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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 당시 미국과 일본의 ‘격차’를 단 적으로 보여준 무기(혹은 전술)이 하나 있다.


누구나 한 번쯤 상상해 봤지만, 현실적 여건 때문에 이를 실행에 옮길 수 없었던 것. 미국과 일본은 태평양 전쟁 당시 이것들을 각각 실행했다. 이들은 각각의 나라를 설명하는 무기이기도 하고, 각각의 나라가 전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대표하는 무기이기도 하다.


바로 VT신관과 가미카제(神風)이다. 이것처럼 각각의 나라를 설명하는 무기(혹은 전술)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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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T 신관


신관(信管)이란, 간단히 말해 대포의 포탄이나 탄환, 어뢰의 폭약을 폭발시키는 장치다. 포탄은 말 그대로 폭약덩어리다. 그런데, 이 포탄이 아무 때나 터진다면 이 포탄을 믿을 수 있을까? 신관은 포탄을 쏘는 이들이 원하는 시간에 터지도록(원하지 않을 때는 터지지 않도록) 해주는 장치이다. 포병으로 근무한 사람들은 이해가 빠를 것이다.


그럼 신관은 어떻게 작동할까? 가장 일반적인 형태는 포탄이 표적에 맞았을 때 작약이 터지는 착발신관, 일정시간을 두고 작동하는 지연신관등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부터 설명할 근접신관인 VT신관이 있다.


근접신관은 그 당시 군관계자들의 ‘꿈’이었다. 보통의 착발신관은 목표에 접촉해야지만 폭발을 한다. 포병이 포를 쏜다고 치자. 목표물 근처의 보병들이 포탄 낙하를 확인하고 납작 엎드린다면 어떻게 될까? 포탄이 떨어진 지역은 구멍이 생기겠지만, 그 외의 지역은 피해가 ‘덜’ 할 것이다. 그런데, 만약 포탄이 목표 바로 위에서 터진다면 어떻게 될까? 그 밑은 아비규환의 생지옥이 펼쳐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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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 이해가 닿지 않을 것이다.


“포탄을 계속 쏘면 맞지 않을까?”


만약 그것이 움직이지 않는 고정 목표물이라면, 100발이고 200발이고 계속해 발사하면 된다. 그러나 목표물이 움직인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도 고속으로 움직이는 비행기 같은 존재라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엄청난 양의 대공포가 생산됐고, 이들은 하늘에다 포탄을 흩뿌렸다. 그러나 당시 대공포의 전술은 일정 구역에 촘촘한 화망을 만들어 놓고, 그곳으로 폭격기나 전투기가 들어오면 박살을 내는 방식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항공기술과는 차원이 다른 발전을 보인 제2차 세계대전의 항공기 개발 기술은 시속 500킬로미터 정도로 날아다니는 건 일도 아니었다. 즉, 인간의 목측(目測)으로는 표적을 따라갈 수 없었다는 의미다.


거의 대부분의 대공포들은 허공에다 돈을 흩뿌렸다. 한 번 걸리면 제대로 K.O시킬 수 있는 강펀치가 있지만, 맞지 않는다면 허공에다 주먹질을 하는 것과 같은 상황. 대부분의 대공포는 허공에다 주먹질을 하다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생각을 하는 이들이 등장했다.


“포탄이 날아가다 표적 근처에서 자동으로 터진다면 어떨까?”

 

착발신관의 경우는 표적에 맞아야 한다. 지연신관은 세세하게 시간을 조정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 그렇다면, 알아서 표적을 찾아가다 표적 근처에서 터져준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단순한 생각.


1930년대 독일은 이 기술을 개발하겠다고 나선다. 그러나 당시 기술력으로는 엄청난 난제였다. 대포 중에도 비교적 작은 구경으로 통하는 105미리 포탄에 장착되는 신관만 하더라도 그 사이즈는 주먹 안에 들어올 정도로 작다. 이 작은 신관에다가 표적과의 거리를 확인해 자동으로 폭발하는 장치를 심는다는 게 보통 일이겠는가? 게다가 그 엄청난 압력은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 포신 안에서 화약이 밀어 올리는 힘. 그 안에서 강선을 따라 돌아야 하고, 충격을 버텨내야 한다.


물론, 어찌어찌 만들어 낼 수는 있겠지만 그 엄청난 비용을 감당할 수 있을까? 독일은 몇 번의 시도 끝에 이 근접신관의 개발을 포기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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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w me the money


독일의 기술력으로도 풀지 못한 문제를 해결한 건 미국의 ‘돈’이었다.


미국 기술진은 신관 안에 전파발신기와 수신기를 집어넣고, 송신한 전파가 반사돼 돌아온 거리를 읽고 기폭 하는 방식을 개발했다. 쉽게 표현하자면, 포탄 안에 작은 레이더를 우겨 넣었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전파를 발사하며 날아가다, 전파가 ‘적기’에 맞고 되돌아오면, 그대로 폭발한다는 원리다.


