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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저론을 처음 연재한 것이 2013년 4월이다. 그 후 1년 동안 불과 4회 정도까지만 글을 쓴 후 지금까지 휴재했다. 내 역량에 걸맞지 않은 주제를 갖고 씨름하다 보니, 생계를 이어나가야 할 형편 때문에 줄기차게 쓰지 못했다, 고 변명하고 싶지만 필자의 게으름 탓이 제일 크다.


얼마 전 죽지않는돌고래 편집장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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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부터 수십 차례 독촉을 받았지만, 이것만큼 강력한 것은 없었다. 필자의 졸필을 이토록 기다리는 독자가 있다니, 너무 미안하고 감사했다. 앞으로 열심히 써서 글 빚을 약간이라도 갚아보려 한다. 죽돌 편집장이 원고료 듬뿍 준다는 약속 때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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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한한 욕망과 희소성


지난 글에서 예고했던 주제는 욕망의 무한함과 자원의 희소성 간의 문제다. 신고전파 경제학은 이를 두고 경제학이 성립하게 된 ‘근본 문제’로 삼는다. 대부분 경제학 교과서의 첫 장은 바로 이 희소성 원칙을 설명하는데 할애된다. 여기서 묘사된 ‘경제학 원리’는 다음과 같다.


모든 재화는 희소성을 갖고 있으므로, 소비자든 생산자든 주어진 조건에서 최대의 만족(효용)을 얻기 위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선택’은 다른 걸 포기하는 대가(기회비용)이므로 기회비용의 가치가 최대인 것을 고르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 된다.


말하자면, 돈 1,000원으로 과일을 사려고 할 때 같은 가격의 사과, 배, 복숭아가 있다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과를 고르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일 것이다. 이때 사과, 배, 복숭아의 효용은 나의 주관적 선호도이므로 나에게 사과=100, 배= 90, 복숭아=80일 터이니 말이다.


이 희소성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선택의 문제는 피해갈 수 없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모든 재화를 구매할 수 있을 만큼 돈이 무한정 많을 수 없고, 절대적 희소성을 띤 ‘시간’이라는 제약 때문에라도 ‘선택’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모든 사람들이 희소성의 지배를 받고 있음에도 선택은 사람마다 다르다. 각자 처한 조건이 다르고 선호와 욕구가 다양하기 때문이다.


보석처럼 모두가 바라는 물건이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선택에 따른 기회비용 문제는 여전히 유효하다. 보석을 천만 원 주고 갖겠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정도의 가격이라면 다른 물건에 더 가치를 두는 사람도 생기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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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거리 여행에 있어 비행기는 다른 교통 수단에 비해 월등한 편익을 제공하여 모두가 원하지만, 기회비용 측면에서 보면 모든 이에게 합리적인 선택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시간당 소득이 많은 부자는 시간을 절약하는 비행기로 이동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 될 수 있지만 저소득자는 기차로 이동하는 것이 기회비용 측면에서 최선이다.


결국 개인의 합리적 선택들이 모이면 시장의 수요와 공급으로 나타나 가격을 형성하고 이에 따라 생산과 소비 등의 자원 배분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이렇게 신고전파 경제학이 묘사한 대로 효용 극대화의 원리가 우리 사회에 순수하게 작용한다면 루저가 없는 아름다운 세상이 펼쳐질 것 같다. 돈이 많든 적든 주어진 조건에서 최소비용 대비 최대만족을 추구하는 데서 오는 쾌락은 동일할 테니까 말이다. 여기서 전제한 인간 욕망(선호)과 효용은 무조건 존중받아야 될 것이다. 그 가치의 우열을 가릴 수도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된다.


그러나 이런 가정이 현실과 얼마나 동떨어진 얘기인지는 굳이 입증할 필요도 없이 자명하다. 기껏 ‘가성비가 짱’인 어떤 물건을 득템하여 잠깐 뿌듯했던 경험을 제외하고는 실제로 이런 쾌락만이 우리 생활을 지배하는 것일까?


신고전파 경제학이 ‘경제의 원리’로서 가정한 이 희소성 원리와 합리적 선택이론은 여러 측면에서 비판받고 있다.


우선 ‘희소성’과 ‘욕망’의 문제부터 살펴보자.


