고 매각하여 공동이용제를 실시하기로 하였다. 아울러 자가소비용의 LNG 직수입을 허용하고 도매 부문의 경쟁 추이를 보아 소매 부문의 도입도 단계적으로 추진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정부는 1999 한국가스공사를 상장하면서 정부 지분을 일부 매각하여 공적 지분 비율을 61.2% 줄였다. 2001년에는 대규모 천연가스 수요자에게 직도입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외국 자본에 의해 강요된 민영화는 반발에 부닥쳤다. 2002 2 정부는 가스공사 구조개편의 시기 시행 방법을 노사정 논의를 통해 해결하기로 노정협약을 체결하고, 그해 3 기본 방향을 수정했다. 도입·판매 부문은 분할 대신 점진적으로 신규 진입을 허용하기로 하고, 설비 부문은 공기업 체제를 유지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2003 노무현 정부에서 가스 공사의 민영화는 사실상 중단되었다.


가스공사의 민영화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건설사 사장 출신의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되고서다. 이명박 정부 인수위는 2008 1 구조개편 로드맵을 수립하여 단계적으로 도입·판매 부문에 경쟁을 도입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광우병이 우려되는 소고기 수입을 허용하려는 정부 정책에 반발하여 5 시작된 촛불집회는 이명박 정부의 민영화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했다. 결국 8 ··청은 가스와 전기, 수도, 건강보험 4 분야는 민영화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촛불 집회가 사그라들던 2008 10 정부는 공공기관 선진화 계획이라는 통해 도입·도매 부문의 신규 판매 사업자 허용을 통해 경쟁을 도입하되 발전용 물량에 대해 우선 경쟁 도입 산업용으로 확대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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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화는 박근혜 정부에서도 승계되었다. 지난 6 정부는 공공기관 기능 조정 방안을 통해 가스 도입·도매 시장 경쟁체제 도입을 재천명하였다. 민간직수입 활성화를 통해 시장 경쟁구도를 조성한 2025년부터 가스 도입·도매 시장을 단계적으로 민간에 개방한다는 계획이다. 현재 수요자 자가소비용 직수입은 포스코와 GS에너지, SK E&S, 중부발전 4개사가 하고 있는데, 2015 LNG 수입량의 5.7% 이들이 수입했다.


가스의 공급은 석유와 달리 배관에 의해 이루어진다. 송유관은 대량 수송의 편의를 위한 것일 소비자에게 공급하는 주로 유조차나 주유소에서 구매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가스는 개별 소비자에게도 배관을 통해 공급한다. 가스통으로 소비하는 경우 난방은 어렵고 취사용으로 사용할 뿐이다.


따라서 배관으로 이루어진 공급망을 유지·관리하는 공기업에서 하는 공익에 부합한다. 가스가 취사와 난방이라는 기본 생활에 필수적인 연료가 만큼 공공복리를 위해 사적 영역에 맡기는 무리다.


수입 분야에서 경쟁을 도입하면 정부 말대로 도입단가를 줄일 있을까? 답은 글쎄요다. 일시적으로 공급 과잉이 발생하는 시기를 제외하고 가스 시장은 생산자 우위의 시장이다. 구매자 역시 공급 안정을 위해 장기 계약을 받아들인다. 이런 시장에서 국내 구매자 여럿이 특정 생산자에게 달려드는 불리하게 작용한다. 국내에 인기 있는 경기 중계권 따겠다고 공중파 3사가 호가를 올려 다른 나라보다 훨씬 많은 돈을 주었던 사례는 익히 들어서 알고 있지 않은가?


공급 안정을 위해서는 오히려 공급 지역의 다변화가 시급한 상황이다. 북한을 경유하는 가스관을 깔아 시베리아 가스를 들여올 있다면 자체로 저렴할 뿐만 아니라 지역에서 들여오는 가스의 아시아 프리미엄도 절감할 있다. 이런 국제적인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민간회사에만 맡길 없는 사안이다. 가스산업에서 공기업이 필요한 다른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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