적기 근처에서 포탄이 터지면, 그 파편으로 적기는 격추된다. 간단해 보이지만, 당시로서는 첨단기술의 집약체이며, 돈을 허공에다 날리는 ‘낭비’의 끝판 왕이었다. 언뜻 이해가 안 가겠지만, 어린애 주먹만한 쇳덩어리에 진공관과 공진기, 전지와 전기식 기폭장치를 우겨넣는다는 건 오늘날 기준에 권총 총알에 16기가까지 SSD와 CPU, 초소형 레이더와 수신기, 리튬이온 배터리를 집어넣고는 발사하는 것과 같았다.


할 수는 있다. 그리고 해냈다. 성능도 나왔다. 문제는 돈이었다.


당시 VT신관을 양산하는데 들어간 비용은 10억 달러 정도로 추산할 수 있는데, 이 비용이라면 태평양 전선에서 항공모함 함재기로 사용하던 F6F 핼켓 전투기 2만대를 생산할 수 있는 돈이다(일본해군의 주력 전투기 제로센이 1만대 약간 넘게 생산된 걸 생각해 보라). 좀 더 직설적으로 설명하자면, 초창기 VT신관 1개의 가격은 당시 가격으로 732달러였는데, 이 당시 미군에 납품된 지프차 1대 가격이 680달러였다. 지금의 물가로 환산한다면, 신관 1개당 가격은 9400달러 정도다. 이건 포탄 가격이 아니라 포탄 앞에 달려 있는 신관의 가격만 따진 거다. 즉, 대포 한 발 발사할 때마다 포탄 가격은 제외하고, 1천 만 원 정도를 허공에다 뿌린다고 생각하면 된다. 만약 포탄까지 결합한다면 포탄 한 번 쏠 때마다 소형차 한 대씩을 허공에다 날린다고 보면 된다(당시 기준으론 지프차 한 대). 아무리 돈이 많은 미국이라도 고민을 했을 법하다. 그러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VT신관의 양산이 한 달 지체되면, 순양함 한 척이, 석 달이 지연되면 전함 한 척이 침몰될 것이다.”


이 논리는 먹혀들었다. 돈보다는 사람 목숨이 더 중하다는 논리를 어떻게 반박할까? 1942년 1월 첫 생산분이 나왔고, 미군은 여름 내내 시험발사를 통해 신뢰도를 확인하고, 개량할 부분을 업체에 전달했다. 그리고 1942년 11월 정식 생산에 들어간다.


대량생산에 들어가면서 원가는 계속 줄어들었고, 1945년이 되자 신관 하나의 가격이 18달러까지 줄어들게 된다(그럼에도 여전히 비싼 물건이다).


미국은 이 비싼 물건을 아낌없이 사용했다. 1943~1945년까지 발사한 5인치포(127미리)의 포탄 중 약 40~50%가 VT 신관을 사용했다.


효과는 극적으로 나타났다. 평균적인 착발신관이나 지연신관을 사용한 포탄에 비해 3배 이상의 명중률을 보여줬다.


VT신관을 장착하지 않은 경우 항공기 1대를 격추하는데 평균 2,000발의 포탄이 사용됐으나 VT신관을 장착한 경우에는 1대를 격추하는 데 500발이면 충분했다. 후술하겠지만, 가미카제 공격기의 경우에는 포탄 소모량이 더 적었다.


그렇다고 해서 VT신관이 만능 특효약이라고 말하는 건 아니다. 태평양 전선에서 일본군을 가장 많이 격추시킨 대공포는 40미리 보포스 기관포였고, 실제로 일본군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도 이 40미리였다. 돈이 넘쳐나는 미국이라도 40미리 기관포에까지 VT신관을 우겨 넣을 순 없었다. 미 해군은 5인치(127미리) 이상의 함포에 VT신관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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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mm 보포스


연사속도에는 40미리에 뒤처졌지만, 5인치 포는 확실한 한 방이 있었다. 그리고 그 한방은 일본군이 가미카제 자살공격을 시도하면서 빛을 발하게 된다.


처음으로 가미카제 자살공격을 맞닥뜨린 미군은 패닉 상태에 빠진다. 그러나 자살공격이 한번 두 번 계속 되자 곧 그 대응책을 생각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봤을 때 가미카제의 위력은 대단해 보이지만, 그 공격루트는 의외로 단순했다. 함선으로 돌격하기 위해서 수직에 가까운 각도로 함선의 제일 약한 연돌(煙突 : 굴뚝) 부분을 노린다거나 오늘날의 대함미사일처럼 바다에 붙어 수평비행을 하다가 들이받는 방법이 다였다.