사막과 계곡에서 물의 가치는 큰 차이가 난다. 희소성 때문이다. 계곡에서는 물이 흔하고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이 작용하여 욕망의 정도가 덜하지만, 사막에서는 그 반대로 물이 귀하기 때문에 욕망의 정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경제학 책에서는 이렇듯 희소성 문제를 자연적 조건과 연관 지어 예를 드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 대부분의 사람들의 욕망은 사회적 재화에 있다.


불과 7년 전 비트코인이 처음 출연했을 때, 1만 비트코인은 피자 한 판 값밖에 안 되었다. 그것도 여러 명에게 제안하여 간신히 한 사람에게 피자 한 판 값으로 팔았을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1만 비트코인의 가치는 123억으로 폭등했다. 물리적 유용성은 하나도 없는데도, 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원하게 되어 희소한 재화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럼 왜 사람들이 그걸 욕망하게 되었을까? 신고전학파의 경제학은 그저 자연적으로 내재된 인간의 속성으로만 파악될 뿐, 욕망 그 자체에 대한 질문도 대답도 할 수 없다.


사실은 대부분의 욕망은 사회 속에서 만들어진다.


어느 페이스북에 담긴 다음 일화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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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욕망은 개인들 간에 비교되거나 상호작용하면서 사회 속에서 창출되는 것이 보통이다. 희소성은 자연적이라기보다는 사회적인 것이며 따라서 인위적이고 상대적인 측면이 훨씬 강하다.


더욱이 신고전학파가 전제하는 인간의 욕망은 기껏 재화를 소비하는 데에만 한정되는 일차원적 수준에 머무른다. 그러나 실제 인간의 욕망은 다양한 층위에 걸쳐있다. 누군가로부터 무시당하지 않으며, 주변으로부터 인정받고, 공평함을 추구하는 그런 욕구가 인간 본성에 내재되어 있다. 자본주의의 폭발적인 발전은 이러한 욕망을 소비로 포섭하여 한층 돋우는 데서 일어난 것이기도 하다.


어쨌든 욕망의 사회성이 거세되다 보니, 오로지 주어진 조건에서 선택의 문제밖에 남지 않는다. 신고전파 경제학의 태생적 보수성은 논리 그 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셈이다.




■ 희소성의 사회적 성격


사정이 이렇다면 우리는 인간의 욕망 그 자체를 성찰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사회적으로 창출되는 희소성은 결국, 욕망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것을 갖지 못한다는 얘기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분수에 맞는 대체재를 선택하는 데서 오는 만족감이 아니라 만성적인 불만족을 느끼며 살아갈 것이다. 다름 아닌 사회적 박탈감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느끼는 대부분의 희소성은 절대적이고 자연적인 희소성이라기보다는 상대적이고 사회적인 희소성이다.


현대 자본주의는 끝없는 욕구를 자극하여 희소성을 무한정 확장시키며 굴러가는 체제인지 모른다. 로버트 스키델스키의 저서 [얼마나 있어야 충분한가](부키)에서는 이 점에 대해 상세하게 논하고 있는 바, 그 내용의 일단을 살펴보자.


어떤 재화에 대해 우리가 끝없는 욕구를 추구하는 것에는 상대적 우월감을 맛보기 위한 목적이 가장 크다. 어느 정도의 물질적 부를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나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이 늘 있기 마련이므로 자기가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한다. 부와 소비의 경쟁이 시작되면 바로 지위의 경쟁이 된다. 제로섬 게임이다. 정의상 누구나 다 높은 지위에 오를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내가 더 많은 돈을 특권적 재화에 쓰면 나는 지위를 얻지만 다른 사람들은 나 때문에 지위를 잃게 된다. 지위를 얻고 유지하기 위한 소득의 상승이 언제든 끝날 까닭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지위를 높이기 위해 구상된 소비는 오늘날에 잘 알려진 몇 가지 유형들이 있다.


첫째, 밴드웨건(bandwagon goods) 재화다. 즉, 다른 사람들이 이미 가졌기 때문에 나도 갖고 싶어지는 재화가 그것이다. 아이들이 갖고 싶어하는 장난감을 위해 부모는 열심히 일해야 한다. 물론 어른들이라고 사정은 다르지 않다.


두 번째로는 속물성 재화(snob goods)를 들 수 있다. 밴드웨건과 반대로 남들이 갖고 있지 못하는(또는 쉽게 가질 수 없는) 재화로서 남들에게 뽐내려는 것이 목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이하고 우월한 취향을 과시할 수 있는 언더그라운드 음악이라든지, 컬트 영화, 특별한 맛집 등이 있다. 속물성 재화는 대중화가 되면 밴드웨건 재화로 변하여 고상한 척하는 진짜 속물들은 원래 좋아하던 것을 포기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 두 가지가 중첩된 것이 배블런 재화다. 과시적 소비에 관한 이론으로 유명한 미국의 이론가 배블런의 명칭을 땄다. 배블런 재화는 명품, 외제차 등 값비싼 것이 알려지면 욕구의 정도도 크게 늘어난다. 여기에 부가된 것은 블링 효과(bling effect)다. 저명한 인사들이 선호하는 브랜드는 대체로 값비싸기 때문에 사람들의 선호는 그것으로 기운다. 과시적 소비는 부를 광고하는 목적이기 때문에 재화의 유용성 여부보다 가격 자체가 중요하다. 그래서 가격이 낮아지면 그 브랜드의 수요는 오히려 줄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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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 이런 재화를 통해 부를 과시하는 것만이 아니다. 이젠 돈 자체가 지위를 나타내는 표식이기 때문에, 비즈니스 세계의 상위층에서는 소비의 수단보다는, 지위 그 자체를 위해서도 돈을 추구한다.


이처럼 남들이 다 갖고 있는 것은 무조건 소유해야 하고, 남들이 쉽게 얻지 못하는 것은 더더욱 갖고 싶어지는 소비의 삶을 추구하는 것이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다. 사실 빈곤층조차 가계 소비의 큰 부분이 이러한 지위재에 할당된다.


우리가 ‘끝없는 욕망’이라는 본성을 갖고 태어난 이상 만족이라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다. 과거의 사치재라도 그것이 대중화되면 필수품이 된다. 그리고 새로운 사치재가 새로운 형태로 끊임없이 등장한다. 결국 희소한 지위재를 둘러싼 경쟁은 지속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본다면 지위(재)를 향한 경쟁이라는 제로섬게임에 돌입한 이상, 패배한 루저는 구제받을  대상이 될 수 없다. 모두 금메달을 딸 수 없으니 패배자의 발생은 필연적이고 자연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 루저의 탈출구, 욕망으로부터의 이탈?


루저 되기가 두렵다면 이 제로섬 게임에서 이탈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 아예 지위를 탐하는 것 자체를 경계하고 삼가는 것이다. 법정 스님이 설파한 ‘무소유의 삶’이야말로 우리 루저들이 찾아야 할 유일한 탈출구일지도 모른다. 


법정은 애지중지해가며 3년 동안 키웠던 난초 경험을 얘기한다. 그 난을 키우기 위해 관계 서적을 구해 읽고, 외국에 가는 친지들에게 요청해 비료를 구했으며 겨울이면 난방을 아끼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싱싱해진 난이 주는 향취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사람들마다 싱싱한 난을 칭송한다. 그런데 이 난 때문에 멀리 떠나지를 못하고, 길을 떠났다가도 뜰에 놓인 난이 햇볕 아래 시들해질까 봐 다시 되돌아오기를 반복한 끝에 그는 ‘집착’을 새삼 깨닫는다. 그리고 그렇게 자식처럼 기른 난을 선뜻 남에게 주고 나니, 아쉬움보다는 해방감이 몰려드는 경험을 하며 ‘무소유’의 삶을 설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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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유에 대해 법정이 남긴 잠언과 같은 애기들은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 정말 많다.


“무소유란 아무 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부(富)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


“사람마다 자기 그릇이 있고 몫이 있다. 꽃이나 새는 자기 자신을 남과 비교하지 않는다. 저마다 자기 특성을 마음껏 드러내면서 우주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다. 비교는 시샘과 열등감을 낳는다. 남과 비교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삶에 충실할 때 그런 자기 자신과 함께 순수하게 존재할 수 있다.”


비단 법정만이 아니라 욕망을 경계하는 잠언 들은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항상 있어왔다. 경쟁에 지친 이들을 위무하는 힐링류 서적에서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부정할 수 없으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범인(凡人)이 추구할 수 없을 것 같은 공허함을 느끼게 된다. 왜 그럴까?


다음 편에서 더 살펴보자.





지난 기사


루저론 - intro

루저론1 - 노력과 의지를 믿지 마라

루저론2 - 한국 사회의 노력 이데올로기

루저론3 - 능력주의와 공정사회의 함정

루저론4 - 무한경쟁은 미친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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