함선에 돌입하기 위한 루트가 고정되자 그 길목에 탄막을 형성하면 쉽게 제압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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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T신관은 맹위를 떨치게 된다. 대구경 함포는 보다 긴 사거리를 자랑했기에 가미카제가 접근하는 루트를 예상하고 그 주변에 집중적으로 탄막을 형성했다. 물론, 격추 숫자는 소구경인 20미리나 40미리 기관포가 더 많았지만, 단순한 항로로 날아오는 가미카제에게는 VT신관을 장착한 5인치 포가 더 효과적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미 해군 함대 사령부는 보다 많은 5인치 포를 장착해야 한다며, 함정에 부착한 대공포 시스템을 재편하자고 건의하게 된다. 일선에서 VT신관의 효과를 확인했기 때문이다. 미 해군이 VT신관에 얼마나 만족했는지는 태평양 전쟁 직후 함정에서 소구경 대공포를 모두 철거하고, 대공포의 구경을 76미리와 127미리로 통일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재미난 건 VT 신관이 태평양에서나 대서양에서나 ‘바보’들을 상대해 이겼다는 점이다.


태평양 전선에서는 ‘유인 공대함 미사일’이라 할 수 있는 가미카제 공격기를 상대로 전과를 올렸다면, 대서양에서는 ‘무인 지대지 순항 미사일’이라 할 수 있는 히틀러의 V1로켓을 상대했다. 물론, 대서양에서의 활약도 대단했다. 접근 항로가 단순한 비행물체에 있어서 VT는 그야말로 재앙이었다.


이렇게 대공포로서 쏠쏠한 활약을 한 VT는 유럽에서의 전투가 거의 막바지에 이르는 1944년 겨울 무렵부터 지상군을 상대로 한 야포에도 사용한다. 그 이전까지는 추축국이 이 VT신관을 확보해 이를 복제할까 사용을 엄격히 제한했는데, 승기가 완전히 연합국으로 넘어온 뒤로는 항공기로 향하던 불벼락이 일반 보병이나 지상목표물에도 아낌없이 뿌려지게 된다.


미국만이 상상할 수 있었고, 미국이기에 생산할 수 있었던 무기. 전쟁은 역시 돈으로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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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쟁국가 일본/ 살림출판사/ 이성환

2. 호호당 선생의 ‘프리스타일’

3. 세계전쟁사/ 육군사관학교 전사학과/ 황금알

4. 러일전쟁과 을사보호조약/ 이북스펍/ 이윤섭

5. 조선역사 바로잡기/ 가람기획/ 이상태

6. 다시 쓰는 한국근대사/ 평단문화사/ 이윤섭

7. 대본영의 참모들/ 나남/ 위텐런 지음, 박윤식 옮김  

8. 나모위키

9. 쇼와 16년 여름의 패전/ 추수밭/ 이노세 나오키 지음

10. 『중일 전쟁』 용, 사무라이를 꺾다/ 미지북스/ 권성욱 지음

11. 나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이었다 / 서해문집/ 김효순 지음

12. 석유전쟁/ 매일경제신문사/ 정기종 지음

13. 우리의 눈으로 본 일본제국 흥망사/ 궁리/ 이창위 지음

14. 연합함대 그 출범에서 침몰까지/ 가람기획/ 박재석, 남창훈 지음

15. 프레시안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24246

16. 일본의 이중권력, 쇼군과 천황/ 살림출판사/ 다카시로 고이치

17. 히로히토 신화의 뒤편/ 을유문화사/ 에드워드 베르 지음

18. 일본의 가장 긴 하루/ 가람기획/ 한도 가즈토시 지음






1부 

[러일전쟁]


2부

드레드노트의 탄생

1차 세계대전, 뒤바뀐 국제정치의 주도권

일본의 데모크라시(デモクラシー)

최악의 대통령, 최고의 조약을 성사시키다

각자의 계산1

8년 의 회, 던 축 

일본은 어떻게 실패했나2

만주국, 어떻게 탄생했나



외전

군사 역사상 가장 멍청한 짓

2차대전의 불씨

그리고, 히틀러

실패한 외교, 히틀러를 완성시키다

국제정치의 본질



3부

태평양 전쟁의 씨앗1

태평양 전쟁의 씨앗2

도조 히데키, 그리고 또 하나의 괴물

일본을 늪에 빠트린 4명의 '미친놈'

대륙의 각성완료, 다급해진 일본

대동아(大東亞)의 환상에 눈 먼 일본

일본, 건드리지 말아야 할 걸 건드렸다 1

일본, 건드리지 말아야 할 걸 건드렸다 2

일본의 패배

일소중립조약이 파기되던 순간 1

일소중립조약이 파기되던 순간 2

천조국, 움직이다



4부

왜 일본은 미국과 전쟁을 하려고 했을까

신성불가침으로 만들어진 권력, 덴노(天皇)

일본의 반인반신, 덴노(天皇)의 오판과 태평양 전쟁

미국과 일본의 외교와 태평양 전쟁

정신력으로 전쟁을 결정한 일본

미국의 최후통첩, 헐노트(Hull Note)

진주만 공습, 두고두고 욕먹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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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더가 디비주는 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


괴물로 변해가는 일본

조약, 테이블 위의 전쟁

러시아 vs 일본 한반도에서 만나다






펜더


편집 : 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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